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은 그냥 쉬는 날이다
노병철
설날이 지난다. 연휴 마지막 날이다. 혹자는 ‘낯설다’의 어근에서 ‘설’이 유래한다. 새롭게 다가온 한해가 낯설게 느껴진다고 하여 그렇게 표현한다고 한다. ‘선다’의 어원설, ‘삼가다(섧다)’, ‘신일(愼日 근신하여 경거망동을 삼가는 날)’의 어원설같이 의견이 분분한 걸 보니 설날 명칭에 대한 명확한 설명은 없는 듯하다. 단지 어릴 적 설빔으로 옷 한 벌 챙겼고 세배를 올려 세뱃돈 챙기느라 허리가 아프게 절을 한 기억은 있다. 그날 저녁 세뱃돈 세는 재미는 그 어떤 재미보다 비할 데가 없을 정도였다. 어른들은 윷놀이에, 어린애들은 연날리기를 했다. 지금은 그런 놀이가 있었나 싶다.
설날에는 떡국을 먹는 전통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데, 떡을 길게 뽑은 가래떡을 둥글게 잘라 만든다. 길게 뽑은 하얀 가래떡은 장수와 집안의 번창을 의미하고 둥글게 썬 가래떡의 모양이 옛날 화폐인 엽전과 비슷하여 떡국을 먹는 것이 돈이 들어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꿩 대신 닭’ 떡국 국물을 꿩고기 혹은 닭고기로 육수를 낸 모양인데 지금은 거의 소고기로 대체된 것 같다. 북한은 여전히 떡국에 꿩이나 닭으로 국물을 낸다고 한다. 정월에 복조리를 걸어 두면 일년내내 집안이 풍요해진다고 복조리를 사서 새벽에 집집이 던져놓고선 차례 지내고 나서 동무들과 복조리 값 수금하러 다녔었다.
설을 언제부터 쉬었는지 그 기원조차 알 수 없고 설이란 어원조차 알 수 없지만 설은 추석과 함께 민족 명절로 이젠 완전히 자리 잡은 것 같다. 하지만 음력이란 개념이 하나둘 사라지는 요즘 설날에 대한 의미는 간데없고 단지 공휴일이라 긴 휴식을 가진다는 생각뿐인 듯하다. 1895년에 양력이 채택되고 해방 후 한때 신정(新正)에 대비하여 구정(舊正)이라는 구태의연한 명절로 취급되어 사라지기도 했다. 1985년 "민속의 날"로 지정되었다. 북한도 없앴다가 2003년에 다시 부활됐다. 이제 중국이나 대만 홍콩, 상가폴같이 화교가 많은 나라만 음력설을 쇤다. 이웃 일본조차 음력설은 없다.
“구정 잘 쉬십시오.”
나름 배울 만큼 배운 분이자 작가이자 더럽게 아는 척 많이 하는 인간이 보내온 문자이다. 설날이란 우리말을 놔두고 ‘구정’이란 한자어를 사용했다고 나무라는 것이 아니다. 나이 칠십이면 구정이란 말이 입에 붙을 수도 있다. 문제는 ‘쉬다’에 있다. ‘쇠다’라는 말이 익숙하지 않아 생기는 일이다. 설을 연휴라 쉬는 것이 아니라 새해를 맞아 나쁜 기운을 쫓아내고 삼가며 조심하는 의미가 담긴 ‘쇠다’를 사용해야 하는 것인데 잠시 정신 줄을 놓은 것 같다. 구정도 마찬가지다. 아직도 작은설을 뜻하는 '아치설'이 와전된 ‘까치설’이 크리스마스이브처럼 ‘설날이브’ 날로 착각하는 이가 많듯이, 일제가 한민족의 혼과 얼을 말살시키기 위해 구정이라고 비하하면서 설날을 없앴다고 하는 이가 많다. 굳이 여기에 토를 달면서까지 그렇지 않다고 할 필요성은 느끼지 못한다. 그럴 수도 있고 안 그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조카들이 인사와 세배한다. 그러면서 인사말로 이렇게 복을 많이 받으란다. 세뱃돈을 주면서 한마디 해야 했다. 복(福)은 내려받는 것이지 올려받지는 않는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 다른 곳에서 행여 똑같은 실수를 할까 싶어 집안 단속을 하고자 함이었다. “어른에게 세배하고는 그냥 ‘건강하세요.’라고 인사말을 하면 된다. 어른에게 복이란 말을 사용하면 결례이다.”라고 설명했다. 갑자기 분위기가 싸해진다. 꼰대 잔소리가 되어버렸다. 요즘 다 사용하는 단어라고 집사람이 핀잔을 준다. 하긴 지금 그런 말이 먹힐 리 없다. 대구 명문가 중에는 양력설을 쇠는 집안이 있다. 대표적인 집안이 곽 병원을 만드신 운경어른 집안이다. 곽 씨 문중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 나름 명문이라 우기는 우리 집안도 몇 년 전 코로나 이후로 설 명절을 없애버렸다. 쇠는 날이 아닌 쉬는 날로 바꿔버린 것이다. 살아있는 친지들 간에 우의를 다지는 것이 더 낫다는 판단을 했다. 아마 아버지를 포함한 위대하신 우리 조상님들께서는 잘했다고 칭찬을 해 주시리라 확신한다. 올 1월도 똑같은 새해인사 두 번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