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붉은 섬
이강산
하늘은 잿빛이다. 흑백사진을 촬영할 때 노출 측정용으로 사용하는 그레이 카드, 그 빛이다. 나는 몽골 여행 카페를 열었다.
몽골 출사 여행. 함께 가실 분, 답글, 혹은 메일주세요.
‘동행구하기’ 게시판 글을 읽으며 나는 무릎을 쳤다. 드디어 떠날 수 있게 되었구나. 카페 게시판에 글을 올리려던 차였다. 몽골 평원, 사진 촬영 동행자를 찾습니다. 마침 같은 내용의 글이 올라와 있었다. 그러나 마지막 문장을 읽으며 된숨을 내쉬었다.
현재 여자 2명입니다.
여자 2명. 그 내용만 아니었어도 나는 답글을 썼을 것이다. 내일 당장이라도 떠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니었다.
소매치기 및 아이디 관리 주의. 몽골 여행 카페지기의 경고는 특별히 신경 쓸 일이 못되었다. 어느 나라든 소매치기는 피할 수 없었다. 프랑스 루브르박물관은 소매치기 때문에 한 달씩이나 스스로 문을 닫았다. 오죽했으면 박물관 직원이 자신의 생존권을 자진 반납했겠는가. 선배 사진가는 인도 촬영 투어 도중에 카메라 배낭을 송두리째 잃어버렸다. 소매치기나 소지품 분실 문제는 아시아든 유럽이든 내가 조심하면 해결될 일이었다. 파리에서 베네치아를 거쳐 로마까지 나는 바지 속에 복대를 두르고 다니지 않았던가.
출사 동행이 여자라는 게 문제였다. 단순히 몽골 유적지 관광 촬영이 아니기 때문이다. 최소 5박 6일의 트래킹 코스였다. 카메라 배낭을 짊어지고 혹한의 들판을 걷다가 냉장실 같은 게르에서 숙식을 해야 한다. 남자들도 쉽지 않은 여정이었다. 1월의 몽골 추위란 그야말로 바람마저 얼어붙어 그 바람의 얼음조각들이 뼛속까지 파고드는 느낌이라 했다. 그럼에도 기어이 몽골의 겨울을 고집한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눈 감고 셔터를 눌러도 푸른 하늘과 흰 구름과 지평선이 찍힌다. 여름에 몽골 출사를 다녀온 선배 사진가의 이야기였다. 그러나 내가 원하는 몽골은 푸른 하늘과 흰 구름과 지평선이 아니었다. 눈 덮인 평원을 가로지르는 기마민족 몽골리안의 원시적 모습. 그 흑백 풍경이었다.
남자든 여자든 겨울 출사 동행은 처음부터 쉬운 일이 아니었다. 몽골 투어 신청자를 한 달 가까이 찾아볼 수 없었다. 예상했던 일이었지만 겨울 기행 일정에 비상이 걸렸다. 카페를 드나들며 벌써 1월의 절반을 놓쳐버렸다. 학원 휴강기간에 다녀오려면 1월 말이라도 출국해야 가까스로 일정을 맞출 수 있었다. 그러자면 오늘, 내일 사이에 여행사에 계약금을 건네고 항공권 예약을 마쳐야 한다. 오늘 아침 몽골 여행 카페 문을 다급하게 연 것은 차마 마지막 희망을 놓을 수가 없어서였다. 그러나 이미 때를 놓친 셈이었다.
나는 여기저기 몽골 여행 사이트를 뒤지며 반나절을 끙끙거리다 국내 길찾기를 검색했다. 도착지, 강원도 정선군 여량면 구절리. 자동차 소요시간 약 3시간 48분. 총거리 약 263.0킬로미터. 왕복 천 리 길이었다. 눈만 내리지 않으면 아침 일찍 출발해서 자정 전엔 귀가할 수 있는 거리였다. 구절리를 먼저 다녀오자. 나는 몽골 출사 여행을 접기로 했다. 휴대폰을 들고 문자를 찍었다.
모레 아침, 구절리행 가능합니다.
바지주머니에 휴대폰을 넣고 창 밖을 보니 하늘은 여전히 잿빛이다. 오늘 밤부터 전국적으로 약간의 눈이 날린다는 예보가 나왔다. 길 위에 살짝 덮이는 정도라면 문제없겠지만 깡마른 내 발자국이 찍힐 만큼 눈이 쌓이면 차 운전은 무리였다. 구절양장 같은 길을 타고 해발 1,300미터까지 올라가야 한다. 어쨌거나 체인은……. 주머니 속에서 휴대폰 진동이 느껴졌다.
구절리, 기다릴게요.
해거름이었다. 1월 중순이면 일몰이 손가락 한마디쯤 늘어졌을 테지만 날이 흐려 노을은 없다. 노을에 한 번도 물들지 못한 채 이대로 겨울이 끝날 것만 같다. 지금 당장 동쪽 호숫가로 달려가면 엊그제 호수를 떠다니던 노을의 조각배를 발견할 수 있을까. 나는 문득 이틀 전 양 원장의 침묵 속으로 닻을 내리던 조각배를 떠올렸다. 깊고 넓은 침묵의 호수에 떠 있는 붉은 조각배를. 그 조각배가 항해한 먼먼 여름의 항로를.
“왼쪽 창 밖 보세요. 타워 브릿지가 열립니다.”
가이드가 소릴 질렀다. 차장 밖 멀리 타워 브릿지가 보였다. 다리 중간 부분 상판이 시옷자로 벌어지는 중이었다.
“여러분들, 정말 행운이십니다. 저 문이 열리는 거 보기 쉽지 않거든요. 여기 사는 저도 일 년에 두어 번 보는 풍경입니다.”
런던 도심 골목을 몇 번 꺾어 돈 버스가 마침내 정차했다. 가랑비가 뿌렸다. 점심을 막 지났는데 벌써 세 번째 빗줄기다. 일행은 우산을 들고 버스에서 내렸다. 건물 주차장을 빠져나와 종종걸음으로 템즈강 변에 닿았을 땐 이미 타워 브릿지 문이 닫힌 뒤였다. 워낙 관광 차량이 많아 정체가 길어진 탓이었다. 아니, 어쩌면 우리가 본 것은 타워 브릿지가 닫히는 모습이었는지도 몰랐다.
“사진 촬영하고 십오 분 뒤 출발합니다. 시간 지켜주세요.”
타워 브릿지를 배경으로 전체 기념촬영을 한 뒤 일행은 조별로 뿔뿔이 흩어졌다. 런던 2박 째, 다섯 번째 관광코스였다. 양 원장은 한 컷도 개인 사진을 찍지 않았다. 내 요구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내 카메라를 들고 두어 차례 셔터를 눌렀을 뿐. 런던공항에 도착해서 호텔에 짐을 풀 때까지 양 원장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대영박물관과 국회의사당과 버킹검 궁전과 트라팔가 광장을 오가면서도 사진 촬영은 물론 일체 말이 없었다. 딱 한마디를 꺼내긴 했다. 출국 전, 인천공항에서 가이드가 조를 나눌 때.
“인사드릴게요. 월드 투어 유럽팀장 김지연이라고 합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메일에서 준비물과 주의사항 보셨죠? 자, 시간 없으니까 간단히 확인 말씀드립니다. 이번 유럽 9박 11일 패키지여행은 모두 열일곱 명입니다. 저 포함해서 열여덟 명. 아셨죠? 열여덟 명이 11일간 한 가족, 한 몸처럼 움직이셔야 안전하고 즐거운 여행이 되시는 겁니다. 서울 가족 세 분이 한 조, 광주 가족 네 분이 한 조, 수원 직장동료 여덟 분이 네 명씩 두 조가 됩니다. 그리고 천안에서 오신 대학생님과 충주에서 오신 아주머니, 대전에서 오신 아저씨, 이렇게 세 분이 한 조가 되는 겁니다. 모두 충청도에 사시니까 한 가족이라 여기면 되겠어요. 대학생이 아들 노릇하고 아주머니께서 어머니, 아저씨께서 아버지 역할하시면 딱 맞겠어요.”
“팀장님, 대학생 어머니하기엔 제가 너무 젊은 것 같은데요.”
“그냥 일찍 결혼하셨다고 생각하세요.”
젊은 어머니 역할을 꺼린 양 원장은 그러나 결코 젊지 않았다. 어림짐작으로도 사십 대 중반은 되어보였다. 런던에서 유로스타를 타고 파리에 자정 무렵 도착했을 때 양 원장은 지친 모습이 역력했다. 이튿날 저녁에도 그랬다. 저녁 여덟 시가 되어도 해가 떨어지지 않아 일행은 호텔 뒤편의 호밀밭에서 펄펄 뛰었다. 기념촬영을 하고 들판에서 환호성을 지르며. 날이 어두워져 일행이 호텔에 돌아올 때까지 양 원장은 관절염 환자처럼 로비에서 앉아만 있었다.
“쉽게 지칠 나이죠, 마흔 중반이면.”
“가이드님, 그게 아닌 것 같아요. 우리도 다 중년 이쪽저쪽인데, 건강이 문제가 아니라 다른 일이 있나 봐요.”
비에 흠뻑 젖어 에펠탑을 내려와 베르사이유 궁전을 돌아볼 때 사람들은 웅성거렸다. 가이드가 진정을 시켰지만 수군거리는 소리가 내 귀에까지 들렸다. 시간에 쫓겨 세느강 유람선을 포기하고 몽마르뜨 언덕에 올랐을 때, 양 원장은 발목이 불편하다며 화가의 거리에 들어서지 않았다.
“대열에서 한 사람만 떨어지면 위험해요. 소매치기도 많고 잡상인도 많아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요.”
나는 가이드를 대신해서 양 원장 곁에 남기로 하고 화가의 거리를 포기했다. 양 원장은 파리 시내를 굽어보며 침묵했다.
“죄송합니다.”
일행이 화가의 거리를 돌아 나와 몽마르뜨 언덕의 계단으로 내려설 때였다. 양 원장이 입을 열었다. 나는 일행 쪽으로 걸음을 옮기려다 멈칫, 했다.
“몸이 안 좋으신가 봐요.”
“…….”
스위스 제네바행 TGV를 타기 위해 리옹역 대합실에서 한 시간 가량을 서 있었다. 대학생이 일행을 따라가서 사들고 온 생과일주스를 양 원장에게 건넸다.
“고마워요.”
양 원장이 프랑스에서 꺼낸 말은 그게 마지막이었다. 제네바에서 전세버스를 타고 알프스 산마을 샤모니로 달리는 내내 양 원장은 침묵했다.
“화이트 와인, 참 맑군요.”
양 원장이 완성된 문장에 가까운 말을 처음 꺼낸 것은 샤모니에서였다. 가랑비가 뿌리는 샤모니는 조용했다. 마을을 양옆에서 에워싼, 만년설이 덮인 산봉우리도 조용했다. 저기, 저쪽 산 중턱에 거대한 얼음덩어리들 보이죠. 메르데글라스, 빙합니다. 가이드가 가리킨 빙하는 조용하다 못해 적막하기까지 했다. 순백색의 적막. 적막의 처녀성 같은 마을. 나는 만년설에 에워싸인 알프스의 산마을 샤모니에 대한 첫인상을 그렇게 새겼다. 가이드가 안내한 한인식당도 우리 일행이 들이닥치지만 않았다면 적막강산이었을 것이다. 한국이라면 한창 저녁 밥상 차리는 소리로 떠들썩할 무렵이었다. 식당은 텅 비어있었다. 그 적막한 풍경을 깨뜨린 것은 와인잔 부딪치는 소리였다.
“자, 건강과 행복을 위하여!”
임시반장을 맡은 광주 가장이 건배를 외치자 일행은 일제히 소리쳤다. 위하여! 오로지 이 순간만을 기다리며 영국과 프랑스를 거쳐온 사람들처럼 일행은 와인잔을 단숨에 비웠다. 놀라운 것은 와인잔을 세 번씩이나 나에게 들이민 양 원장의 태도였다. 적막의 옷 한 겹을 벗어던진 것처럼 양 원장은 조심스레 와인잔을 기울였다.
“참 맑아요, 화이트 와인.”
그뿐이었다. 우리 가족의 식탁은 다시 침묵이었다. 대학생조차 어른들의 눈치를 살피는 탓에 며칠째 침묵의 성찬을 드는 중이었다. 한국의 샤브샤브처럼 끓는 물에 소고기를 데쳐 먹는 뽕디. 다들 연하고 부드럽다며 칭찬 일색인 그 소고기 살점을 질긴 수입고기 씹듯 오물거리며 나는 와인을 들이켰다. 무슨 말이든 양 원장의 입에서 나오길 기대했지만 식탁을 벗어날 때까지 양 원장은 끝내 침묵으로 일관했다.
“안녕하세요. 날씨가 참 좋아요.”
6일째 아침이었다. 양 원장이 처음 내게 인사를 건넨 것은. 하룻밤 묵고 떠날 예정인 메리뀨리 호텔 발코니에서였다. 와인 덕분에 단잠을 자고 일어난 뒤였다. 발코니의 제라늄꽃을 배경으로 셀프 사진을 막 찍으려던 참이었다. 바로 옆 객실의 발코니에서 양 원장이 목례를 했다. 빨간색 제라늄 꽃잎에 양 원장의 한쪽 어깨가 묻혀있었다.
“잘 주무셨어요? 날씨가 생각보다 쌀쌀하지 않네요.”
“네. 알프스가 따뜻하게 품어준 덕분에 숙면을 했어요.”
“꽃잎 빛깔이 너무 강렬해서 사진 좀 찍고 있어요.”
“저도 사진 좋아해요. 사진 배우려고 대학교 평생교육원 사진반도 수료했어요.”
나는 카메라를 내려놓고 하이파이브 손짓을 했다. 팔을 뻗치면 닿을 듯한 거리에서 양 원장의 손바닥이 잠깐 흔들렸다. 등 뒤에 서 있는 만년설처럼 하얀 손바닥이었다. 그것은 마치 제라늄꽃 속에서 날아오른 것처럼 아주 짧은 순간 꽃잎 위에 떠 있다가 이내 꽃 속으로 사라졌다. 알프스의 골짜기에서도 나비가 나는구나. 순간, 나는 흰 손바닥을 나비라고 나지막이 불렀다. 일행의 뒤를 좇아 부지런히 날갯짓을 하며 샤모니를 떠난 나비는 밀라노와 베네치아를 거쳐 피렌체와 로마의 펄펄 끓는 거리에서도 보일 듯 말듯 날아다녔다. 그리고 그것은 따뜻한 보금자리, 약속의 땅을 찾아 수만 킬로미터의 바다를 횡단하는 제주왕나비처럼 우리가 인천공항에 무사히 내려앉을 때까지 날개가 다 찢어진 채 고요히 날아다녔다.
정선 24km.
영월에서 태백으로 넘어가는 국도 이정표에 정선이 보였다. 다음 삼거리에서 좌회전한 뒤 59번 지방도를 타고 수직으로 북향하면 정선이었다. 구절리는 정선에서 이십여 분 거리의 태백산 능선 자락에 숨어있을 터였다.
“정선이 벌써 몇 번째에요. 이제 그만 집착을 버리세요, 제발.”
아내의 말을 못 들은 척 정선을 세 번째 다녀간 게 지지난해 가을이었다. 흑백사진 개인전 촬영 때문이었다. 「섬, 육지의」. 변방의 여인숙을 육지의 외딴섬으로 설정하고 작업 중인 여인숙 다큐 촬영이었다. 망망대해에 떠 있는, 5만분의 1 지도에는 표기조차 되지 않는 외딴섬. 자본의 바다, 인간의 바다에 표류하듯 떠 있는 여인숙. 외딴섬과 여인숙의 이미지가 닮았다는 생각에서 셔터를 누르기 시작했다. 지난 4, 5년 간 나는 그 섬에 수없이 정박했다. 서해 횡도와 영산도와 아차도를 밟던 걸음을 옮겨 육지의 섬을 부지런히 오르내렸다. 원앙여인숙, 부자여인숙, 강경여인숙, 이쁜이집……. 어느 섬이든 불과 2만 원이면 닻을 내릴 수 있었다. 네 번째 정선행인 오늘은 그러나 섬에 정박하지 않아도 되었다.
싸락눈이 흩날렸는지 길은 젖었지만 다행히 얼음이 깔리진 않았다. 먹다 남은 밥그릇처럼 말라붙은 밭고랑과 어딘가 멀리 달아날듯 몸무게를 확 줄인 숲에 듬성듬성 잔설이 보였다. 정선 인근의 낮고 짧은 산줄기의 기온은 태백산의 핏줄답게 고루고루 맵찼다. 그 추위에 길은 잔뜩 몸을 웅크린 채 좀처럼 허리를 펼 줄 몰랐다.
추위만 모른 척한다면 길은 마을 골목처럼 편안하고 낯이 익었다. 늘 혼자였지만 어디서든 길은 한결같은 모습을 내게 보여주었다. 적당히 굽고 적당히 곧은 길. 겸손한 자세로 자신을 굽힐 줄 알고 조심스레 자신을 드러낼 줄 아는 미덕을 지닌 길. 가는 곳마다 길이란 길은 예외 없이 제 안에 곡선을 품고 있었고, 그래서 넉넉하고 아름다웠다. 그 곡선이 바로 자연미의 중심이라고 어느 국토여행가는 목청을 높였지만 굳이 목청을 높일 까닭이 없었다. 자연은 처음부터 곡선의 결정체였고 길은 그 자연의 실핏줄 같은 존재였으니까. 당연하게도 나 역시 자연의 한 점일 터, 자연의 핏줄을 따라 흰 피톨처럼 홀로 떠다니는 사이, 나는 사람의 체온 같은 따뜻한 온기를 그로부터 체감한 지 오래였다. 그래서였을까. 어디로든 길을 따라 떠나면 마음과 몸이 가벼워지는 것은.
“집 밖으로 나도는 그 역마 같은 걸 그만 떨치세요.”
나는 차 속도를 줄였다. 등 뒤 어디선가 아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옆자리의 양 원장을 힐끗, 바라보았다. 잠이 들었는지, 아니면 생각에 잠겼는지 양 원장은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다. 충주휴게소에서 양 원장을 태우고 한 시간 반가량을 달렸을 것이다. 이 속도라면 점심시간에 늦지 않게 정선에 닿을 수 있었다. 양 원장이 몸을 움직이는 것으로 보아 눈을 뜬 모양이었다.
“함평 나비축제, 가보셨어요?”
“아직.”
“나비가 참 아름다워요. 몇 해 전 봄에 아들 형제와 다녀온 적 있어요.”
“…….”
양 원장은 다시 침묵했다. 충주휴게소를 떠나면서 줄곧 이어지던 침묵이었다. 그것은 지난 주말 동쪽 호숫가 모래언덕에 앉은 두 사람이 일몰의 호수 위로 돌팔매질을 하면서 물수제비를 뜨던 그 침묵이기도 했다.
내가 뜬금없이 함평 나비를 입에 담은 뜻을 양 원장은 알 리 없었다. 나는 집을 떠나 충주를 향해 달리는 동안 7월의 유럽 여행을 떠올렸다. 그중 알프스 산마을 샤모니의 제라늄꽃 위로 날아오르던 흰나비에 매달려 있었다. 그 나비는 내가 마흔아홉 해를 살면서 보았던 그 어떤 나비보다 강렬한 인상을 내게 각인시켜주었다. 그처럼 가볍게, 그처럼 눈부시게 날갯짓을 하며 날아오르는 나비를 본 적이 있던가. 기억이 나질 않는다.
“붉은 나비도 많겠죠?”
양 원장이 눈을 뜨고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길은 태백산 능선을 따라 오르막과 내리막이 반복되면서 경사가 급했다. 나는 앞을 보고 말했다.
“네. 붉은호랑나비가 있어요.”
나는 붉은에 힘을 주어 말했다. 수백 마리의 붉은호랑나비가 우리 둘 사이에 떼 지어 날아다니는 사이, 몽골 평원의 얼음처럼 차고 무거웠던 침묵이 짧게, 짧게 토막이 나고 있었다. 어느덧 정선 시내였다. 정선역 쪽으로 차를 몰았다. 역 골목의 호수여인숙을 잠깐 둘러보고 점심을 먹을 생각이었다. 호수여인숙 주인 노파가 나를 알아볼까? 못 알아보아도 상관없는 일이다. 호수여인숙 사진을 찍었던 102호실만 들여다보면 되었다.
지난 주말이었다. 양 원장을 동쪽 호수로 초대했다. 유럽을 다녀온 뒤 네 번째 출사 동행이었다. 촬영을 마치고 호숫가에서 잠시 쉴 때, 양 원장에게 작년 봄에 열었던 흑백사진전 리플릿을 건넸다. 그 속에 실린 「호수여인숙」이 정선역 앞 호수여인숙 102호실 사진이었다. 태백산에서 발견한 호수와 섬을 여인숙 다큐사진전에 발표하기 전 먼저 공개한 것이다. 사진의 흐름을 파악할 겸 독자의 반응도 알아볼 겸. 리플릿을 넘기던 양 원장의 손이 호수여인숙 앞에서 멈췄다.
“유 선생님. 이 사진 속 불빛, 붉은색 꼬마전구 맞죠?”
“예, 15촉짜리 전구랍니다.”
“아직도 이런 게 있군요.”
“그거 발견하고 놀랐어요. 오래전에 사라져서 기억 속에만 남아있던 물건인데.”
“저도 기억해요. 어릴 때 아버지가 뒷간에 매달아놓은 꼬마전구. 쭈그려 앉은 내 모습을 출입문 전체에 비춰주던 불빛. 무섭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했던 물건이었죠.”
호숫가에서 양 원장은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그리곤 만연체의 문장 하나를 풀어놓았다. 나는 깜짝 놀랐다. 양 원장이 이렇듯 길게 말한 적이 없었다. 유럽을 다녀온 뒤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빨강 기차를 타고 싶어요.”
“예?”
“알프스 몽땅베르산이었죠? 샤모니에서 산에 올라갈 때 탔던 기차, 그 빨강색 기차.”
“우리나라엔 빨강 기차가…….”
“있어요.”
“어디…….”
“구절리. 강원도 정선 구절리에 있어요.”
나는 당황했다. 양 원장의 입에서 구절리가 나오다니.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사진 때문에 유 선생님은 한두 번쯤 다녀온 적 있을 것 같아요.”
빨강 기차와 호수여인숙. 우연한 조우였다. 나는 주저하던 끝에 입을 열었다.
“사진전에 걸었던 호수여인숙…… 정선에서 촬영했어요.”
“아, 그랬군요.”
“정선에서 이십 분 정도 올라가면 구절립니다. 그런데 어떻게 거길?”
“텔레비전에서 봤어요. 구절리역에 옛날 기차를 개조한 카페가 있더군요. 빨강 열차카페죠. 그리고 레일바이크가 운행되었어요. 그 레일바이크도 빨강이었고요.”
양 원장의 말은 맞았다. 텔레비전에서 보았다는 기억도 정확했다. 태백산 정선군 일대의 탄광촌이 폐쇄되고 카지노가 들어서면서 정선선이 끊긴 뒤 정선선 종착역인 구절리역은 관광지로 변해 있었다. 비둘기호 낡은 객실을 개조한 열차카페와 레일바이크를 운행하면서.
양 원장이 빨강 기차를 처음 입에 담은 것은 지난 주말 동쪽 호숫가가 아니었다. 유럽에서 돌아와 한 달쯤 지나서였다. 아침저녁 바람이 제법 초가을 맛이 느껴질 때였다. 양 원장과 증평 장터 촬영에 동행했다. 유럽 여행 중 도움을 받은 보답으로 양 원장이 초대한 일이었다. 함께 촬영을 하면서 사진도 배우고 싶다며. 증평 장터에 앉아 순대국밥을 먹으면서 양 원장은 빨강 기차를 꺼냈다. 샤모니의 빨강 기차. 참 아름다웠어요. 그리고 입동 무렵, 함께 출사 나갔던 충주호에서 양 원장은 카메라 대신 내 앞에 빨강 기차를 들이밀었다. 그 기차가, 충주호 물속으로 잠긴 줄 알았던 그 기차가 느닷없이 지난 주말 물속에서 솟아올랐다. 양 원장이 빨강 기차를 몰고 멀리 동쪽 호수를 건너온 것이다.
“이번 겨울에 구절리를 꼭 한번 다녀올 생각입니다.”
“…….”
“유 선생님만 괜찮다면 구절리까지 동행을 부탁드리고 싶어요. 언제든 연락 기다릴게요.”
동쪽 호수에서 돌아온 이틀 뒤, 나는 몽골 출사 여행을 포기하고 양 원장에게 문자를 찍었다. 모레 아침, 구절리행 가능합니다.
“유 선생님. 저 펜션, 어디서 본 것 같은 풍경이죠?”
“아, 샤모니에서 묵었던…….”
“네, 메리뀨리 호텔. 그 모습이어요.”
구절리역 주차장에 차를 댄 것은 오후 세 시였다. 시간에 쫓길까 염려되어 호수여인숙은 간판만 보고 정선을 떠났다. 차에서 내려 역 풍경을 둘러보던 양 원장이 반색을 했다.
“어쩌면 이렇게 외양이 닮을 수가 있죠?”
역 맞은편 펜션을 향해 걸어가면서 양 원장은 낮게, 낮게 감탄사를 이어갔다. 펜션 뒤편에 굴뚝이 있는지, 집 주인이 뒷마당에서 장작을 태우는지 연기가 날렸다.
태백산 화전민의 전통 너와지붕 흉내를 낸 뾰족지붕. 절반으로 켠 통나무를 콘크리트 골조에 덧댄 외벽. 펜션은 언뜻 보면 화이트 와인과 뽕디에 취했던 샤모니의 한인식당 같았다. 아니, 양 원장이 선뜻 메리뀨리 호텔을 연상한 것은 펜션의 각 방마다 뾰족 지붕을 따로 하고 벽에 굴곡을 넣어 변화를 준 모습 때문일 것이었다. 그러나 펜션은 방에 딸린 발코니가 없었고, 당연히 붉은 제라늄꽃이 담긴 화분도 보이지 않았다.
“바로 이것이었군요. 정선레일바이크.”
구절리역 맞은편의 펜션에서 눈을 돌린 양 원장이 역 광장에 세워둔 조형물을 가리켰다. 철판을 잘라 만든 모형 레일바이크였다. 빨강 레일바이크에 올라앉은 잿빛 사내가 야호를 외치고 있었다.
“저쪽, 저기 보이는 빨강 기차가 바로 열차카페랍니다.”
“그렇군요.”
“차 한잔 마시고 몸을 녹인 뒤에 레일바이크 타요.”
“아니, 먼저 풍경을 둘러보고 차 마시면 어떨까요. 각자 촬영도 하고. 레일바이크는 그 다음에…….”
“네. 그럼 삼십 분쯤 후에 만나요.”
나는 한 발짝 앞서 구절리역 플랫폼 쪽으로 걸어갔다. 관광객 서너 명이 역 대합실을 비껴 앞서거니 뒤서거니 같은 방향으로 걸었다. 서울~구절리. 4216. 정선선이 살아있던 십여 년 전, 하루 두 차례씩 서울과 구절리를 왕복한 비둘기호였다. 진주황의 낡은 기관차는 색칠을 새로 한 듯 겉이 말끔했다. 기관차와는 달리 출입구마다 차양을 달아놓은 객실은 흡사 가뭄으로 갈라진 논바닥처럼 듬성듬성 진주황 살갗이 터져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플랫폼을 서성대는 사람들이 선뜻 열차카페에 오르지 않는 것은. 남녀 서너 명이 열차 수량을 헤아려보듯 한 칸, 한 칸 열차의 뒤쪽으로 걸어갔다. 나는 마지막 객실 입구에서 걸음을 멈췄다. 양 원장은 여전히 기관차 앞에 서 있었다.
다섯 번째 동행. 한겨울 해발 1,300미터의 태백산 간이역. 잠시 후 열차카페에 올라 에스프레소 한잔을 마신다면…… 낡고 좁고 무더웠던 이탈리아 카페의 에스프레소 맛을 추억할 수 있을까. 유럽의 응접실, 산마르코 광장에 앉아 빨강 탁자에 놓인 순백의 찻잔을 어루만지던 흰나비의 손짓을 다시 볼 수 있을까. 아니면…… 베네치아 대운하에 곤돌라 100대를 띄워 두고 비발디가 연주했다는 사계(四季)의 선율에 잠길 수 있을까.
나는 열차카페를 벗어나 정선선 철로 막다른 길에서 돌아섰다. 저만치 초저녁 이내에 잠긴 구절리역이 보였다. 양 원장은 보이지 않았다. 좌우로 흘러내리는 태백산 능선의 밑바닥에 역사를 앉혀두고 사진 몇 컷을 찍었다. 더 찍을 만한 풍경이 없을까. 카메라를 돌려가며 뷰파인더로 역 주변 풍경을 들여다보았다. 마을의 몇몇 지붕과 그 뒤로 우뚝 솟은 태백산 줄기의 능선마다 잔설이 희끗희끗 깔려있었다. 마치 알프스의 몽땅베르산을 옮겨다놓은 것처럼 여겨지는 저쪽 능선 어딘가 빙하로 내려가는 케이블카가 매달려있을 것만 같았다. 있다면 틀림없이 빨강 케이블카일 것이다. 지금쯤 양 원장은 그 케이블카를 타고 만 년 전 시간의 동굴 속으로 파묻히는 중일지도 모른다. 나는 카메라 배낭을 추스른 뒤 빙하의 언덕을 향해 걸었다.
어제 새벽, 구절리 기행 하루 전이었다. 새벽 내내 잠을 뒤척였다. 당일치기라도 겨울철이기에 장거리 기행 준비를 해야 했다. 그러나 체인을 새로 구입하는 것 말고는 양 원장이 동쪽 호수를 다녀간 뒤 곧장 카메라 배낭을 챙겼기에 따로 할 일이 없었다. 선배 사진가들과 점심 먹기로 한 약속 시간에 맞추어 공주만 다녀오면 하루 일과는 끝이었다. 휴강기간 늘 그랬던 것처럼 아내가 출근한 집은 흑백사진 속의 어느 섬처럼 고요했다. 아침 밥상을 정리하고 FM 생생클래식을 들으며 잠시 무료하게 앉아있었다. 그러다 갈증이 느껴져 냉장고를 열었다. 막걸리를 담은 피티 병이 보였다. 피티 병의 아랫배가 독 오른 복어처럼 부풀어 올라 있었다. 그 복어를 발견한 게 화근이었다. 병마개를 열다가 막걸리가 터졌고, 막걸리 폭탄을 맞은 주방이 아수라장이 된 것이다. 결국 점심 약속이 깨지고 말았다.
“누님, 늦어서 미안해요.”
“무슨 일 있었나 봐. 늦을 사람이 아닌데.”
“막걸리 때문에.”
“막걸리?”
“막걸리가 폭발했어요.”
폭발소리에 두 누님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게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냐는 듯이. 쉰 둘과 쉰 넷의 중년 여류작가. 공주 금강변에서 함께 점심을 먹기로 약속한 사진가 선배들이었다. 공주 토박이 선배가 모로코 기행 사진집을 발간했고 누님, 동생 하는 셋이서 먼저 자축하자는 뜻으로 잡은 점심이었다. 그랬던 것이 한 시간 반이나 늦는 바람에 흔적 없이 사라진 터였다.
어제 시 쓰는 동창이 정지용 시인 생가를 다녀오자며 옥천으로 불러내더니 다짜고짜 매화막걸리집으로 데려갔고, 함께 마셨으며, 매화로 담근 술맛이 좋아 한 병을 구해온 게 잘못되었는지 병이 터질 것 같아 병마개를 열다가 정말로 터졌고, 막걸리 폭탄 파편에 쓰러진 주방의 시신을 대충 수습하고 총알처럼 날아왔다는 얘기까지 단숨에 풀어놓은 뒤 나는 냉수 한 컵을 들이켰다. 생각할수록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막걸리가 폭발하다니. 막걸리를 뒤집어 쓴 몸을 닦는 내내 정신 나간 사람처럼 내 입에서 피식피식 웃음이 새나왔다.
“민우 씨, 이거야. 모로코 기행 사진집.”
“원고 교정지네요. 책은 언제 나온대요?”
“지난주 나올 예정이었는데 좀 늦어지나 봐.”
공주 누님의 세 번째 기행 사진집이었다. 두 번째 쿠바 기행 사진집을 낸 게 지난해였다. 지구촌을 강 건너 마을처럼 드나드는 정열적인 중년 여류사진가. 만날 때마다 혀를 내두르게 만드는 누님의 작업량에 나는 늘 부러움과 열등감에 사로잡히곤 했다. 누님보다 두 살 위인 다른 누님은 향토 사진가로서 지역 풍물 다큐에 전념하고 있었다. 최근 삼, 사 년의 작업 끝에 공주의 사계 사진집과 사진에세이를 냈다. 내게 두 사람의 의미는 남달랐다. 취미로 셔터를 누르던 나를 카메라 배낭을 둘러매고 세상 밖으로 떠돌게 만든 사람들. 말하자면 두 사람은 나의 사진 대모 같은 존재였다. 내가 무료하거나 지쳐있거나 생의 통증을 느낄 때마다 그 통증을 가라앉혀주는 사람. 언제든 나를 맡겨두고 떠날 수 있는 사람. 먼 길을 동행하는 친구라기엔 크고 넉넉해서 좋고, 등을 기댈 수 있는 어머니라기엔 젊고 건강해서 더 좋은 그런 존재였다.
“그렇잖아도 누님들 만나면 물어볼 게 있었어요.”
모로코와 홍차를 뒤로 물리고 내가 사들고 간 경주빵을 끌어당길 때였다. 나는 몇 번씩 주저하던 말을 꺼냈다.
“좀 난처한 질문이긴 한데, 힐링 상담하는 셈치고 들어주세요.”
“무슨? 민우 씨 문제?”
“아니, 친구 일이에요. 어제 막걸리 마신 그 시인 친구.”
“친구가 왜?”
그 친구, 만나는 여자가 있는데……. 나는 친구가 들려준 이야기를 요약해서 풀어놓았다. 막걸리를 마시기 전부터 취한 뒤의 이야기까지. 마흔을 막 넘길 무렵 문학 행사장에서 처음 만난 그 여자와 거의 2년에 한 번씩 통화를 하고 지낸다. 남매를 둔 그 여자는 시를 쓰면서 문학강의도 하는 등 활동이 왕성하다. 통화는 오로지 여자가 전화를 걸어서만 가능하고 전화를 받으면 고작 두어 차례 만나는 게 전부이다. 그리곤 여자가 소식을 뚝 끊었다가 다시 전화를 걸어오면 어제 만난 사람처럼 밥 먹고 함께 지낸다. 헤어진 뒤 언제나 시인 친구 혼자 한동안 술에 절어서 지낸다, 등등.
“행복하다. 고맙다. 부끄럽다. 미안하다. 두렵다. 여자를 만나고 헤어질 때마다 친구가 느끼는 감정이 이렇답니다. 자신이 참 못난 남자라는 식의 자학도 하고 그래요. 이렇게 복잡한 감정들에 치이면서까지 그 여자를 왜 만나야하는지 모르겠어요. 그것도 2년씩이나 기다리면서.”
“글쎄, 좀 특별한 관계 같네.”
“그 친구, 오래 알고 지냈지만 가정에 문제가 있거나 성적 욕망이 엿보인다거나 그런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는데 말입니다.”
“세상에 흔하게 떠도는 말대로 외로움이 깊다거나 모성애가 부족하다거나,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저도 그와 엇비슷한 질문을 했지만 고개를 젓더라고요. 앞으로도 그 여자와의 관계를 지속시킬 생각이냐, 기다리지 않으면 끝날 일 아니냐, 그런 말을 꺼내면 친구 놈은 그저 내가 못난 남자라는 말만 하고 술을 마셔요. 제가 어떤 식으로 조언을 해주면 좋을지 모르겠어요.”
“물론 우리도 그 나이를 넘어섰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자신의 정체성에 혼돈을 겪으며 흔들리는 경우도 있겠지. 하지만 2년에 한번 여자의 전화를 받고서야 만난다는 스토리, 헤어진 뒤 자학하면서 다시 기다린다는 스토리, 밝힐 수 없는 무슨 필연이 있겠지만 들은 내용만으론 삼류 드라마도 아니고, 소설 같지도 않고 그러네.”
생각할수록 그 친구, 참 불행한 것 같아요. 그 말을 꺼내려는데 매화막걸리 잔을 손에 거머쥔 채 흐느끼는 친구가 먼저 떠올랐다. 친구는 한 여자를 2년씩이나 기다리는 자신이 불행하다는 말을 수없이 반복하며 술을 따랐다. 그 여자, 아내 모르게 처음 만난 여자였어. 그런데 그 여자…… 하다가 친구는 흐느꼈고, 몇 번 더 그런데…… 를 반복하다가 탁자에 코를 박았다. 취기로 쓰러진 친구를 내려다보면서 나는 친구를 쓰러뜨린 여자의 모습을 상상했다. 친구가 쓰러지기 전 흐느끼는 동안 내게 무슨 말을 감추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친구가 들려준 말만으론 그 여자의 모습을 도무지 윤곽조차 그릴 수가 없었다. 외양은 어떤지, 성격은 어떤지, 보일 듯 말듯 한 실루엣만 떠오를 뿐. 다만, 2년마다 누군가의 전화번호를 찍는 그 여자가 2년에 한두 번씩 술에 절어 쓰러지는 친구보다 더 불행할 수도 있겠다는 상상은 어렵지 않았다.
“누구든지 중년의 문턱을 쉽게 넘어서는 게 아니잖아. 그 세월을 채우도록 낯선 사람, 새로운 대상과 어떤 방식이든 관계를 맺는 일이란 게 언제든 설레고, 기쁘고, 두렵고, 슬픈 것들이지. 그 감정의 도가니를 어떻게 수용하는가, 수용의 자세가 문제라면 문제일 테고.”
향토 사진가 누님은 사진에세이를 쓴 작가답게 어휘와 호흡을 조절하면서 말을 이어갔다. 누님의 작품집에서 읽었던, 중년의 갈등을 세상의 풍경에 견주어 풀어나간 문장 몇 개가 어렴풋하게 기억났다. 나무들도 인간처럼 중년이 있다. 나무들도 갈등을 겪는다……. 인간이든 나무든 그들의 중년은 다 같이 미와 추의 양면성을 지녔는데…….
“자기 생을 파국으로 몰고 가겠다고 작정을 하지 않는다면 지혜로운 선택이 필요하겠지. 그런 의미에서 보면 누군가 말했듯이 인생에서 가장 지혜롭고 진지해지는 시기가 사십 대 중후반이라는 말, 자신의 지혜로운 선택으로 말미암아 가장 행복해지는 시기라는 말, 그 해석이 옳을 것 같아.”
대화가 너무 무겁게 흐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공주 누님의 휴대폰이 울렸다. 모로코 기행 사진집이 발간되었다는 전화였다. 예측하지 못한 반전이 일어난 것처럼 화제가 시인 친구와 여자와 지혜와 행복으로부터 모로코의 사막으로 순식간에 넘어갔다. 두 누님은 곧장 모로코 사막을 향해 떠났다.
마흔아홉 살. 그렇다면 나는 내 인생에서 가장 진지한 시기를 이미 놓쳐버린 것일까. 아니면 뒤늦게 그 시기에 들어서는 중일까. 철거촌을 떠돌더니 이젠 여인숙이에요? 집착을 버리세요, 제발. 틈만 나면 집 밖으로 떠도는 남편을 향해 단말마 같은 어휘를 쏟아내는 아내. 마흔 중반을 막 넘어선 아내는 지금 이 순간 어떤 시간의 길 위에 서 있을까. 행복하지 않으면 내려놓으십시오. 요가철학자 이 교수의 말이었다. 몇 해 전 겨울이었다. 아내를 따라간 지리산 요가명상 캠프에서 이 교수는 살얼음 같은 수련원 바닥에 앉아 나지막이 말했다. 손에 쥔 것을 놓아야만 다른 것을 쥘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행복하지 않다면 바로 내려놓으십시오. 아내가 제발 버리라고 간청하는 나의 집착들. 돈도 안 되고 집에 걸어둘 수도 없는 변방의 다큐사진들. 내 손에 움켜쥔 그것은 과연 행복한 것인가. 잘 모르겠다. 생활의 절반 이상을 오로지 요가수련에만 쏟아붓는 아내는 행복한가. 그것도 모를 일이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행복과는 상관없이 나는 언제든 아내에게 들려줄 말 한마디를 감추고 지낸다는 사실이다. 당신이 버리라는 그것을 내 손에 움켜쥐기 위해 지금까지 살아온 거야. 당신이 요가에 몰두하듯, 그것을 두 손에 꽉 움켜쥐고 살아가듯 나 역시 마찬가지라고.
불현듯 공주 누님들의 마흔아홉이 궁금해졌다. 행복한 시간이었을까.
누님들. 혹시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지는 않은가요? 아니면, 누님을 기다리고 있을 누군가의 전화번호를 지금도 기억하고 있나요?
나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아무것도 묻지 않았지만 만약 그 질문을 던진다면 두 누님의 입에서 나올 만한 답을 짐작할 수는 있었다.
지문이 없어서 민원서류 자동발급도 못해, 우리는. 사는 게 얼마나 바쁜지 앞만 보고 걸어도 다리가 휘청거릴 나이야.
두 누님은 아직도 모로코 사막을 횡단 중이었다. 사막의 무더위도 아랑곳없이 행복한 표정들이었다.
“죄송합니다. 오늘 레일바이크 운행은 더 이상 못하게 되었습니다.”
“정비하는데 오래 걸리나 봐요.”
“예. 한두 시간쯤 예상하고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내일 아침부터는 정상 운행되도록 하겠습니다.”
오후 네 시. 일몰은 아직 이른 시간이었지만 바람이 날카로웠다. 코끝을 도려낼 듯한 바람이 양 원장과 나를 차례로 훑고 지나쳤다. 제대한 뒤 광산촌 기행을 처음 다녀갈 즈음, 비둘기호에서 막 내려서던 내 목을 후려치던 그 바람이었다. 바람은 이십여 년 전보다 더 젊고 강했다.
“유 선생님, 차 드세요. 몸이 많이 언 것 같아요.”
양 원장이 앞서 올라선 열차카페는 냉기가 돌았다. 우리 말고는 손님이 없었다. 날이 추웠고 레일바이크 운행도 중단된 탓에 관광객들이 일찌감치 정선 쪽으로 내려간 모양이었다.
“차 마신 뒤 정선에서 저녁 먹고 떠나면 되겠어요.”
열차카페 실내는 생각보다 넓었지만 조명은 어두웠다. 앤틱 가구를 흉내 낸 것일까. 빛이 날아간 낡은 비둘기호 의자를 재활용한 실내는 연녹색 파스텔을 거칠게 칠해놓은 것 같았다. 나는 에스프레소와 유자차를 주문하고 창 밖을 보았다. 마을은 사람이 모두 떠난 것처럼 을씨년스러웠다. 메리뀨리 호텔풍의 펜션 지붕 너머로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 연기가 아니었으면 땅거미가 깔리기 시작하는 구절리는 등댓불조차 없는 무인도나 다름없을 듯싶었다.
“열차카페는 이 칸 하나뿐이고요 나머진 펜션으로 사용한답니다. 혹시 구절리에서 머무르실 거라면…….”
“아닙니다. 저흰 곧 정선으로 내려갈 거예요.”
찻잔을 비울 때까지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입을 닫았다. 그러다 카페 직원이 꺼내든 펜션이라는 말꼬리를 물고 동시에 입을 열었다. 내 시선을 비껴 앉은 양 원장의 눈에서 메리뀨리 호텔의 붉은 네온사인이 반짝거렸다.
“유 선생님, 유럽 여행 말인데요.”
“예. 무덥고 힘들었지요.”
“이제야 말씀드리는데, 유럽은 처음이었어요.”
“부끄럽지만 저도 그랬답니다.”
“길도 낯설고, 언어도 낯설고, 게다가 일행들도 초면이라서 대화도 잘 못하겠고…….”
“저는 안 좋은 일을 겪고 한국을 떠나신 줄 알았습니다.”
“실은 제가 지쳐있었어요. 충주 시내에 자그맣게 서각공방을 열고 있는데 두어 달 작업해서 서각대전에 출품하고 훌쩍 떠나온 터여서.”
“아, 그랬군요. 저는 논술학원에 나가면서 아마추어 사진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시내 갤러리의 유료 암실을 빌려서 흑백사진 작업을 하고 있어요.”
“흑백사진을 하시는군요.”
“예. 여름은 본격적인 입시철이 아니라서 시간 있을 때 견문이나 넓히려는 욕심으로 유럽을 다녀왔고요. 경비 문제로 아내에게 미안한 일이기도 해서 사진 찍을 생각은 없이 그냥…….”
나는 거짓말을 했다. 단순히 견문을 넓히려고 일 년 가까이 모은 돈을 한꺼번에 쏟아부은 게 아니었다. 내 일상으로부터 단 열흘만이라도 벗어나고 싶었다. 아내와 암실 사이에 가로놓인 팽팽한 긴장의 끈을 잘라내고 싶었다. 그러나 불가능한 일이었다. 유럽은 차선이었다. 아니, 따지고 들자면 그 선택은 아내의 요청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이젠 집에 걸어둘 만한 사진을 찍으세요. 그 비싼 필름 사진을 찍으면서 왜 남들 다 찍는 풍경 사진은 못 찍는지 모르겠어요.”
아내는 집요하게 풍경 사진을 주문했다. 그 의도가 진실이었는지는 모른다. 철거촌이나 여인숙 같은 다큐 사진 작업에 대한 반발로 내가 멀리하는 작업을 선택해서 내던진 말인지도 모른다. 아내의 의도와 상관없이 나는 인천공항을 떠나면서 유럽의 풍경을 상상해보았다. 이미 수많은 사진가와 관광객들이 카메라에 담아온, 인터넷을 뒤지면 수십, 수백 장씩 돌아다니는 유럽의 풍경들을. 프랑스의 호밀밭이나 이탈리아 평원의 사이프러스나무 따위들. 아니면 런던 템즈강이나 파리의 에펠탑 야경 같은 것. 인천공항에서 그 풍경을 떠올리며 나는 다짐했다. 절대 그 풍경들은 촬영하지 않는다. 도저히 셔터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한다면 그땐 어쩔 수 없이 몇 컷만 담는다. 떠들썩한 풍경이 아니라 조용한 유럽의 원주민들만 엄선해서.
“혹시, 소설가 정지훈이라고 들어보셨는지요?”
“글쎄, 잘 모르겠는데요. 제가 독서량이 부족해서.”
“제 남편이랍니다.”
차를 몰고 구절리를 내려가는 중이었다. 정선의 야경인 듯한 불빛들이 산자락 저 아래에서 가물가물 흔들렸다. 양 원장이 별안간 남편을 옆자리에 태웠다.
“베스트셀러는 없지만 소설집을 네 권 냈어요. 다른 직업은 없으니 전업 작가인 셈이죠.”
“전혀 몰랐습니다. 양 원장님이 유치원이나 학원 원장이 아니라 서각가인 줄도 오늘 알았고요.”
태백산 어둠의 속도는 생각보다 빨랐다. 일찍 저녁을 먹고 길이 더 어두워지기 전에 정선을 빠져나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구절리를 내려오는 그새 길은 어디랄 것 없이 이미 늪처럼 깊은 어둠이 깔려있었다.
“섬에 들어간 지 오륙 년 되었어요. 독자가 늘고 생활이 번잡해지면서 글에 집중하겠다며. 변산반도 줄포가 고향인데 집에서 가까운 서해안 작은 섬에 낡은 집 하나를 얻어 작업실로 쓰고 있어요.”
정선에서 두부찌개를 비운 뒤에도 남편은 우리 곁을 떠나지 않았다. 줄포와 섬과 낡은 집 한 채도 밥상에서 가부좌를 틀었다.
“유 선생님. 지난주 호숫가에서 호수여인숙을 보여주셨죠?”
“예.”
“그때, 여인숙을 섬이라고 표현하던 말을 들으면서 이런 생각을 했어요. 저 역시 섬 같은 존재일지도 모른다고. 지도에도 없고 등댓불조차 없는 심해의 한 점, 섬. 그런 존재.”
나는 양 원장의 시선을 피해 손을 닦았다. 물수건을 반으로 접어 목덜미를 훔치는 순간 등골이 싸늘했다.
“남편이 섬으로 떠난 뒤 얼마간은 나만의 시간과 공간을 확보했다는 만족감이 팽배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 문득 나를 바라보니 캄캄한 거예요. 나를 밝혀 주는 불빛들이, 내 안에서 나를 밝혀준다고 믿었던 등불들이 모두 꺼져버린 것처럼 캄캄했어요. 밤을 새워 나무를 깎고 글씨를 새겨도 그 불빛은 살아나질 않았어요. 그래서 그 어둠 속을 탈출하다시피 홀연히 떠난 곳이 유럽이었어요.”
“예. 저는 그런 줄도 모르고…….”
“곁에 아무도 없었어요. 내 안팎은 캄캄한데, 그 어둠 속에서 사람의 말을 한마디도 못한 채…….”
“양 원장님.”
나는 양 원장의 입을 가로막고 닫혀있던 내 입을 열었다. 금방이라도 탁자에 쓰러질 듯 양 원장의 목소리가 흠뻑 젖어있었다.
(이하 생략)
—계간 『시에』 2013년 가을호
이강산
충남 금산 출생. 1989년 『실천문학』으로 시, 2007년 『사람의 문학』으로 소설 등단. 시집 『물속의 발자국』. 소설 「금반지」, 「칼자국」, 「그 새는 어디로 갔을까」, 「황금비늘」, 「즐거운 초상(初喪)」, 「진주조개잡이」, 「그물」, 「흑백사진이 있는 풍경」, 「거인의 방」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