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련불교문화재단 이사장 원택 스님
- 돌 씹은 이빨 값 이젠 다 물었다 ‘성철 시봉’ 벗어나‘원택 만행’ 떠날 터
법보신문 2013.10.30 입력 발행호수 : 1218 호
1만 배 올리고 받은 좌우명 ‘속이지 말라’ 참뜻 알고 출가 본지풍광·선문정로 법문 11권 선림고경총서 37권 산파 역
물 닦으려 휴지 몇 조각 쓰니 ‘니 애비 만석꾼이제?’ 질책 인재양성 직언에 뺨 두 대 ‘곰 새끼만 우글, 어쩌라고?’
선양 불사가 오히려 먹칠? ‘자기를 바로 보라’ 가르침 올곧게 전하고 싶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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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택 스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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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 중 안 될래? 고만 중 되라.”
“불교에 대해 알고 싶지만 출가할 생각은 겨자씨만큼도 없습니다.”
“나이 서른 다 돼서 세상에서 뭐 할 거고. 나는 함부로 남보고 중 되라고 안 한데이.”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한 원택 스님이 성철 스님을 처음 친견한 건 1971년 3월. 첫 만남에서 원택 스님은 ‘평생 지남이 될 만한 좌우명’을 부탁드렸다. “그래, 그라먼 절돈 3000원 내놔라.” 절돈 3000원은 3천배를 말함이다. “좌우명 한 말씀 듣고자 하는데 3000원까지 낼 거야 없지 않습니까?” “니는 불교에 대해 뭐 쫌 아나? 니는 공짜로 거저묵자 하는 놈이구만. 안 된데이. 니는 절 돈 만원 내놔라.”
3천배도 아니고 1만배라니. 오기가 발동했다. ‘못 할 것도 없지.’ 절의 횟수가 더해갈수록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이 밀려왔다. ‘절 그만두고 내려갈까?’하는 생각도 있었지만 버티고 버텨 1만배를 마쳤다. 이제 좌우명 받고 내려가면 끝이다. 다시는 백련암을 찾지 않으리라!
“속이지 마라.”
실망스러웠다. 큰스님이 내리는 좌우명이라면 좀 더 거창하거나 오묘해야 하지는 않는가? 고작 ‘속이지 마라’라니. “와? 좌우명이 무겁나? 무겁거든 내려놓고 가거라.”
해인사에서 내려온 지 석달이 지날 무렵, 문득 큰스님이 내린 좌우명이 스쳐갔다. ‘그렇다. 내가 지금까지 살면서 남을 속인 적은 없지만, 나 자신을 속이고 산 날은 얼마나 많은가?’ 며칠 뒤 자신을 말끔히 화장하는 꿈을 꾸었다. 백련암을 찾았다.
“참선 공부를 하고 싶습니다.” “삼서근(麻三斤) 해라.”
집에 돌아 와 화두를 들었지만 일심(一心)으로 들리기는커녕 잡념만 더 무성해졌다. ‘괜히 화두 받아 생고생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만 갖다가 수개월을 흘려보냈다.
1972년 새해, 큰스님의 지도가 있어야 진전이 있을 것 같아 대구에서 해인사 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어느 순간, 언뜻 머리 주위를 무지갯빛이 휘감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부처님께서 내시는 ‘광배’가 자신의 몸에서도 나오는 듯했다. 뭔가 안에서 꿈틀거렸다. 큰스님 뵙자마자 ‘따귀 한방 때려보자’는 심산으로 성철 스님과 대면했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격’이라는 사실을 아는데 찰나의 시간이면 충분했다.
“뭐냐 이놈아!” 벼락 고함에 따귀는커녕 혼비백산해 주저앉고 말았다. 조심스럽게 버스에서의 체험을 스님께 전했다. “헛 경계가 나타난 거다. 하루 자고 가거라.” 저녁 무렵 큰스님이 찾는다는 전갈이 왔다. 큰스님이 곧장 물었다. “니 중 안 될래? 고만 중 되라.” 원택 스님의 출가인연은 그렇게 맺어졌다.
“중 되라 하실 때는 그렇게 자상하셨는데 출가하고 나니 눈길 한 번 주지 않으셨습니다. 언제 보았느냐는 식이예요. 평생 백련암에서 절만 하다 마칠 것 같아 날이 밝으면 도망가 버리자 작정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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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인사 백련암에서 아비라 기도하는 불자들. |
| 그날 밤 꿈속에 눈썹이 허연 노스님 7~8명이 나타났다. 한 사람씩 자신을 소개하는 데 선종사에 쟁쟁한 선사들이었다고 한다. 그 분들 하는 말이 한결같았다. ‘도망가지 말고, 기도 끝내고 중노릇 잘 해라.’ 화들짝 놀라 깼다. ‘도망갈 때는 가더라도 밥 먹은 큰방 청소나 하고가자’는 생각에 물걸레를 들었다. 이 때 큰스님이 방문 열고 들어오더니 한 마디 던졌다. ‘이놈아 도망가야지, 와 아직 도망 안 가고 여기 있노!’”
성철 스님 시자 노릇만 20년. 내성적인 원택 스님이 가야산 호랑이를 모셨으니 그 ‘고충’은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차를 올리다 물 한 방울 떨어뜨려 급한 마음에 휴지 몇 토막 잘라 닦으니 ‘니 애비가 만석꾼이제?’라는 핀잔이 돌아왔다. 대중 스님 잘 모시려 부지런히 장 봐오면 ‘원주 시켜놓았디만 장똘뱅이 다 됐네!’라는 질책이 돌아왔고, 육조단경 법문에 환희심이 일어 ‘저를 위해 하신 듯합니다’하니 ‘내가 어데 법문할 데가 없어 니 같은 행자놈 위해 법문 하겠나?’라 하신 성철 스님이다.
“이쑤시게 하나도 버리지 않고 닦아서 쓰시던 큰스님 눈에 거리낌 없이 휴지를 쓰는 제가 어떻게 보였겠습니까? 좌선 중 상기병에 걸렸던 저를 구하시려 백련암 원주 소임을 맡기셨습니다. 좌선 멈추고 동선(動禪)하라는 것이었는데 장 보는 일에만 열중하고 있으니 주객이 전도됐다는 일침을 가하신 겁니다. ‘행자 놈 위해 법문 했겠나’하셨지만 이내 물으셨습니다. 환희심이 난 이유를 말입니다. 법문을 통해 뭐 좀 터득했냐는 물음이었던 겁니다.”
말 한마디, 행동 하나 하나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반면, 원택 스님의 ‘직언’에 빛을 본 역작도 있다. 그 대표작이 ‘본지풍광’과 ‘선문정로’. 성철 스님이 ‘밥값 했다’고 자평한, ‘이 책 이해하고 실천하는 사람이면 바로 나를 아는 사람’이라 한 그 역저다.
녹음기 하나 구해 큰스님 법문을 노트에 받아썼다. 큰스님이 ‘쓸데없는 일 한다’는 불호령 내릴까 두려워 몰래 이어폰 끼고 들으며 기침, 웃음, 고함소리 하나까지도 놓치지 않고 옮겼다. ‘본지풍광’과 ‘선문정로’ 등 성철 스님 법문집 열 한권은 그렇게 시작됐다.
보조 스님의 ‘돈오점수’를 비판한 ‘선문정로’는 출간 후 큰 파장을 몰고 왔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성철 스님의 돈오돈수가 깨졌다. 적어도 불교학계에서는 그랬다. 어느 날 원택 스님은 안마를 해 드리다 직언했다고 한다. ‘해인사 골짜기에서 돈오돈수 외쳐도 아무 소용 없으니 큰스님 사상을 뒷받침할 인재를 키우셔야 한다’고 말이다.
순간, 성철 스님은 벌떡 일어나 원택 스님의 뺨을 치면서 고함쳤다. “니, 지금 인재양성이라 했나? 난 인재양성이 뭔지 모르고 살았는 줄 아나?” 아무 말 못하고 다시 안마를 하려는 찰나 성철 스님은 다시 일어나 원택 스님의 빰을 또 한 대 올렸다. “키울 인재가 없는데 나보고 우짜란 말이고. 너거들이라도 내 뜻 알아 제대로 공부하며 살아야지. 다 머저리 곰 새끼들만 우글거리니 나도 별 수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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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택 스님이 은사 성철 스님의 옷깃을 여며드리고 있다. |
| 지금 생각해도 그 때 만큼 역정을 크게 내신 적이 없었다고 한다. 며칠 고민 끝에 다시 직언했다. “역대 조사들의 어록 중 돈오돈수 사상을 주장한 분들의 말씀을 번역해 널리 알리면 큰스님 사상의 울타리가 되지 않겠습니까?” 또 한 대 맞을까 우려했는데 의외의 일언이 돌아왔다. ‘그것도 한 가지 방법이겠네.’ 선림고경총서 37권은 그렇게 빛을 보았다.
‘모든 생명을 부처님과 같이 존경합시다’로 시작하는 1981년 부처님오신날 성철 스님의 법어는 조계종 종정 첫 한글 법어로 기록돼 있다. ‘방장이 아닌 종정으로서 모든 국민에게 한 말씀 하시는 것이니 한글체로 해야 한다’는 원택 스님의 주장을 성철 스님이 받아들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백련불교문화재단도 장학불사의 중요성을 역설한 원택 스님의 간곡한 청에 의해 이뤄졌다.
성철 스님 열반 후, 원택 스님은 큰스님의 자취를 세상에 내놓는 일에 매진했다. 성철 스님 사리탑 조성을 시작으로 성철 스님 생가를 복원한 겁외사를 창건한데 이어, 성철 스님 사상을 조명하는 각종 학술포럼 등을 열어갔다. 일각에서는 원택 스님의 이러한 행보를 마땅치 않게 생각했다. ‘성철 스님 상(象)을 자꾸 만들면 오히려 큰스님을 욕되게 만드는 것’이라는 것. 여기에 성철 스님 시봉 일화를 담은 ‘성철 스님 시봉이야기’를 내놓으니 ‘큰스님 이름으로 장사 하느냐?’는 질책까지 받았다.
“무비 스님께서 저에게 한 말씀이 기억납니다. ‘내가 공부할 당시만 해도 범어사에 큰스님 참 많았지! 성철 스님만 대단했던 게 아니야. 그런데 그 스님 다 어디 가셨나?’”
한평생 수행에 매진한 수좌의 소탈한 삶은 그 자체만으로도 후학의 본보기가 된다. 하지만 기록이 없으면 이 또한 무용지물이다. 원택 스님은 제자로서 은사가 생전에 폈던 뜻을 올곧이 전하고 싶을 뿐이다. 세대를 초월한 이 시대의 화두 ‘자기를 바로 보라’, ‘남을 위해 기도하라’는 뜻을 전하고 싶은 것이다.
“이제 큰스님 열반 20주기 행사까지 마쳤습니다. 저도 ‘성철 스님 시자 원택’에서 벗어나려 합니다. 큰스님께서 자주 하시던 말씀이 있습니다. ‘중은 논두렁 베고 잠들다 죽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성철’이라는 짐을 내려놓고 원택만의 만행을 떠나고 싶다는 뜻일 것이다. 성철 스님의 그늘에서 벗어나 자신이 해야 할 공부를 마치겠다는 뜻의 다름 아니다. 다만, 올해 창간한 잡지 ‘고경’만은 알차게 꾸며 끊임없이 내겠다고 한다.
“지금은 60여쪽 밖에 안 되는 소책자입니다. 하지만 성철 스님의 뜻을 실천하고자 하는 회원 중심으로 이 잡지를 키워보려 합니다. 회원들의 성금이 쌓이면 장학불사는 물론 선림고경총서 또한 다시 손보려 합니다. 이 잡지는 무가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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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자들과 포행하는 성철 스님. 왼쪽부터 원융, 원영, 성철, 원택 스님. |
| 원택 스님이 ‘무가지(無價紙)’라 한 이유가 있다. ‘공짜’ 차원의 무가지가 아니라 ‘값을 매길 수 없는 잡지’라는 뜻이다. 성철 스님을 비롯한 역대 조사들의 가르침을 세속 셈법으로 정할 순 없다는 의미다.
공양주 시절 원택 스님은 쌀 속의 돌을 고르는데 꽤나 서툴렀다. 어느 날 한 스님이 백련암을 찾았다가 원택 스님이 차린 밥상을 받았다. 얼마 안 있어 그 스님이 호통쳤다. ‘내 이빨 물어내, 이놈아.’ 돌을 씹은 것이다. 서러웠다. 절 생활 접고 하산하겠다는 생각만 들 뿐이었다. 이를 지켜 본 성철 스님이 한마디 했다. ‘그러면 내 이빨 어떻게 물어줄래? 나도 니 밥 먹기가 얼마나 힘든지 아나? 니가 내 이빨 물어주려면, 도망치려 할 게 아니라 백련암 살면서 내한테 그 빚을 갚어야제. 안 그러나!’
원택 스님은 지금도 그 한마디가 생생하다며 미소를 보인다. ‘이제 이빨은 물어준 것 아니냐’는 의미인 듯싶다.
채한기 상임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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