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첫번재 살인
병호는 석장의 협박문을 놓고 앉아있었다. 그 협박문은 그날 오전중에 Q경찰서 관내에서, 그것도 경찰서를 중심으로 반경 300m안에서 발견된것들이였다. 더 이상의 신고전화가 없는것으로 보아 관내에 붙여진것은 그 석장이 전부인것 같았다. 물론 누군가가 경찰에 신고하지 않고 찢어서 쓰레기 통에 버렸을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것까지 고려에 넣어 계산한다는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있었다.
서울시내에는 현재 30개의 경찰서가 있다. 인구 천만명이 들끓고 있는 거대도시를 30개의 경찰서가 분할해서 치안을 맡고 있는것이다.
Q경찰서 형사들이 29개 경찰서에 모두 전화를 걸어 알아본 결과 오늘밤 녀자를 죽이겠다는 협박문을 입수한 경찰서는 단 한군데도 없었다. 거기에 관한 신고전화도 없었기때문에 그들은 그 협박건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결국 범인은 Q경찰서 관내에만 그 협박문을 붙인것 같다. 그것도 경찰서 가까운 곳에다.
경찰서 부근에다 그런 협박문 벽보를 석장이나 붙인것은 경찰의 눈에 쉽게 띄게 하기 위해서가 아닐가. 그렇다면 놈은 경찰에 도전장을 보낸것이다. 그리고 대담하게 석장이나 붙여놓은것을 보면 녀자를 죽이겠다는 놈의 말이 결코 빈말은 아닌것 같다. 놈은 자신의 강한 의지를 보여주기 위해 똑같은 내용의 벽보를 석장이나 붙여놓은것이다.
세번째로 발견된 벽보는 앞서 수거된 두장과는 달리 사람들의 왕래가 적은 뒤골목에 붙어있었다. 그 골목은 차 한대가 겨우 빠져나갈수 있을 정도의 좁은 길로서 지저분하기 짝이 없었다. S자로 휘여진 그 골목은 길이가 100m쯤 되였는데 한쪽 면은 주로 건물의 뒤쪽 면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다른쪽 면은 낡은 주택과 려인숙 건물들로 채워져 있었다. 그러나 그쪽 면은 도시재개발지구로 묶여 빈집들이 대부분이였고 려인숙도 지금은 세집가운데 한곳에서만 손님을 받고 있었다. 골목이 지저분하고 으슥한데다 빈집들이 많아 지난 1년 사이에 우범지대로 락인 찍혀 있었다.
세번째 벽보는 그 골목의 목욕탕 건물 뒤쪽 벽에 붙어있었는데 순찰경관이 지나다가 발견하고 떼온것이였다. 그 경관은 파출소에서 근무하고 있는 젊은 순경이였는데 그 벽보를 떼다가 소장에게 그것을 보여주었고 소장은 그것을 보고 코웃음치면서 그에게 그에게 도로 돌려주었다. 젊은 순경을 그것을 버릴가 하다가 혹시나 해서 서랍에 넣어두었는데 본서에서 그것을 찾는 전화가 걸려오는 바람에 자신의 행동이 헛되지 않았음을 알게 되였던것이다.
“범인이 이 벽보를 붙이면서 조그마한 흔적이라도 남겼을거 아니냐?”
“글쎄요.”
왕반장은 볼멘 소리로 대꾸했다.
“하다못해 발자국이라도 남겼을거 아니냐? 날아가서 그걸 붙이지 않은 이상…”
“눈에 찍힌 발자국은 구경군들이 짓이겨서 이미 없어졌을겁니다.”
“그렇다면 혹시 담배꽁초 같은것도 없을가?”
“범인이 담배를 피운다면 혹시 현장에 떨어뜨렸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세심한 놈이라면 담배꽁초도 함부로 버리지 않았을겁니다.”
“만일 꽁초를 버렸다면 타액이 마르기전에 빨리 수거해야 해.”
병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현장에 떨어져 있는 담배꽁초를 모두 수거해오도록 해. 꽁초뿐만 아니라 그 주위에 떨어져 있는것이면 모두 주어오라구. 목욕탕쪽은 내가 가보겠어. 그 파출소 순경 이름이 뭐라고 했지?”
“서순경입니다.”
“지금 전화를 걸어 목용탕앞으로 나오라고 하지. 그 목욕탕 이름이 뭐라고 했지?”
“옥천탕입니다.”
병호는 옥천탕의 위치를 물어본 다음 밖으로 나갔다.
밖에는 여전히 눈이 내리고 있었다. 만일 한달동안 쉬지 않고 눈이 내린다면 어떻게 될가. 사람들도 차량들도 발 묶여 한동안 갇혀있어야 할것이다. 그러면 이 도시는 괴괴한 적막에 싸이겠지. 제발 한동안만 내려라.
전투복차림의 서순경은 먼저 나와 기다리고 있다가 병호가 말을 걸자 차렷자세로 거수경례를 했다.
“음, 자네가 그 이상한 벽보를 떼였나?”
“네, 그렇습니다.”
20대의 초롱초롱한 눈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병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벽보가 어디 붙어있는지 나한테 좀 알려달라구.”
“네, 가시죠.”
“자넨 그걸 뗄 때 맨손으로 떼였나?”
“네 그렇습니다.”
“그럼 자네 지문이 거기에 묻어있겠군.”
서순경의 발길이 조금 흐트러지는것 같았다.
“네, 아마…”
그들은 뒤골목으로 들어섰다.
“미처 그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아, 괜찮아.”
그들은 지저분한 골목길을 나란히 걸었다.
“여긴 사람이 살지 않는것 같은데…”
병호는 턱으로 빈집들을 가리켰다.
“네, 재개발지구라 거의 모두 떠나가고 현재는 두집만 남아있습니다. 모두 헐어내고 대형건물을 지을 모양입니다. 바로 여깁니다.”
서순경은 걸음을 멈추고 시꺼멓게 때가 낀 건물벽을 가리켰다.
벽보가 붙어있었던 자리에는 벽보의 모서리로 보이는 조그마한 종이쪼각만이 달라붙어 있을뿐이였다. 그 종이쪼각 우에는 스카치 테이프가 달라붙어 있었다.
“그 이상한 벽보를 본게 몇시경이였나?”
“아침 9시쯤이였습니다.”
“발견하고 바로 뜯었나?”
“네, 그렇습니다.”
“그때 여기에 사람들이 있었나?”
“네, 서너명쯤 있었습니다.”
“구경군들이였나?”
“네, 그런것 같았습니다.”
“그들가운데 이상한 사람은 없었나?”
“별로 그런 사람은 없는것 같았습니다.”
“그들을 자세히 보지 않았겠지.”
서순경은 조금 당황해 하는 표정을 지었다.
“네, 사실은 그렇습니다.”
“됐어, 바쁠텐데 가보라구.”
서순경은 그에게 착실히 거수경례를 하고나서 오던 길로 되돌아갔다.
병호는 주머니속에서 면장갑과 비닐주머니를 꺼냈다.
벽보가 붙여있던 자리 아래 땅바닥에는 담배꽁초며 구겨진 빈 담배갑, 휴지, 껌껍질 같은것들이 널부러져 있었다. 그리고 그것들은 대부분 눈과 함께 구두발에 짓밟혀 있었다.
병호는 그것들을 하나하나 집어서 눈과 흙을 털어낸 다음 비닐봉지속에 넣었다. 찬바람이 골목안으로 몰려올 때마다 새로운 쓰레기들이 바람을 타고 날아오군 했다. 그는 새로 날아온 쓰레기들은 줏지 않았다. 어쩌다 지나가는 행인들이 그를 이상한듯이 쳐다보군 했다.
서(署)로 돌아가는 길에 그는 자주 가는 설렁탕집에 들러 혼자 점심식사를 했다. 식사를 하면서도 그는 자주 손목시계를 들여다 보군 했다. 범인은 오늘밤 녀자 한명을 죽이겠다고 했다. 오늘밤이라면 이제 몇시간밖에 남지 않았다. 날이 저물 때부터 밤으로 친다면 오늘밤이란 6시부터 자정까지를 말하는것일가. 아니면 래일 날이 샐 때까지를 말하는것일가. 일단 6시부터 자정까지 잡아두는것이 좋겠지. 그렇다면 범인은 저녁 6시부터 시작해서 6시간동안에 녀자 한명을 죽이겠다는것이다. 그리고 그 증표로서 한쪽 귀를 자르겠다는것이다.
저녁 6시까지는 이제 4시간반이 남았다. 그 시간까지 범인을 체포한다는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해보는데까지 최선을 다 해보는 수밖에 없다. 녀자 한명이 죽어갈 때까지 가만히 앉아 기다릴순 없지 않은가.
그는 갑자기 밥맛이 떨어져 더 이상 식사를 계속할수가 없었다. 그래서 수저를 놓고 밖으로 나왔다.
사무실로 돌아가자 이미 두개의 비닐봉지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그 옆에 자신이 가져온 봉지를 내려놓았다.
“의외로 쓰레기가 많더군요. 그래서 모두 걷어가지고 왔습니다.”
왕반장이 신문지를 책상우에 펴면서 말햇다.
병호는 매직펜을 꺼내 백산부인과앞에서 수거해온 쓰레기봉지에는 ①이라 적었고 럭키클러과 온천탕쪽에서 가져온 쓰레기봉지에는 각각 ②와 ③이라고 써두었다. 그렇게 번호를 붙여두면 편리한 점이 많았기때문이였다.
첫댓글 재밌게 잘 보았습니다. 나머지두 빨리 올려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