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25일 성 야고보 사도 축일
-정인준 신부
복음; 마태20,20-28 <너희는 내 잔을 마실 것이다.> 20 그때에 제베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과 함께 예수님께 다가와 엎드려 절하고 무엇인가 청하였다. 21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무엇을 원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 부인이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22 예수님께서 “너희 는 너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한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할 수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자,2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내 잔을 마실 것이다. 그러나 내 오 른쪽과 왼쪽에 앉는 것은 내가 허락할 일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정하신 이들에게 돌아가는 것이다.”24 다른 열 제자가 이 말을 듣고 그 두 형제를 불쾌하게 여겼다.25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너희도 알다 시피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26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 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27 또한 너희 가운데에 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28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섬기러 왔고”
비올레타의 집에서 향연을 벌이며 알프레도가 부르는 ‘축배의 노래 (Brindisi :Libiamo ne’lieti calici)가 생각납니다. 이 오페라의 서막에서 남녀의 사랑은 향연의 축배에서 시작됩니다.
우리에게는 추억이 된 유익종의 ‘축배의 잔을 들자’라는 결혼 축하 노래말이 있습니다. “한쌍의 원앙이 되어 영원을 맹세하네. 뜨거운 가슴으로 함께 할 두 사람. 아름다운 날들 위해~ 축배의 잔을 들~자.”
여기서 ‘축배의 잔’이라면 서로 기쁨과 상대의 삶, 그리고 사랑을 눈다는 의미가 되겠지요. 그런데 복음에서 주님께서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라고 질문하시는 것을 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같은 잔이라도 ‘수난’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제베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기 전에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십니다.
“보다시피 우리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다. 거기에서 사람의 아들은 수석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넘겨 질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사람의 아들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그를 다른 민족 사람들에게 넘겨 조롱하고 채찍질하고 나서 십자가에서 못 박게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은 사흗날에 되살아 날 것이다.”(마태 20,18-19)
제베대오의 어머니도 또 두 아들도 주님의 수난에 대해서는 더더군나 모른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한 자리에 오르실 것 같아 두 아들을 부탁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수난과 십자가 그리고 죽음을 맞으시러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는데 주님의 오른 쪽, 왼쪽의 높은 자리를 청하니 말입니다.
사람에게는 욕심이 여럿 있는데, 그 중에 끊기 어려운 것이 재물욕과 성욕이라고 합니다. 많은 현자들이 이 둘의 욕심은 다스릴 수 있으나 자신들도 끊기 어려운 것이 명예욕이라고 했습니다.
명예욕은 출세, 권력, 이름을 드러내는 것 등의 여러 얼굴로 나타나는데, 자기 자신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자신을 죽이는 것만큼 어렵다고 합니다. 더군다나 이 욕심은 자신의 깊숙한 자리에 있어 알아차리는 것도 쉽지가 않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이 명예욕은 사람을 끊어질 듯 하면서도 끝까지 사람을 지배하는 것이지요. 함께 공동체를 위해서 봉사한다는 분들 중에 명예욕으로 자유롭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분들은 어떤 일에서든지 기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유롭지 못한 분들은 하는 일이나 그 위치를 자로 재듯 따지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남들에게 드러나거나 빛나지 않으면 기피하는 모습도 보입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 뿐 아니라 봉사하는 우리에게도 생명과 같은 교훈의 말씀을 해 주십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마태 20,26-27)
고국의 고속 도로 휴게소 입구에 이런 문구가 걸려 있는 글을 볼 때가 봅니다. ‘저희는 손님을 섬깁니다.’
이 말이 복음서에서 나왔는지는 몰라도 뒷맛은 씁쓰레하기도 합니다. 실상 휴게소에 들어가면 그 반대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말만 ‘봉사, 봉사’하기는 얼마나 쉽고 또 멋 있습니까? 교회의 봉사자들도 마찬가지이지요. ‘봉사’라는 말이 ‘사랑’만큼이나 흔해빠진 것은 아닐까 반성도 해봅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을 맞으러 가시는데 제자들은 높은 자리싸움을 하고 있으니 한심스럽지만 사실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희망하는 것은 바로 사랑의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며 이끌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절망하는 우리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보물을 질그릇 속에 지니고 있습니다. 그 엄청난 힘은 하느님의 것으로, 우리에게서 나오는 힘이 아님을 보여 주시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온갖 환난을 겪어도 억눌리지 않고, 난관에 부딪혀도 절망하지 않으며, 박해를 받아도 버림받지 않고, 맞아 쓰러져도 멸망하지 않습니다.”(2코린 4,7-9)
질그릇 같은 우리는 현실에서 주님의 가르침을 원하면서도 때로 갈팡질팡 거리를 두고 살아 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주님의 가르침대로 살 수 있는 것은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면서까지 우리를 사랑하시고 이끌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바로 주님의 십자가를 나누며 사는데 사도 바오로는 다시 이렇게 이 사실을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우리 몸에서 예수님의 생명도 드러나게 하려는 것입니다.”(2코린 4,10)
오늘 우리는 우리의 사랑이신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다시 새기며 참다운 봉사자, 겸손한 봉사자의 삶 새겨야 할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태 20,28)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