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낸 뜬금없는 소리처럼 들리시겠지만.
요즘. 진화 심리학. 신경 생리학 등의 분야에서 가장 fancy한 주제 中 하나가 이겁니다.
신身의 고통과 심心의 고통은 같은 기제로 인해 조절된다.
저도 논문들의 초록(abstract)을 보면서. 이게 왠 개소린가 싶었는데.
내용을 쭉 탐독해 보니. 논리라던지. 실험적 근거가 꽤 그럴싸 하더라고요.
그래서. 오늘은 이겁니다.
과연. 아스피린이 내 마음의 상처에도 효과가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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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의 내용과는 상관없이. 참 아름다우십니다. 님아. 아아 -
매우 광범위한 문화권들에서.
"아프다" 내지는 "상처를 입다"란 언어적 표현은. 신체와 마음 둘 다에 쓰이고 있다고 합니다.
다모에서.
아프냐? 나도 아프다.
요 대사가. 니 거기 다친 데 쎄리냐?? 나도 쎄려 죽겠써.
이 뜻은 아니잖아요.
어찌됐든. 많은 언어들이. 공통적으로.
아프다란 단어를. 심心과 신身에 혼용해서 쓰고 있다는 사실.
이와 관련하여.
벌써 십수년전부터. 진화 심리학자들이 "마음의 고통"에 대해 자신들만의 이론을 정립해 오기 시작했더랬죠.
그들에 의하면. "고통" 역시. 개체의 생존에 기능적인 역할을 수행하게 됩니다.
즉. 상황이 좋지 않음을 경고함으로써. 상황을 개선시키기 위한 일종의 알람 역할을 해 준단 거지요.
(고통이 없다면. 병이나 상처 등의 문제를 인식하지 못한 채 방치하여 죽음에 이르기 일쑤겠죠.)
그리고. "마음의 고통" 역시 "신체의 고통"과 마찬가지의 역할을 수행한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입니다.
마음이 아프지 않다면. 뭐가 잘못되고 있는 지 알 수 없겠고. 그렇담.
분명 잘못된 것이 있을 터임에도. 그걸 시정해서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가 없겠죠.
이를테면.
배척(소위 말하는 왕따)을 당해서. 무리로부터 떨어지게 된 사바나인을 떠올려 봅시다.
아마. 배척과 연합된 "마음의 상처 기제"가 제대로 발달되지 못 했더라면.
즉. 따를 당해도 아무 느낌이 없다면.
지금 이 상황이 나에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분간이 잘 가지 않겠죠.
무리에서 이탈된 상황에 대해 별다른 느낌이 없기 때문에. 그냥저냥 그 "이탈된" 상태를 계속 유지한다면.
간단합니다. "사냥"당하기 쉽겠죠. 외따로 떨어져 있는 개체만큼. 포식자에게 손쉬운 타겟은 없을 테니까요.
정서(e-"motion")의 기능성은. 후속 행동을 이끈다는 것에 있습니다.
마음이 아프면. 뭔갈 하게 되죠.
이별의 아픔에 몸서치리치는 사람은.
전 여친에게 자꾸 전화를 건다거나. 다른 여자를 찾는다거나.
외로움을 느끼게 되면.
그 감정을 느끼지 않기 위해. 적잖은 노력과 시도들을 행하죠.
친구들을 불러 낸다거나. 괜히. 주변 지인들에게 전화를 한다거나. 기타 등등. 등등등.
조증(bipolar disorder).
마음이 depressed되면. 마음의 고통이 알람 역할을 함으로써.
무언가 행동을 촉발하게끔 합니다.
의기 소침한 느낌. 다친 마음을 떨쳐 내기 위해.
일부러 안 그런 척. 일부러 신난 척. 일부러 재미난 척.
본인의 행동 각성 수준을 높이는 거죠.
그러다가. 그런 것들이 내가 겪은 마음의 상처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깨닫게 되면.
다시 depressed됩니다.
그럼. 또 마음의 고통이 알람 역할을 함으로써... (이하 중략. 기타 등등. 등등등.)
신체든 마음이든 다를 바 없이. 고통이란 것의 역할이.
현재 상황이 좋지 않다는 것에 대한 고지(내지는 경고) 여하에 있는 것이라면.
그 고통을 조절하는 기제 역시." 동등한 신경 수준"에서 진화되었다고 추측하는 것 또한 무리가 아닐 수 있겠죠.
즉. 심신의 고통이 같은 기제에 의해 조절되는 것이 아닐까 라는 가정인 거고.
그렇다면. 신체의 고통을 경감시켜 주는 무언가가. 마음의 고통 역시 경감시켜 줄 수 있지 않을까?
이를테면. "아스피린" 같은 것들 말입니다.
아세트아미노펜(해열.진통제의 성분)이 마음의 고통을 경감시킬 수 있을까?
라는 Baumeister 등의 2010년 논문에서.
피험자들에게 한달동안 day by day로 아세트아미노펜을 복용케 하면서.
매일마다 마음의 고통에 대한 diary를 작성케 했는데.
아세트아미노펜을 복용치 않은 대조 집단군에 비해.
이들 실험 집단군이 '마음의 고통을 덜 느꼈다'라는 통계치가 나왔더랬습니다.
또한. 따를 당하면 아플까?
라는 Eisenberger 등의 2003년 논문에서는.
피험자들을 실험 상. 일부러 따 시키고 나서. FMRI를 촬영해 봤더니.
신체에 고통이 가해질 때 활성화되는 두뇌 영역인 ACC와 RVPFC 등에 동시에 빨간불이 들어 왔습니다.
위 두 실험 모두. 마음의 고통과 신체적 고통이 같은 기제에 의해 운용되고 있음을 지지하고 있다 볼 수 있는 거지요.
아스피린의 위엄??? (만병통치약이 왜케 싼 거야 근데????)
그렇다면. 이 가설이 맞다면. 그 역 또한 성립 가능할 겁니다. (vice versa)
즉. 마음의 고통을 경감시켜 주는 무언가가. 신체의 고통 역시 경감시켜 줄 수 있지 않을까??
이를테면.
가족. 연인. 배우자. 친구. 지인 등으로부터의 사회적 지지(social support).
사회적 지지는 외부로부터의 위협에 대항케 하는 매우 중요한 내적 자원으로써.
마음이 다쳤을 때. 상처입은 마음을 달래는 데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심신에 대한 고통의 기제가 같은 시스템 下에서 주관되고 있다면.
당연히. 사회적 지지라는 이 내적 소스가 풍부한 개인이 더. 신체적 손상에도 저항력이 강하겠지요.
또는. 종교.
아주 빈번히. 종교의 힘으로 신체의 고통을 극복했다는. 또는 육체적 질병을 치유했다는 간증을 들을 때가 있는데.
이 역시 종교적 판타지에 기반한 현상이 아니라. 충분히 과학적 메카니즘의 발로일 수 있단 생각이 듭니다.
종교(神)의 파워란. 그 사회적 지지력이 일반 인간들로부터의 그것과는 차원이 다를 텐데.
그 정도의 심적 치유력이라면. 이른바 "기적"이라고 불리우는 현상들도 어느정도까진 설명이 가능하지 않을까.
종교적 카타르시스가 일시적으로나마 고통의 둔감화를 이끈다는 문헌도 있고.
판타지 소설을 보면. 종교적 축복으로 인해 성기사들의 육체가 한층 강인해지는 스킬들도 있잖아요?? (ㅋㅋㅋ)
진화론적으로 매우 타당스런 기술인 성직자들의 힐링 파워.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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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이런 연구도 있더라 정도의 마인드로 읽어 보신다면.
충분히 재미있을 수 있을 것 같아 소개드려 보았습니다.
마음이 아플 땐 아스피린.~
좀 무서운 건.
어느 약이나 "면역"이란 절차를 거치듯이.
사회적 지지 또한. 누적될 수록. 그 효과가 옅어질까? 하는 점입니다..
아스피린을 너무 먹어 댔더니 내성이 생겨서 이젠 별 효과가 없는 것 같아. 처럼.
내 곁의 그 사람이 이젠 마치 공기처럼 느껴져서. 그 소중함을 지각하지 못 하겠어.
사람들은 고마운 것에 익숙해지면, 그것의 고마움을 망각하는 경향이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이는 '망각'이라기보다는 "면역"이라고 labeling하는 편이 더 적합한 것일까?
모르겠습니다. 허나. 여러모로. 저에게 있어선 이것저것을 생각하게 해 주는 내용이었더랬죠.
또한. 마음이 괴로울 땐. 아스피린이나 먹어볼까? 하는 생각도 요즘은 하고 있답니다. 히헤헷.~
※ 무명자 블로그 http://blog.naver.com/ahsune
첫댓글 좋은 글 잘 보고 갑니다, 매번 고맙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프로작인가? 정말 마음을 치료? 하는 약도 있지 않나요?
크 정말 좋은글 잘 보고있습니다 굳굳!!
내성이 생길까봐 약을 정말 안먹는데. 지금 부상 당한 부위가 너무 아픈데. 아스피린 이야기 나오니까 땡기네요.
잘보고 갑니다.^^
스트레스가 쭉 이어질 경우, 아스피린을 영양제처럼 먹어야할까요 =_=
좋은 글 잘 봤습니다.
성기사 얘기 재밌네요 ^^
감사합니다~!
항상 잘읽고 갑니다...
무명자님 글은 볼 때마다 정말 흥미롭네요 ^^ 잘 보고 갑니다~
정말 최고~!! 무명자님은 나의 영웅~~!!^^ㅎㅎㅎㅎ
어잌후. 그 정돈 아니잖아요.~ ㅋㅋ 감사합니다~~~~ ㅎㅎㅎ
좋은 글 잘 보고 갑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염치 없지만 자주 부탁드려요~~
아녜요. 단 한 명의 독자만 계시더라도. 제 글쓰기는 계속됩니다. ㅋㅋㅋ
브라덜들이여 읽어 주셔서 쌩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