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울고있는 아이의 모습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정원의 한 모퉁이에서 발견된 작은 새의 시체 위에 초추(初秋) 양광(陽光)이 비치고 있을 때,
대체로 가을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게다가 가을비는 쓸쓸히 내리는데 사랑하는 사람의 발길은 끊어져
거의 한 주일이나 혼자 있게 될 때.
아무도 살지 않는 고궁, 그 고궁의 벽에서는 흙덩이가 떨어지고 창문의 삭은 나무
위에는 '아이세여, 내 너를 사랑했노라…'라는 거의 알아보기 어려운 글귀가 쓰여 있음을 볼 때.
숱한 세월이 흐른 후에 문득 발견된 돌아가신 아버지의 편지. 편지에는 이런 사연이 쓰여 있었다.
'사랑하는 아들아, 네 소행들로 인해 나는 얼마나 많은 밤을 잠 못 이루며 지새웠는지 모른다.
' 대체 나의 소행이란 무엇이었던가.
하나의 치기 어린 장난, 아니면 거짓말, 아니면 연애 사건이었을까.
이제는 그 숱한 허물들도 기억에서 사라지고 없는데,
그때 아버지는 그로 인해 가슴을 태우셨던 것이다.
동물원의 우리에 갇혀 초조하게 서성이는 한 마리 범의 모습 또한 우리를 슬프게 한다.
언제 보아도 철책가를 왔다갔다하는 그 동물의 번쩍이는 눈,
무서운 분노, 괴로움에 찬 포효, 앞발에 서린 끝없는 절망감,
미친 듯한 순환, 이 모든 것은 우리를 더없이 슬프게 한다.
횔더린의 시, 아이헨도르프의 가곡. 옛 친구를 만났을 때. 학창시절의 친구 집을 방문하였을 때.
그것도 이제는 그가 존경받을 만한 고관대작, 혹은 부유한 기업주의 몸이 되어 몽롱하고
우울한 언어를 조롱하는 한낱 시인밖에 될 수 없었던 우리들을 보고 손은 내밀기는 하되,
이미 알아보려 하지 않는 듯한 태도를 취할 때.
사냥꾼의 총부리 앞에 죽어 가는 한 마리 사슴의 눈초리. 자스민의 향기.
이 향기는 나에게 창 앞에 한 그루 노목(老木)이 서 있던 나의 고향을 생각하게 한다.
공원에서 흘러오는 은은한 음악소리. 꿈같이 아름다운 여름밤.
누구인가 모래자갈을 밟고 지나는 발자국 소리가 들리고 한 가닥의 즐거운 웃음소리가
귀를 간지럽히는데, 당신은 여전히 거의 열흘이 다 되도록 우울한 병실에 누워있는 몸이 되었을 때.
달리는 기차 또한 우리를 슬프게 한다.
어스름 황혼이 밤으로 접어드는데, 유령의 무리처럼 요란스럽게 지나가는 불밝힌 차창에
미소를 띤 어여쁜 여인의 모습이 보일 때.
화려하고 성대한 가면 무도회에서 돌아왔을 때.
대의원 모씨의 강연집을 읽을 때. 부드러운 아침공기가 가늘고 소리 없는 비를 희롱할 때.
사랑하는 이가 배우와 인사할 때. 공동묘지를 지나갈 때.
그리하여 문득 '여기 열 다섯의 어린 나이로 세상을 떠난 소녀 클라라 잠들다'라는 묘비명을 읽을 때.
아, 그녀는 어린 시절 나의 단짝 친구였지.
하고헌 날을 도회(都會)의 집과 메마른 등걸만 바라보며 흐르는 시커먼 냇물.
숱한 선생님들에 대한 추억. 수학교과서. 오랫동안 사랑하는 이의 편지가 오지 않을 때.
그녀는 병석에 있는 것이 아닐까? 아니면 그녀의 편지가 다른 사나이의 손에 잘못 들어가,
애정과 동경에 넘치는 사연이 웃음으로 읽혀지는 것이 아닐까?
아니면 그녀의 마음이 돌처럼 차게 굳어버린 게 아닐까? 아니면 이런 봄날,
그녀는 어느 다른 사나이와 산책을 즐기는 것이나 아닐까?
초행의 낯선 어느 시골주막에서의 하룻밤.
시냇물이 졸졸 흐르는 소리.
곁방 문이 열리고 소곤거리는 음성과 함께 낡아빠진 헌 시계가 새벽 한시를
둔탁하게 치는 소리가 들 릴 때.
그때 당신은 불현듯 일말의 애수를 느끼게 되리라.
날아가는 한 마리의 해오라기. 추수가 지난 후의 텅빈 논과 밭.
술에 취한 여인의 모습. 어린 시절 살던 조그만 마을을 다시 찾았을 때.
그곳에는 이미 아무도 당신을 알아보는 이 없고,
일찍이 뛰놀던 놀이터에는 거만한 붉은 주택들이 들어서 있는 데다 당신이 살던 집에서는
낯선 이의 얼굴이 내다보고,
왕자처럼 경이롭던 아카시아 숲도 이미 베어 없어지고 말았을 때.
이 모든 것은 우리의 마음을 슬프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이 어찌 이것뿐이랴.
오뉴월의 장의 행렬. 가난한 노파의 눈물. 거만한 인간. 바이올렛 색과 검정 색.
그리고 회색의 빛깔들. 둔하게 울려오는 종소리. 징소리. 바이올린의 G현.
가을 밭에서 보이는 연기. 산길에 흩어져 있는 비둘기의 깃.
자동차에 앉아있는 출세한 부녀자의 좁은 어깨. 유랑가극단의 여배우들.
세 번째 줄에서 떨어진 어릿광대. 지붕위로 떨어지는 빗소리. 휴가의 마지막 날.
사무실에서 때묻은 서류를 뒤적이는 처녀의 가느다란 손. 만월(滿月)의 밤,
개 짓는 소리.'크누트함순'의 두세 구절. 굶주린 어린아이들의 모습.
무성한 나뭇가지위로 내려앉는 하얀 눈송이,
이 모든 것 또한 우리의 마음을 슬프게 한다.
안톤 슈낙(1892~1973년)
독일 프랑켄 지방의 리넥 태생. 그는 리넥 외에 데델바흐, 함멜부르크, 크로나흐, 알제나우, 밀텐베르크 등 프랑켄 지방 부근의 아름다운 풍경 속에 젊은 시절을 보냈습니다.
언론계에 투신하여 다름슈타트, 만하임, 프랑크푸르트 등지에서 일했고 신문에 오페라 및 연극평을 썼으며 특파원으로 많은 여행도 했습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1차 대전 때는 부상을 입었고 2차 대전 때는 미군의 포로가 되었다가 석방되기도 했습니다.
슈낙은 호기심 많은 유토피아주의자였습니다. 8권의 시집과 2권의 소설이 있지만 그의 장기(長技)는 시정(詩情)있는 아름다운 문체의 산문에 있었고 <젊은 날의 전설>, <아름다운 소녀 이름> 등 10여 권의 산문집을 남겼습니다.
우리나라 교과서에 실려 알려진 짧은 산문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은 산문집 <로빈손의 바늘(1946년)>에 실린 것입니다. 김진섭의 번역문은 그의 수필집 <생활인의 철학>에 들어 있습니다.
Inside Outside - Tony O'Conn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