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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 생각(思親)
千里家山萬疊峰(천리가산만첩봉)-산 첩첩 멀고먼 곳 고향이련만
歸心長在夢魂中(귀심장재몽혼중)-언제나 꿈속에서 돌아가고파
寒松亭畔雙輪月(한송정반쌍윤월)-한송정(寒松亭) 가에는 외로이 뜬달
鏡浦臺前一陣風(경포대전일진풍)-경포대(鏡浦臺)앞에는 바람이 불고
沙上白鷗恒聚散(사상백구항취산)-모래사장에 흰 갈매기 흩어졌다 모이고
波頭漁艇每西東(파두어정매서동)-고기 배 물결치며 오고 가나니
何時重踏臨瀛路(하시중답임영로)-언제면 고향에 다시 돌아가
綵舞斑衣膝下縫(채무반의슬하봉)-색동옷 입고서 바느질할까
신사임당(申師任堂)
“사임당 빛의 일기” 이원수 연기가 지나친 코미디다
SBS의 드라마 “낭만닥터 김사부”를 재미있게 본 여운(餘韻)으로 후속 드라마
“사임당 빛의 일기”에 기대를 걸었다.
드라마 “대장금”에서 공전(空前)의 인기를 끌었던 이영애 주연에도 상당한 관심을
두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막상 드라마 내용은 기대에 못 미친다는 생각이 든다.
아직 6회를 지났기 때문에 섣부른 판단인지는 모르지만 드라마의 구성 내용이
판타지(Fantasy)풍의 “푸른 바다의 전설” “도깨비”등과 같은 타임슬립(Time slip)의비슷한 모양새에서 벗어나지를 못했다는 생각이다.
한국 드라마의 가장 큰 문제점 중의 하나가 흥미위주로 과도하게 역사를 잘못되게
(歪曲)표현하는 것이다.
소설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드라마 “여인천하”에서 문정왕후(文定王后)의 동생 윤원형(尹元衡)을 오라비로
둔갑시켰다.
윤원형은 문정왕후의 동생이다.
*드라마 “바람의 화원”에서는 남자 화가 신윤복(申潤福)을 남장 여자로 바꾼 것은
역사 왜곡의 극치다.
조선 후기의 김홍도, 김득신과 더불어 3대 풍속화가인 혜원(蕙園) 신윤복(申潤福)은
도화서(圖畵署) 화원인 한평(漢枰)의 아들이다,
*소설 “대무신왕(大武神王)”에서
“나, 대무신왕!”이라고 대화하는 대목이 나온다.
대무신왕이란 사후(死後)에 부르는 시호(諡號)다.
살아있을 때 짓고 부른 호칭이 아니다.
세종(世宗), 정조(正祖)등도 죽은 후에 종묘(宗廟)에 모신 묘실(廟室)의 이름인 묘호(廟號)다.
*어떤 역사소설에서는 “다음 주에 보자”는 말이 나온다.
우리역사에는 “일주일”이란 단위가 없다.
“주週)”는 기독교가 문화가 들어온 뒤에 생긴 말이다.
어린이들 아니 어른들도 역사책을 읽지 않은 사람은 드라마대로 믿는 사람들이
많다.
“사임당 빛의 일기” 5회와 6회에 사임당의 남편인 이원수(李元秀)가 등장한다.
드라마 화면에는 이원수(李元秀)가 완전히 코미디 개그맨 캐릭터 연기를 한다.
이것이 필자의 눈에는 너무 과장(誇張)된 “이원수의 연기”라는 생각이다.
역사속 신사임당(申師任堂)에 관한 기록에서 이원수(李元秀)는 남편으로서
신사임당(申師任堂)에 비해서 성격이 우유부단(優柔不斷)하여 사임당의 애를 많이 태운 기록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한 가지 예로서
신사임당은 남편에게 공부하기를 권하면서 10년 별거를 약속한다.
그러나 공부하기 위해 떠난 이원수는 아내가 보고 싶어 다시 중간에 돌아오기를
반복하였다. 타일러 보기도 하고, 결단력 없는 남편을 나무라기도 한다.
그런데도 의지가 약한 남편 이원수(李元秀)는 학문에 뜻을 두지 않는다.
마침내 사임당은 가위를 들고
“당신이 학업을 제대로 이루지 않으면 내 머리카락을 자르고 절에 들어가
비구니가 되겠다”고 말한다.
이원수는 다시 공부를 위해 떠났지만 약속했던 10년 공부는 3년 만에 접고 만다.
결국 과거에는 합격하지 못하고 국가에서 공신(功臣)이나 현직 당상관(堂上官)의
자손에게 과거(科擧)를 안보고 관리(官吏)로 채용하던 “음서(蔭敍)”방법에 의하여
50세 늦은 나이에 한강의 뱃길을 담당하는 종5품(從五品 지금의 7급)인 황해도 해주
수운판관(水運判官)에 임명된다.
그 후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까지 지낸다.
이 내용은 율곡(栗谷) 이이(李珥)선생이 어머니 신사임당(申師任堂)의 행적(行蹟)을
기록한 글인 “선비행장(先妣行狀)”과 조선 시대의 문물과 사회제도, 풍속 따위를
수록한 “견첩록(見睫錄)”에 있다.
“견첩록(見睫錄)”에 있는 한 내용으로
남편 이원수는 한때 덕수 이씨 문중에 있는 영의정인 5촌당숙 이기(李芑)와 가까이 지냈다.
이원수가 이기(李芑)의 집에 드나드는 것을 알게 된 사임당은
“저 영의정이 어진 선비들을 이용하고 권세를 탐하니 후일에는 불행이 닥칠 것이오.
당신은 절대로 그 집에 발을 들여놓지 마시오.”라고 하면서 5촌당숙의 권력을 빌려 벼슬을 얻고자 하는 이원수에게 사임당은 이기의 집에 출입하지 말 것을 강하게 충고하였다.
이기(李芑)는 윤원형(尹元衡)의 심복으로 명종(明宗) 원년에 윤원형과 함께
소윤(小尹)이 대윤(大尹)을 몰아내는 정치 싸움인 을사사화(乙巳士禍)를 일으킨 뒤 영의정의 자리에까지 오른 인물이다.
이 을사사화로 인하여 대윤(大尹)일파 100여 명이 숙청당하는 큰 당쟁이었다.
그후 다시 대윤(大尹)이 집권하자 이기(李芑)는 사화(士禍)의 원흉으로 죽임을 당하고 묘비도 제거되었다.
이원수가 만약 사임당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고, 계속 이기의 집에 드나들었다면
화를 입었을 것이며 아마 그 화(禍)가 율곡 이이에게까지 미쳐 지금의 대학자로 이름을 남기지 못하였을지도 모른다.
또 “동계만록(東溪漫錄)”에는
제가(사임당)죽은 뒤에 당신은 다시 장가들지 마세요.
우리 자식이 이미 7남매인데 더 자식이 필요 없지 않소.
하며 자식들이 계모에게 설움 받을 것을 염려하였다.
이원수는 사임당 살아있을때에 이미 나이 어린 주막집 여인 권씨를 만나 딴살림을 차렸다.
그리고 사임당 사후에는 그녀를 곧바로 아내로 맞아들였다.
나이어린 권씨를 통해서 이원수가 자유분방했고 술주정까지 심했다는 말을 듣고
사임당의 속앓이를 짐작 할 수 있다.
그래도 이원수는 아내가 남편에 대해 의무만 지녔고 권리는 주장할 수 없었던
조선 시대에 아내 사임당의 생각과 재능을 존중한 후덕한 성품의 남편인 듯하다.
또한, 학문에는 별로 뜻이 없다고는 하나 천성이 선하고 세상 물욕이 없었다.
이원수가 죽은 후 묘비명을 지은 청송 성수침(聽松 成守琛)은 말하기를
“자못 옛 어른의 풍도가 있었다.”라고 이원수의 인품을 칭찬하기도 했다.
세월이 흐른 후 백여 년 뒤에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도
“신사임당의 어진 부인을 만나 율곡(栗谷) 선생 같은 큰 현인(賢人)을 낳은 것은 그야말로
“좋은 술은 질그릇에 담지 않는다는 말 그대로라.”고 하며
이원수의 숨은 덕(德)이 능히 어진 부인 사임당과 짝할 수 있었다고 칭송하고 있다.
그러나 송시열이 이원수를 칭찬한 것은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위상을 높여서
서인(西人) 의 결속력을 다지려는 의도가 있던 인물이라 이원수에 대한 과한 칭송은 대학자 율곡의 아버지이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후세인은 판단한다.
이상과 같이 이원수(李元秀)가 신사임당(申師任堂)에 비해 남편으로서 부족한 점이 많은 역사 기록이 있지만 드라마에서 보여주는 “이원수의 연기”는 “사임당의 빛의 일기” 제목에서 신사임당(申師任堂)이 주는 무게감에 비해 너무 흥미위주로 지나치게 코미디식 연출로 역사왜곡을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신사임당(申師任堂)에 대해 몇 가지를 추가 해 보고자 한다.
필자는 한국은행 5만원권 지폐를 볼 때마다 “고전문화 전시(展示) 지폐”라는
생각이 든다.
지폐의 앞면에는 신사임당(申師任堂1504~1551)의 초상화다.
초상화 뒤에 사임당이 그린 “묵포도(墨葡萄)”그림이 있다.
지폐의 뒷면에는 어몽룡(魚夢龍1566~사망미상)의 “월매도(月梅圖)”다.
월매도 뒤에는 희미하게 이정(李霆1541~1622)의 “풍죽도(風竹圖)”가 그려져 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이들의 출생과 사망 시기를 보면
신사임당(申師任堂1504~1551)
어몽룡(魚夢龍1566~사망미상)
이정(李霆1541~1622)이 같은 시대의 사람임을 알 수 있다.
신사임당(申師任堂)의 초상화에 묵포도(墨葡萄)는 그렇다 쳐도
조선 회화사(繪畵史)에서 어몽룡(魚夢龍)이나 이정(李霆)보다 매화나 대나무 그림을
훨씬 잘 그리는 화가가 있는데도 왜 한국은행에서 신사임당(申師任堂)과 같은 시대의 그림을 도안(圖案)으로 선택하였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긴다.
신사임당(申師任堂)은 조선역사에 유일(唯一)한 여성상(女性像)으로 존재한다.
현모양처(賢母良妻)
여류화가(女流畵家)
여류문인(女流文人)등으로 수식어(修飾語)가 붙어 있다.
그러나 신사임당(申師任堂)에 관한 역사적 기록은
이순신 장군처럼 임진왜란 때 해전을 한 기록이나
장영실처럼 과학을 연구한 것처럼
신사임당(申師任堂)이 조선역사와 이 시대에 이르기까지 지폐에 초상화를 넣을
정도로 추앙(推仰)받을 자료가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율곡(栗谷) 이이(李珥)같은 위대한 아들을 낳고 교육시켰기 때문에 존경받는다고
한다면 퇴계(退溪) 이황(李滉)은 율곡과 쌍벽의 인물이고 율곡(栗谷)보다
성리학(性理學)의 태두(泰斗)다.
퇴계의 아버지는 퇴계선생이 태어 나던 해에 돌아가셨다.
퇴계 선생의 어머니 춘천박씨는 혼자의 몸으로 6남 1녀의 자식들을 품팔이를 하면서 잘 키우고 특히 세계적인 성리학자 퇴계선생을 있게 했다.
퇴계의 기록에 “나의 일생에서 가장 영향을 많이 받은 사람은 어머니”라고 하였다.
그런데 왜 퇴계의 어머니는 현모양처(賢母良妻)에 이름이 오르지 않았을까
사임당은 그림을 잘 그리고 시를 잘 지었기 때문일까?
사임당의 그림은 산수화, 포도, 초충도(草蟲圖), 묵란(墨蘭)등이 있다.
이중에서 사임당 그림의 백미(白眉)라는 말을 뜨고 있는 초충도(草蟲圖)는
사임당의 그림이 아니라는 설도 있다.
이원복 전 국립박물관 학예실장은 말하기를
율곡 학파의 영향으로 신사임당이 인기를 얻자 모작(模作)과 위작(僞作)등이
많이 양산되었다고 하였다.
필자는 신사임당의 한시자료를 다수 가지고 있다.
신사임당의 한시의 수준도 조선의 여류시인 황진이나 허난설헌의 수준에 못 미친다고 본다(필자 개인의 생각)
신사임당이 이 시대에 존경받는 여인상으로 자리매김한 주요한 내용이 있다.
신사임당이 그린 난초(蘭草) 그림이 있다.
이 난초그림의 발문(跋文)을 138년뒤의 인물인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이 쓴다.
발문(跋文)이란 난초그림의 내용을 설명한 것이다.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은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학문계통을 이은 기호학파(畿湖學派)다.
그리고 정치적으로는 서인(西人)인 율곡을 계승한 서인(西人)의 영수(領袖)다.
신사임당의 난초그림에 대한 송시열의 발문(跋文)을 소개한다.
송자대전(宋子大全)권146에 있는 내용이다.
송자(宋子)는 “조선의 주자(朱子)”라는 뜻으로 송시열을 높이 부르는 칭호다.
사임당(師任堂)의 난초 발(蘭草跋)
원문(原文)
此故贈贊成李公夫人申氏之所作也。其見於指下者。猶能渾然天成。若不犯人力也如此。況得五行之精秀。會元氣之融和。以成眞造化哉。宜其生栗谷先生也。先生從曾孫東溟,百宗以從班出佐西幕。將行。以此帖示余。俾余題其上。蓋此帖流落人家。
不爲李氏有者有年矣。百宗尋求不已。今年月日。得之於漢陽李姓人。粧繕如舊。
復爲家傳百世之寶。其意可謂勤且至矣。抑嘗聞栗谷先生甫能言。
自作子事父母及張公九世同居圖。端坐而默觀之。此圖幸存而不泯乎。則粘綴此帖之下。使人知夫人之爲母先生之爲子。寔是源委相承。不使上谷君家專美於前可也。
百宗其毋忽之哉。時崇禎己亥臘。恩津宋時烈敬書。
해설(解說)
사임당(師任堂)의 난초 발(蘭草跋)
이는 고(故) 증(贈) 찬성(贊成) 이공(李公 이원수(李元壽)를 가리킴)의 부인 신씨(申氏)가 그린 것이다. 그 손가락 끝에서 나온 그림도 이처럼 혼연(渾然)히 자연으로 이루어져서 마치 사람의 힘이 들어가지 않은 것 같은데,
하물며 오행(五行)의 정수(精秀)를 얻고 원기(元氣)의 융화(融和)가 모여서 진정한
조화(造化)를 이룬 것임에랴.
율곡 선생을 낳았음이 마땅하다.
선생의 종증손(從曾孫) 동명(東溟) 백종(百宗)이 조반(朝班)에서
서막(西幕 평안도 관찰사(平安道觀察使)의 막좌(幕佐)로 나가기에 앞서 이 첩(帖)을 나에게 보이면서 그 위에 글을 써 달라고 하였다.
이 첩이 인가(人家)에 굴러다녀서 이씨의 소유가 되지 않은 지 여러 해인데,
백종(百宗)이 애써 찾은 끝에 금년 모월 모일에 한양(漢陽)의 어떤 이씨에게서 찾아
전과 같이 장선(粧繕)을 하여 다시 영원토록 가전(家傳)의 보물로 삼았으니,
그 뜻이 간절하고도 지극하다 하겠다.
일찍이 들으니 율곡 선생이 겨우 말을 하게 되었을 때에 스스로 아들이 부모를 섬기는 것과 당(唐) 나라 때 장공예(張公藝)의 9대(代)가 한집에 살았던 그림을 그려 놓고, 단정히 앉아서 묵묵히 보았다고 한다.
그 그림이 다행히 남아 있다면 이 첩 밑에 붙여서 사람으로 하여금 부인의 어머니됨과 선생의 아들 됨이 실로 근원과 줄기가 서로 이은 것을 알게 하여,
상곡군(上谷君)의 집안만이 전대(前代)에서 홀로 빛나게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백종은 소홀이 하지 말지어다.
숭정 기해년(1659, 현종 즉위년) 섣달에 송시열은 삼가 쓴다.
상곡군(上谷君)은 주자(朱子-朱熹)와 함께 성리학을 집대성한 송(宋)나라의 정호(程顥)를 뜻한다.
그의 모친 후부인(侯夫人)는 후덕하고 법과 인애(仁愛)로 집안을 다스렸다고 알려져 있다.
무엇보다 정호(程顥)와 정이(程頤)라는 걸출한 두 성리학자를 배출한 것을 가장 높게 평가받는다.
우암 송시열은
“중국에는 후(侯)씨 부인과 정호(程顥)와 정이(程頤) 형제가 있다면 조선에는
신(申)씨 부인과 율곡(栗谷)이 있다면서 신사임당(申師任堂)과 이이(李珥)를 극찬했다.
그 후에도 송시열은 이이(李珥)와 사임당(師任堂)을 묶어 추앙하면서
사임당이 부덕(婦德)의 전형(典型)으로 떠받들어지면서 이후 서인(西人)·노론(老論) 계열의 유학자들이 사임당 예찬에 가담했다.
이로 인해 율곡(栗谷) 이이(李珥)가 백세(百世)의 스승으로 떠받들어지면서
신사임당(申師任堂)은 현모양처의 본보기 인물로 각인(刻印)되어간 것이다.
그렇다면 신사임당(申師任堂)의 실제 모습은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사임당은 당시 조선 유교 사회 사대부의 남자가 좌지우지하는 사회규범에 맞섰던
절개 있는 여성이었음은 분명해 보인다.
달리 말하면 당시 조선시대의 신여성이라 할 수 있다.
사임당이 혼인한 조선 제11대 왕 중종(재위1506∼1544)때는
“혼인의 예(禮)가 바르게 서야 군신(君臣)과 부자(父子)의 도리도 바를 수 있다”
이라면서 “남자가 여자의 집으로 장가드는 것은 천도(天道)에 역행하는 것”이라는
왕이 문서를 내릴 정도로 사회 전체가 성리학적(性理學的) 질서 분위기가 강한 시기였다.
그렇지만 사임당은 신랑이 신부를 데려와(親迎) 신랑집에서 혼인식을 하는
중국식 주례에 따른 혼인인 “친영례(親迎禮)”로 자신의 인생을 바꿀 생각이 없었다.
사임당이 혼인 이후 19년 동안이나 친정인 강릉 오죽헌에서 기거한 행적은 당시의
성리학적(性理學的) 법도와 질서에 대단히 위반(違反)하는 간 큰 행동이었다.
사임당의 또 다른 진면목은 자신의 재능을 자식들에게 물려준 것에서 찾을 수 있다.
학문적 재능은 율곡(栗谷) 이이(李珥)가,
예술적 재능은 넷째 이우(李瑀)와 맏딸 이매창(李梅窓)이 물려받았다.
특히 이이(李珥)의 학문(學文)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는데,
이이(李珥)의 성리학(性理學) 밑바탕인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은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에서 퇴계(退溪)의 이(理)에 비해 열등한 것으로 보던 기(氣)를 이(理)와 동등한 가치로 끌어올렸다.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영남학파(嶺南學派)와 기호학파(畿湖學派) 연원(淵源)은
이(理)와 기(氣)의 주장에서 시작된 것이다.
이이(李珥)의 이런 융합적(融合的)인 철학관(哲學觀)과 함께 사림(士林)의 분당(分黨)을 가슴 아파하고 당론(黨論)을 조절하려는 조제론(調劑論)을 펼친 밑바탕에는
집안을 화평하게 이끈 사임당의 집안경영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때문에 가정은 반드시 화목하고 질서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여기서 증명한다.
필자가 이렇게 역사적 자료를 인용하여 긴 글을 쓰는 이유는
신사임당(申師任堂)을 폄하(貶下)하는 의도가 아니다.
역사속의 인물을 올바른 기록에 의하기 보다는
정치적 목적으로 서인(西人)과 노론(老論)의 우세를 점하기 위한 목적이거나
기호학파(畿湖學派)의 주도권에 신사임당(申師任堂)을 이용해서는
올바른 인물평이 될 수 없다는 생각이다.
농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