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국리에서 있었던 이십여 년간의 발굴 그리고 쏟아진 유적과 유물들 그것은 한반도 청동기 역사를 다시 쓰게 했다. 발굴 결과를 토대로 추정 복원한 청동기 시대의 송국리 모습이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청동기 시대 마을 송국리 이곳엔 삼천 년 전 이 땅에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다. 안녕하세요. 에이치디 역사 스페셜 고두심입니다. 오늘은 여러분과 함께 청동기 시대로 시간 여행을 떠나볼까 합니다. 청동기 시대 하면은 저는 먼저 고인돌이 떠오르구요. 영화나 만화에서 그렇게 봐서 그런지 당시 사람들의 생활도 좀 원시적인 그런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오늘 송국리를 다 둘러보고 나시면 아하 청동기 시대에 우리가 그렇게 살았구나 실감하실 수가 있으실 겁니다. 마을로 한번 들어가 보시죠 발굴 결과를 토대로 송국리 마을 유적을 컴퓨터 그래픽으로 복원한 것입니다. 마을을 큰 도랑이 빙 둘러싸고 있는데 도랑이 제법 크지 않습니까 그냥 건너기는 힘들 것 같아요. 마을에 들어가려면 이렇게 다리를 건너야 합니다. 마을을 둘러싼 도랑을 환호라고 하는데요. 외부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한 방어시설입니다. 환호를 건너 와 봤더니 이번에는 나무 목책이 가로놓여 있군요. 이렇게 굵은 나무 기둥을 박아서 울타리를 친 목책 역시 외부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 만든 방어시설입니다. 입구에는 감시용 망루가 있는데요. 어째 마을로 들어서기가 수월치 않을 것 같습니다. 출입구 쪽에 있는 이 망루 외에도 마을 안으로 들어가게 되면 여러 개의 망루가 있다고 합니다. 마을의 삼엄한 분위기가 감도는데요. 여기를 또 보시면 출입문 앞에 이렇게 방어시설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출입문 양쪽의 도랑을 파고 경사면에 뾰족한 통나무로 촘촘히 박아놓은 이것을 녹채라고 합니다. 발을 헛딛기라도 한다면 그래서 녹차에 빠진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입니다. 이 마을은 왜 이렇게 이중 삼중으로 방어시설을 갖춰놓아야만 했을까요. 여기 말이 말하는 옥방지구가 주로 가면 이쪽이 되는 아마 지난 천구백구십육 년 남강댐 수몰지인 진주 대평리에서 청동기 시대의 유적이 발굴됐다 그 편이 이제 언 이렇게 모두 백십만여 평에 이르는 청동기 시대 마을 유적이다. 이 유적에서는 눈에 띄는 독특한 시설이 발견된다 마을을 들어서는 입구에서 가장 먼저 만나는 것 바로 환호다 어떤 곳에 환호는 두 줄로 만들어졌다. 환호의 길이는 삼백 미터 폭은 이 미터에 이른다 깊이는 일 점오 미터 위는 넓지만 아래로 내려갈수록 좁아진다. 안은 발이 간신히 들어갈 만큼 좁다랗게 홈을 팠다. 발이 낀다면 빠져나가기 힘들 정도다 한우가 만들어지게 되면 역시 그 구조 자체도 그렇고 그 역할이나 이런 것들이 확실히 어떤 뭐라고 해야 할까 좀 군사적인 그런 시설물 그러니까 이게 적극적으로 공격은 아니지만 적어도 외부에서 침입해 들어오는 사람들을 저지하는 그런 효과는 분명히 있었다라고 볼 수 있죠 방어 시설은 환호만이 아니었다. 환호를 따라 일정한 간격으로 발견되는 커다란 구멍 이 구멍은 굵은 통나무를 세웠던 흔적이다. 통나무로 기둥을 세우고 울타리를 친 것이다. 환호에 이어 목책으로 이중 방어막을 만든 것이다. 적어도 환호를 갖다가 두개보로 한다든지 또는 거기에 곁들여서 어떤 목차에 나무 울타리를 설치한다든지 이렇게 하는 것은 훨씬 더 소위 말하면 방어 시설을 견고하게 만드는 그런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거죠. 그러니까 단지 어떤 조금 모래 땅이기는 하지만 의미상으로 단지 그냥 경계로서 돌려둔다 하는 이런 거와는 좀 다르지 않았겠는가라고 생각이 외부의 적이 일차 방어선인 환호를 뚫는다 해도 마을을 공격해 들어가기 위해서는 더욱 견고한 목책을 넘어야 한다 이 마을은 왜 이런 방어시설을 만들어야 했을까 일단 이 인골이 발견된 것은 태평리에서 발굴된 인골에 그 단서가 우리나라는 쉽게 부식되는 산성 토양이라 오래된 인골이 남아 있는 것은 아주 드문 일이다. 이 인골은 이천오백여 년의 세월을 견디고 비교적 온전한 채 발견됐다 신체 각 부위도 명확하게 알 수 있다. 여기가 목뼈의 끝이 되겠습니다. 목뼈의 끝이고 이렇게 요추가 이어집니다. 이어지고 여기는 선골이 되겠습니다. 그리고 좌우에 팔 요 부분은 좌우의 대태골 그다음에 좌우에 경골이 이렇게 돼 있고요 그런데 인골에는 유독 머리 부분만 없다. 인골의 머리 부분은 어떻게 된 것일까 왜 인골이 두개골이 없을까 조사가 잘못된 것은 아닐까 굉장히 고민을 많이 했죠. 조사를 하는 과정에서 보니까 석관묘의 끝에서 요추가 나왔습니다. 요추가 나오고 또 두개골이 만약에 있었다면 적어도 다른 인골로 같이 나와줘야 될 치아가 나오지 않아서 저희들 판단으로는 분명히 매장 당시부터 두개골이 없는 채로 그러니까 머리를 잘린 채로 묻혀진 인골로 판단을 했습니다. 인골은 매장 당시부터 머리가 없이 묻힌 것이다. 이 무덤의 주인은 어떤 이유로 머리가 잘린 채 묻힌 것일까 그 단서는 또 다른 무덤에서 발굴된 네 개의 작은 돌멩이에 있다. 이 작은 돌멩이는 머리 없는 주인의 무덤에서 약 백 미터 떨어진 곳에서 나왔다 네 개의 돌멩이는 조사 결과 화살촉의 앞부분인 것으로 밝혀졌다. 석관 내부에는 별도로 부장된 유물은 없었습니다. 단지 이 석관 바닥에서 마제 석촉의 선나무편 4점만이 발견되었는데 어 이 유물들은 아마 그 당신들이 의도적으로 부장한 유물로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무덤에 화살촉을 부장한 경우는 많지만 그 앞부분만 부장된 경우는 보고된 적이 없다. 이 화살촉 앞 부분은 어떻게 무덤 안에 있었을까 무덤에서 발굴된 화살촉이 어떤 상태인지 살펴보기로 했다. 현미경 분석 결과 화살촉의 앞부분은 강한 충격에 의해 몸통 부분이 절단된 것으로 밝혀졌다. 부러진 이유는 화살 초기니까 아마 이용을 했던 것 같습니다. 이용을 해서 부딪히고 나니까 충격에 의해서 내 게 다 안면 부러지고 그러고 뒤부분이 동강이 났거든요. 이거는 아마 충격에 의해서 이렇게 파괴가 되지 않았는가 이렇게 생각이 되었지 무덤 속에서 발견된 부러진 화살촉 네 개는 무덤 주인의 사인을 알 수 있는 유력한 증거다 석관에 매장된 피장자는 마제 석촉이 장착된 화살을 맞고 아마 사망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리고 그 피장자들의 안장을 위해서 석관을 마련하고 이제 묶기 전에 화살촉을 뽑는 과정에서 마제 석초의 선단부가 부러져 몸속에 남아 있게 되었고 석촉 편이 남아 있는 상태 그대로 아마 매장이 이루어져서 석관 내부에서 마제의 석초 3단부 편이 출토된 것으로 생각됩니다. 청동기 시대의 유적인 강릉 방동리 마을 유적 이 마을 환호에서는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흥미로운 유물이 출토됐다 예예 환호는 현재 지금 여기서 끝 하는 것으로 보고 있고요 주먹만한 크기의 깨진 돌들이 환호 안에 일정한 간격으로 쌓여 있다. 이 깨진 돌들은 무슨 용도로 사용한 것일까 간 거구나 이거 적으로부터의 보호하기 위해서 돌을 깨가지고 여기에다가 쌓아놨다가 적이 침입했을 때 돌을 가지고 아마 던졌던 것으로 추정을 하고 있고 일부 돌들이 밑에서 조금 확인되는 것들도 있지만 대체적으로 이 일대에서만 한우 내에서만 확인이 되고 있습니다. 청동기 시대 방동리 마을 사람들은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환호를 파고 투석전에 대비해 깬도를 준비해 놓았다. 청동기 시대의 환호와 목책은 한반도 전역에서 발굴된다 전국 곳곳에 이런 마을이 산재해 있다는 것은 그만큼 전쟁이 잦았다는 것이다. 청동기 시대의 전쟁의 흔적은 오림동 고인돌 암각화에서도 엿볼 수 있다. 창을 든 사람과 칼을 숭배하는 듯한 두 사람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뭘까 그런 사회가 어떤 소위 말하면 무기를 뭐랄까 숭배한다고 해야 될까 아니면 좀 무를 숭배한다 아니면 무기와 관련된 어떤 권위 이런 걸 드러낸다라고 볼 수 있고 결국 그것도 전체적으로는 이 전쟁과 관련된 사회 또는 전쟁이 있었던 사회에서 가능한 것이니까 그런 시점의 사회를 본다면 역시 전쟁을 유발시킬 만한 그런 어떤 배경 동기들이 이제 상당히 성숙돼 있는 그런 시점이 되는 것이죠. 곳곳에서 발견되는 전쟁의 흔적 그것은 전쟁이 일상적이었던 것임을 짐작하게 한다 집단과 집단 사이의 갈등이 시작되는 청동기 시대는 전쟁의 시대였다. 바로 치열했던 전쟁 때문에 송국리에는 그런 삼엄한 방어시설을 만들어 놓아야 했습니다. 전국 곳곳에 산지에 있는 청동기 마을 유적을 보면은요 대부분 환호와 목재 같은 방어 시설이 발견되는데요. 그만큼 청동기 시대의 한반도는 전쟁이 일상적이었다는 증거입니다. 평상시 생활은 어떠했을까요. 이런 움집을 짓고 살았는데요. 겉보기에는 신석기 시대의 움집과 거의 비슷해 보이는데 집안은 어떨까요. 아이고 바닥을 깊게 파서 반 지하로 해놨군요. 이런 반지하가 여름에는 서늘하고 겨울에는 따뜻하다고 합니다. 집안 구조도 신석기 시대 몸집과 비슷한데요. 가재 도구들이 좀 달라 보입니다. 신석기 시대의 집 안에는 주로 사냥 도구들이 많이 보였었는데요. 여기는 농기구들이 많이 보이는군요. 이것은 곡식을 갈 때 쓰는 갈돌이구요. 그리고 이것은 돌라칩니다. 돌로 만들었지만 날이 아주 예리하게 생겨서 곡식이 아주 잘 배어지겠습니다. 청동기 시대 토기는 요즘에 소치나 식기 용도로 쓰였지만은 이렇게 곡식을 저장하는 저장고 역할도 했답니다. 토기마다 곡식이 가득한 걸로 봐서 먹을거리 걱정 없이 사는 데는 아주 여유가 있었나 봅니다. 근데 이건 또 뭐죠 청동기 시대에 이런 의자가 다 있었군요. 손님이 오시면 이 의자에 앉혔을까요. 마을에는 또 이렇게 큰 공동 창고가 따로 있습니다. 일반 집과 달리 난간을 세우고 건물을 올려놨는데요. 이렇게 해놓으면 통풍이 잘 되고 습기도 잘 차지 않는다고 해요. 이 마을 공동창고 안에는 과연 무엇이 들어있을까요. 한번 올라가보도록 하죠. 커다란 토기마다 곡식이 가득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이거는 수수구요. 그리고 저기에는 팥 그리고 쌀 조에 이르기까지 송국리의 집도 그렇고 마을 공동 창고에도 그렇고 식량을 넉넉하게 비축해 두고 있는데요. 이 마을의 풍족함을 가져다 준 곳은 농경이었습니다. 청동기 시대에 농경생활은 어땠을까요. 청동기 시대에 농경유적 발굴이 한창인 춘천 천전리 마을 내부에 길이 이 미터 깊이는 1미터에 이르는 커다란 원형 구덩이가 일정한 간격으로 흩어져 있다. 이런 구덩이는 수백 개에 이른다 이 커다란 구덩이는 곡식을 저장했던 저장 시설이다. 청동기 시대 이마을 사람들이 대규모 농경을 했다는 사실을 뒷받침한다 이곳 마을 저습지에서 발굴된 요철 형태의 이 유적은 경작지다 주변에 흙을 끌어모아 두둑을 쌓아 올리고 작물을 재배했다. 이것은 초기 밭 형태로 보인다. 고랑 이랑 그래서 고랑이 있고 이랑 부분을 보통 두드리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것처럼 비슷하게 옆에 흙을 이렇게 끌어모아가지고 이 위에서도 경작을 하고 그걸 심었다라는 뜻이죠. 그리고 이 사이에서도 뭔가 심었던 게 저희 과학 분석에서 다 나왔습니다. 이게 팥이었어요. 팥이 수천 도둑과 고랑을 일구는 밭 경작 방식이 청동기 시대에 이미 시작된 것이다. 지난 천구백구십구 년 진주 대평리 유적에서는 수만 평에 이르는 청동기 시대의 밭유적이 발굴됐다 천전리 밭 위적보다 더 발달한 형태다 밭에 남은 이랑의 흔적은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당시 밭을 일구던 사람들의 발자국도 선명하게 남아 있다. 그렇다면 청동기 시대 사람들은 어떤 작물을 재배했을까 대평리에서는 많은 종류의 탄화된 곡식 알갱이들이 출토됐는데 현재 확인된 곡식으로는 보리와 밀 조화 기장 수수 등 십여 가지가 넘는다 주로 겨울철에 우리가 저희들이 재배를 주로 해왔던 보리나 밀과 같은 그런 작물들이 있고 그리고 또 봄철에 파종을 해가지고 가을에 수확하는 조와 수수 같은 이런 작물 그리고 여름에 주로 채취하는 그 팥이나 녹두 같은 이런 탄화곡물들이 출토되는 걸로 봐서는 하나의 어떤 유적 내에서 다양한 시기를 가진 것들이 서로 이렇게 중복되게 이렇게 파장한 것이 아닌가 그렇게 본다면 그 당시의 기술 수준이나 지금 현대의 기술 수준은 크게 차이가 없는 것으로 이렇게 확인되고 있습니다. 농경문 청동기 손바닥만 한 크기의 이 청동기에는 당시 농경을 알 수 있는 그림이 새겨져 있다. 나비로 밭을 가는 남자와 곡식을 바구니에 담는 여자의 모습은 농경을 중시했음을 알게 한다 당시 농경을 발전시킨 것은 발달된 농기구였다. 특히 나무를 가공하는 석기의 등장으로 목재의 농기구가 다양하게 개발됐다 이런 개량된 농기구는 농업 생산의 혁신을 가져다 주었다. 그런 석기를 통한 목재 농구 소위 목재 굉이랄지 또는 목재 삽이랄지 또는 기타 이러한 목재 농구들이 이제 굉장히 발달했다는 뜻이고요 그러한 목재 농구가 실질적으로 지구조 경지 확장이랄지 또는 수로 개척이랄지 또는 논농사 관리랄지 이런 측면에 광범위하게 사용됐을 것이지 그래서 석기의 증가 자체가 그것 자체로서 끝나는 게 아니라 석기가 가져온 보이지 않는 지금은 우리가 알 수 없는 그런 목기 재료를 광범위하게 생산했을 것이다. 이렇게 추정이 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청동기 시대의 논농사는 이루어졌을까 부여 송국리에서 발굴된 다량의 탄화미는 송국리에서 논농사를 했음을 말해준다 송국리 토기에 찍힌 볍시자국도 당시 논농사의 직접적인 증거다 당시 논농사는 어떤 방식이었을까 춘천 천전리에서 청동기 시대 논의 형태와 규모를 알 수 있는 유적이 발굴됐다 이 흰선 가늘게 길게 표시된 부분은 물이 흘렀던 수로 같은 역할을 한다라고 생각하시면 되고 그 내부에 이제 네모처럼 된 이 내부가 아마 경작을 했던 논면에 해당되는 부분이라고 생각을 하시면 됩니다. 획기적인 논은 주변의 저습지보다 낮은 곳에 자리하고 있다. 주변에 저습지에서 물이 흘러내리게 수로를 만들었다. 초기 단계의 논이다. 취락이 가까운 구릉에서도 논 유적이 발견된다 천안 논산간 고속도로 공사 중 발견된 마전리 논유적 논의 크기도 커지고 비교적 반듯하게 구획돼 있다. 논에는 인공으로 수로를 파서 물을 댄 흔적이 있다. 논에 물을 대는 관계 시설도 따로 갖춰 놓았다. 수로를 따라 논으로 물이 흘러갈 수 있게 관계 시설을 갖춘 논 이 논 농사 기술은 농업 생산량을 획기적으로 끌어 올렸다. 이 논 농사의 출연이라고 하는 것은 이제 정착 생활 완벽한 정착 생활을 가능하게 했다는 데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는데요. 논을 활용함으로 인해 가지고 대규모 취락이 등장을 하게 되고 따라서 그런 대규모 취락이 등장을 하면서 결국은 거기에 어떤 그 지배적인 계층이라든지 아니면 그 하층민이라든지 그런 어떤 계층의 이제 발생이 생겨나게 되구요. 나아가서는 이제 그러한 것들이 이제 어떤 그 고대 국가로 그런 발전하는 어떤 밑거름이 된 것이 바로 이 논 농사의 출연 그다음에 이제 안정적인 식량 확보 그런 걸로 인해가지고 결국은 그 어떤 사회 경제 체제의 대폭적인 그 변화를 가져왔다고 이렇게 생각됩니다. 농기구와 경작 기술의 발달은 농업 생산량을 크게 늘렸고 사람들은 안정된 정착생활을 하게 됐다. 청동기 시대 송국리 사람들 역시 농경을 통해 마을의 부를 축적하고 있었다. 들판 가득 잘 여문 벼이삭들을 보느라면 봄 여름에 땀 흘림 노력이 아깝지 않은 것 같습니다. 지금 제 손에 들고 있는 것은 삼각형 돌칼인데요. 여기를 보면 구멍이 나 있죠. 여기다 이렇게 끈을 끼워서 둥그런 고리를 만들어 손목에 이렇게 걸거나 손가락에 쥐고 벼 이삭을 자릅니다. 생각보다 잘 베어지는데요. 청동기 시대는 청동으로 도구를 만들어 쓰던 시대를 말하지만 그때까지도 생활에 많이 쓰인 도구는 여전히 섞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청동기 시대의 석기는 신석기 시대 석기와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정교해지고 새로워졌습니다. 지금도 우리가 잘 쓰고 있는 낯이나 괭이의 원형은 청동기 시대에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농경기술의 발달로 생산물은 늘어났지만 한편으로 이 늘어난 생산물을 놓고 분쟁도 잦았다고 합니다. 이곳 국제관에는 청동기 시대 지구촌 마을 모습이 전시돼 있는데요. 농경으로 생산물이 늘어나게 되자 공통적으로 특징이 나타납니다. 바로 이 마을을 둘러싼 방어시설입니다. 오늘날 유럽인의 조상인 게르만족은 청동시대 이후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남부에서 유틀란트 반도 북부 독일 지역에 걸쳐서 살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여기 독일 헤센주의 한 유적을 보시면 환호와 목책으로 방어시설을 만들어 마을을 보호하고 있습니다. 이곳은 영국 돌센 마을인데요. 약간 높은 언덕 위에 자리한 이 마을은 환호를 세 겹이나 둘렀습니다. 당시 화살촉에 맞은 사람 뼈도 발굴돼 이곳에서 전쟁이 치열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중국은 다른 나라들에 비해 농경정착 생활이 일찍 시작됐는데요. 5천 년 전에 황화강 중류 강채 유적을 보시면 역시 환호가 보이죠. 아주 깊고 넓게 파서 물까지 채웠습니다. 정말 요새처럼 보이는데요. 전 세계적으로 이런 방어시설이 본격적인 농경정착 생활과 함께 등장하는데요. 수렵 채집 생활을 할 때는 먹을 것을 뺏겨도 다시 구하면 되지만 농경사회에서는 한 해 지은 농사를 빼앗기게 되면 굶어야 됩니다. 죽는 거나 마찬가지죠 그렇기 때문에 이때 사람들은 적의 침입으로부터 마을을 지키기 위해서 이렇게 애써 방어시설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농경은 청동기 시대를 그 이전과는 다른 세상으로 만들어 갑니다. 최근 마산 진동리에서는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청동기 시대의 대규모 무덤군이 발굴되고 있다. 현재까지 발굴된 무덤은 석관묘가 삼십여 기 고인돌은 사십여 개에 이른다 무덤의 크기도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특히 이곳 무덤들에서는 계층화된 청동기 사회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우선 눈에 띄는 것은 큰 규모로 묘역을 조성한 고인돌이다. 묘역은 길이가 이십오 미터 폭은 십일 점오 미터에 이른다 묘역 중앙의 덮개돌은 깨진 채 발견됐다 이렇게 양쪽에 거칠게 면이 남아 있습니다. 이런 부분들은 후대에 지금 의도적으로 다 인위적으로 깨뜨린 부분들입니다. 많이 훼손됐습니다. 현재 크기보다 한 서너 배는 컸을 것으로 예상이 됩니다. 네모 반듯하게 잘 다듬은 돌로 묘역을 두르고 세단에서 여덟 단까지 단을 쌓아 올린 것으로 보아 지배계층의 무덤으로 보인다. 이 무덤은 아주 정교하게 가공된 정교하게 가공된 돌을 긴 사각형 형태로 만든 다음에 아 최하단석에서부터 한 3단 내지 8단 정도를 쌓고 있습니다. 그리고 최하단석에서 일정 부분 들여 쌓기 하는 공법이 확인됩니다. 또 다른 곳에는 석관묘들이 무리지어 있다. 이들 석관묘는 크기도 작고 초라해서 계급이 낮은 사람들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여기에 만들어져 있는 무덤들은 저기 하천 쪽에 만들어져 있는 큰 묘역을 가진 지석묘들보다 규모도 작고 전체적인 형태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것들 세계는 어떤 서로 관련성을 가지고 만들어져 있지만 저기에 비해서 계급이 낮은 계층이 낮은 사람들의 무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곳은 지배자들의 무덤들이 무리지어 모여 있는 곳이다. 다양한 크기의 이 무덤들은 돌을 원형으로 쌓아 무덤을 보호하고 있다. 지배자들의 무덤에서도 위계의 차이는 나타난다 이 무덤군에서 가장 큰 이 무덤은 직경이 이십 미터에 이른다 무덤의 주인은 당시 최고의 힘을 가졌던 지배자로 보인다. 뿐만 아니라 이 무덤은 지금까지 발굴된 청동기 시대 무덤 중에서 가장 큰 것이다. 무덤은 커다란 돌을 쌓아 보호하고 있는데 이것은 봉토의 흙이 무너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이 돌은 이 묘역을 보호하기 위한 봉토에 덧붙인 돌들입니다. 인위적으로 식사 인위적으로 지금 현재 약 90cm가 남아 있습니다마는 인위적으로 쌓아 올렸습니다. 무덤 주위에는 사미터 넓이의 도랑이 둘러싸고 있다. 무덤을 보호하고 신성시하기 위해 만든 시설로 보인다. 이런 규모의 무덤을 축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은 많은 노동력을 동원할 수 있는 경제력과 정치력을 함께 갖춘 최고 권력자일 것이다. 이들 무덤은 하나의 어떤 특정한 개인을 위한 대규모의 무덤들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특정한 무덤들이 계속해서 연접되어서 큰 군집을 이룬 상태입니다. 그래서 이 당시에 사회는 아주 이제 불평등이 심화가 된 상태고 계급이 발생했던 상태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주 최상위층에서부터 하위층까지의 어떤 복잡 위계화가 진행되는 사회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청동기 시대가 계급사회라는 것은 주거지에서도 확인된다 삼천사백여 평의 비교적 좁은 면적에 170여 개의 주거지가 밀집하고 있는 용암리 유적 그러니까 직업의 문화가 이쪽에서 나눠지고 있는 것으로 볼 수가 있습니다. 이 마을 주거지 중에서 눈에 띄는 주거지가 있다. 8개의 대형 주거지가 바로 그것이다. 이들 대형 주거지의 크기는 서른 평에서 서른다섯 평에 이른다 다섯 평 안팎인 일반 주거지의 일곱 배가 넘는 규모다 이 주거지의 특징은 주거지 가쪽으로 의자들이 있었던 그러니까 동자주가 올라가고 그 위에 의자들이 이렇게 행방향으로 나란히 안치되어 있고 이쪽에도 안치돼 있습니다. 우두머리라고 그럴까요. 족장이라고 할까요. 그런 주거지가 아닐까 그렇게 추정을 하고 있고 그 큰 주거지에서 나타나는 노지라든가 그 밖의 또 저장 공간 그런 것들로 봐서는 상당히 세력이 있는 그런 주거지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대형 주거지에서는 소형 주거지에 비해 다량의 저장 시설과 유물들이 발굴된다 청동기 시대는 이렇게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로 계층이 나뉘고 빈부 격차가 벌어졌다. 계급사회가 시작된 것이다. 칠십오 년부터 시작돼 이십여 년에 걸쳐 발굴된 부여 송국리 유적 주거지를 비롯해 토기와 농기구 등 중요한 유적과 유물 발굴로 송국리는 한반도의 청동기 시대를 대표하는 유적으로 손꼽힌다 특히 석관묘에서 발굴된 유물들은 학계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비파형 청동검과 정교하게 갈아 만든 고급 석기류 빛깔 고운 옥제품들은 이 무덤이 지배자의 무덤임을 말해준다 특히 비파형 청동검은 지배자를 상징하는 유물이다. 이 청동검이 발굴됐다는 것은 곧 송국리의 최고 권력의 지배자가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비파형 청동검은 날 양 쪽에 돌기가 있는 자로와 손잡이를 조립한 조립식 검으로 모양이 고대 악기인 비파를 닮아 비파형 청동검이라고 부른다 송국리에서는 또 하나의 의미 있는 유물이 발굴됐다 바로 청동 도끼 거푸집이다. 거프집은 송국리에서 자체적으로 청동기를 제작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성공이 주거지 유적에서 이제 편한 제 거프 집 거프 집이 이 두 쪽으로 이렇게 저 합쳐서 그 주저오게 돼 있는데 그 한쪽 면에 한 절반 정도가 주소가 됐습니다. 그런데 이 거프 집이 부채골 도끼 모양을 갖고 있었는데요. 이 부채골 도끼라는 거는 청동검과 함께 도끼 이런 일련의 청동 유물이 우리 그 송구력 문화 시기부터 제작이 됐다는 것을 확실하게 말해주고 있는 증거가 아니냐 이렇게 생각 숭실대 박물관에는 청동기 시대에 사용된 다양한 형태의 거푸집이 전시돼 있다. 송공리 거푸집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청동기를 자체 제작했다는 중요한 증거가 되는 유물이다. 당시 사용된 청동기는 지배자의 권위와 위엄을 과시하는 물건이었다. 제사 의식에 사용된 의례용 청동기는 지배자가 몸에 차거나 종교적 행위를 할 때 사용했다. 당시 의례 행위는 지배자를 실망스러운 존재로 받아들이게 했다. 청동기 시대 사람들은 청동기를 소유함으로써 강력한 힘을 가질 수 있다고 믿었다. 점차적으로 석기를 쓰는 집단에서 에 신분이 이제 형성이 되고 계급이 이제 이루어지면서 어떤 신분의 상층과 하층이 구분이 되면서 그 상층부 소위 수장층과 같은 에 사람들이 이제 늘어나게 되고 그러한 청동기들은 바로 이러한 그 수장과 같은 사람들의 소유물로 이해를 하고 있습니다. 청동기는 강력한 지배자의 등장을 가져왔으며 지배자는 사회를 움직이는 힘이었다. 청동기는 부족장 같은 특권층이나 가질 수 있는 아주 귀한 물건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부족장은 청동기를 어떻게 사용했을까요. 먼저 부족장에 허리에 찬 청동 거물 볼까요. 청동검은 무기로도 쓰였지만 그 자체만으로도 지배자의 힘을 과시하는 상징물이었습니다. 허리에 단 방울은 이렇게 부족장이 움직일 때마다 소리를 냅니다. 당시 사람들은 방울의 신령스러운 소리가 귀신을 부른다고 믿었고 그런 소리를 내는 부족장을 신성한 존재로 받아들였던 거죠. 게다가 가슴에 단 청동거울은 햇볕을 그대로 반사하여 부족장이 움직일 때마다 눈부신 광채가 납니다. 청동거울은 부족장이 태양과 같은 존재임을 과시하는 상징물이었습니다. 청동기 시대 사회는 부족장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그런 사회였습니다. 고창 매산마을에 산기슭게 늘어서 있는 수많은 돌들 이것들은 모두 고인돌이다. 고인돌 행렬은 산 경사면을 따라 일점오 킬로미터 구간까지 이어져 있다. 그런데 이곳의 고인돌들을 보면 어느 하나 똑같은 모양새가 위에 올린 덮개돌과 받침돌의 모양과 크기에 따라 아주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어떤 고인돌은 어느 집 담장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기도 하다 이곳에는 왜 이렇게 고인돌이 많은 걸까 지성묘 사회라는 것은 그 집약농경 그러니까 농업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사회가 되기 때문에 사람이 살기 좋은 환경 그러니까 농사가 잘 되는 곳을 택해서 살아서 오늘날의 농경 비옥한 농경지대는 전라도 전라남북도 아닙니까 그래서 바로 고창이나 화순 쪽에를 포함하는 전라남북도에 그 지석묘가 유달리 많다는 것은 인구 밀도가 높았고 또 자연환경이 거기에 부응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고인돌은 많은 노동력을 동원할 수 있는 지배자의 무덤이다. 이런 거대한 고인도를 축조하는 데는 얼마의 인력이 투입돼야 할까 목포대학교의 최성락 교수 그는 고인돌 복원 실험을 통해 청동기 사회 규모를 추정하는 연구를 했다. 육점팔 톤 가량의 고인돌 덮개돌을 만들고 실제로 사람들을 동원했다. 칠십 명을 동원해야 덮개돌을 끌 수 있었다. 최 교수는 일 톤의 무게를 끄는 데는 열 명의 인력이 투입돼야 한다는 결론을 얻었다. 예를 들면 전남 지역에서도 사십 톤 내지 오십 톤의 그런 큰 상석들이 있기 때문에 그런 상석을 끌기 위해서는 상당한 사람들이 동원됐다고 봅니다. 4500명 정도 동원이 됐으니까 그런 단순한 생각을 해본다면 상당한 사회 조직이 있어야만이 4500명의 사람을 동원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죠. 그런 측면에서 보면 450톤의 고인돌 상석을 끌었다는 사회는 결코 시족 사회나 부족 사회가 아니다. 이렇게 볼 수도 있겠습니다. 고인돌과 청동기 사회의 발전 단계를 연구하는 유태용 박사 그는 강화도 고인돌 군을 통해 청동기 시대의 강화도 사회 규모를 분석했다. 강화도 고인돌 분포도 조사에서 주목할 만한 사실을 찾아냈다. 강화도에는 소 밀집 지역을 단위로 열 개의 고인돌 군이 존재하고 있다. 고인돌의 무게와 개수는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고인돌의 무게가 커질수록 고인돌의 개수는 줄어드는 것이다. 그 무게가 무거워질수록 주석 및 숫자가 현저하게 줄어드는 그런 형태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슨 뜻을 의미하느냐 하면 강화도에서 사이가 형성될 때 각기 마을마다 독립된 형태로 정치체가 형성되었는데 시대가 지남에 따라서 각기 독립된 마을 정치체가 하나의 커다란 단의 형태처럼 정치체가 하나로 통합되어 가는 그런 양상을 보여주는 게 아닌가 아마 그렇게 생각이 됩니다. 강화도 부근리 고인돌은 규모가 가장 크고 축조 상태도 가장 훌륭하다 북은리 고인돌은 강화도에서 가장 늦게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북군이 고인도를 세웠던 당시 사회는 어떤 규모였을까 덮개돌의 무게는 백구 톤 일톤을 끄는데 열 명이 필요하다면 동원된 인원은 천구십명이다. 가구당 인원 수를 다섯 명으로 계산하면 오천사백오십 명의 인구가 추산된다 강화도 지석묘 사회는 당시에는 적어도 5천 명에서 6천 명 사이 이 정도의 사회 규모가 아니었을까 이렇게 판단이 되고요 그래서 강화도의 부근이 지생류가 축제되었을 경우 사회는 엄청난 인구가 인구를 통제할 수 있는 그런 대족장 사회가 이미 완성된 단계가 아닌가 이렇게 판단이 됩니다. 전북 고창군 운곡리에는 큰 바위처럼 보이는 거대한 고인돌이 자리하고 있다. 운곡리 고인돌은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고인돌이다. 그렇다면 이 운곡리 고인돌을 세웠던 사회는 어떤 규모였을까 덮개돌의 무게 이백구십칠 톤 여기에 동원된 인원은 이천구백칠십 명이다 한 가구당 다섯 명으로 계산하면 인구는 만사천팔백오십 명이 된다. 규모로 보면 국가 단계에 진입을 했다고는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전라도 전라남북도 경기도 쪽에서 고인돌 사회가 해체되면서는 마한 사회로 바뀌어 나가고 그 다음에 경상남북도에서는 진안이라든가 변한 사회로 바뀌어 나가고 그래서 강원도 같은 경우는 옥자라든가 예매 이렇게 바뀌어 나가죠. 정복과 통합의 과정을 반복하면서 청동기 시대 고인돌 사회는 고대 국가가 탄생하는 밑거름이 된 것이다. 크기도 모양도 각양각색이죠. 한반도에는 현재 이런 다양한 형태의 고인돌이 총 사만여기나 분포하고 있다고 해요. 이는 전 세계 고인돌의 오십 퍼센트에 해당하는 숫자인데요. 고인돌이 하나 존재한다는 것은 제법 큰 규모의 공동사회가 존재하고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한반도에 고인돌이 많았다는 것은 그만큼 청동기 시대 한반도에는 수많은 부족 공동체가 존재했다는 것입니다. 청동기 시대에 존재했던 수많은 부족 공동체들은 부족장의 통솔 아래 주변에 약한 부족을 정복해 나갔습니다. 빈번하게 벌어졌던 부족들간의 전쟁 전쟁은 청동기 사회를 급격하게 변화시킵니다. 송국리 역시 전쟁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송국리의 운명은 어떻게 바뀔까요. 부여 송국리 마을 유적은 주변보다 높은 구릉에 자리 잡고 있다. 주위 평야와 강을 한눈에 내려다보는 위치다 밭이었던 이곳에서 송공리의 운명을 말해주는 중요한 유적과 유물이 발굴됐다 집자리 유적 대부분에서 화재의 흔적이 나타났다 불에 타서 지붕이 고스란히 내려앉은 집이 대부분이다. 당시 송국리에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송국리 유적을 발굴했던 김길식 교수 그는 집자리에 난 화재는 전쟁과 관련이 있다고 보고 있다. 축조되어 있던 방향 주거지고 보시다시피 여기에 화재를 입은 주거지 시커멓게 있던 목탄들이 많이 확인이 되고 이 송국리 유적 같은 경우에는 되게 이 방영 뒷자리의 칠십 퍼센트 이상이 화재로 불탄 흔적이 조사가 됐고 그 다음에 그 방영 주거지를 둘러싸고 있는 이 목책 시설마저도 거의 전소되다시피 이 화재를 입은 그런 흔적들이 조사가 됐습니다. 이거는 아까 이야기한 거와 마찬가지로 이 단순 방화나 이런 차원의 화재가 아니고 그때 당시에 어떤 이 집단 간의 갈등에 의한 전쟁의 상황을 유추해 볼 수 있는 그런 자료가 된다고 이야기 할 수 있겠습니다. 상대를 잘 봐요 마을 전체 김 교수는 갈등을 벌인 두 집단을 네모 집자리를 쓰는 집단과 원형 집자리를 쓰는 집단이라고 본다 주거지가 어떻게 배치되어 있는지 이런 것들을 이제 잘 봐야 이제 그런 것들을 이제 확인을 하죠. 두 집단은 목책 안과 밖에 자리하고 있었다. 목책 안에 발굴된 네모 집자리는 칠십 퍼센트 이상이 화재를 입었다. 목책 밖의 원형 집 자리는 화재를 입지 않았다. 김 교수는 이것을 원형 집 자리가 네모 집 자리를 공격한 근거로 본다. 네모 집자리 마을을 방어하던 목책이 함께 불탄 것도 원형 집자리가 공격한 근거다 또한 불타고 난 목책 리를 파괴하고 원형 집 자리가 들어선 사실도 두 집단 간에 전쟁이 있었음을 뒷받침하는 증거라는 것이다. 목책으로 둘러싸인 그 방영집 자리로 구성된 마을 이 마을을 목책 시설을 포함해서 운영 집자리 주거가 이렇게 곳곳에서 파괴하는 그런 흔적이 전반적으로 다 조사가 됐습니다. 이건 곧 운영집 자리가 기존의 방향 집 자리로 구성되어 있던 마을을 이렇게 침범하는 그런 과정이라고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거죠. 전쟁은 송국리의 주인을 바꿔 놓았다. 전쟁에서 패한 네모난 집자리는 사라지고 원형 집자리가 송국리 언덕을 지배하게 된 것이다. 한바탕 전쟁의 피바람이 몰아치고 난 이후 송공리는 이렇게 다른 마을로 변모했습니다. 청동기 시대 농경기술의 혁신은 사람들에게 풍요로움을 선물했습니다만 가진 자와 못가진 자 간에 차별이 생겼고 그로 인해서 뺏고 빼앗기는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더 많이 가지기 위해서 혹은 가진 것을 뺏기지 않기 위해서 청동기 시대 사람들은 잦은 전쟁을 치러야만 했습니다. 더 큰 힘을 가진 부족들은 더 좋고 강력한 무기로 힘 없는 부족을 정복하고 통합을 했습니다. 이런 전쟁이 반복되면서 청동기 마을들은 더 크고 더 강성한 마을로 성장을 했습니다. 전쟁 그 자체는 비극이었지만 청동기 시대의 전쟁은 고대 국가를 탄생시킨 또 다른 힘이었습니다. 송국리는 삼천 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역동적이었던 청동기 그 시대를 우리에게 생생하게 전하고 있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