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생명 그리고 소명
행22.12-29
시 작 기 도
묵상나눔과 회사생활 그리고 이전부터 괴로운 마음으로 발견한 것이 있습니다. 나에게 잘못한 사람이 잘 되는 것이 불편하고 그의 죄악이 드러나고 그 가운데서 멸망은 아니더라도 사라져 버리기를 바라는 내 육신의 소욕을 고백합니다. 그것은 정확히 사탄의 바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내어 버립니다. 그리고 좋은 마음과 좋은 행실은 나에게 있지 않고 나에게서 나오지 않습니다. 오직 매일 매 순간 주님으로부터 받아서 나오게 됨을 인정합니다. 오 주여 주님의 길을 내게 가르치소서. 주님의 생명을 부어주소서. 주님을 내가 경외하고 바라봅니다.
본 문 내 용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예수님을 만난 일에 이어서) “거기에 아나니아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율법을 따르고 경건하여 주위 사람들이 칭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나에게, ”형제 사울이여, 눈을 뜨시오“ 하니 시역을 회복하였습니다. 그가 말하길,” 우리 조상의 하나님께서 당신을 택하셔서, 그 분의 뜻을 알게 하시고, 그 의로우신 분을 보게 하시고, 그 분의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게 하셨습니다. 당신은 그 분을 위하여 모든 사람에게 당신이 보고 들은 것을 증언하는 증인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기다릴 것 없이 일어나 주님의 이름을 불러 침례를 받아 죄 씻음을 받으십시오.“
그 이후 저는 예루살렘에서 기도하던 중 황홀경에 빠져 주님이 내게 말씀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서둘러서 예루살렘을 떠나라. 예루살렘 사람들이 나에 관한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나는, “주님, 내가 주님을 믿는 사람들을 가는 곳마다 회당에서 잡아 고문하고 투옥시켰던 것을 사람들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증언하는 스데반이 피를 흘리고 죽을 때에 그 현장에서 함께 찬동하면서 그들의 겉옷을 지켰습니다.” 그 때에 주님이, “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사람들에게로 보내겠다” 하셨습니다.“
군중들이 여기까지 듣자, “이 자를 이 땅에서 없애 버려라. 살려 두면 안된다”하고 소리를 지르며 옷을 벗어던지고 먼지를 공중에 날렸습니다. 그 때 천부장이 바울을 병영 안으로 끌어 들여서, 유대 사람이 이렇게 소리 지르는 이유를 알아내려고 채찍질을 명하자, 바울이 누운 상태에서 옆에 있던 백부장에게, “ 로마 시민을 유죄판결도 없이 채찍질 하려 합니까?”하자 백부장이 천부장에게 바울이 로마시민인 것을 알렸습니다. 그는 바울에게, “당신은 로마시민입니까? 나는 많은 돈을 주고 시민권을 땄습니다” 했고 바울은 자기는 나면서부터 로마시민임을 밝혔습니다. 천부장은 신문을 그치고 그가 로마시민이고 그를 결박한 일을 두려워했습니다.
주 해
에스겔(겔1.26-28에서)처럼 ‘인자’의 영광이 비치어 엎드러지고, 사도요한은 강렬하게 비치는 예수님의 얼굴을 보고 (계1.16-17) 발 앞에 엎어져 죽은 사람처럼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사야는 성전에서 자기를 부르시는 주님을 보고(사6.5) ‘재앙이다 멸망하게 되겠구나’하였습니다. 모두 다 그들을 증인으로 부르시는 장면입니다. 바울도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 그를 증인으로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는 동일한 빛을 경험을 하면서 자기 죄로 인해 멸망하여 죽은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죽은 사람처럼 엎드린 바울에게 주님이 하신 말씀은 “일어나라, 가라“입니다. 그리고 아니니아의 도움으로 그를 다시 보게 하신 뒤에 죄를 씻어주시고 소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심판과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신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나셔서 바울을 살리시고 바울에게 ‘생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 생명으로 그는 일어나 가서 다시 보게 되고 죄씻음의 침례를 받았습니다. 에스겔, 이사야, 사도요한도 동일합니다. 주님 앞에 설 때 죄로 인해 심판받아 죽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죽음에서 다시 살리시는 생명을 받아, ‘일어나’ 증인으로서의 소명을 받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도 마찬 가지입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 설 때 죄로 인해 심판 받아 죽는 것처럼, 삶에서 그런 경험을 하게 됩니다. 우리의 죄 때문에 심판을 받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주님은 부활의 생명을 주시고 일어날 힘을 얻게 하시고 자기에게 주어진 그 ‘길’을 걸어가게 하십니다.
바울이 자기의 소명에 관해 이야기할 때, 특히 아나니아가 바울이 그 ‘의로우신 분’운 보았다고 했음을 들었을 때(이사야가 메시야를 부르는 표현 사24.16),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바울의 증인의 증거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들었을 때, 유대인들은 이사야6장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이사야에게 소명을 주면서 이스라엘 백성이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할 것이다’(사6.9-10)라는 예언이 바로 자기들에 해당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사야6장의 성취와 함께 그 예언의 본 뜻이 밝혀집니다. 그것은 그들의 배척을 통해서 온 땅과 모든 민족에게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은혜의 역사, 하나님 나라의 길을 여시기 위함입니다!!!
이것은 선지자들을 박해하고 죽이는 이스라엘을 예언하시는 것, 열매없는 무화과나무처럼 하나님께 자신의 소명을 다하지 않는 이스라엘, 포도원 주인에게서 포도원을 탈취하고자 아들까지 죽이는 소작인들처럼 하나님 나라의 책무를 저버리고 하나님 나라를 주님으로부터 빼앗으려하는 이스라엘을 향한 예언의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이스라엘의 이런 죄악과 그 예언의 본 뜻은, 바로 그들의 배척을 통해서 땅 끝 모든 민족에게까지 하나님 나라를 열어 주시려는 것입니다. 그것이 선지자들과 예수님처럼 박해를 당하는 사도바울의 소명을 통해 여기 사도행전 22장에서 선포되는 것입니다!! 아멘.
이것을 선포하자 그들이 분개하는 것입니다. 마귀가 가장 듣기 싫은 지점이기 때문에 그들을 격동시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기 죄로 인해 심판 받아 죽는 자임을 직면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생명을 받아 다시 살아나서 그 생명으로 일어나서, 가야합니다. 모든 민족에게 하나님 나라를 열어 주신 그 “길”을 가야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가신 길이고 우리의 길입니다.
나 의 묵 상
에스겔 이사야 사도요한 그리고 바울처럼, 주님의 영광의 빛 앞에 엎드려져서 자기의 죄악에 대해 직면하고 죽는 과정을 거치고 있습니다. 더 밝게 비추어주시기만을 바랍니다. 경건한 예언자들이 자기를 보고 재앙이다, 멸망이다. 나는 죽었다하며 얼굴을 땅에 묻고 엎어진 것처럼 내 죄악을 직시하고 있지 않음은 분명합니다. 상대적 의로움으로 위선을 품고 있음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심판과 죽음을 지나 무죄함을 입증하신 주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씻어주시고 그 분 안으로 받아주시사 함께 심판받고 죽고 그분 안에서 다시 살게 하셨습니다. 영원한 심판과 죽음은 이제 없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십자가의 영광의 빛, 부활의 영광의 광채입니다. 그 빛이 내게도 환하게 비치어서 내가 주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내게 생명을 주시사 소명을 길을 가게 하십니다. 나는 주님 안에서 그 길을 갑니다. 그리고 계속 더 강한 빛을 비추어 주십니다. 비추소서.
햇빛보다 강한 빛나는 주님의 영광의 빛 아래 거하는 것이 기쁨입니다.
기 도
아버지, 빛을 비추어 주소서. 모든 어둠과 죄악을 물러가는 빛으로 내 영혼을 비추소서. 그 빛과 생명으로 일어나 걸어가게 하소서. 주님이 주신 그 ‘길’을 걷게 하소서.
모든 민족에게 하나님 나라가 열려 있으니, 주여 보내소서. 그들에게 빛을 반사할 주님의 자녀들을 보내소서. 주님의 얼굴 빛을 모든 민족에게 비추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