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에서는 최대한 공정하게 객관적으로 전황을 평가해도 때와 상황에 따라 적을 이롭게 하는 행위가 될 수 있다. 영향력이 큰 인사일수록 더욱 그렇다.
되돌아보면, 지난해 5, 6월 격전지 '바흐무트' 공략에 나선 러시아 용병 그룹 '바그너 그룹'의 수장 예브게니 프리고진(지난해 8월 비행기 폭파로 사망)이 전선의 어려움을 토로하며 크렘린을 자극했고, 지난해 11월에는 우크라이나군 총참모장(합참의장 격) 발레리 잘루즈니(경질후 주영 대사 내정)가 영국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와의 인터뷰및 기고를 통해 전선의 교착 상태를 주장했다가 인사권자인 젤렌스키 대통령의 눈밖에 났다.
그리고 6개월이 지난 지금, 우크라이나군 정보총국의 바딤 스키비츠키 부국장(상황실장)이 2일 공개된 이코노미스트와의 인터뷰에서 "우크라이나 (전선) 상황이 그 어느 때보다 어렵다"고 인정하며 '협상'을 화두로 던졌다. 자칫하면 앞으로 '잘루즈니판 설화(舌禍)'에 휘말릴 판이다.
잘루즈니 총참모장은 지난해 11월 2일 이코노미스트 기고및 인터뷰에서 "나토(NATO)의 군사교본과 우크라이나군 최고 지휘부의 계산과 달리 (가을철) 반격은 성공하지 못했다"며 "(앞으로) 극적인 돌파구도 없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 이유로 양측의 대등한 군사력을 꼽았다. 군사 장비와 병력에서 결정적인 우위를 점하지 못하는 한, 어느 쪽도 진격은 불가능하다고 했다. 전선이 교착 상태에 빠진 원인이라는 분석이었다.
이코노미스트의 잘루즈니 특집 23년 11월 2일자/웹페이지 캡처
전선의 교착 상태가 '패배 위기'로 몰린 건 거의 6개월간 미국의 군사 지원이 끊긴 탓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도 군정보총국의 제 2인자가 지금까지 거의 금기시된 '협상'을 입에 올리는 건 정세 분석을 넘어 '적을 이롭게 했다'는 오해를 받을 수도 있다.
실제로 그의 인터뷰를 계기로, 대러 강경파인 영국의 언론들이 4일 '러-우크라 협상'을 주제로 한 기사들을 내보내기 시작했다.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에 따르면 영국 텔레그라프와 데일리 메일, 로이터 통신 등은 3일과 4일 “우크라이나의 평화 회담은 전장에서 피할 수 없는 패배에 대한 대안이라고 한 고위 장군(스키비츠키 부국장)이 말했다"며 협상론을 제시했다.
우크라이나는 위기라고 고위 장성이 말했다는 스키비츠키 우크라군 정보총국 부국장 인터뷰/웹페이지 캡처
스키비츠키 부국장 이코노미스트 인터뷰를 받아쓴 영국 텔레그라프지/웹페이지 캡처
스키비츠키 부국장은 이코노미스트와의 회견에서 "(우크라이나는) 싸우는 것만으로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방법을 찾지 못했다"며 "이런 전쟁은 협상으로만 끝낼 수 있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양측은 현재 잠재적인 협상을 앞두고 가장 유리한 위치를 점하기 위해 경쟁하는 중"이라면서 "의미 있는 협상은 내년 하반기에나 시작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스트라나.ua는 2일 "스키비츠키 부국장이 (이코노미스트와의) 회견에서 몇 가지 공감이 가는 발언을 했다"며 1991년 국경에 도달하는 목표는 점점 더 멀어지고 있으며, 승리 가능성을 보지 못하고 있다는 발언을 소개했다.
그가 예상하는 협상 시점은 내년(2025년) 하반기 쯤. 상대(러시아)가 심각한 전쟁의 역풍에 직면하면서 협상의 문이 열릴 것이라는 관측이다.
그 때까지 러시아는 돈바스 지역(도네츠크주와 루간스크주)를 점령하는 계획을 밀어붙일 것이라는 게 스키비츠키 부국장의 전망. 최근 최대 격전지로 떠오른 '차소프(차소우) 야르'의 함락도 시간문제라고 했다. 그는 "오늘이나 내일은 아니다'는 전제를 달았지만, "러시아군은 전승 기념일(5월 9일)까지, 늦어도 푸틴 대통령의 베이징 방문시까지는 '뭔가를 하라'(차소프 야르 점령/편집자)는 명령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미 뉴욕타임스(NYT)는 이에 대해 곧바로 의문을 제기했다. NYT는 미군 분석가들을 인용, "러시아군이 전승 기념일까지 차소프 야르 점령 등 큰 전과를 올리려고 한다는 우크라이나측 주요 인사들의 발언을 믿을 수 없다"며 "우크라이나군이 탄약 부족에 시달리고 있지만, 방어선이 곧 무너질 위험은 없다"고 반박했다. 키예프(키이우)는 지난 주말 미국으로부터 대전차 미사일과 155㎜ 포탄 등 (미국의 대우크라 추가 지원 법안에 따른) 첫 군수 지원품을 받았기 때문이다. 패트리어트 방공시스템을 포함한 두 번째 무기 배송도 가까운 시일 내에 우크라이나에 도착할 전망이다.
언론과 자주 접촉하는 스키비츠키 부국장/인터뷰 영상 캡처
스키비츠키 부국장은 "러시아군의 대공세가 5월 말이나 6월 초에 시작될 것"이라며 "우크라이나 제 2의 도시 하르코프(하리코프)와 북부 수미도 공격 사정권에 들어있다"고 말했다. 그가 추정한 러시아군 병력은 51만4000명으로, 크리스토퍼 카볼리 유럽주둔 미군사령관 겸 나토(동맹)군 사령관이 한달 전 제시한 추정치 47만명보다 4만명 가량 더 많다. 또 하르코프와 접한 국경 지역에 주둔중인 러시아군은 3만5000명 수준이지만, 조만간 5만~7만 명으로 늘어날 것으로 그는 예상했다. 러시아군은 또 예비병력으로 1만5,000~2만명을 보유하고 있다고 했다.
이 정도 병력으로 하르코프나 수미시를 점령할 수 있을까?
그는 "충분하지 않지만, 돈바스 지역의 방어선이 뚫히면 북진(北進)하는 러시아군과 합세해 하르코프를 위협할 수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인구 120만 명의 도시 하리코프는 앞으로 암울한 날들만 기다린다고도 했다. 러시아군의 조직에 대해서는 "군사작전 초기(2022년)의 '뻥만 센 조직'이 아니라, 명확한 작전 계획과 단일 명령체계에 따라 움직이는 강군으로 변했다"고 그는 평가했다.
문제는 장기전에 따른 전쟁 수행능력. 그는 "러시아의 군수 물자 생산력도 자재와 기술 인력 부족 등으로 인해 2026년 초에는 한계에 도달하고, 러-우크라 모두 무기 부족에 처할 것"이라면서 그러나 "다른 변수(서방의 지원 확대/편집자)가 없다면 우크라이나가 더 빨리 바닥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의 인터뷰 기조는 전체적으로 비관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스트라나.ua도 3일 하루를 결산하는 기획기사에서 "스키비츠키 부국장의 다소 비관적인 어조는 우크라이나 SNS에서 당국이 러시아와의 협상을 위한 정지작업을 벌이고 있다는 관측을 불러 일으켰다"면서 그러나 "그의 발언을 분석해 보면, 우크라이나의 군사 정치 지도부는 내년에는 러시아가 힘이 빠지기 시작할 것으로 보고, 적어도 1년 동안은 버틸 수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다만, 앞으로 1년을 더 버티더라도, 우크라이나의 대러 협상력이 나아질 것이라는 보장도 없다고 지적했다.
오는 6월 스위스에서 열릴 '평화 정상회의'가 분수령이 될 것이라는 게 이 매체의 진단. 젤렌스키 대통령은 스위스 평화회의에서 러시아군의 철수를 포함한 '평화 공식'에 대한 전세계적 지지를 모을 계획이지만, 만약 실패한다면, 전쟁 종식을 위한 '플랜 B'를 구상해야 할 판이라고 분석했다.
스키비츠키 부국장이 우려한 것은, '5월 위기설'을 부추기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흔들기 전략이다. 미국의 추가 군사지원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의 '5월 대공세'는 군사적으로 우크라이나를 위협하고, 젤렌스키 대통령의 정식 임기가 5월 20일로 만료된 뒤 그의 정치적 정당성을 훼손하는 러시아의 허위 정보 캠페인이 거셀 것으로 그는 내다봤다. 일부 야당 세력이 이에 합세할 경우, 러시아의 흔들기 전략은 우크라이나군 정보총국을 불안에 빠뜨리기에 충분할 지도 모른다.
우크라이나에 새 동원법이 발효됐지만, 길거리 강제동원 혹은 폭력동원에 대한 주민들의 반발은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사진은 길거리 강제동원 영상/캡처
미국의 추가 군사지원이 전장에 도착하기까지 상당한 시간(몇주 혹은 개월)이 걸린다는 점 외에 우크라이나 내부의 지지부진한 예비역 동원도 불안 요인으로 그는 지적했다. 그는 "젤렌스키 대통령이 군 등록및 징병 사무소(우리식으로는 병무청)의 지역 책임자들 해고한 뒤, 예비역 동원이 지난 겨울 사실상 중단됐다"며 "새 동원법이 발효됐지만, 전투 의욕이 없고 사기가 낮은 예비역들만 징집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또 "러시아도 비슷한 문제에 직면했지만, 여전히 전투에 투입할 병력이 우크라이나보다는 더 많은 게 현실"이라고 덧붙였다.
스키비츠키 부국장은 이번 전쟁에서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것으로 유럽이 처한 상황을 들었다. 그는 "유럽 국가들이 우크라이나를 돕기 위해 군수물자 생산을 더욱 늘릴 수 있는 방법을 찾지 못한다면, 그들도 러시아의 공격 타깃에 놓이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나토 집단방위조약 제5조(나토 회원국이 공격을 받을 경우, 자동 개입하는 조항/편집자)와 우크라이나와의 접경 지역에 주둔한 나토군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그는 "실제로 나토가 (러시아 공격의) 시험대에 오르면 다를 것"이라며 “러시아군은 7일 안에 발트해 연안 국가들을 장악할텐데, 나토가 대응하려면 10일은 걸릴 것"이라고 했다.
이코노미스트는 그의 발언을 다소 황당하다고 지적했다.
나아가 그는 "우크라이나는 전쟁 초기에 막강한 러시아 공수부대와 해병대의 위협을 제거함으로써 유럽에 다년간의 군사적 우위를 제공했다"며 "유럽은 이에 보답해야 한다"고도 했다.
그의 결론은 이렇다.
“우리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계속 싸울 것이다. 우리는 살아남고 싶다. 하지만 전쟁의 결과는...우리에게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