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 처음의 물음으로 돌아가서, 시는 왜 아름 다울까요? 여기에서 '왜'가 이유를 묻는 의문사라면, 그 의문에 대한 하이데거의 최종적인 답은 '이유가 없다'일 겁니다. 시가 아름다운 이유는 없습니다.
아름다움을 존재의 빛으로 이해하는 하이데거에게, 존재를 찬연히 드러내는 시가 아름다운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여러 가지 이유들을 열거하고 생각해 볼 수 있지만, 결국 이 물음을 완벽하게 해소할 수 있는 ‘이유’는 없습니다. 그래도 굳이 말해야 한다면, '아름다운 시가 존재한다’는 것이 그 물음에 대한 정직한 답변일 겁니다.
사실 이 경우 '왜'는 이유를 묻는 의문사라기보다 는 처음 아름다운 시적 존재에 압도된 경이감의 표 현, 즉 '감탄사'로 시작된 것입니다. 이런 ‘왜’는 생 각에 생각을 이어가도 사라지지 않고, 이내 첫 출 발점으로 되돌아옵니다. 그래서 물음을 멈춰야한 다면, 바로 물음이 시작된 그곳에서 멈출 수밖에 없습니다. 물음이 찾아낸 온갖 이유들은 종국에 시적 존재 앞에서 명멸(明滅)합니다. 요컨대 존재 는 시가 아름다운 모든 이유들의 근거이자 탈근거 입니다. '시가 아름다운 이유는 그것이 아름답기 때문입니 다.' 이것은 이유를 들어 말하는 진술이 아니라 사 실상 '동어반복(tautology)'이죠. 동어반복은 인 식의 확장을 가져오지 못합니다. 같은 말만 반복 해서 되뇌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죠. 그렇다면 이런 동어반복이 무의미하기만 한 것일까요? 항 상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같은 말을 반복 하는 '사이'에, 시와 아름다움에 사유해 볼 수 있기 때문이죠. 사태를 장악할 수 있는 '인식'은 아니지 만, 시적 존재의 다양성에 대한 '이해'는 얻을 수 있 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해는 헤겔식의 변증법적 지식모델과는 다른 앎입니다. 헤겔식의 지식모델 이 기지(知)를 보존·축적하고 부정을 통해 확장· 공고하게 하는 것이라면, 이런 이해는 모든 인식 의 탈근거, 즉 기존에 축적된 인식체계를 무너트 릴 수 있는 미지의 심연을 전제하기 때문입니다. 이때 부딪히는 동어반복은 무력한 항진(恒眞) 명 제가 아니라 모든 인식을 무력하게 만드는 '강력 한' 침묵의 소리이며, 이 침묵은 무능함으로 그치 는 것이 아니라 기지를 무능하게 함으로써 미지를 수용할 수 있는 유능한 침묵입니다. 결국 동어반 복은 이런 (존재의) 침묵의 첫 외침일 테죠.
마지막으로 지금까지의 논의를 압축적으로 표현 한 시 한편을 감상하기로 하겠습니다. 독일의 신 비주의 시인 앙겔루스 실레지우스(Angelus Silesius, 본명: Johann Scheffler, 1624~1677)의 시입니다.
앙겔루스 실레지우스의 시
장미가 존재하는 데엔 아무런 이유가 없다네. 장미가 피어나는 것은 그것이 피어나기 때문일 뿐, 장미는 자기 자신에게도 주목하지 않으며, 누가 자기를 봐주는지 궁금해 하지도 않는다네.
아름다운 장미가 피는 것에 이유가 없듯이, 아름 다운 시가 존재하는 데에는 이유가 없습니다. 지 금까지의 논의에 따른다면, 분명히 그렇습니다.
그런데 만일 이 시대에 아름다운 시가 더 이상 존 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요? 우리 시대의 사람들이 시가 아름다운 이유를 강박적으로 묻는 진정한 까닭은 아마도 아름다운 시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다는 공포 때문일 것입 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