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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복원된 비각거리의 비석. 찰방 재임중 지역 주민들에게 선정을 베푼 찰방을 기리기 위하여 주민들이 공덕비를 세웠다.
광주 서방(瑞坊) 사거리에서 범두 고개를 지나 말바우, 핑고, 도동 고개로 연결되는 비포장 2차선 도로는 광주에서 창평, 옥과, 순천을 거쳐 진주 부산으로 가는 동진(東進)의 길이었으며 순창 정읍을 지나 전주 공주로 연결되는 북상(北上)의 길목이었다.
또한, 5일마다 열리는 광주 큰 장날이면 죽제품을 가득 싣고 새벽에 담양을 출발한 말수레가 말방울을 울리며 지나던 길이었고 창평 고서 장둥이 사는 아짐씨들이 늙은 호박 하나를 옆구리에 낀채 머리에 계란 한 꾸러미를 이고 잰걸음을 바쁘게 움직이던 길이다.
그 길 우산동쪽에 비석이 즐비하게 자리잡고 있었는데 그것이 무슨 비석인지 알 길이 없는 개구쟁이들은 그 비석에 올라가 놀기에 바빴다.
그렇게 말없이 자리를 지키고있던 비석이 도시계획으로 인하여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고 기억에서도 희미해져 버린지 오래이다.
지금이야 역도 많아지고 통신 수단도 다양해졌지만 그 옛날에는 역에서 사람의 이동과 물동량은 물론 서신의 이동을 감시하고 통제하였다.
중앙(漢陽)에서 하달된 왕명(王命)이 경양역에서 2개 방면으로 갈라져 파발마(擺撥馬)가 내달렸던 것이다.
순창 담양 옥과 동복 화순 남평으로 연결되는 제1 지선과 억기 가람 인물 창신 대부 검부 가리로 연결되는 제2 지선의 출발점과 도착 지점이 경양역(景陽驛)이었다.
반대로 함평 무안 영광을 관할하는 나주목(羅州牧)과 고흥 보성 화순을 관할하는 장흥 도호부(都護府)에서 한양으로 올라가는 모든 서류와 공물이 경양역을 통과해야 했으니 역을 책임지고있는 찰방은 병조(兵曹)소속으로서 종6품 벼슬에 해당하는 사람이었다.
@2005@ 우산동에 복원된 경양역 찰방 송댁훈의 공덕비
지금으로 말하면 행정조직은 이조(吏曹)소속으로 현감(縣監)이나 목사(牧使)가 그 업무를 수행했고 역의 찰방(察訪)은 현재의 국방부에 해당하는 병조 소속으로 기무사나 특수 임무를 부여받은 안기부 정도의 역할을 했지 않았나 싶다.
때문에 역 운영자금을 조달하기 위하여 조정에서 허가해준 토지가 역 둔토(屯土)인데 지금의 교육대학 광주상고 자리 중시안 골의 논이 그것이었으며 역도제 폐지로 교대 동강대 광주상고의 설립 근거지가 됐다.
국가도 흥망성쇠(興亡盛衰)가 있고 지역도 마찬가지이다. 개항(開港) 이전에 성가를 날리던 제물포와 마포가 -인천에, 영산포가-목포에, 동래가-부산에 그 영광을 넘겨주듯이 내륙 교통과 통신 거점이던 경양역이 1895년 폐소(廢所)되면서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져갔고 1913년 호남선 철도가 개통되면서 우리의 뇌리에서 영영 지워져 버렸다.
지금도 오치 넘어 마을이나 무등산 자락 충효동에 가면 나이드신 어른들과 얘기를 나누려면 계냥 동네에서 왔다고 해야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이며 대화를 할 수 있다.
@2005@ 빛 고을 광주(光州)의 옛 지도
경양(景陽). 1440년 세종 22년에 김방이라는 사람이 책임자가 되어 3년 공사 끝에 방죽을 쌓고 그 이름을 <경양방죽>이라고 명명했다는 기록이 조선실록에 나오는 것을 보면 그 이전부터 고을 이름을 경양이라 부르지 않았나 싶다.
그 수로를 중심으로 서방쪽은 쑥밭등이라 불렀는데 남쪽은 무엇이라 불렀는지 기억이 가물가물 거린다.
누문동에서 경양 마을에 이르는 <경양방죽> 제방에 숲이 우거져있고 닭을 기르는 농가에서 닭 우는 소리가 그칠 날이 없다하여 계림동이라 지었다니 그 많던 양계장의 계사(鷄舍)는 다 어디로 갔을까?
@2005@ 광주 서방 국민학교라는 글씨가 선명하다. 광주 서방국민학교는 현재의 광주 효동 초등학교 전신이다.
1953년. 휴전 이후 향토부대 31 사단이 오치에 주둔하고 지금의 서방 사거리에서 부대까지 신작로가 뚫리면서 면모를 바꿔가던 서방은 전남대가 확충을 하고 쑥밭등 논 자락에 호전(湖電)이 들어서며 중흥기를 맞이했고 경양 방죽을 매립하여 시청 청사가 들어서고 광주역이 이전해오면서 전성기를 구가했다.
이 과정에서 자취를 감추었던 비각거리의 비석이 돌아왔으니 더할나위 없이 기쁘고 반갑다.
개발 만능주의에 떠밀려 개발도 좋고 발전도 좋지만 우리의 옛 조상들의 애환이 서려있는 향토 사적지를 아끼고 보살피는 것은 후손들의 몫이지 않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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