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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17. 묵상글 ( 사순 제5주일. - 길 떠나는 인생. 등 )
0859, 김찬선 신부님, 이수철 신부님, 상지종 신부님, 김명겸 신부님 글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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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17. 사순 제5주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4.03.17 04:29
- 길 떠나는 인생
오늘 독서와 복음은 ‘영원한 구원’, ‘영원한 생명’을 얘기합니다.
그러니 오늘 사순 제5주일은 ‘영원한 구원/생명을 얻는 길’이 주제일 것입니다.
그런데 영원한 생명의 길은 요한복음에서 아주 선명하게 제시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기에 예수님이라는 길을 따라가면
진리의 길을 가고 생명의 길을 가게 되기에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아닌 다른 사람을 따라가면 안 됩니다.
만일 여러분이 저 김찬선을 따라오시면 안 됩니다.
그러나 제가 주님을 프란치스코나 성인들처럼 잘 따르는 사람이면
저를 따르는 것이 주님을 따르는 것이 되기에 저를 따라도 되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저를 따라오시면 안 됩니다.
그렇다면 이제 주님을 잘 따르는 것이 어떤 것인지 봐야 합니다.
어떤 것이 주님을 잘 따르는 것입니까?
그것은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너무 당연한 것이지만 떠나야 길입니다.
떠나지 않는 길이란 없습니다.
문제는 길 떠나는 인생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황천길을 떠나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자기 목숨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가나안에 가기보다 이집트에서 사는 것이 더 좋기 때문입니다.
부자 청년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십계명 가운데서 제4계명부터 제10계명까지 지켜야 한다고 하신 다음,
모든 걸 다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주고 당신을 따르라고 하시자 따르지 않습니다.
그가 생각한 영원한 생명은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사는 것이었던 겁니다.
그러나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주님을 따라야 하고,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있던 곳을 떠나야 하며,
죽음이라는 강도 건너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떠나 가나안으로 가는 길에 홍해가 있었습니다.
홍해는 죽음의 강이기도 하고 생명의 강이기도 합니다.
이집트의 목숨은 잃고 가나안의 목숨을 얻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것이 싫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것이 싫습니다.
자기 부정이기 때문인데 그러나 자기 목숨을 미워함은
작은 자기는 부정하고 큰 자기가 되기 위해서입니다.
소아(小我)는 죽고 진아(眞我)로 살기 위해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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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17. 사순 제5주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의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가 젊었을 때, 한 여인과 사랑에 빠졌습니다. 여인은 칸트가 청혼해 주길 원했지만, 칸트는 데이트 때마다 철학적인 이야기만 계속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자가 먼저 칸트에게 “당신과 결혼하고 싶어요. 저와 결혼해 주세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칸트는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한 뒤, 도서관에 가서 사랑과 결혼에 대한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결혼해야 하는 이유 354개, 결혼하지 않아야 하는 이유 350개를 찾았습니다. 이제 결정했습니다. 결혼해야 하는 이유가 4개 더 많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칸트는 결혼하지 못했고 평생 독신으로 살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연구 후에 청혼하러 여자의 집에 갔을 때, 그녀의 아버지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닙니까?
“내 딸은 이미 결혼했네. 아이가 둘이나 있지. 그동안 자네는 도대체 어디에 있었나?”
결혼의 장단점을 생각하는 동안 3년이나 흐른 것입니다.
심사숙고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미루기만 하는 것은 큰 후회를 남길 뿐입니다. 특히 사랑이 그렇습니다. 사랑은 먼 훗날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겠다. 사랑하겠다.”라며 뒤로 미루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한다. 사랑한다.”라며 지금 당장 말하고 또 실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 사랑은 미뤄지는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 역시 지금 사랑해야 함을 주님께 배웁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새 계약을 맺으시려고 돌아가실 때가 되었으며, 죽음을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해 드릴 순간이 다가왔음을 말씀하십니다. 그 순간은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단순히 겪는 하나의 사건이 아닌, 이 세상의 삶을 모두 거는 대단한 일입니다. 그런데도 이를 거부하지 않으십니다. 우리 구원을 위한 사랑 때문에 또 하느님 아버지의 영광을 드높이는 사랑을 위해 지금 당장 결심하시고 이행하셨습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듯이, 당신 사랑으로 많은 열매가 맺어지게 되었습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예수님께서는 순종을 배우셨고,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라고 고백하듯이, 주님의 사랑이 모든 구원이 근원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사랑은 어떠해야 할까요? 주님의 사랑을 본받아 지금 곧바로 실천할 수 있는 적극적인 사랑이 되어야 합니다. 미루는 사랑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또 남의 사랑을 먼저 받아야 나도 실천하겠다는 이기적인 사랑도 금물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셨듯이, 어떤 조건도 없이 베풀 수 있는 사랑만이 예수님을 온전하게 따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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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우리가 어디에서 태어날지 선택할 수는 없었더라도 어디로 갈 것인지는 택할 수 있습니다(스티븐 크보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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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17. 사순 제5주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요한 12,26)
사순절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다음 주에는 성주간이 시작 됩니다.
오늘 우리는 파스카에 대한 고통과 승리의 이중교훈을 만나게 됩니다.
<제1독서>는 ‘위로의 책’이라 불리는 <예레미아서>의 말씀입니다. 예레미아는 시나이 계약과는 다른 ‘새 계약’을 맺을 날이 올 것을 예고합니다. 곧 ‘새 계약’으로 당신의 법이 마음과 정신에 새겨지고 허물이 용서되고 당신의 백성과 영원히 결합될 것을 예고합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에게 가슴에 당신의 법을 넣어주고, 마음에 법을 새겨줄 것이며,
그들의 허물을 용서하고 그들의 죄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겠다.’(예레 31,33-34)
<제2독서>는 이 ‘새 계약’이 어떻게 이루어지게 되었는지를 증언해 줍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큰 소리로 부르짖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고 하느님께서는 그 경외심 때문에 들어주셨으며, 또한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하셨고 그리하여 모든 이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음’(히브 5,7-9)을 상기시켜 줍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파스카를 지내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와 계셨는데, 순례하러온 그리스인들이 제자에게 “예수님을 뵙고 싶습니다.”(요한 12,21)하고 청합니다. 여기에 쓰인 “보다”라는 동사는 단지 물리적인 외적인 형태를 보는 것을 넘어 내면적인 의미를 파악하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들은 예수님 안에 간직된 비밀, 곧 그리스도의 신비를 보고자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될 때가 왔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요한 12,23-26)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임과 ‘타인을 위해 죽을 것’임을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당신을 섬기려면, 당신을 따라 그 죽음의 길을 가야함을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당신의 신비를 드러내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예수님께서는 이때를 맞이하여 “마음이 산란합니다.”(요한 12,27)라고 고뇌의 마음을 털어놓으십니다. 그렇지만, 겟세마니에서 “아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마르 14,36) 하시면서도 “아버지 제가 원하는 것을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신 것을 하십시오.”(마르 14,36)라고 하신 것처럼,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십시오.”(요한 12,28)하고 아버지의 뜻에 순명의 응답을 하십니다.
그러자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나는 이미 그것을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겠다.”(요한 12,28)
그렇습니다. 이처럼, 아버지의 뜻에 순명함이 곧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마르 15,34) 하시면서도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루카 23,46)라고 순명하심으로써,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실 것입니다. 결국, 이는 십자가의 현양을 통해서 이루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는 땅에서 들어 올려지면 모든 사람을 나에게 이끌어 들일 것이다.”(요한 12,32)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어떻게 죽임을 당하실 것인지를 가리켜주시면서, 마침내는 십자가의 순명으로 승리를 거두실 것을 알려주십니다. 그리하여,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라는 당신께서 가르쳐주신 ‘주님의 기도’의 첫 구절을 이루십니다. 이처럼, 당신께서는 아버지께서 영광을 입으시기만을 바라시며, 바로 당신의 죽으심으로 아버지의 영광이 드러내시기를 바라십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바로 그 파스카의 때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십자가와 함께 파스카를 맞을 준비를 해야 할 때입니다. 그때가 오면, 우리를 당신과 결합시켜주실 것입니다. 당신의 고통과 영광에 우리를 참여시키심으로써, 우리 마음에 당신의 법을 새겨주시고, 우리의 허물을 지워주실 것입니다. 우리를 아버지의 품 안으로 불러 모으시고, 우리도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도록 하실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십자가의 승리를 통하여 이루실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요한 12,26)
주님!
함께 있는 이를 존중하게 하소서!
함께 있는 이를 업신여기지 않게 하소서!
당신께서 함께 있는 저를 결코 무시하지 않으시듯,
저 역시 곁에 있는 형제를 종중하고,
함께 계신 당신을 섬기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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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17. 사순 제5주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한 사람, 바로 내가 중요하다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당신의 아들을 보내 주시고 영원한 생명의 근원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 시간 구원으로 초대받은 우리의 축복된 삶을 감사하는 가운데 주님을 만나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하루의 일상을 보내면서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라는 말을 몇 번이나 하고 있는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이웃뿐 아니라 하느님께도 말입니다. 사실 내가 숨을 쉬고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감사해야 합니다. 숨을 쉬지 못한다는 것은 이미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살아있을 때 감사의 표현을 구체적으로 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12,24)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자신을 희생하심으로써 많은 사람에게 당신 생명을 나누어 줄 것이라는 사실을 비유적으로 암시하신 말씀입니다. 사실 밀알이‘땅에 떨어져 죽는 것’은 그대로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생명을 낳기 위해 뿌리내림을 뜻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십자가 위의 죽음은 열매를 맺는, 새로운 생명을 위한 죽음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아버지 하느님 안에 온전히 묻히신 결과입니다. 사실 씨앗도 온전히 묻히지 않으면 새에게 쪼아 먹히든 햇볕에 타버리든, 길바닥에서 밟혀 으깨어지기 마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안에 온전히 죽어서 마침내 부활의 영광을 통해 그 죽음이 헛되지 않음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분의 죽음은 우리를 위한 사랑이요, 부활은 그 사랑의 승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한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우리의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죽음을 통해 생명을 살리는 신비를 머리로는 헤아리기 힘들지만, 신앙 선조들의 열정과 사랑을 통해, 순교 신앙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세상에 생명을 주는 모범을 이어가는 신앙인이 되길 기도합니다. 지금은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한 알의 밀알이 될 때입니다. 사랑의 승리를 위해 투신할 때입니다. 그렇다면 일상 안에서 밀알이 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상대를 위해 배려하고 희생하는 것입니다. 부부간에, 부자간에 이웃 간에 공동체의 구성원 간에 서로를 배려하고 존중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이기적인 마음을 절제하고 상대의 삶과 생명을 거룩하게 여기는 마음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미사참례 하실 때 앞자리부터 앉아주시면 늦게 오시는 분이 덜 미안합니다. 늦는 사람이 매일 늦기도 하지만 그래도 주님과 함께하시려 부랴부랴 오시는데… 어떤 사정이 있어서 늦기도 하는데…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 않아봐요… 이것도 배려입니다.
그러나 그 배려와 존중이 온전히 이루어져야 합니다. 단순한 동정심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랑으로 해야 합니다. 그것은 보상을 바라지 않는 베품입니다.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루카17,10)하는 것입니다. “희생은 주님 사랑의 징표”(성 프란치스코)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 정도 했으면 됐지 뭐’, 또는 ‘이렇게 해줬는데 너는 나에게 해 준 게 뭐 있니?’‘너도 이만큼은 해야 하는 거 아니니!’ 하는 마음이 든다면 온전히 묻혔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랑은 보상을 바라지 않습니다. 사랑은 사랑 자체가 보상이기 때문입니다.
밀알이 되어 썩는다는 것은 또한 ‘내가 먼저 미안해’하는 것입니다. ‘염소 두 마리가 외나무다리에서 만났습니다. “너 비켜”, “안돼, 네가 비켜”하며 한참을 옥신각신하다가 한 마리가 말했습니다. “좋아 그렇다면 나도 생각이 있어”. 그러자 다른 한 마리가 놀라서 물었어요. “무슨 생각?” “여기서 늙어 죽을 생각이야”(이규경).
이렇게 고집을 피우는 것을 뭐라 하죠? “똥고집!” 살아가면서 서로 다른 의견과 생각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나 내 뜻을 관철하려고 엉뚱한 고집을 피우면 서로가 피곤하고 힘이 듭니다. “네가 언제까지 그러고 있나 보자” 하는 마음을 가지면 그야말로 ‘지옥’입니다. 그러나 내가 먼저 ‘미안해’ 한다면 그것이 밀알처럼 썩는 것이고 그래야 화해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곳이 천국입니다. “사랑이 있으면 천국이요, 사랑이 없으면 지옥입니다”(까롤로 까레또).
서로 자기의 이익에 매달리는 오늘날, 밀알이 되어 썩는 이가 없다면 사회는 점점 더 각박해지고 힘들어질 것입니다. 가정에서도 아버지와 어머니, 자녀들이 스스로가 밀알이 되지 않고 자신만을 위하는 삶을 추구한다면 행복한 가정을 이룰 수 없습니다. 아버지는 당신의 주장만으로 온 가족을 휘두르고 싶어 하고,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왜 나만 이렇게 힘들게 살아가야 하느냐고 불평하며, 자녀들은 무조건 요구만 하고 서로 양보하지 않는다면 화목한 가정을 이룰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한 알의 밀알이 되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가정에도 이 세상에도 희망이 있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세상이 악한 기운, 이기심, 두려움에 지배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런 인류에게 주님은 용서와 화해, 희망을 가능케 하는 사랑을 선물로 주셨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사랑을 가진다면 그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때로는 ‘계란으로 바위치기다’ 하는 마음이 생길 때도 있습니다. ‘바위와 마주선 느낌이다’ (참으로 답답하고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를 때 쓰는 표현)할 때도 있습니다. 그래도 사랑해야 합니다. 사실 그러면 그럴수록 더 큰 사랑을 필요로 합니다. 요한사도는 말합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 목숨을 내놓으신 그 사실로 우리는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 놓아야 합니다”(1요한3,16).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소중합니다. 밀알이 되어 썩고자 하는 한 사람이 중요합니다. 그는 하느님으로부터 귀히 여김을 받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각자가 짊어지는 십자가는 귀찮고 번거로운 생고생이 아니라 주님과의 더 깊은 사랑에로 고양되는 축복의 초대”(홍승모)입니다.
아브라함은 멸망의 위기에 처한 소돔을 위하여 간절히 빌었습니다. 그리고 롯의 구원을 이끌어 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순명으로 구세주를 잉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한 사람의 기도, 한 사람의 순명, 한 사람이 짊어진 십자가를 통해 모든 이가 구원을 얻게 됩니다. 결국 밀알이 되어 썩는 나를 통해서 우리 이웃의 구원에 결정적 영향을 준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나의 손발을 구원의 도구로 써 주심을 감사합시다. 한 사람, 바로 내가 중요합니다. 그를 사랑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누구나 자기 좋은 것을 찾지 말고 남에게 좋은 것을 찾으십시오!(1코린4,10). 남에게 좋은 일을 하는 가운데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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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17. 사순 제5주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무라까미 하루키는 그의 소설에서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Pain is inevitable Suffering is optional(아픔은 피할 수 없지만, 고통은 선택하기에 달려있다.)”
축구 선수로서 해외에서 인정받고 많은 기록을 남긴 최초의 선수는 ‘차범근’입니다. 그는 ‘차붐’이라고 불리면서 유럽 축구에서도 인정받았습니다. 강인한 체력과 돌파력은 그의 강점이었습니다. 차범근 선수가 씨를 뿌린 유럽축구에 지금은 많은 한국 선수들이 활약하고 있습니다. 박지성 선수가 있었고, 손흥민, 김윤재, 이강인 선수가 있습니다. 제가 미처 이름을 모르지만 더 많은 선수들이 유럽 축구에서 활약하고 있습니다. 야구선수로서 야구의 본고장인 미국에서 인정받고 기록을 남긴 선수로는 ‘박찬호’ 선수가 있습니다. 박찬호 선수 덕분에 저도 90년대 중반에 미국 메이저 야구를 보았습니다. 미국의 강타자를 빠른 속도의 볼로 스트라이크 아웃을 시키는 모습은 자랑스럽기까지 했습니다. 박찬호 선수가 뿌린 씨가 열매를 맺어 지금은 많은 한국 선수들이 활략하고 있습니다. 김병현 선수는 투수로서 메이저 리그에서 우승을 이끌기도 했습니다. 추신수, 최희섭 선수도 있었고, 지금도 4명의 선수가 메이저 리그에서 활약하고 있습니다.
1998년입니다. 한국은 IMF의 위기를 겪고 있었습니다. 전 국민이 좌절과 절망 속에 힘들어 하고 있을 때입니다. 미국의 LPGA 골프에서 한국 선수 박 세리는 아주 인상적인 장면을 보여 주며 우승하였습니다. 박세리 선수는 물가에 떨어진 볼을 치기 위해서 양말을 벗고 물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힘차게 볼을 쳤고, 그 볼로 인해서 우승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저도 그 장면을 보면서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우리 국민은 위로를 받았고, 희망을 보았습니다. 그 뒤로 박세리 선수는 많은 우승을 하였고, 명예의 전당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박세리 선수가 뿌린 씨는 수많은 박세리 ‘키즈’를 키워냈습니다. 한 때는 한국 여자 골프 선수들이 우승한 골프 대회가 절반을 넘었습니다. 명실상부 한국 여자 골프는 세계 골프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최나연, 유소연, 리디아 고, 박인비 선수들이 활약했습니다. 지금도 많은 선수들이 LPGA에서 활약하고 있습니다. 골프를 잘 모르는 제가 이 정도를 아는 것은 그 선수들의 실력이 LPGA에서도 알아 줄 만큼 뛰어나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낯설고, 생소한 곳에서 뿌리를 내리고, 자리를 잡기까지 선수들은 많은 어려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눈물로 씨를 뿌렸기에 기쁨으로 곡식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제가 서울대교구 성소국장으로 있을 때입니다. 신학교에 들어가는 학생들과 면담을 하면 물어보는 것이 있습니다. ‘어떻게 신학교에 들어가려고 했습니까?’라고 묻습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려면 그에 합당한 이유가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학생들이 ‘이태석 신부님’을 이야기했습니다. 학생들은 어릴 때 이태석 신부님의 다큐 ‘울지마 톤즈’를 보았다고 합니다. 그 영상을 보면서 학생들은 자연스럽게 ‘나도 저런 신부님이 되고 싶다.’는 마음을 가졌다고 합니다. 의사였고, 사제였던 이태석 신부님은 멀리 아프리카 수단으로 가서 선교하였습니다. 그곳 아이들에게 음악을 통해서 꿈과 희망을 키워주었습니다. 나병환자들을 방문하면서 그들의 일그러진 발에 맞추어 신발을 제작해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셨습니다. 신부님은 열정을 다 한 후에 안타깝게도 40대의 나이에 하느님의 품으로 가셨습니다. 그러나 신부님의 뜨거운 삶과 열정은 열매를 맺었습니다. 많은 학생들이 사제가 되어서 신부님이 못 다한 꿈을 이루고 있습니다. 톤즈의 학생들은 신부님의 뒤를 이어서 의사가 되었고, 신부님처럼 사랑을 베풀고 있습니다.
꽃이 되어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의미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한 알의 씨앗이 되어 어두운 땅에서 썩어가는 것은 그 무엇보다 소중한 일입니다. 신앙은 꽃이 되기보다는 먼저 씨앗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제가 좋아하는 시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기쁨이라는 것은 언제나 잠시뿐, 돌아서고 나면 험난한 구비가 다시 펼쳐져 있는 이 인생의 길./ 삶이 막막함으로 다가와 주체할 수 없이 울적할 때/ 세상의 중심에서 밀려나 구석에 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 자신의 존재가 한낱 가랑잎처럼 힘없이 팔랑거릴 때/ 그러나 그런 때일수록 나는 더욱 소망한다./ 그것들이 내 삶의 거름이 되어 화사한 꽃밭을 일구어 낼 수 있기를/ 나중에 알찬 열매만 맺을 수만 있다면/ 지금 당장 꽃이 아니라고 슬퍼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에도 씨앗이 되었던 분들이 있었습니다. 그분들이 흘린 땀과 노력이 있었기에 우리는 이렇게 아름다운 성전에서 하느님을 찬양하고, 친교의 공동체를 이룰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씨앗이 되는 분들이 있습니다. 맞습니다. 세상은 아름다운 사람이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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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17. 사순 제5주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래도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생명을 위해 음식을 먹습니다. 우리가 먹는 모든 음식은 생명을 가지고 태어난 것이었습니다. 숨 쉬는 것이었지요. 우리가 먹는 것 중에 그렇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생명만이 생명을 유지할수 있습니다.
주님도, 성체로서 우리의 육신과 영혼에 생명을 불어넣습니다. 또한 어떤 의미로는 우리의 부모도 그러합니다. 자녀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바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욕심도, 하고픈 것도 포기하고 자녀를 위해,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죽어야 산다.’라는 말을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이 말을 이렇게 풀어드릴 수 있겠습니다.
내가 가진 욕심, 내가 가진 나쁜 습관 등을 버려야만, 아니 내 안에서 없애야만 내가 참 하느님의 자녀로서 살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내 안에 때 묻음을 씻어 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내 안에 나쁜 것만을 없애야 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내 안에 소중히 간직한 것, 그중 하느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다면 그 또한 멀리해야 할 대상입니다.
주님은 우리와 함께 사는 것을 너무나 좋아하셨습니다. 그래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저는 바로 이때를 위해 온 것입니다.”라고 말입니다.
그렇게 주님은 사랑하는 사람들을, 자신의 목숨을 뒤로해야 했습니다. 그것이 쉬웠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아버지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을 제게 거두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셨듯이 결코 사랑하는 것을 포기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부활은 고통과 죽음 후에 온다는 것을 말입니다. 누군가를 위해 자신을 포기하고, 내가 가진 것 중에, 그것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하느님 앞에 포기할 수 있을 때 진정한 부활을 우리는 만나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만으로 만족하는 사람, 내가 숨 쉬고 있다는 것만으로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행복이고, 이것이 바로 하늘나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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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장찍기
저의 집무실은
갑곶순교성지 ‘작은 도서관’이라는 곳에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책을 읽겠다는 마음은 간절하나
역시 몸이 따라주지 않습니다.
그래도 한달에 4~5권의 책은 보려합니다.
책을 다 읽으면 뿌듯한 마음으로
책장 첫 페이지에 완독한 날자와 이름을 적습니다.
그리고 도장을 ‘쾅’하고 찍습니다. 책 옆면에도 도장을 찍습니다.
책을 읽을 때도 즐겁고 기쁘지만
다 읽은 책에 ‘완독’의 상징인 도장을 찍을 때도 기쁩니다.
왜 기쁠까요?
왜냐하면 제 손때가 묻은 책이어서 그렇습니다.
주님도 우리를 보면 기쁘지 않으실까요?
왜냐하면....
주님 손때가 묻은 사람이 바로 우리이기 때문입니다.
주님 도장이 우리 이마에 찍혀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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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17. 사순 제5주일. 키엣 대주교님.
썩어 없어진 밀알의 고통
비옥한 땅 위에 두개의 밀알이 있습니다. 한 밀알이 자신의 간절한 소망을 이야기합니다. “나는 땅속 깊이 뿌리내려 반드시 새싹으로 태어날 거야. 따뜻한 봄이 오면 온 얼굴로 땅 위의 따뜻한 햇살을 느끼고, 상큼한 이슬 방울을 나의 어린 잎사귀 위에 간직하고 싶어.” 꿈을 간직한 밀알은 푸르른 잎으로 자랐습니다.
옆의 밀알이 중얼거렸습니다. “깊은 땅속에 뿌리를 내린다면 깜깜한 어둠 속에서 아무것도 볼 수 없을 거야. 그리고 새싹이 땅을 뚫고 세상에 나오려면 상처를 입을 거고 세상에 나온다 해도 애벌레들에게 금방 먹혀버리고 말 거야. 그래도 견뎌서 예쁜 꽃을 피우면 개구장이들이 와서 마구 나를 꺾어버릴 거야. 난 세상이 너무나 무서워. 안전할 때까지 그냥 여기서 기다릴 거야” 밀알은 땅속에 뿌리를 내리지 않고 계속 기다렸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지나가던 암탉이 그 밀알을 얼른 먹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씨앗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 반드시 썩어 없어져야 하는 것이 씨앗의 운명입니다.
아무리 씨앗이 많다 해도 뿌리지 않으면 소용없는 것입니다. 씨앗이 물과 영양분을 흡수하고 형체가 사라질 때 만이 싹이 트고 나무가 되어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도 그렇습니다. 섞어 없어진다는 것은 자신을 희생하고 열심히 일하는 것이며 자신에게 익숙한 많은 것들을 포기하는 고통을 의미합니다. 포기와 고통을 통해 나와 가족. 사회가 발전할 수 있습니다.
영적인 삶은 썩어 없어져야만 열매를 맺는 씨앗과 같습니다.
자신의 의지를 버리고, 주님의 율법에 어긋나는 욕망을 단절하고, 죄의 나락으로 유혹하는 이웃과 물질적 지리적 장소로부터 격리되고자 하는 결심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유혹과 쾌락은 우리 삶의 일부가 되어있기에 익숙한 것으로부터의 단절은 고통이 따를 것입니다. 단절을 통한 손실 또한 감수해야만 합니다. 현재의 “손실”을 받아들인다면 미래에는 반드시 “이득”이 있을 것입니다. 그 “손실”을 통해 “영원한 참 행복”을 얻을 것입니다.
나의 의지를 포기하고 주님의 뜻을 따를 때, 나의 의지를 포기하고 주님을 향해 갈 때만이 주님을 만날 수 있고 주님과의 일치를 이룰 수 있습니다.
황금 벌판을 보며 풍성한 수확을 위해 썩어 없어진 밀알의 고통을 알지 못했습니다. 이처럼 아름다운 세상을 위해 얼마나 많은 분들이 죽음의 고통을 견뎌냈는 지 알지 못했습니다.
주님, 이제 우리가 그 한 알의 밀알이 되게 하여 주소서.
한 알의 밀알처럼 썩어 없어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게 하소서.
지금 현재의 안위가 아니라 하늘나라의 참 행복을 위해 영적인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하소서.
이러한 영적 죽음을 통하여 새생명의 신비를 일깨우게 하여 주소서.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인간은 포기를 통해 성장하지만 포기한다는 것은 그 만큼의 고통을 감수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며 무엇을 포기했을 때 가장 고통스러웠습니까? 그리고 그 포기의 결과는 어떠했습니까?
2. 씨앗은 스스로 썩어 없어져야만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나의 영적 삶에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3.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한 알의 밀알이 되셨습니다. 나는 지금 어떠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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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17. 사순 제5주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보라, 예수님을!”
-새계약의 예수님, 순종과 섬김의 예수님, 십자가와 부활의 예수님-
“보고 배워 닮아갑시다!”
“들어라”만 중요한 말마디가 아니라, “보라” 역시 참 중요한 말마디입니다. 잘 들어라 있는 두 귀요, 잘 보라 있는 두 눈입니다. 무엇을 봐야 합니까? 믿는 이들에게 우선적으로 봐야 할 분은 예수님입니다. 모두가 눈여겨 잘 보라고 제대 뒤 중앙에 높이 걸려있는 십자가의 예수님입니다.
기후위기 시대에 생명 살림 운동에 전념하는 정성헌 선생의 귀띔 40가지중 맨먼저 나오는 충고가 “보고 싶은 사람이 돼라”입니다. 과연 보고 싶은 분이 있으십니까? 여러분을 보고 싶어 하는 분은 있으십니까? 아마 제가 제일 많이 보는 분은 프란치스코 교황 얼굴일 것입니다. 날마다 교황님 홈페이지를 볼 때 마다 예수님을 뵙듯 만나는 교황님 얼굴입니다.
또 수도원에 정주하면서 참 좋아하는 장면이 셋입니다. 자비의 집 숙소문을 열었을 때, 또 집무실문을 열었을 때 활짝 열려 한눈 가득 들어오는 하늘과 산 그리고 아름다운 수도원 전경에 마음도 환해지고 넓어지는 느낌입니다. 또 하나는 성전에서 공동전례기도시 한눈 가득 들어오는 늘 봐도 늘 새로운 형제들 얼굴입니다. 특히 지금도 자비의 집 숙소문을, 집무실 문을 활짝 열었을 때 전개되는 풍경과 더불어 생각나는 "당신이 그리울 때" 라는 시가 있습니다.
“당신이 그리울 때
당신이 보고 싶을 때
눈을 들어 하늘을 본다
한눈 가득 들어오는
가슴 가득 안겨오는
푸른 하늘, 흰구름, 빛나는 별들
한눈 가득 들어오는
가슴 가득 안겨오는
그리운 당신, 보고 싶은 당신”-1998.11.22.
무려 26년전 1998년 여기서 썼던 시입니다. 물론 그리운 당신, 보고 싶은 당신이 상징하는 바, 하느님 얼굴, 예수님 얼굴입니다. 늘 곁에 있어도 늘 그립고 보고 싶은 주님 얼굴입니다. 더불어 생각나는 시편 42장 앞부분 두 구절입니다.
“암사슴이 시냇물을 그리워하듯,
내 영혼 하느님을 그리나이다
내 영혼, 하느님을 생명의 하느님을 애타게 그리건만
그 하느님 얼굴을 언제나 가서 뵈오리까”(시편42,2-3)
믿는 영혼들 누구나의 갈망이 이런 하느님의 얼굴을, 예수님의 얼굴을 뵙는 것이며 바로 이런 마음으로 이 거룩한 미사에 참여하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오늘날 위기의 시대라 칭하며 혹자는 셋을 꼽습니다. “1.기후위기, 2.인공지능, 3.쓰레기”로 모두가 인류의 미래를 위협합니다. 날로 예측 불가능하게 변화되는 기후요, 곳곳에 넘처나는 쓰레기들이요, 날로 들어나는 스마트폰 중독자들이 현재의 추세입니다.
스마트폰을 볼 것이 아니라, 특히 신자들은 하느님을 뵙듯, 예수님을 뵙듯, 눈을 들어 하늘을 자연을 무엇보다 십자가의 예수님을 보는 눈의 훈련이 참으로 절실한 시대입니다. 스마트폰을 볼수록 시력은 나빠질 것이고 예수님을 볼수록 시력은 좋아질 것입니다. 무엇을 보느냐에 따라 내가 형성됩니다. 그냥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깊이 들여다 보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 서두, 예루살렘 축제때 예배를 드리러 온 사람들 몇이 갈릴래아의 벳사이다 출신 필립보에게 다가가 청합니다. 그대로 미사에 참석한 우리들의 심정을 대변하는 듯 합니다.
“선생님, 예수님을 뵙고 싶습니다.”
정말 영성생활에 참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뵙는 것입니다. 그냥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깊이 전체를 꿰뚫어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뵙는 것 역시 능력이요, 똑같은 눈이 아니라 영적 시력의 차이도 클 것입니다. 노화와 더불어 육안의 시력은 약해져도 영안(靈眼)의 시력은, 심안(心眼)의 시력은 날로 좋아졌으면 좋겠습니다.
날로 깊어지는 자비와 지혜, 온유와 겸손, 찬미와 감사의 영안(靈眼)이요, 이런 눈으로 평생 깊이 보고 배워 닮아가야 할 예수님입니다. 분별의 지혜도 이런 눈에서 나옵니다. 우리의 영원한 롤모델이 예수님입니다. 죽을 때까지, 살아있는 그날까지 평생 보고 배워 닮아가야 하는 예수님이요 날마다 예수님을 보고 배워 닮으라고 매일미사가 있습니다.
첫째, 새계약의 예수님을 보고 배워 닮아가야 합니다.
제1독서 예레미야서의 말씀이 참 고맙고 은혜롭습니다. 하느님은 신실하신 분이며 변함없이 당신 약속에 충실하십니다. 예레미야 예언자를 통한 새계약의 약속이 마침내 예수님을 실현되었습니다. 새계약의 이 은혜로운 미사에 참석한 우리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보라, 그날이 온다. 주님의 말씀이다. 그때에 나는 이스라엘 집안과 유다 집안과 새계약을 맺겠다...내가 맺어줄 계약은 이러하다. 주님의 말씀이다. 나는 그들의 가슴에 내 법을 넣어주고, 그들의 마음에 그 법을 새겨 주겠다. 그리하여 나는 그들의 하느님의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그날이 바로 오늘입니다. 그때가 바로 지금입니다. 새계약은 예수님을 통해,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실현되고 있으니 이보다 더 큰 구원의 행복은 없습니다. 주님의 법은 우리 마음에 새겨지고 하느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고 우리는 하느님 아버지의 자녀가 됨을 확인하는 새계약의 미사은총입니다.
둘째, 순종과 섬김의 예수님을 보고 배워 닮아가야 합니다.
값싼 구원은 없습니다. 값싼 새계약의 축복은 없습니다. 새계약이 실현되기까지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뇌와 시련과 고난, 죽음과 부활의 일련의 과정을 깊이 들여다 봐야 합니다. 순종과 섬김으로 요약되는 히브리서의 예수님의 평생 삶의 묘사가 큰 깨우침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계실 때, 당신을 죽음에서 구하실 수 있는 분께 큰 소리로 부르짖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고, 하느님께서는 그 경외심 때문에 들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새삼 우리의 현세 삶은 고난을 겪음으로 순종을 배워가는 순종의 학교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일상의 모든 고난을 순종을 배우는 계기로 삼을 때, 오히려 전화위복의 축복이요 주님을 닮아가는 영적성장과 성숙에 좋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어 요한복음은 우리 모두 예수님의 섬김의 삶을 배우도록 격려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완전히 죽어 무(無)로 없어지는 죽음이 아니라 내적변형을 이뤄주는 죽음입니다. 뿌리가 나고 싹이 트고 꽃이 피고 풍성한 열매의 수확이니 그대로 새생명의 부활 축복으로 이어지는 죽음입니다. 죽음의 상징하는바 섬김의 사랑, 섬김의 비움입니다. 주님은 섬김과 추종을 명쾌하게 요약합니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
섬김과 추종이 하나입니다. 새삼 우리 삶은 예수님을 따라 닮아가는 순종의 여정이자, 섬김의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순종과 섬김의 롤모델인 예수님을 보고 배워 따라 닮아가는 우리 삶의 여정이 참 자랑스럽고 영광스럽습니다.
셋째, 십자가와 부활의 파스카의 영광스런 예수님을 보고 배워 닮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영원히 보고 배워 닮아가야 할 분은 파스카의 예수님뿐입니다. 바로 파스카의 예수님만이 우리의 영원한 희망이자 기쁨이 되고 끊임없이 샘솟는 내적 활력의 원천이 됩니다. 파스카의 예수님은 순종의 여정에 항구함으로 완전하게 되신 뒤에는 당신께 순종하는 우리 모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다음 예수님의 고백과 기도가 마음 깊이 와 닿습니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될 때가 왔다... 저는 바로 이때를 위하여 온 것입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십시오...이제 이 세상은 심판을 받는다. 이제 세상의 우두머리가 밖으로 쫓겨날 것이다. 나는 땅에서 들어 올려지면 모든 사람을 나에게 이끌어 들일 것이다.”
주님은 부활 영광의 승리로 끝나는 죽음임을 예고합니다. 우리가 영광스럽게 되고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는 우리의 삶이자 죽음이라면, 얼마나 아름답고 거룩한 삶이자 죽음이겠는지요! 곧장 부활의 영광이 뒤따를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부단히 당신 십자가와 부활의 영광으로 이끄시어 영적승리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예수님을 보고 배워 닮아가는 파스카의 여정에 항구하도록 힘을 북돋아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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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17. 사순 제5주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밀알 하나>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
밀알 하나
땅에 떨어져
죽습니다
마침내 맺을
많은 열매
믿고
바라고
사랑하기에
그 열매 가운데
단 하나라도
비록 제 품에
담을 수는
없지만
밀알 하나
기꺼이 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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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17. 사순 제5주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그리스도의 수난의 절정에 이르는 성주간을 앞둔 사순시기 5주간 독서와 복음은 우리들에게 자비와 사랑이 넘치는 하느님이심을 보여줍니다. 무엇보다도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허물을 용서하시고 죄를 기억하시지 않으시는 무한하신 자비를 보여 주시고자 하십니다.
실질적으로 사순을 마무리하는 이 한주간에 무엇보다도 그분의 자비와 사랑을 통한 용서와 죄에 대해서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주간에 우리는 마음안에 자리잡은 절망을 몰아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죄를 용서하시지 않으시리라는 그릇된 관념에서부터 나타나는 절망은 오히려 또 다른 죄를 범하도록 유인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용서가 일상안에서 구체적으로 행해져야 합니다. 하찮은 잘못만을 용서하는 용서는 용서가 아니며 용서할 만한 것만을 용서하는 자비는 자비가 아닙니다. 용서란 증오를 멈추고 앙갚음을 포기하는 자비로운 마음입니다. 용서하는 사람이 용서받는 사람보다도 하느님 자비를 더 깊이 체험하게 됩니다.
또한 우리 안에 자리잡은 죄에 대해서도 겸허히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죄는 사랑이 약해질 때 온간 죄악이 자라나게 됩니다. 죄의 습관은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남아 있고 그 기억도 남아 있어 또 다시 죄로 유혹하기에 죄를 잘 살펴야 합니다. 우리는 죄에 빠지기 쉬운 우리의 영적 연약성과 경향을 기억하고서 가능한한 유혹을 피해야 합니다.
물질적 좋음에 대한 애착이나 영적인 좋음에 대한 애착으로 인해 생겨나는 죄, 습관적으로 인한 죄, 그리고 열정으로 인한 죄들을 바라보고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은총을 청해야 합니다.
모든 죄의 뿌리는 사도 바오로가 말하듯이 재물에 대한 탐욕입니다. 재물은 모든 나쁜 욕심을 키우고 채울 수 있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모든 죄의 시작은 집회서가 말하고 있듯이(10,15) 교만입니다. 교만은 남보다 두드러지고 싶어하는 무질서한 사람으로서 무엇보다도 이 세상의 좋음과 쾌락들을 추구합니다.
성 프란치스코의 ‘악습을 몰아내는 덕행’을 묵상하며 사순시기를 잘 마무리 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과 지혜가 있는 곳에
두려움도 무지도 없습니다.
인내와 겸손이 있는 곳에
분노도 흥분도 없습니다.
기쁨과 더불어 가난이 있는 곳에
탐욕도 욕심도 없습니다.
고요와 묵상이 있는 곳에
근심도 분심도 없습니다.
자기 집을 지키기 위하여 주님께 대한 경외심이 있는 곳에
원수가 침임할 틈이 없습니다.
자비심과 깊은 사려가 있는 곳에 경박도 고집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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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요일 성체의 날✝️
<세계 도처에 일어난 성체의 기적(마리아 헤젤러)>
브와-시뇰-이삭에서 피흘리는 성체
벨기에-1405년
그러나 주님께서는 성주의 어리석은 변명에 만족하시지 않고 오히려 그가 더욱 더 열심히 살도록 그를 격려하였다.
“네가 진정 찾고자 한다면 그러한 의사를 쉽게 찾게 될 것이다. (그와 동시에 아마 이 기사 자신도 그런 의사로서 부름을 받았을 것이다. ) 말해 보아라, 너희들이 날마다 내게 새로운 상처를 입히는데 어떻게 내가 온 몸에 상처를 입지 않을 수 있겠느냐?"
그리고 나서 그 하느님의 상처를 입고 있는 그분은 놀란 성주에게 당신 가슴의 극심한 상처를 보여 주며 말했다.
“이리로 내게 가까이와서 이 옆구리의 상처를 자세히 보라. 이것이 내 고통을 크게 하고 있노라! "
쟝 뒤 브와는 구세주의 피가 흐르는 가슴의 상처를 보고 슬픈나머지 크게 소리쳤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심으로써 그에게 진실한 사랑을 갖도록 타이르셨다.
“네가 단지 말로써 나를 치료해 줄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면 적어도 내 고통을 덜 수 있도록 네 손을 내 상처에 얹어라. 그리고 네가 할 수 있는 바를 해 보아라. 그리고 네가 나를 위해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게 될 때까지 네가 무엇을 해야 할지 깨닫도록 너에게 나타난 것이다. 그러면 나는 세상의 죄를 용서 해 줄 것이다.”(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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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17. 사순 제5주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수난의 길에 앞서
마음의 산란함을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수난의 때를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음을 아시는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 그 때를 벗어나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공관 복음을 통해
예수님께서 겟세마니에서 기도하신 장면을
기억합니다.
공관 복음에서는
수난의 잔을 거두어 달라고 기도하시지만
요한복음은 이 장면을 전하지 않습니다.
즉 요한복음에 나타난 예수님은
수난을 거부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그 길로 나아가는 모습으로
묘사됩니다.
이 모습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잡으러 왔을 때에도
나타납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계신 곳으로 오자
예수님께서 먼저 그들에게 나아가시며
'누구를 찾느냐?'하고 물으십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몸소 당신이 밀알 하나가 되기 위해서
죽음을 받아들이십니다.
여기에서 많은 열매는
당신을 믿는 이들,
그래서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주실
영원한 생명을 의미합니다.
그것을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땅에서 들어 올려지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땅에서 들어 올려진 십자가
그 십자가는 많은 이를 위한 죽음이고
그 죽음을 예수님께서는
결코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그것은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며
많은 이에 대한 사랑 표현입니다.
사랑을 위한 죽음
사랑을 위한 희생
그것이 우리를 위한 것이라면
우리의 몫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에 있습니다.
죽기까지 누군가 나를 사랑한다면
그 사랑을 받아들여
나도 나 자신을 사랑해야합니다.
그것이 나를 사랑하는 사람의 뜻일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될 때가 왔습니다.
그 사랑이 우리를 향해 오고 있습니다.
그 사랑을 받아들여
충만한 기쁨을 살아갈 수 있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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