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변주하는 단어였다
최해돈
밤이, 어둠을 복사한다
밤이, 적막 속으로 촘촘히 파고든다
밤이라 부를 수 있는 인칭대명사가 밤 안에서, 밤 밖에서, 밤의 위와 아래에서, 밤의 왼쪽과 오른쪽에서 서서히 접힌다.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듣는 밤. 흩어지는 것들이 과거형으로 환원되고, 그리움이 기억 속에서 멀어지는 동안, 밤은 자신을 위해 떠날 채비를 한다. 밤에 조각난 슬픔이 발견되고, 가난한 사람을 위하여 밤이, 발을 동동 구른다. 새벽으로 뚜벅뚜벅 걸어가는 가로등이, 느림과 빠름의 질량을 투명하게 인식하는 나무 의자가, 콸콸콸 울음을 분출하는 수도꼭지의 물이, 나무와 나무 사이를 빠져나가는 바람의 속도가, 겸허한 자세의 보도블록 위 침묵이, 그리고 밤을 표현할 수 있는 형용사 또는 부사가
밤 밖에서
밤 안으로
파고든다. 파고들면서 그동안 얽히고 엉킨 생각의 부스러기를 날려 보낸다. 밤은 흩날리는 것의 음표들로 가득하고 요란하다. 밤은 밤으로 이어지고, 밤은 밤으로 단절된다. 밤이, 넉넉함으로 살아가는 동안, 나는 무얼 할 수 있을까. 밤이, 가을의 낭떠러지로 추락하는 동안, 새가 날아간 거리는 얼마나 될까. 밤은 밤이어서 휘어진다. 밤은 밤이어서 컹컹거린다. 밤은 밤이어서 넓이가 확장된다. 현재 과거 미래를 넘나들며 강을 건너는 동안 발생하는 확률들. 밤이 있어 확률은 존재하고, 삶은 더 배부르다. 밤에 그리운 이에게 편지를 쓰면, 유리창은 수평으로 일렁인다. 밤과 유리창의 교집합으로 어둠의 한 각이 닳는다
밤에 어둠을 보니
파생되는 물방울, 물방울들
밤은 어둠 속으로 걸어갈 때 더 아름답다. 밤은 어둠 속으로 걸어가며 울고 있을 때, 주름진 세상이 점점 펴진다. 밤이 어제를 기억할 때, 밤은 조금씩 완성되며, 밤의 조각들이 하나둘 삭제될 때, 밤은 밤의 기능을 상실한다. 우리는 밤에 태어나 밤의 낙엽에 눕는다. 낙엽에 누워 사라지는 밤을 안타까워하고, 때로는 밤에 기댄다. 밤에 기록되는 직선과 곡선의 흐느낌, 밤의 웅덩이에 새롭게 태어나는 생명들, 밤의 체온과 호흡으로 또 다른 밤의 발길이 바쁘다. 밤 앞에 밤이, 밤 뒤에 밤이, 밤 옆에 밤이, 밤 옆에 다시 밤이, 태어나고, 태어나고, 태어나고. 밤은 어둠을 낳고 어둠은 밤의 고요를 먹으며 잘 자란다.
뾰족한 밤이 뒤뚱뒤뚱 걸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