[김성회의 뿌리를 찾아서] <74>유씨(劉氏), 강릉유씨(江陵劉氏)
김성회 한국다문화센터 운영위원장 kshky@naver.com
세계일보 기사 입력 : 2014-05-20 21:21:01
송나라서 팔학사와 함께 건너온 ‘유전’이 우리나라 유씨의 도시조
◆유씨(劉氏)는
유(劉)씨의 성인 유(劉)의 뜻이 ‘죽이다’의 뜻으로 쓰여, 별칭으로 묘금도 유(劉, 묘+금+도)씨라고 한다. 원래 유씨는 중국에서 시작된 성씨로 시조는 중국에서 항우와 쟁패를 다투고 한나라를 세운 고조 유방(劉邦)이다. 우리나라 유씨가 시작된 것은 고려시대 임팔급(평택임씨 시조)과 함께 송나라에서 건너온 팔학사(八學士)의 한 사람인 유전(劉筌)부터이다.
그는 고려 문종 때 임팔급 등 팔학사와 함께 건너왔는데, 유씨의 시조인 한나라 고조 유방(劉邦)의 41세손이다. 송나라에서 병부상서를 지냈으며, 재상 왕안석(王安石)이 제정한 청묘취식법(靑苗取息法)을 백성을 수탈하는 악법이라고 반대하다가, 간신의 모함을 받아 위험에 처하자 뜻을 같이하는 임팔급 등 팔학사와 함께 고려에 들어와 경상북도 영일군에 정착하였다. 따라서 유전이 우리나라에 거주하고 있는 모든 유(劉)씨의 도시조가 되는 셈이다. 그 유전의 맏아들인 유견규(劉堅規)가 거타군(居陀君, 지금의 거창)에 봉해져 거창유씨가 되었다. 유견규의 동생 유견구(劉堅矩)는 대사헌을 지냈으며, 유견구의 아들 유웅열(劉雄悅)이 판전리사사로 아림군(아림파)에 봉해졌다. 또 유견구의 손자 유성(劉成)이 추밀원 부사와 대장군을, 증손인 유찬(劉贊)이 대사헌을 역임하여 거창유씨 가문을 중흥시켰다. 이외에도 검교대장군을 지낸 유한작(劉漢灼)과 집현전 대제학을 역임한 유해(劉海), 그리고 어모장군에 이른 유귀손(劉貴孫)이 유명하였으며, 특히 유한우(劉旱雨)는 예조판서를 지낼 때 중국 황제의 부름에 따라 기우제관으로 파견되어 3일간 기우제를 지내니, 비가 내렸다고 한다. 이에 황제가 크게 기뻐하여 통헌대부 병부상서를 제수하였다고 한다.
그 후 시조 유전의 9세손인 유승비(劉承備) 때 강릉유씨로 분관하는데, 유승비의 증손인 문희공(文僖公) 유창(劉敞)이 조선의 개국공신으로서 옥천부원군(玉川府院君, 옥천은 지금의 강릉)에 봉해졌기 때문이다. 이후 후손들이 강릉을 본관으로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또 배천유씨(白川劉氏)는 시조인 유국추(劉國樞)가 도시조 유전의 8세손으로 고려조에서 도첨의평리를 지내며 나라에 공을 세워 문하시중평장사에 추증되고 배천군에 추봉되었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유국추를 시조로 받들고 거창유씨에서 분적하였다. 이후 시조 유국추의 아들 유승(劉升)이 고려 명종 때 좌복야를 역임한 후 은천군에 봉해졌으며, 손자 유현(劉賢)은 진현관 대제학을 역임하였다. 또 유현의 맏아들 유시준(劉時俊)은 예부상서를 역임한 후 복흥군에 봉해졌고, 그의 아들 유보국(劉補國)과 유서(劉瑞)의 형제가 뛰어났으며, 유현의 막내아들로 상장군에 올랐던 유여준(劉汝俊)과 임진왜란 때 무명을 떨쳤던 후손 유극량(劉克良)이 유명하다.
그외에도 유씨(劉氏)에는 충주(忠州), 금성(金城), 연안(延安), 전주(全州), 경주(慶州), 강원(江原), 강화(江華), 개성(開城) 등 모두 47본이 있는 것으로 전하며, 전체 인구는 2000년 조사에서는 7만5192가구에 24만2889명으로 32위를 차지하였다. 그중 강릉유씨가 5만5464가구에 17만8913명으로 가장 많고, 그 뒤를 이어 거창유씨는 6081가구에 1만9419명이다.
◆강릉유씨(江陵劉氏)는
유씨 가문에서 가장 번성한 가문은 강릉유씨이다. 강릉유씨는 거창유씨에서 분관한 성씨인데, 그 시조는 유씨의 도시조인 유전의 9세손인 유승비이다. 강릉으로 분관하게 된 것은 유승비의 증손인 문희공(文僖公) 유창이 조선의 개국공신으로서 옥천부원군에 봉해지면서 후손들이 강릉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강릉유씨의 분파로는 경력공파(經歷公派), 병사공파(兵使公派), 좌랑공파(佐郞公派), 군수공파(郡守公派), 감찰공파(監察公派), 어사공파(御使公派), 병판공파(兵判公派), 병사공파(兵使公派), 금성군파(金城君派) 등이 있다.
강릉유씨의 후손 중에서 선조 때 학자였던 유호인(劉好仁), 임진왜란 때 진주성이 함락당하자 남강에 투신했던 유한량(劉漢良), 인조 때 예학자(禮學者)로 유명한 유희경(劉希慶), 영조 때 학자 유언일(劉彦一), 고종 때 학자이자 시인으로 유명한 유재건(劉在建), 구한말의 선각자이자 김옥균, 서광범 등의 스승 격이었던 유대치(劉大致),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이었던 유여대(劉如大)가 유명하다. 강릉유씨 가문에서 조선시대 배출한 문과 과거급제자는 모두 23명이다.
◆강릉유씨의 연혁과 인물
우리나라 유씨(劉氏)의 도시조는 유전이다. 그는 한 고조(유방)의 41세 손으로 중국 강소성 농서현(江蘇省 西縣) 출신이다. 송나라 인종 때 정현대부 한림학사 병부상서(正憲大夫 翰林學士 兵部尙書)로 재임했다. 그의 증조부는 유종(劉宗)이며 송조한림(宋朝翰林)을 지냈고, 조부는 유적(劉迪)으로 이부상서를 지냈다. 그리고 부친 유채(劉采)는 금자광록대부를 지냈다.
그는 재상 왕안석이 청묘취식법이라는 악법을 제정하려 하자, 이 법의 폐지를 간하다 모함을 받게 되었다. 이에 동지였던 임팔급(林八及), 설인검(薛仁儉), 허동, 송규(宋奎), 최항(崔沆), 권지기(權之奇), 공덕수(孔德狩)와 더불어 고려로 와서 경북 영일군 기계면에 정착하였다.
유전은 3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맏이가 유견규이고, 둘째가 유견구이며, 셋째가 유견익이다. 유견규는 거타군에 봉해졌고, 유견구는 아림파의 시조로 광정대부밀직사 대사헌을 역임했다. 또 셋째는 봉익대부 이조판서 대사헌을 역임하였다.
강릉유씨는 도시조 유전의 9세손인 유승비에서부터 시작된다. 유승비는 고려말에 문과에 급제하고 좌복야에 재임하다 물러났다. 그의 아들 유송백(劉松柏)은 개성윤과 상호군을 지냈고, 둘째 유송재(劉松梓)는 금성군파 파조로 삼중대광 문하시중 평장사를 역임하고 금성군에 봉해졌다.
유승비의 증손인 유창은 조선건국에 참여하여 개국이등공신(開國二等功臣)에 책록되어 옥천부원군(지금의 강릉)에 봉해졌다. 목은 이색의 문하에 있다가 이색의 천거로 둔촌 이집(李集)의 사위가 되었다.
유창은 태종이 즉위하자 승녕부윤(承寧府尹)이 되어 태조의 귀경을 권유하였으며, 대제학, 참지의정부사(參知義政府事), 판공안부사(判恭安府事) 등을 역임하였다. 이후 세자의 스승으로 궤장(지팡이)을 하사받았다.
유창의 세 아우인 유직(劉直), 유방(劉方), 유치(劉治)는 각각 강릉유씨의 영흥파(永興派), 청송파(靑松派, 호판공파), 북청파(北靑派, 병판공파)를 이루었다.
유직은 생원 및 진사에 합격한 후 문과에 급제하여 통훈대부, 사간원 사간(司諫) 등을 역임하고, 숭정대부에 올라 이조판서를 역임하였다. 유방은 조선조 문과 급제하여 대사간을 지내고 세종 때 호조판서를 지냈다. 유치는 문과에 급제하고 예문관 대제학과 정헌대부, 병조판서를 역임하였으나, 청해백(靑海伯) 이지란(李之蘭)과 같이 북청에 귀양 가서 은거하였다.
유창의 아들인 유인통(劉仁統)은 이조판서를 역임하였다. 그의 아들로 유지주, 유신주, 유계주가 있었는데, 유계주(좌랑공파 파조)의 아들이자 증손인 유한량(劉漢良)은 임진왜란 때 무장현감(茂長縣監)으로 있다가 진주성 방어에 참전하였으나, 진주성이 함락되자 남강에 투신하였다. 그의 아들 유세분(劉世扮)은 진원현령(珍原縣令)을 역임하였다. 참판이었던 유선보(劉善寶)의 아들인 유호인(劉好仁)은 문장과 학문에 뛰어나 후진양성에 전력했다.
유창의 아들이며 유인통의 동생인 유인제(劉仁悌, 군수공파 파조)는 문과에 급제하여 통훈대부로써 금산(경북 금릉)군수를 역임하고, 대제학을 지냈다. 또 유창의 셋째아들 유인길(劉仁吉)은 판서를 역임하였다.
어사공파 파조인 유상우(劉尙友)는 유창의 넷째아들인 유직의 후손으로 문과에 급제한 후 사헌부 감찰을 거쳐 함경도 순무어사에 오르고,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의 아들 중 맏이인 유장생(劉長生)은 진전직(眞殿直)을 지냈고, 그의 아들 유만수(劉萬壽)는 사간원 정언을, 셋째인 유천수(劉千壽)는 상주목사를 역임하였다.
경력공파 파조인 유지주(劉智周)는 유창의 큰아들인 유인통의 아들로 조봉대부 부마부경력과 이조참판을 역임하였다. 슬하 5남 모두 현달했는데, 장남 유용량은 병조참판을, 차남 유용평은 의빈부도사 제용감 판관을, 셋째 유용하는 예조좌랑을, 사남 유용삼은 이조좌랑을, 오남 유용순은 승정원 좌승지와 예조참의를 역임하였다.
병사공파 유신주는 문과에 급제한 후 가선대부 평안부 병마절도사에 올랐다. 슬하에 삼형제를 두었는데, 첫째인 유웅(劉熊)은 충좌위 부사과(忠佐衛 副司果)를, 둘째 유호(劉虎)는 통훈대부 예조좌랑(通訓大夫 禮曹佐郞)을, 셋째 유표(劉豹)는 성균진사(成均進士)를 지냈다.
감찰공파 파조인 유생(劉生)은 유창의 넷째인 유인길의 맏이로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 감찰과 옥과 현감을 지냈다. 그외 경주유씨로 분적한 유경상(劉景祥)은 성균관 전적을 지내고 경주부사를 역임하였다.
그밖에 가문을 빛낸 인물로는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킨 유덕문(劉德文), 전주에서 효자로 유명했던 유경달(劉景達), 가뭄 때 빈민구휼에 업적을 남긴 유기원(劉基源), 유동원(劉凍原) 등 효도삼대(孝道三代)가 가문을 빛냈다.
이외 유승비의 증손 유경(劉景, 유송백의 손자)은 부사공파 파조로 고려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문하주서와 평산부사(平山府使)를 역임하였다. 유대치(劉大致)는 중인계급 출신의 의사(한의)로 역관인 오경석(吳慶錫)과 함께 청나라에서 가져온 서적을 탐독하고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을 가르켰다.
◆강릉유씨 근현대 인물
유여대(劉如大)는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후 목사가 되었다. 이승훈 등과 독립만세 시위를 계획하고 기독교 대표로 3·1운동 때 33인의 일원으로 독립선언문에 서명하였다. 경찰에 체포되어 2년간 투옥되었다.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이 수여되었다. 유득신(劉得信)은 경기도 고양에서 암살단에 가입하고, 군자금을 모집하다 체포되어 9년간 복역했다. 해방 후 목사로 재직하다 6·25 때 순교했다.
그 밖에 현대인물로는 정관계에서는 유창순(국무총리), 유재흥(국방장관), 유옥우, 유민상, 유용근, 유기천, 유기수, 유수호, 유승민(이상 국회의원), 유각종(동자부차관), 유진순(충남지사), 유흥수(육군소장), 유재남(육군소장), 유남규(해군소장) 등이 있으며, 학계에서는 유기천(서울대총장), 유영대(전북대총장), 유석옥(건국대총장), 유희세(고려대 교수), 유태종(고려대 교수), 유현종(소설가), 유준상(미술평론가), 유원동(숙대교수), 유봉영(조선일보 편집국장), 유승범(합동통신 편집국장) 등이 있다. 재계에서는 유성연(삼척탄좌회장), 유충근(경향건설사장), 유승윤(건국대재단이사장) 등이 있으며, 국가대표 탁구선수 유남규와 개그맨이자 방송인 유재석도 강릉유씨 문중 인물이다(전 현직 구분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