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족이 진출하여 세운 나라, '불가리아'
강단 사학계는 부여 역사를 외면하지만, 부여사는 단재 신채호가 한국 민족을 부여족이라고 부를 정도로 한민족사의 골간을 이룬다.
몇 안 되는 부여사 연구가 중에 신용하 교수는, 부여가 최소한 BCE 5세기부터 CE5세기까지 약 천여 년 동안 만 주일대에 존재하였으며 CE세기 전반까지 동북아의 최선진국이었다고 말한다. CE 5세기라면 <환단고기>가 전 하는, 북부여에서 분파된 마지막 부여인 연나부부여(서부여)가 멸망한 때(494)와 일치한다.
신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4세기 말경 부여족의 일파가 중앙아시아 카스피해와 흑해 사이에 위치한 '캅카스Cau
casus' 지방으로 이주하였고, 그 후 5~7세기 초까지 돈강 유역과 북캅카스 지역으로 계속 이주하였다.
7세기의 서양사에서부터 불가Bulghar족의 역사가 나오는데, 이 불가족이 곧 부여족이다. '불가' 란 '부여(불)의 가加' 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635년 불가족은 족장 쿠브라트Kubrat의 지도력 아래 '대大 불가리아Bulgaria'를 건국하였다. 하지만 몇 년 후 그가 사망하였고(642), 그의 다섯 아들은 격심한 권력싸움으로 불가리아를 해체시켰다. 그 중 세 아들이 이끈 불가족은 결국 주변 민족에 복속되고 말았지만, 둘째와 셋째 아들은 독립국가를 세웠다.
둘째 아들 코트라그Kotrag가 세운 나라, '고추불가Kotchou-Bulghar국'은 14세기까지 번성하였고, 현재는 타타르 자치공화국(1920년 소비에트연방의 자치 공화국으로 성립됨)으로 존재한다. 타타르인의 언어 구조는 한국어와 동일하고, 생김새도 동양인의 모습이다.
셋째 아들 아스파르흐Asparukh가 이끈 불가족은 오늘날의 발칸 반도로 남하하였다. 당시 비잔틴 제국의 로마군 장교의 기록에 의하면, 불가족은 로마군과의 결전을 앞두고 하늘을 향해 조상신 단군Tangun에게 승전을
기원하는 제천의식을 행하였다. 이것은 환단 시대 이래로 동방 한민족이 일관되게 거행해 오던 천제 풍속을 서방으로 이주한 부여족도 그대로 따랐음을 보여준다.
이 불가족은 마침내 로마군을 물리치고 불가리아 제1제국(681~1018)을 건국하였다. 불가족은 귀족 계층이 되어 보야Boyar(부여의 유사 발음인 부유의 모음조화에 따른 변음)라 불렸고 슬라브족을 농민으로 삼아 다스렸다.
황제 크룸Krum에 이르러 주변의 로마군을 대부분 추방하고 수도를 옮겨 소비(또는 사비, 지금의 소피아)라 불렀다. 황제는 소비의 산에 올라 단군에게 제사를 올리고, 그 산 이름을 발칸산으로 정하였다.
신 교수는 '발칸산'을 '밝안산', '밝산', '백산' 등의 우리말 지명과 동일한 것으로 보며, 한민족은 고대로부터 백산(밝은 산)에 올라 제천 의식을 행하였다고 말한다. 지금도 크룸 황제의 제천 유적이 일부 남아 있다는 이 발칸산에서 발칸 반도라는 이름이 유래하였다.
크룸 황제가 병사한(814) 후 불가리아는 국력이 점점 약화되었다. 12세기에 불가리아 제2제국(1186~1330)을 세웠지만 그 지배층은 제1제국 때와는 많이 다른 모습을 갖게 되었다. 소수 불가족과 다수 슬라브족 사이의 혼혈로 슬라브족의 생김새를 많이 띠게 되었다.
그렇지만 발칸 산, 발칸 반도, 소비 등의 지명 속에 부여의 자취가 남아 있고, 불가리아 말의 문법 구조와 풍습(정월 달집놀이, 굿거리 등)에서도 한민족의 체취를 느낄 수 있다.
그리고 불가리아인은 백인 세계에서 유일하게 갓난 아이의 엉덩이 반점, 일명 몽고반점이 나오는 민족이다. 이 모든 것은, '불가리아는 동방에서 온 부여족이 세운 국가'라는 신 교수의 주장처럼, 불가리아의 원 조상이 바로 부여족이었음을 가리키고 있다./<환단고기, 안경전 역주, 상생출판, 140~141쪽>
@서울사나이 키르키스가 월지가 쇠퇴한후 현 중앙아에 자리를 잡았다 하셨져...?
가야(가락국)의 역사는...가야는 곧 목지요 목지국은 곧 월지란 사서가 있는 고로...
최소한 원지는 중앙아와 신장성 티벳을 더 동쪽으로 넘지 못하는 역사적 위치이니...
최초 가야와 관련있는 삼한의 원 위치는...티벳부터 시작해...현 중원으로 옮겨진 지명이라 봅니다.
삼한의 풍속은...티벳과 가장 유사하고여...
그럼, 상대적 북방 상국인 고구려(하늘)은...현 신장성과 감숙성정도에 중심이 있었단 얘기로 전 해석해 봅니다.
@서울사나이 조선 백두산의 기록을 보면...
늘상 그 북으로 끝도없는 사막이 나옵니다...최소한 현 청해성의 기련산을 자꾸 암시하고...
더 나가면 천산의 동쪽 줄기인 박격달봉을 가리킨다 보입니다.
조선사서엔...백두산이 서경(평양?)의 서쪽에 있단 기록도 나옵니다.
한반도론 절대 설명할 수 없는 구도입니다.
@서울사나이 당분간 역사에 빠지지 좀 않고 싶은데... 자꾸 뗑기니 팔자인지 싶습니다...ㅡ. .ㅡ
@서울사나이 훈(韓)은 흉노의 당대 수장였던 고구려의 통치를 받았고...
당연 훈누의 수장인 고구려가 서역을 정벌했으니...흉노가 아틸라의 주력인데...
아틸라는 흉노가 아닌 훈(韓?)이라 함은...아틸라(박혁거세?) 자체도...고구려에 지배받던 삼한의 왕으로...
먼 서역으로 유배형&용병을 당했던 것을...그리곤 순식간에 다시 호송&제거당한 것을,,,
이를 모르는 서양사는...아틸라의 훈(韓)이 흉노(고구려가 대장)라 착각하고...
아틸라의 세력이 갑자기 사라진걸 뭔 미스테리로 남겨둔거라 봅니다.
전체적인 저의 주장은 이렇습니다.
백인들의 역사는 아주 정교하고 과학적이라 일면,신빙성이 있지만...
그도 백인우월주의로 늘상 동양의 통치를 받던 역사나 그들의 원류를 감추고 싶은 자존심이 내재하기에...
자꾸 연구가 알타이를 못 넘어온다.
이러다 또 날세겠으니,,,담에 다시 하겠습니다.
이늠의 역사얘기 하다 보면... 생활이 자꾸 망가집니다.
@서울사나이 차라리 그들에 의해 대륙조선사가 더 구체적으로 밝혀지겠군여...
외로가든 빽으로 가든...서울만 가면 되니 다행입니다.
유라시아 흉노라인 철도와 유라시아 흉노역사가 밝히는 길이 동시에 개통되려나 봅니다.
마지막으로...북해(北海)가 천해(天海)..란건 사서들의 일관됀 얘기고
중세 고지도들 전체에도 북해와 천해는 거의 전부 알알해와 발하쉬호 중가르분지 보해위치로 나옵니다.
중세까지도 지역이 엄청 넓은 바다로 나오며...그 흔적은 이 지역들에 아직도 널널한 염호가 증명한다 봅니다.
고비사막도 역시 한해(翰海)라 표기해서... 양키들 지도에도 파란 물이나 누런물로 표기합니다.
역사학자들은 이를 무책임하게 해(海)는 넓은 땅을 이르지 바다가 아니라 하고...
과학자들은...몽골과 중앙아 사막들의 소금천지를 몇백만년 전에 대륙이 바다였을 때 어쩌구 나불대나...
역시, 무책임한 소리라 봅니다.
지속적으로 줄어든겁니다.
궐한님 천산을 백두산으로 보는 견해는 아주 탁월합니다. 그런데 한민족은 항상 정착하는 곳의 신성한 산은 백두산이라 이름을 붙였다는 것도 생각해야 합니다. 제사 장소로서 소도도 마을이 있으면 설치했습니다.
맞습니다.
최초의 불함은 바이칼 서부...외몽골 서북의 아르한가이 불칸삼맥같은데...
조선사 고대의 백두산은 천산의 동쪽줄기 박격달산..즉 복그드올(위대한 산)...인데...
여긴 이미 당나라이후 거란족 때 부터 빼앗겨...근세조선은...그 상대적 동남줄기인 현 기련삼맥을 ...
찬나라 오랑케와 조선의 서북을 나누는 백두산으로 재 배정했다 보이고...
이기도 빼앗끼면 화산의 서쪽지맥인 태백산을 백두산으로...
여길 다시 태평천국의 난 이후 빼앗끼곤...현재의 동북삼성 고지도상 동금산(東金山=동부알타이산)으로 옮기고...
이도 빼앗끼곤 현 한반도의 백두산을 다시 조선의 백두산으로 설정하는 이동이 있었다 보입니다.
@궐한 님의 사견이니 반박할 필요성이 없습니다만....님의 견해를 따라가면... 우리 조상들은... 매번... 싸울때마다 땅을 빼앗기고... 종국에는 한반도로 숨어든 찌질한 민족이 됩니다... 이런 사관이 과연 옳은 사관인가요? 이병도의 식민사관보다 우월하다 자랑할 수 있는 사관인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백두산은 흰머리산으로... 만년설이 있어야 가능한 이름이고... 천산은 만년설 여부와 상관없이 생민들이 그리 생각하면 천산이 됩니다... 그런 의미로 한반도의 천산은... 개성의 송악산, 한성의 북악산, 원주의 치악산, 안양의 관악산, 전주의 모악산, 양양의 설악산, 제천의 월악산, 고성의 풍악산, 흥양의 별악산 등으로... 그 아래에는 크고작은 나라들이 존재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한반도 것은 고려 오악의 동서남북 기본조차도 안 맞습니다.
@궐한 동금산과 지금 백두산의 위치는 어떤 관계에 있습니까? 단의 실제 주인공 권선생님이 백두산 전의 백두산이 그 근처에 있다고 했습니다. 고려때 서경이 서안이라 하는데 견해는 어떠신가요. 왕건묘가 사천에 있는 것과 트루판이 高倉국이고 창은 고구려 때는 구르(굴)라 읽었습니다. 그 주위 무덤의 벽화가 고구려 벽화와 기원이 같고 안서도호부를 고선지 부자가 맡고 있었다는 사실은 그들이 당나라 함락당하기 전에 그곳의 토호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단동의 안동도호부와 상대적 개념으로 고구려 영토를 증명해주는 사실입니다. 고견을 듵고 싶습니다.
@궐한 노래 가사 중에... 찔레꽃 붉게 피는 남쪽나라 내고향... 이런 노래가 있습니다... 여기서... 찔레꽃은 흰꽃이지 붉은 꽃이 아닙니다. 붉은 찔레꽃은 없다는 얘기입니다... 이는 찔레꽃을 표현한 가사가 잘못된 것이지 찔레꽃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데 가사내용에 함몰되어 붉은색이 아니니 찔레꽃이 아니다고 주장하는 것과... 오악의 위치(방향)가 사서의 내용과 일치하지 않으니 그것이 아니다는 님의 주장이 어떻게 다른가요?
인종분류로 백인을 코게시안(Caucasian)이라 합니다. 백인이 아닌 사람들이 코카서스 지방에서 코가 선(코카서안) 백인들이 사는 것을 보고 부른 이름일 가능성이 가장 큽니다. 코카서스(캅차카) 지방에서 가장 높은 산이 엘부리스 산(Elburs(5,642m)유럽에서 가장 높은 산, 알프스보다 높다)일 때 한민족이 정착하기 좋은 신성한 땅입니다. 서양 말에서 엘은 한국말 알과 기원이 같고 하나와 같은 뜻이 있고 접미사 스는 's와 같은 소유격이나 복수를 뜻하는 접미사입니다. 결국 불산입니다. 부여가 백인들의 땅을 뺐고 정착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한민족의 역사는 너무나 왜곡되서 역사교육이 전혀 없는 완전 백지상태에서
형사가 범죄 현장을 조그만 단서라도 버리지 않고 수사 하듯이 해야 하는데 역사학 석사 박사는 자기도 모르게 세뇌가 되어 증거가 나와도 경직된 뇌로 가능성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 것이 안타깝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