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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16. 묵상글 ( 사순 제4주간 토요일. - <나의 말보다 바로 나> . 등 )
** 07:28. 김찬선 신부님 글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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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16. 사순 제4주간 토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나의 말보다 바로 나>
“그분처럼 말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하나도 없었습니다.”(요한 7,46)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단 한걸음
만이라도
나보다
나의 말을
뒤에
두는 겁니다
나
비록
아무 말
하지 않아도
나
있어
모든 것
말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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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16. 사순 제4주간 토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4.03.16 05:35
- 결정은 하되 단정하지 않는
오늘 복음은 예수님을 둘러싸고 여러 부류가 설왕설래하는 얘기입니다.
일반 군중은 예수님이 메시아 또는 예언자일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붙잡아 오라고 보냈던 성전 경비병들은 왜 붙잡아 오지 않았느냐고
수석 사재들과 바리사이들이 질책하자 예수께서 대단한 분이라고 합니다.
니코데모가 본인의 말을 듣고 한 일을 알아본 뒤에 심판하라는 율법을 들어
신중론을 펴자 무지막지한 말로 그 말을 막아버립니다.
“당신도 갈릴래아 출신이라는 말이오?
성경을 연구해 보시오. 갈릴래아에서는 예언자가 나지 않소.”
이것을 보면서 저는 ‘결정과 단정’을 오늘 강론 주제로 잡았습니다.
결정(決定)과 단정(斷定)
지도자들이 결정을 내리는데 단정을 통해 결정을 내리는 것입니다.
부연하면 단정이란 끊을 단(斷), 정할 정(定)이니 다른 사람의 의견은
죄다 끊어버리고 혼자서 그러니까 독단적으로 결정을 내리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바로 이렇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지금 우리 교회가 많이 노력하는 시노달리따스와 정반대지요.
시노달리따스는 함께 여정을 간다는 뜻의 Synod에서 나온 말로
함께 결정하는 방식과 그런 정신을 담고 있는 말입니다.
사실 뭔가를 결정할 때 제일 쉬운 방식은 독단적으로 결정하는 방식입니다.
단체의 최고 지도자가 혼자 결정하면 다른 사람은 그저 따르는 방식입니다.
제일 쉬운 방식이지만 이것은 제일 나쁜 방식이지요.
민주주의적으로도 나쁜 방식이지만 신앙적으로도 나쁜 방식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한 사람이 독점하는 방식이고,
다른 사람에겐 하느님의 뜻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식이니 말입니다.
그다음 쉬운 방식이 다수결 의결 방식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독단적인 결정 방식보다 한결 민주적이긴 하지만
제일 좋은 방식은 아니고 제일 완전한 방식도 아닙니다.
제일 좋고 완전한 방식이 바로 시노달리따스입니다.
밑에서부터 공동으로 합의를 이루어낼 때까지 서로 설득하고
계속 논의하는 방식이니 제일 완전한 방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가 근자에 시노달리따스를 많이 얘기하고 있는데,
제일 완전한 만큼 제일 어려운 방식이기에 지지부진한 상태이지만,
우리 교회가 초대 교회의 예루살렘 사도 회의부터 십수 차례 공의회까지
오늘 복음의 수석 사제들 집단과는 다른 방식을 취하려고 노력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제일 완전한 만큼 제일 어려운 방식이기에
우리 역사에서 이러하지 못한 적이 실제로 있었고,
우리 단체들 가운데서 이러하지 못한 곳도 많지요.
이런 면에서 제가 제일 마음 아픈 것은
저희 프란치스칸 공동체들 가운데도 이런 곳이 상당히 있다는 것입니다.
시노달리따스 정신을 제일 잘 살아야 할 사람들이 프란치스칸인데 말입니다.
사실 프란치스칸 공동체는 Fraternitas 곧 형제적 공동체가 아닙니까?
공동체 책임자가 있지만 그는 장상이 아니라 봉사자요 수호자이고,
모든 형제를 통해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뜻을 모든 형제와 함께
식별하고 결정하는 존재이지 결코 독단적으로 결정하는 사람이 아니잖습니까?
어쨌거나 우리는 단정적인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함을,
결정은 하되 단정은 하지 말아야 함을,
오늘 복음의 수석 사제들에게서 배우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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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16. 사순 제4주간 토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프랑스의 의상 디자이너 코코 샤넬을 잘 아실 것입니다. 이쪽 분야에 거의 문외한이라 할 수 있는 저도 샤넬 복장이 현대 여성복의 시초였다는 것, 그리고 샤넬 복장을 착용한 여성이 스타일과 분위기 등 그 모든 것을 조화롭게 완성하기 위해서는 샤넬 넘버 5 향수를 뿌려야 한다는 말을 알고 있습니다. 그만큼 샤넬의 패션과 향수는 전 세계 사람에게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그 창시자 코코 샤넬은 고령에도 활동적이고 부지런한 모습을 보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뇌출혈로 결국 자리에 눕게 되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기억력은 떨어지고 알 수 없는 불안감에 힘들어했습니다.
1971년 1월의 어느 주일, 그녀는 리치호텔의 스위트룸에서 곱게 차려입은 채 누워 있었습니다. 평생 독신으로 살았기에 그녀 곁에는 직원들이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계속 이런 말을 반복했다고 합니다.
“아! 당신이 날 죽이고 있어요.”
“당신은 날 죽이려 하시는군요!”
그리고 87세의 디자이너 코코 샤넬은 살포시 눈을 감으면서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결국 사람은 죽는구나.”
코코 샤넬의 말대로 우리 모두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영원히 살 것처럼 착각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자기는 아파서는 안 되고, 자기는 늙어서는 안 되고, 자기는 죽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아프고 늙고 죽는 것은 인간이라면 당연히 걸어가야 할 과정인데도, 이를 인정하지 못해서 하느님께 불평불만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당연한 진리를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자기 뜻만을 인정하는 것이 아닌, 주님의 뜻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 시대의 바리사이들은 주님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저 자기들이 느끼는 대로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성경은 연구해 보시오. 갈릴래아에서는 예언자가 나지 않소.”(요한 7,52)
바리사이들이 니코데모에게 한 이 말은 역설적으로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심을 암시하는 말이 됩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태생이 아니라 베들레헴 태생이며, 그 집안은 다윗 임금의 후손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성경 말씀대로 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삶과 죽음은 모두 그분의 영역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 뜻에 맞춰서 살아야 합니다.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할 진리가 그분 뜻에 포함되기 때문입니다. 자기 뜻만을 내세워서 진리에서 벗어나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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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연결은 마음으로 이루어진다(C.조이벨 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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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16. 사순 제4주간 토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그분처럼 말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하나도 없었습니다.”(요한 7,46)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 6 개월쯤 전 초막절 마지막 날, 예루살렘에서 성령에 휩싸이어 급박하게 “큰 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사람은 성경 말씀대로
그 속에서부터 생수의 강물이 흘러나오리라.”(요한 7,37-38)
오늘 <복음>은 이 말씀을 들은 군중들의 여러 반응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예수님을 체포하러 나섰다가 그냥 돌아온 성전 경비병들은 그들을 보낸 수석사제들과 바리사이들에게 “그분처럼 말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하나도 없었습니다.”(요한 7,46)라고 말합니다.
대체 그분께서는 어떻게 말씀하셨기에, 그들은 그분처럼 말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하나도 없었다고 말하는 것일까? 대체, 예수님의 말씀은 다른 사람들의 말과 어떻게 달랐을까? 그분의 말씀은 어째서 듣는 사람들을 감동시킨 것일까? 왜 오늘 날에도 여전히 많은 이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감동받고 변화되는 것일까? 대체, 그 신비로운 힘은 무엇일까?
<성경>에서는 그분의 말씀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전해줍니다.
그런데 왜 그분의 말씀에는 권위가 있을까요?
그것은 오늘 <복음>의 앞부분인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의 하신 말씀, 곧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요한 7,29)에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은 하느님에게서 왔고, 하느님께서 당신을 보내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당신께서는 단지 하느님에 ‘의해서’ 보냄 받은 자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하느님에 ‘의해서’ 보냄 받은 자들은 많았습니다. 예언자들이 그렇고, 세례자 요한이 그렇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에게서’ 오신 분은 단 한 분, 오직 예수님뿐이십니다. 그래서 그분만이 온전히 하느님을 아시며, 그분의 가르침은 참되고 권위가 있습니다. ‘하느님에게서’ 온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곧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곧 ‘하느님의 말씀’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수석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그분을 받아들이지도 믿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알고 있고 성경을 알고 있다고 스스로를 여기지만, 바로 그 안다는 사실에 걸려 오히려 예수님을 거부하고 죽이려고 합니다. 이는 ‘선입견’이나 ‘편견’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가르쳐줍니다.
우리도 오늘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자칫, 수석사제들과 바리사이들처럼 우리의 편견과 선입감으로 말씀을 거부한다면,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중요한 것은 우리가 ‘알고 있다’는 사실이 아니라, 우리가 ‘모른다.’는 사실을 아는 일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모르면서 알 뿐입니다. 우리가 안다는 것은 사실, 지적 정보의 한 파편, 아니 한 파편의 한 부분도 제대로 알지 못할 뿐입니다. 그저 1미크론(1/1000 mm), 아니 1나노(10억분의 1)만큼일 뿐일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아는 것이 전부인 양 믿어버리는 이 어리석음의 ‘선입견’이 때로는 하느님의 계획까지도 거부하고 외면하게 만들어버리고 맙니다. 자칫‘안다’고 믿어버린 ‘선입견’이 진리를 받아들이는 데 오히려 걸림돌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앎으로 말씀을 알아듣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우리를 알아듣고, 말씀이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도록 우리 자신을 말씀께 승복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먼저 본인의 말을 들어보고 또 그가 하는 일을 알아보고 난 뒤에야, 그 사람을 심판하게 되어 있지 않습니까?"(요한 7,51)
주님! 저는 말을 들어보기도 전에, 또 일을 알아보기도 전에,
미리 판단하고 심판하는 선입견과 편견으로 가득합니다.
귀 기울여 듣는 겸손한 마음과 애정으로 일을 알아보는 섬세함을 주소서.
주님! 제 마음에는 말을 듣고도 의심하고, 일을 보고도 인정하지 않는,
왜곡과 불신이 가득합니다.
제 마음이 깨끗하고 순수해지게 하소서.
들은 말을 신뢰하고, 본 바를 인정하게 하소서.
저희의 말을 다 들어주시고, 저희가 한 일을 다 아시는 주님!
저에게 억울하게 상처받은 이들의 마음을 어루만져주소서.
저의 곡해와 몰이해, 고집과 완고함, 왜곡과 비뚤어짐,
무관심과 불신으로 아파하는 이들에게 당신 자애를 베푸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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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16. 사순 제4주간 토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지식은 지혜 안에서 활용되어야 합니다
어떤 교수는 ‘구약성경은 한국의 선황당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필요 없는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성경을 연구한다면서도 ‘신약은 구약 안에 감추어져 있고, 구약은 신약을 통해 밝게 그 의미가 드러난다.’는 가장 기본적인 성경해석의 원칙을 외면한 채 자기가 아는 것이 다 인양 주장하였습니다. 구약은 신약의 예표이고 신약은 구약의 완성입니다. 아마도 그는 신앙의 책인 성경을 알량한 지식으로 다 알 수 있고 또 증명할 수 있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하긴 마귀도 성경을 인용하며 예수님을 유혹하였으니, 성경에 대해 아는 척하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성경을 아무리 많이 연구하더라도 그 말씀을 진리로 받아들이고 온몸으로 살지 않는 한 결국 하느님을 만나지 못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잡으러 간 경비병이 “그분처럼 말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하나도 없었습니다”(요한7,46). 하고 말할 정도로 예수님의 말씀은 특별한 권위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그가 다윗의 고향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예수님을 거부하였습니다. 그들은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으로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구세주로 받아들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지식으로 알 수 있는 분이 아니라 그분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사는 것을 통해서만 진정한 만남을 이룰 수 있고 또 알게 됩니다. 그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군중은 예수님의 권위와 능력을 보았고, 예언자로 메시아로 이해하였습니다. 그러나 내로라하는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의 눈에는 율법만이 보였습니다. 오늘도 지성인이라 자처하는 이들이 주님을 제대로 만날 수가 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아는 것이 다가 아니고, 사심 없는 눈으로 보아야 볼 것을 볼 수 있거늘 자기 안에 갇혀 있으니 딱하기 그지없습니다. 오늘 복음 요한7장 52절의 말씀에서 바리사이들은 “성경을 연구해 보시오. 갈릴래아에서는 예언자가 나지 않소.” 하고 말합니다. “그들은 성경을 샅샅이 뒤져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 살아계신 하느님을 만나려 애쓰는 대신 그를 가리켜 보이고자 기록된 언어의 숲에 들어갔다가 길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들에 견주면, 성경에 무식한 경비병의 눈이 오히려 밝았음은 당연한 일입니다. 대체로 학자들이 무식한 것은 그들의 지식이 눈에 대들보 구실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이현주). 그러니 섣불리 지식을 자랑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지식은 지혜 안에서 활용되어야 합니다.
이런 우스갯소리가 있습니다. ‘학사’는 ‘이젠 모든 것을 다 아는 것 같다.’라고 깨달은 사람이고, ‘석사’는 ‘알고 보니 내가 아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라는 것을 깨달은 사람이랍니다. ‘박사’는 ‘나만 모르는 줄 알았더니 남들도 아무 것도 모르더라.’를 깨달은 사람이고, ‘교수’는 ‘어차피 다들 모르니까 이거라도 우기자’ 라고 행동하는 경지에 이른 사람이랍니다.
하느님 앞에 알면 얼마나 안다고 내세울 수 있겠습니까? 주님 앞에서 자기 것을 아무리 우겨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헛된 바람을 지니지 말고 기도와 성사에 적극 참여 함으로써 그분을 더 깊이 만나고 사랑하게 되길 바랍니다. 뭘 좀 안다고 스승행세를 하지 말고 행동으로 모범을 보일 수 있길 희망합니다. 성경은 과학책이 아니라 신앙고백입니다. 따라서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느껴야 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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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16. 사순 제4주간 토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아침 산보 길에 ‘뉴스와 강의’를 듣는 것이 저의 일상입니다. 묵주기도를 마치고 늘 하던 대로 뉴스를 들으려고 하는데 핸드폰이 먹통이 되었습니다. 핸드폰을 꼈다 켜면 되곤 했기에 그렇게 했는데도 여전히 먹통이었습니다. 답답한 마음에 핸드폰에 있는 음악을 들으면서 산보를 마무리 했습니다. 다행히 사제관에 설치된 ‘와이파이’ 덕분에 문자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전날 핸드폰에 문제가 있어서 바꾸려고 했기 때문에 핸드폰 문제인줄 알았습니다. 통신사 대리점엘 갔더니 이미 많은 사람들이 대리점을 방문하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핸드폰에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통신사의 시스템에 문제가 생겼다고 합니다. 정부는 그것이 사이버테러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두고 조사 중이라고 합니다. 다행히 핸드폰의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통신사에 있었는데 애꿎은 핸드폰만 탓했습니다. ‘자다가 봉창 두드린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새벽에 자고 있는데 별일도 아닌 것을 가지고 문자를 하거나, 전화를 하는 것을 뜻합니다. ‘종로에서 뺨맞고 한강에서 화풀이 한다.’라는 속담도 있습니다. 일의 전후 사정을 잘 모르고 엉뚱한 곳으로 화살을 돌리는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예레미야는 하느님께 하소연합니다. 자신은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열심히 살았는데 고난과 멸시를 받고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혹시 하느님께서 잘못 판단하셔서 악인들에게 힘을 주고, 악인들에게 행복을 주는 것은 아닌지 살펴달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 땅에 정의와 평화가 강물처럼 흐르게 해 달라고 합니다. 예레미야는 이렇게 탄원합니다. “저는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순한 어린양 같았습니다. 저는 그들이 저를 없애려고 음모를 꾸미는 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이제 악인들의 죄악은 끝내시고, 의인들은 굳세게 하소서. 마음과 속을 꿰뚫어 보시는 분, 하느님은 의로우시다. 주님, 제 의로움, 제 결백을 보시고, 제 권리를 찾아 주소서. 이제 악인들의 죄악은 끝내시고, 의인들은 굳세게 하소서.” 한국에서라면 소비자들의 민원도 빗발치겠지만, 통신사도 오전 중에 문제를 해결하기 마련입니다. 미국은 나라가 커서 그런지 소비자들의 민원도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통신사도 아예 대리점 문을 닫았습니다. 예레미야는 하느님께서도 워낙 바쁘시기에 자신의 고난과 아픔을 미처 모르는 것은 아닌지 하느님께 민원을 넣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사람’을 또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예언자로 알고 있었습니다. 메시아가 오신 줄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나라’를 선포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권력으로, 재물로, 업적으로 가는 곳이 아니라고 선포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의 의로움이 드러나는 나라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나라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의 거룩함이 가득한 나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참된 행복을 선포하셨습니다. 행복은 원하는 것을 얻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행복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진다고 하십니다. 행복은 자비를 베푸는 사람들에게 주어진다고 합니다. 행복은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에게 주어진다고 합니다. 행복은 복음 때문에, 예수님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에게 주어진다고 합니다. 바로 그런 사람들이 하느님의 나라에서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전의 경비병들도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새로운 권위를 보았습니다. 니코데모도 예수님의 말씀에서 새로운 권위를 보았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을 예언자요, 메시아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영적인 눈이 멀었습니다. 예언자요, 메시아인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새로운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자신들만이 율법과 계명을 해석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자신들만이 하느님의 뜻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듣지도 보지 못했던 예수님에게서 새로운 권위가 나올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했고, 오히려 박해하려했던 사람들에게는 두 가지 잘못이 있었습니다. 자신들만이 진리의 수호자라고 생각하는 교만입니다. 기득권을 지키려는 욕심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무지한 사람들입니다. 일의 종류나 일의 가치도 중요할 수 있습니다. 일을 하는 장소와 일을 하는 때도 중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일을 하는 사람의 마음자세입니다. 아무리 누추한 곳이라 해도 그곳에 주님이 계시면 그곳은 주님께서 거처하시는 성전이 됩니다. 아무리 화려하고 좋아보여도 그곳에 탐욕과 분노가 있다면 그곳은 악취가 나는 곳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곧 ‘봄’이 오면 어두운 땅 속에서 파란 새싹이 나올 것입니다. 말을 하지 못하는 저 풀과 꽃들도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우리들은, 세례를 통해서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은 더욱 더 하느님의 영광이 이 땅에 드러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하늘과 땅의 주님이신 아버지, 지혜롭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는 이 모든 것을 감추시고 오히려 철부지 어린이들에게 나타내 보이시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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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16. 사순 제4주간 토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니코데모의 말이 맞습니다. 그분의 말을 들어봤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을 박해하려던 사람들은 그분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단 하나였습니다. 메시아는 갈릴래아에서 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루하루를 지내다 보면 사람과 사람의 분쟁 가운데 서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이런 분쟁의 중심에 서게 되면 더욱 차분해야 한다는 사실 말입니다.
그럴 때는 양쪽의 말을 모두 들어야 합니다. 천천히 그리고 정확히 들어야 합니다. 시시비비를 가리기 전에는 누구의 손도 들어주어서는 안 됩니다. 우선 듣는 것이 우선입니다.
우리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늘 마음이 평온하면 좋으련만 그렇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수많은 소리가 마음을 가득 채울 때가 있습니다. 의심과 불신, 분노와 미움, 슬픔과 불안함이 공존하며 마음속에서 각기 다른 소리를 만들어 냅니다.
이럴 때도 우리가 해야 할 첫 번째는 바로 듣는 것입니다. 내 마음을 혼란하게 하는 마음들 사이 사이에 주님의 소리가 있습니다. 아무리 어둡더라도 우리를 향한 빛은 늘 우리를 비추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렇게 마음이 산란할 때일수록 비워야 합니다.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안에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그럼, 길이 보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마음이 산란할 때마다 늘 고요하면 안 머무셨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먼저 들으십시오. 그럼, 주님을 주님으로 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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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룽지 된
장 죽
얼마 전 선배 신부님과 작은 식당에 들렀습니다.
메뉴판을 넘기던 중
처음 보는 메뉴, 그러나 너무나 익숙한 메뉴가 있었습니다.
누룽지 된장 죽
누룽지 맛도 압니다.
된장 맛도 압니다.
죽 맛도 압니다.
그리고 이 세 가지를 하나로 합치면….
첫술을 입에 넣었습니다. 후후 불며….
익숙한데 익숙하지 않은 맛과 식감이었습니다.
누룽지 된장 죽…. 신박한 별미였습니다.
익숙한 신앙에 익숙하고 또 익숙한 것을 더하면
익숙하면서도 익숙하지 않은 재미를 만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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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16. 사순 제4주간 토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예수님은 누구인가?
“예수님 만나기, 예수님 알기, 예수님 살기”
-날마다 새롭게!-
예수님은 누구인가? 우리 믿는 이들의 평생 화두입니다.
분명한 것은 믿는 이들에게는 끊임없이 물어야 할 가장 중요한 질문이며 “날마다, 새롭게!” 내 삶의 현장에서 예수님을 만나야 하고, 예수님을 알아야 하고, 예수님처럼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화답송 후렴에서 제1독서에서의 예레미야와 복음에서의 예수님의 고립무원의 처지를 느낍니다. 예레미야를 통해서도 예수님이 누구신지 은연중 감지됩니다. 두분다 하느님께 대한 강철같은 신뢰와 사랑을 지닌분들입니다.
“주, 하느님, 당신께 피신하오니, 뒤쫓는 모든 자에게서 저를 구하소서, 저를 구해 주소서. 사자처럼 이 몸 물어가지 못하게 하소서. 아무도 구해 주는 이 없나이다.”(시편7,2-3).
그대로 오늘 제1독서의 예레미야의 처지에 대한 묘사같고 이런 고립무원의 처지에서 예레미야 예언자의 기도가 심금을 울립니다.
“그러나 정의롭게 판단하시고, 마음과 속을 떠보시는 만군의 주님, 당신께 제 송사를 맡겨 드렸으니, 당신께서 저들에게 복수하시는 것을 보게 해 주소서.”
하느님만이 예레미야에게 유일한 구원의 출구임을 깨닫습니다. 아마 복음의 예수님도 매사 예레미야처럼 하느님께 희망과 신뢰를 두고 하루하루 절박한 마음으로 사셨을 것입니다. 예레미야의 반응을 통해 예수님의 처지가 은연중 짐작되며 주변인들의 증언을 통해서도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감지됩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은 전혀 드러나지 않고 숨겨져 있으며 예수님을 만난 이들의 소감들만 전할 뿐입니다. 추측컨대 하느님과 깊은 결속관계의 예수님이심을 깨닫게 됩니다.
“저분은 참으로 그 예언자시다.”
“저분은 메시아시다.”
예수님은 만난 이들에 대한 반응에 대해 격렬한 반대 의견이 이어지며, 몇몇은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그분께 손을 대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쉽게 범접할 수 있는 예수님이 아님을 깨닫습니다.
“그분처럼 말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하나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성전 경비병들의 생생한 목격담에 역시 바리사이들의 격렬한 반대 의견이 뒤따릅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중에서 니코데모와 같은 깨어있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미 예전에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만났던 분이기에 예수님을 아는 니코데모가 예수님을 위해 변론합니다.
“우리 율법에는 먼저 본인의 말을 들어보고 또 그가 하는 일을 알아보고 난 뒤에야, 그 사람을 심판하게 되어 있지 않습니까?”
역시 이에 대한 동료 바리사이들의 반응은 얼마나 완고한지요! 무지의 고정관념, 선입견, 편견이 철벽같습니다.
“당신도 갈릴래아 출신이라는 말이오? 성경을 연구해 보시오. 갈릴래아에서는 예언자가 나지 않소.”
새삼 예수님과의 참 만남이, 예수님을 참으로 아는 것이 얼마나 결정적인지 깨닫습니다. 살아 있는 참 만남이 없으니 소모적 논쟁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완전히 감춰져 있습니다. 이런 논쟁의 중심에 침묵중에 주변에 활짝 열려 있을 주님을 만나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지금 여기서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처럼 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분들의 체험을 나누는 것도 중요합니다.
“가장 약한 사람들을 섬기는 것은 하느님의 모든 남녀들이 해야할 일이다.”
“가난한 사람들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은 자동적으로 공산주의자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가난한 이들은 복음의 깃발이며, 예수님 마음 안에 있는 이들이다. 그리스도교 공동체내에서 소유는 나눠져야 한다. 이것은 공산주의가 아니라, 순수한 그리스도교이다!”
“내가 은퇴한다면, 나는 전직 교황이 아니라 전직 로마의 주교로 불리길 원한다. 고백사제가 되고 병자들과 친교를 가질 것이다.”
바로 예수님을 만났기에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이런 고백도 가능합니다. 전임 베네딕도 16세 교황과의 관계에 대한 솔직한 고백에 공감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말한다. “전직 베네딕도 16세 교황은 부도덕적이고 무원칙적 사람들에 의해 이념적이고 정치적 목적으로 도구화됨으로, 10년 동안 우리 둘은 얼마나 많이 상처를 받았는지...”’
이런 고통들을 수용하고 견뎌낼 수 있었음도 예수님과의 깊은 신뢰와 사랑의 일치 체험에서 가능했음을 봅니다. 우리의 예수님과의 관계가 시냇물 깊이라면 두분 교황님의 예수님과의 관계는 태평양 바다 깊이일 것입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신 파스카 예수님은 우리와의 만남을 고대하십니다. 당신을 만나, 당신을 알고, 당신처럼 살기를 바라십니다. 어제 교황청 설교가 추기경의 4번째 사순강론도 은혜로웠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라자로의 부활은 예수님을 죽음에 이르게 했고, 예수님의 죽음은 그분을 믿는 모든 이들의 부활의 원인이 되었다. 그분은 시간의 끝에서 부활한 것이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서 시작된 부활인 것이다.”
바로 오늘 지금 여기서 부활한 주님을 만나, 주님을 알고, 또 주님처럼 살라는 것입니다. 어제 매주 2회 수도원 쓰레기를 말끔히 정리하면서 섬김의 직무에 충실한 원장 수사를 통해서도, 어느 형제와의 유쾌한 문자 메시지를 통한 만남에서도 저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 대화 나눔을 일부 공개합니다.
-“신부님, 항상 좋은 말씀 주셔서 감사합니다. 신부님의 성덕 열심히 따라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자랑스런 아버님 모심을 축하드립니다! 형제님은 아버님만 보고 배워도 성인이 될 것입니다! 그 89연세에 영육이 건강하시니 축복입니다! 형제님도 아버님 건강 타고 나셔서 영육으로 건강할 것이니 감사하며 은총의 사순시기 기쁘게 사시기 바랍니다.”
“네 알겠습니다. 이 기쁜 소식 아버지께 전달해 드리겠습니다... 아버지께 신부님 말씀 전해드렸더니 환하게 웃으시네요. 아버지 환하게 웃으시니 저도 행복합니다. 감사합니다.”-
저는 이 신심깊고 다정한 부자(父子)분을 통해서도 참 좋으신 예수님을 만난 듯 어제는 많이 유쾌했고 행복했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파스카의 봄같은 분입니다. 예전에 나눴던 “예수는 봄이다” 시를 다시 나눕니다.
“예수는 봄이다
봄은 사랑이다
봄이 입맞춘 자리마다
환한 꽃들 피어나고
봄의 숨결 닿은 자리마다
푸른싹 돋아난다
예수는 봄이다
봄은 사랑이다”-1999.3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봄같은 예수님을 만나,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처럼, 봄처럼, 살게 합니다. 저절로 솟아나는 참 자주 많이 나눴던, 늘 고백해도 늘 새로운 주님께 대한 사랑의 고백입니다. "예수님은 누구인가?"에 대한 저의 답변입니다.
“예수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희망,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당신과 함께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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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16. 사순 제4주간 토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그분처럼 말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하나도 없었습니다.” (요한 7,46)
권능있는 예수님의 말씀
유대인들이 구원자의 말씀에 넘어갈까 봐 걱정한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그분을 붙잡아 오도록 성전 경비병들을 보냈습니다. 그리스도를 가두어 놓으면 더 이상 그에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되리라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백성에게 일어날까 걱정 하던 일이 예수님을 잡아 오라고 그들이 보낸 이들에게 일어납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성전 경비병들이 뜻밖의 말을 하는 것을 듣고 몸서리칩니다. “그분처럼 말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하나도 없었습니다”라는 말이었지요. 성전 경비병들의 말은 바로 이런 뜻입니다. ‘예수님을 붙잡아 오지 못한 것을 두고 우리를 탓한다면 말이 안됩니다. 거룩한 힘이 담긴 말씀을 하는 분을 우리가 어떻게 붙잡을 수 있단 말입니까? 그분은 인간처럼 말씀하시지도 않았고 인간들이 할 만한 말씀을 하시지도 않았습니다. 그 말씀들은 본성상 하느님이신 분만이 하실 수 있는 말씀들이었습니다’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4 존재는 거룩하다
존재는 생명보다 크다. 그것은 생명과 지식의 토대다. 그것은 내세에서도 계속된다. 순교자들은 죽어서 목숨을 잃었지만, 존재를 얻었다. 우리의 생명은 죽게 마련이지만, 우리의 존재는 그렇지 않다. 왜 그런가?
그 이유는 존재가 하느님과 가깝기 때문이고, 하느님이 산 자의 하느님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생명이다”라고 엑카르트는 말한다. 하느님이 보기에는 어느 것도 죽지 않는다. 모든 것이 그분 안에서 살아 있기 때문이다. 엑카르트는 존재야말로 하느님의 가장 독특한 현존이라고 말한다. 이는 존재가 창조주 특유의 것이기 때문이다. 피조물의 생명이 죽는 것이지 존재가 죽는 것은 아니다. 하느님만이 존재를 죽일 수 있다.(137)
✝️ 토요일 이웃 종교(생태)의 날✝️
이름 없는 하느님, 김경재
이슬람교의 유일신 신앙과 '믿음의 다섯 기둥'
이상의 다섯 기지 특징은 이슬람교가 지닌 유일신 신앙의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무하마드는 이슬람교를 알라의 절대적 자기 계시에 근거하여 모든 예언과 종교가 완결적으로 정화된 형태라고 확신했다
그렇게 확신하는 근거는 야훼 종교의 창립자인 모세나 그리스도교 창립자인 예수를 모두 예언자의 영적 산맥 줄기에서 솟구친 영적 고봉(高峰)들이라고 무슬림은 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무하미드는 진정한 유일신 신앙의 역사적 계보를 찾아 올라가 마침내 아브라함에 이른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래가 처음엔 자녀를 잉태하지 못하므로 여종 하갈에게서 얻은 아들 이스마엘의 계보를 이어 아랍인들의 혈통과 신앙이 지속되어 왔다고 역사적 신학의 눈으로 성경 해석을 하는 것이다.(창세기 16장 참조)
아브라함에서 이스마엘로 이어지는 계보를 중시하고, 아브라함의 신앙이 참되고 순수한 유일신 신앙의 시발점이었다고 보는 이슬람교의 성경 해석은 유대교나 그리스도교 성경 해석학과 물론 큰 차이를 보인다
이슬람교 성지 순례 과정에서 순례의 클라이맥스가 되는 메카의 '카바'(Kaaba) 성소 창립자를 거슬러 올라가 아브라함과 이스마엘에게서 그 시발점을 찾는 무슬림의 통속 신앙은 역사적 확실성이 없다.(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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