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과 멋을 아는 풍류 시인의 놀음
한잔의 꿈/ 시평 우병택
양호 시인과 하룻밤을 약주로 보내본 이라면, 그를 낭만과 진실한 가슴을 지닌 시인이라고 말해도 이의를 달 사람은 없을 게다. 약간은 돈키호테적인 느낌을 받기도 하지만, 시인이라는 그 나름대로의 자긍심과 현실 사이에서 조화를 이루고 삶을 살아가는 그를 그들은 사랑할 수밖에 없겠기에 하는 말이다.
시집 한잔의 꿈 에서 보듯이 그의 시는 곧 취함의 끝이요, 또한 그것은 곧 시인 본인의 꿈인 것이다.
1부
사랑/ 그 순수의 그늘에서
첫머리를 장식한 ‘사랑’의 전문을 보자.
사랑은
살갗에 와 닿는
바람
한줄기에서도
보이지 않는 향기를 피운다.
이미 不惑을 훨씬 넘기고 이제 知天命의 문턱에 들어선 그가 살이 타듯 한 사랑이 아닌 ‘살갗에 와 닿는 바람’ ‘보이지 않는 향기’ 정도일까? 이는 그를 알고 나면 일면 수긍이 가는 대목이랄 수 있다.
양호 시인은 병원 원무과에서 잡다한 병원의 일을 업으로 삼고 틈틈이 시를 써온 시인이다. 또 시를 쓰기보다는 허접한 봉사활동에 열을 올리다가 시 한 수를 낚는 시인이다.
그런 그가 보는 사랑의 가치가 결코 예사롭지가 않아서 하는 말이다. 다시 돌이켜 보면, 그의 사랑은 그의 표면이 아닌 잔잔한 이면(裏面)에서 이미 끊고 있다는 얘기가 된다. 때문에 양 시인의 시에는 특별한 기교가 없다. 그저 한 잔 술이면 한 편의 꿈이 나오는 것이다. 양호 시인을 이런 각도에서 볼 때에야 비로소 그의 시 내면이 읽힐 수 있다.
숨을 내뱉을수록 점점 더 커지는
아린 가슴 속 풍선을 불어
상현달 끝자락에
붙들어 매었건만
수줍음에 떠는
맨 처음 속살의 아슴아슴한
형체처럼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 -<첫사랑 전문>
‘아린 가슴 속 풍선’ ‘맨 처음 속살의 아슴아슴한 형체’
이쯤 되면 양 시인의 시적 센스는 이미 검정 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첫사랑을 겪은 엄청난 충격과 이미 그 사랑이 깨진 사랑이기에 ‘첫사랑’이라고 했을 터. 그런 사랑을 더 아름답게 표현한 그의 시어들. 그것을 주워서 엮을 줄 아는 시인의 알량함. 이런 맥락에서 보면, 앞서의 짤막한 두 편의 시를 통해서 끊임없이 연구하는 그의 시어와 그것을 갈고 닦는 열정이 베어 나옴을 체감할 수 있다. 특히 ‘아슴푸레하다‘라는 형용사는 ’어둡고 희미하다’라는 뜻을 지닌 터. 이를 ’아슴아슴하다‘로 바꾸어 쓴 그의 의도는 무엇일까 한 번쯤 묻고 싶어진다. 아마도 다음 행에 쓸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라는 구절과의 부딪침을 은근히 피하려는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어휘 선택의 고민은 다음 작품에서도 계속된다.
지평선 너머
해조음이 손짓을 하며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온다.
해 늦은 가을
임 떠난 그 자리엔
기쁨이
슬픔이
파도를 타고 출렁인다.
맴돌던 추억들은
파도에 몸부림치다가
바닷가 모래성을 사정없이 후려갈긴다.
-<추억> 전문
‘해조음’이란 ‘파도소리’를 일컫는 말인데, 이런 사전적 의미 정도라면 의미가 없다. 아마 불교용어로 쓴 듯 그 인상이 짙다. ‘중생에게 내리는 덕’ 정도로 쓰여야 ‘손짓을 하며’와 어울린다. 그렇다면,해 늦은 가을에 떠난 임은 기룬 임인가, 아니면 부처란 말인가?
군 입대를 앞두고 엉뚱하게도 부친의 돈 가방을 메고 제주도로 잠적했던 양 시인의 奇行과 무관하지 않은 시 구절이다.
‘맴돌던 추억들은
파도에 몸부림치다가
바닷가 모래성을 사정없이 후려갈긴다. ‘
사랑하는 아들을 군 기피자로 만들고 싶지 않았던 부친의 끈질긴 노력이 계속되는 동안 그가 바라 본 제주의 파도가 그의 뇌리에 맴돌다가 은연중에 튀어 나온 게 아닐지….
그런데, 양 시인과의 대화 속에서 우연히 발견되는 의외의 사건. 그것은 시조에 오면 그의 언어 조탁 능력이 뛰어난다.
기다림의 숨결이
내 안에 들어와서
시린 살갗 여린 떨림
따스하게 채워주어
첩첩산 움터게 하는
붉디붉은 꽃망울
-<매화>전문
여기서도 ‘살갗’이 나온다. 그것도 ‘시린 살갗’이다. 직접 시인에게 묻진 않았지만, 살갗이 ‘시리다‘라는 표현은 아마도 그의 병원 업무와 무관하지 않으리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사회 봉사에서 느끼는 남다른 체험도 한몫했을 터. 두주불사하는 그의 심성에서 우러나오는 대범함 속에 이런 여림이 있기에 그의 시가 빛이 나는 게 아닐지….
이 시조가 양 시인의 여타 작품보다 두드러짐은 그가 노산 이은상님의 생전에 그로부터 사사 받은 흔적이 있기에 가능한 일로 여겨지는 대목이다.
양 시인은 2003년도 끝나가는 어느 날 훌쩍 그가 오랫동안 몸담고 있던 병원원무 일을 그만 두게 된다. 그리고 그의 사랑하는 아내 곁으로 돌아온다. 나는 그와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도 그를 가장 모르는 측근이 된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복잡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곧 알게 된다.
한잔의 꿈속에서 밀려왔다 밀려오는
님의 향기에 취해
내 몸 속 깊은
그리움은 달아나 버리고
또 다시 외로움이
너의 그림자만큼 길어질 때
나의 방황하는 혼은
어디다 휴식을 정할까
-<꿈속의 님> 전문
여기에서 그의 또 다른 면을 엿볼 수가 있다. 그 고독의 길을 그는 걸어 온 것이리라.
풍류와 낭만을 가진 그가 병원 원무 일로 바쁘게 돌아가는 일상은 결코 자신이 아니었을 것으로 짐작이 된다. 그래서 아내가 하는 아이스크림 가게를 기웃거리고 급기야 그의 사랑을 꼭 움켜질 양으로 아내 곁으로 다가온 것은 아닐지.
또 다시 외로움이
너의 그림자만큼 길어질 때
나의 방황하는 혼은
어디다 휴식을 정할까
바로 이 대목이 그가 가장 목말라하던 그리움의 끝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 양호 시인의 4집 출판을 축하하며 3집에서 작품 몇을 추려 올립니다. 이 시평은 2003년에 습작한 것의 일부입니다.
첫댓글 겨울 바람이 가슴을 후비고 숭숭하게
어께까지 서늘케 하는 날에
사랑은
살갗에 와 닿는
바람
한줄기에서도
보이지 않는 향기를 피운다.
---시 한 수로 위안이 됩니다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