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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연재 배삼익선생 교유인물록
인동 장달수 편
10년 전에 만든 자료라 다시 보니 빠진 자료가 많네요
시간 나는데로 보완하도록 하겠습니다
배삼익(裵三益)[1534년(중종29)~1588년(선조21) = 55세].
자는 여우(汝友), 호는 임연재(臨淵齋)이다. 본관은 흥해(興海)이고, 아버지는 충좌위(忠佐衛) 부사과(副司果)배천석(裵天錫)이고, 어머니 연일정씨(延日鄭氏)는 정세호(鄭世豪)의 딸이다.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명종~선조 시대 활동
1558년(명종13) 생원이 되고, 1564년(명종19) 식년(式年) 문관(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31세였다. 성균관(成均館)에 들어가서 학유(學諭) · 학록(學錄) · 학정(學正) · 박사(博士)로 차례로 승진하였고, 1573년(선조6) 홍문록(弘文錄)에 선발되어 홍문관 부수찬(副修撰)에 임명되었다가, 호조 좌랑으로 옮겼다. 1575년(선조8) 부친상을 당하였고, 3년 상기를 끝마치고는 형조 · 예조의 좌랑을 역임하였는데, 성균관 전적(典籍)을 거쳐 형조 정랑으로 승진하였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선조가 특별히 교지(敎旨)를 내려서 사간원 정언(正言)에 임명하고 불렀으나 병으로 사양하였다. 1581년(선조14) 외직으로 풍기군수(豊基郡守)와 양양부사(襄陽府使)를 역임하였고, 1583년(선조16) 내직으로 사헌부 장령에 임명되었다. 성균관 직강(直講) · 사예(司藝)를 거쳐, 1584년(선조17) 성균관 사성(司成) · 사간원 헌납(獻納)에 임명되었다. 이어 홍문관 수찬(修撰)으로 옮겼는데, 지제교(知製敎)를 겸임하였으며, 다시 홍문관으로 들어가서 부교리(副校理)에 임명되었다. 1585년(선조18)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승품(陞品)되고, 승정원 동부승지(同副承旨)에 발탁되어 우부승지(右副承旨) · 좌부승지(左副承旨)로 승진하였다. 상호군(上護軍)이 되었다가, 장례원 판결사(判決事)를 거쳐,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에 임명되었다.
1586년(선조19) 성절사(聖節使)와 동지사(冬至使) 일행이 중국 명나라 북경(北京)에 가서 회동관(會同館)의 옥하관(玉河館)에 머물렀는데, 사신 일행이 실화(失火)하여 옥하관이 불에 타 버렸다. 명나라에서 조선 사신 이하 관원을 모두 체포하여 심문을 하고 죄를 주려 하자 조선 조정에서 그를 진사사(陳謝使)로 삼아서 급히 북경에 보냈다. 그는 명나라 예부(禮部)와 신종(神宗) 만력제(萬曆帝)를 만나서 사건을 원만히 수습하였다. 그리고 돌아올 때, 새로 간행된 『대명회전(大明會典)』을 얻어 가지고 왔는데, 이 책에는 그동안 조명 관계에서 문제가 되었던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종계(宗系)가 정정되어 있었다. 사행의 공으로 우승지(右承旨)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사임하였다. 1588년(선조21) 황해도관찰사로 나갔는데, 당시 황해도는 해마다 흉년이 들었으므로, 그는 병든 몸을 이끌고 여러 고을을 순행하면서 기민(饑民)들을 구휼하다가, 고질병이 심해져서 벼슬을 사임하였다. 고향 안동으로 돌아가던 중에 해주(海州)의 청단역(靑丹驛)에서 객사(客死)하니, 향년이 55세였다. 그는 책을 많이 가진 장서가로 유명하고, 글씨도 잘 썼는데, 친필시와 제병(祭屛)이 남아 있다.
저서로는 시문집인 『임연재집(臨淵齋集)』 6권이 남아 있다.
북경 옥하관 화재사건
1586년(선조19) 3월 성절사 윤자신(尹自新)과 동지사 성수익(成壽益)이 중국 명나라 회동관의 옥하관에 머물렀는데, 사신 일행이 실화(失火)하여 옥하관이 불탔기 때문에 조선 사신과 종사관들이 모두 체포되어 심문을 받게 되었다. 명나라에서는 외국사신이 머물도록 사신관을 지었는데, 이것이 북경에 있는 회동관이다. 명나라는 태조 주원장(朱元璋)의 ‘해방(海防)’ 정책에 따라 중국 민간 상인과 해외 상인과의 사무역을 일절 금지하고, 나라끼리 부족한 물자를 교류하는 조공(朝貢) 무역만을 인정하였다.『대명회전(大明會典)』을 보면, 명나라와 조공(朝貢) 관계를 가졌던 나라들의 조공 물품과 조공 회수를 규정하고 있는데, 조선의 조공품은 인삼 · 모시 · 나전 · 조선종이 · 화문석 등 10여 종이고, 조선은 1년에 3회 정기 사신을 보낼 수 있었다. 그러나 조선은 정조사(正朝使) · 동지사 · 성절사 · 천추사(千秋使)를 정기 사신으로 파견하였을 뿐만 아니라 비정기 사신을 수시로 파견하였다. 조선이 자발적으로 조공 사신을 빈번하게 파견한 까닭은 조공(朝貢)이라는 공무역을 통하여 역관과 상인들이 사무역을 할 수 있도록 하려 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명나라와 조공 관계를 가졌던 80여 개국 중에서 조선 사신이 가장 빈번하게 중국 명나라에 왕래하였으므로, 명나라 태종 영락제(永樂帝)는 처음에 조선 사신 일행을 일본 · 안남(安南) · 몽고 사신과 함께 회동관의 남관(南館)에 유숙하게 하였다. 그러다가 1441년(세종23) 조선 사신을 위하여 특별히 옥하관을 따로 지었는데, 지금 북경 자금성(紫禁城)의 옥하(玉河)가 흐르는 숭문문(崇文門) 북쪽 부근에 있었다. 옥하관은 동관(東館) · 서관(西館)으로 나누어져 있었고, 긴 회랑(回廊)으로 연결된 대청(大廳)과 중청(中廳)에 동방(東房) · 서방(西房)이 있어서 조선 사신 일행이 편리한 대로 방을 쓰면서 40여 일 동안 머물 수 있었다. 조선식으로 온돌방을 갖추었고, 조선식 요리사와 조선어 역관이 5명씩 항상 배치되어 있었다.
옥하관이 건립된 지 145년 만에 불타버렸으므로, 명나라에서는 조선 사신 이하 모든 관원을 체포하여 심문을 하고 죄를 주려고 하였다. 당시 조선 사신 일행은 35명 안팎으로, 정사 · 부사 · 서장관인 6품의 문관과 통사(通事: 역관) · 압물(押物) · 압마(押馬) · 의원 · 군관 등으로 구성되었다. 조선 사신 일행은 북경의 회동관 무역을 비롯하여 이르는 곳마다 중국 상인들과 사무역을 행하여 조선 사신의 일행의 짐을 싣는 마필이 적으면 3백 필, 많으면 5백 필에 이르렀다. 사무역을 통하여 막대한 이익을 보았기 때문에 서울 육의전(六矣廛)의 경상(京商)과 개성의 송상(松商)이 경쟁적으로 권문세가와 결탁하여 사신 일행의 종사관을 자기들 장사군들로 채워 넣었다. 조선 시대 최고의 갑부가 대체로 역관(譯官)들이었던 것도 바로 그들만이 사무역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 시대 중기에 이르러, 사신 일행의 질서가 더욱 문란해졌는데, 이때 옥하관에 불을 내었을 뿐만 아니라, 압물이 물건을 허술하게 관리하다가, 조공할 방물(方物)마저 모두 도둑을 맞아 예부의 이번원(理藩院)에 조공품을 제출하지도 못하였다. 이번원 담당 관원이 격분하여 황제에게 보고하여, 조선 사신들의 처지가 더욱 어렵게 되었다. 조선 조정에서 배삼익과 원사안(元士安)을 진사사의 정사와 부사로 임명하여 급히 명나라에 보내어 진사(陳謝)하게 하였다. 배삼익은 북경에 가서 명나라 예부와 이번원을 설득하고 신종 만력제를 만나서 독단으로 잘 응대(應對)하여 황제의 오해를 풀었다. 만력제가 칙서를 내려서 칭찬하고 포상으로 망의(蟒衣)와 채단(綵段)을 내려주었다. 그때 그가 만력제에게 사적으로 하사 받은 옥피리와 상아홀(笏)은 지금 그 종가에서 보관하고 있다. 귀국하자 선조는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내구마(內廐馬)를 한 필을 하사하였다. 그 뒤에 옥하관은 다시 중건되어, 청대 조선 사신 일행도 연경(燕京: 북경)의 옥하관에서 유숙하였다.
성품과 일화
배삼익은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고 집이 몹시 가난했으나, 스스로 분발하여 도산서원(陶山書院)에 가서 글을 배우고, 이황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아가서 직무(職務)를 수행할 적에는 신중하고 부지런하였을 뿐만 아니라 매사를 모두 분명하게 처리하였고, 외직에 나가서는 풍속에 따라 다스리면서 관대하고 대범하게 일을 처리하였다. 풍기군수가 되었을 때 아전들을 엄하게 다스리고 백성들을 어질게 어루만지니, 처음에는 강경한 토호들이 상당히 그를 싫어하였으나, 몇 년 만에 고을 사람들이 모두 그의 치적을 칭송하였다.
배삼익이 대성(臺省)에 있을 때 송익필(宋翼弼)이 예전에 그의 아버지 송사련(宋祀連)이 정승 안당(安塘)의 집에 노비였다고 무고를 당한 것을 분풀이하려고 법정에 송사하였다. 송익필은 서인(西人) 이이(李珥) · 성혼(成渾)과 친하였으므로, 법관들이 모두 서인을 무서워하여 회피하고 판결하지 못하였다. 이때 동인(東人) 배삼익이 즉시 이를 판결하여 송익필을 노비로 만들었기 때문에 송익필은 도망하여 서인 정철(鄭澈) 등의 보호를 받았다. 송익필은 서인의 영수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에게 예학(禮學)을 가르친 사람인데, 당시 송익필의 재판은 동인과 서인의 당쟁에서 핵심 문제였다. 그가 이 사건을 맡아서 재판하여 서인에게 결정적 패배를 안겼는데, 이를 통해 그가 동인의 중심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송사에 패배한 송익필은 절치부심하다가, 서인 정철을 움직여 <정여립(鄭汝立) 의 옥사>를 확대시켰다. 그리하여 전라도는 반역향(反逆鄕)이 되고, 이발(李潑) 등 동인 인사 1천여 명이 연루되어 처형되었다. 이때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제자 최영경(崔永慶)도 옥사에 연루시켜 처형하였는데, 이 사건은 북인 정인홍(鄭仁弘)의 공격을 받아 서인이 실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안동 북쪽 내성(奈城) 호애산(虎崖山)의 언덕에 있고, 후배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이 지은 비명(碑銘)이 남아 있다. 부인 영양남씨(英陽南氏)는 처사(處士) 남신신(南藎臣)의 딸인데, 자녀는 2남 2녀를 두었다. 장남 금역당(琴易堂) 배용길(裵龍吉)은 유성룡의 제자로,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 감찰(監察)을 지냈다.
행력
중종 29 1534
○8월 3일, 安東 金溪村 외가에서 태어나다. (가장에는 丹地村이라 함. 금계를 이름)
명종 2 1547 14세
○7월, 모친상을 당하다.
명종 9 1554 21세
○겨울, 英陽南氏 南藎臣의 딸과 혼인하다.
비지 남치리와 남매간이다.
명종 11 1556 23세
○9월, 장남 龍吉이 태어나다.
명종 12 1557 24세
○가을, 유성룡과 漢城試를 보러가다. (묘갈명에 당시 서애 선생은 16세 였다고 나와 있습니다)
명종 13 1558 25세
○봄, 부친을 따라 臨河縣 桃木村에 살다.
○ 10월, 생원시에 합격하다.
명종 15 1560 27세
○퇴계 이황에게 「心經」과 「詩傳」을 배우다.
명종 17 1562 29세
○가을, 金誠一과 함께 陶山에서 受業하다.
명종 18 1563 30세
○3월, 金守一과 함께 太學에서 글을 읽다.
명종 19 1564 31세
○ 9월, 문과에 합격하다.
명종 20 1565 32세
○ 8월, 성균관 학유가 되다.
○ 曺植을 찾아뵙다.
선조 1 1568 35세
○ 3월, 퇴계 이황에게 「朱子年譜」를 改刊하여 보내다.
○ 7월, 趙穆, 琴蘭秀 등과 이황을 뵙고 孤山에 놀러가다.
○ 12월, 봉상시 부봉사가 되다.
선조 2 1569 36세
○ 도목촌에 臨淵臺를 짓자 이황이 ‘臨淵齋桃木村’이라 써 주다. ‘臨淵齋’라 자호하다.
선조 3 1570 37세
○ 9월, 도산에서 「심경」, 「啓蒙傳疑」를 講究하다.
○ 12월, 퇴계 이황을 곡하다.
선조 4 1571 38세
○ 10월, 호조 좌랑이 되다.
선조 5 1572 39세
○1 0월, 남명 조식의 만시를 짓다.
선조 6 1573 40세
○ 1월, 부친상을 당하다.
선조 6년(1573 계유 / 명 만력(萬曆) 1년) 2월 8일(기미) 1번째기사
홍문록에 들 인물들을 유희춘·구봉령·정언지 등이 뽑다
홍문록(弘文錄)271) 의 일로 부제학(副提學) 유희춘(柳希春), 직제학(直提學) 구봉령(具鳳齡), 교리(校理) 정언지(鄭彦智)·유도(柳濤), 부교리(副校理) 정지연(鄭芝衍)·홍성민(洪聖民), 부수찬(副修撰) 우성전(禹性傳)·이성중(李誠中)이 완의(完議)하였다. 등록할 사람에 대하여 인물을 개략적으로 논하고 병상(屛床)을 설치한 뒤 차례로 권점(圈點)을 찍었다. 약속대로 6점(點) 이상 9인을 뽑았다. 박점(朴漸)·홍적(洪迪)이 8점이고, 권벽(權擘)·김우굉(金宇宏)·김성일(金誠一)이 7점이고, 조유성(趙惟誠)·안용(安容)·배삼익(裵三益)·홍혼(洪渾)이 6점이었다. 허봉(許篈)·이경중(李敬中)·윤선각(尹先覺)은 5점이었으므로 참록(參錄)되지 못하였다.
선조 8 1575 42세
○ 6월, 豐基 郡守가 되다.
○ 7월, 도산서원에 가다. 김성일과 浮石寺를 유람하다.
선조 10 1577 44세
○ 9월, 趙穆, 楊士奇와 함께 小白山을 유람하다.
선조 13 1580 47세
○ 7월, 승문원 교리가 되었으나 나아가지 않다.
선조 14 1581 48세
○ 3월, 安東 縣監이 되었으나 나아가지 않다.
○ 여름, 襄陽 府使가 되다.
선조 16 1583 50세
○ 사헌부 장령, 성균관 사예가 되다.
선조 17 1584 51세
○ 사간원 헌납, 홍문관 수찬, 사간원 사간이 되다.
선조 , 17년(1584 갑신 / 명 만력(萬曆) 12년) 8월 25일(무진) 2번째기사
홍문관이 심의겸을 파척하라고 올리다
홍문관이 심의겸을 파척할 것으로 올렸는데, 입계하니, 답하였다.
“논한 바가 매우 옳아서 더할 나위 없다. 다만 내가 따르지 않는 것은 감히 논한 자들이 옳지 않다고 여겨서가 아니다. 대개 그가 비록 국가에 죄를 얻기는 하였으나 내가 은혜에 인색할 수는 없기 때문에 지체하면서 차마 못하고 있는 것이다. 옥당(玉堂)은 나의 뜻을 헤아려주기 바란다.”【교리(校理)는 조인후(趙仁後)·홍종록(洪宗祿)·배삼익(裵三益)이고, 수찬(修撰)은 유근(柳根)·이정립(李廷立)이며, 정자(正字)는 윤섬(尹暹)이었다. 】
○ 〈時務十條疏〉를 올리다.
선조 18 1585 52세
선조 18년(1585 을유 / 명 만력(萬曆) 13년) 4월 17일(무오) 4번째기사
정언 전경창이 이산보는 용렬하다며 재상 반열에 올린 것을 개정하라고 아뢰다
정언 전경창(全慶昌)이【성품이 오활하고 소루한 듯하나 그래도 천진스럽고 효성과 우애가 있어 고을에 소문이 났다. 간관으로 있을 적에도 자리만 차지하지는 않았다. 】 간원의 뜻으로 와서【대사간은 이식(李拭), 사간은 배삼익(裵三益), 헌납은 한옹(韓顒), 정언은 이대해(李大海)이다. 】 아뢰기를,
“작위(爵位)는 임금이 세상을 다스리는 도구이므로 진실로 적임자가 아닌 사람에게 작위가 돌아가면 헛되이 제수했다는 비난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산보(李山甫)의 도헌(都憲)의 직임은 이미 체직하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러나 2품의 재상 반열과 가선 대부는 높은 품계로 명위(名位)가 혁혁하여 사람들이 모두 우러르는 바이니, 오직 숙덕(宿德)과 중망(衆望)을 가져 천위(天位)를 함께하여 천직(天職)을 다스릴 만한 사람1115) 을 골라 지위에 있게 한 뒤에야 여정이 흡족하게 여기게 됩니다. 이제 산보는 용렬 나약하여 의지가 없고 식견도 범상스러워 별로 일컬을 만한 재덕이 없는 반면 뚜렷이 임금을 기망(欺罔)한 죄가 있습니다. 이것은 상께서도 이미 통촉하신 것으로 청의(淸議)에 용납받지 못하는 것인데도 외람되게 발탁되는 은혜를 입고 승헌(乘軒)의 총영을 받았으니, 정체(政體)의 바르지 못함이 이보다 더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국가에서 어진 사람을 권면하는 명기(名器)1116) 가 장차 이 때문에 가벼워질 것이니, 머뭇거리지 마시고 빨리 개정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실로 그는 쓸 만한 사람이니, 비록 백성들에게 묻는다 해도 어찌 순박하고 정직하다고 하지 않겠는가. 우연히 나온 한마디 말 때문에 논척(論斥)할 수는 없으니, 윤허하지 않는다. 번거롭게 고집하지 말라.”
하였다.
선조 18년(1585 을유 / 명 만력(萬曆) 13년) 4월 28일(기사) 5번째기사
정언 전경창이 도승지로 임명된 박점은 물의가 있다고 비판하며 체직을 청하다
정언 전경창(全慶昌)이【성질이 순수하고 성실해서 화사스럽지 않으며 독실한 우애(友愛)는 천성에서 나왔다. 그는 대각(臺閣)에서는 논의가 강직하여 구차하게 부화 뇌동하는 일이 없었다. 줏대가 확고하였고 과격한 일을 좋아하지 않았다. 】 간원의【대사간 이식(李拭), 사간 배삼익(裵三益), 헌납 한옹(韓顒), 정언 이대해(李大海)임. 】 뜻으로 아뢰기를,
“도승지는 한 원(院)의 장(長)으로 곧 옛날의 지신사(知申事)입니다. 일을 아뢰고 복명(復命)하는 것 등 그 책임이 가볍지 않으므로 참으로 적임자가 아니면 외람되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박점(朴漸)은 사람됨이 본디 재식(才識)이 없고 명론(名論)이 가벼워서 예에 따라 순차적으로 직급이 올랐어도 이미 물의(物議)가 있었습니다. 더구나 이 은대(銀臺)1134) 의 장은 지위와 명망이 맑고 중후한 자리이므로 결단코 이 사람이 앉을 곳이 아닙니다. 임명한다는 제목(除目)이 한번 내려지자 물정(物情)이 괴이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으니, 체직시키소서.”
하니, 답하기를,
“박점은 체직할 것 없다.”
하였다.
선조 18년(1585 을유 / 명 만력(萬曆) 13년) 8월 28일(병인) 1번째기사
홍문관이 심의겸을 파척하라고 차자를 올리다
홍문관이 심의겸(沈義謙)을 파척시키라는 것으로 차자를 올렸는데 입계하니, 답하기를,
“말한 바가 매우 옳아서 더할 나위 없다. 다만 내가 따르지 않는 것은 감히 논자들을 옳지 않게 여겨서가 아니다. 그가 비록 국가에 죄를 얻기는 하였지만, 나는 각박하게 할 수가 없기 때문에 지체하며 차마 하지 못하는 것이다. 옥당은 나의 뜻을 헤아리기 바란다.”
하였다. 교리(校理)는 조인후(趙仁後)·홍종록(洪宗祿)·배삼익(裵三益)이고, 수찬(修撰)은 유근(柳根)·이정립(李廷立)이고, 정자(正字)는 윤섬(尹暹)이다.
○ 성균관 사성, 홍문관 부교리가 되다.
○ 7월, 同姓간의 혼인을 금할 것을 주청하다.
○ 12월, 승정원 동부승지가 되다.
선조 19 1586 53세
○ 2월, 우부승지가 되다.
○ 8월, 장례원 판결사가 되다.
○ 11월, 성균관 대사성이 되다.
선조 20 1587 54세
○1월, 陳謝使로 차임되다.
○ 19년 병술에 하절사 윤자신(尹自新)과 하지사(賀至使) 성수익(成壽益)이 회동관(會同館)에 있을 때에 실화(失火)의 죄를 물어 사신 이하 관원이 모두 나포(拿捕)되어 국문받도록 되자 우리나라는 배신 배삼익(裵三益)과 원사안(元士安)을 보내 표(表)를 받들어 진사(陳謝)하니, 황제가 칙서를 내려 왕의 충성과 근신함이 칭찬할 만함을 포장(褒獎)하고 망의(蟒衣)와 채단(綵段)을 내려 주었다. 《일월록》
○ 「大明會典」의 宗系修正草本을 구해 와 그 공으로 內廐馬 1필을 하사받다.
선조 20년(1587 정해 / 명 만력(萬曆) 15년) 3월 13일(임인) 1번째기사
옥하관이 불에 타고 방물을 도둑맞은 일로 진사사를 보내며 내린 전교
관사(館舍)가 불에 타 무너지고 방물(方物)이 도둑맞은 사건 때문에 보내는 진사사(陳謝使) 배삼익(裵三益)이 길을 떠나는데, 전교하였다.
“서장관(書狀官)이 말하기를 ‘공마(貢馬)가 중도에서 죽는 것이 많아 단지 모피(毛皮)만 가지고 물건을 대조하게 하니, 사체가 온편치 못하다. 마장(馬粧) 3정(丁)과 유둔(油芚) 등의 물건을 일일이 수령해 가지만 이마(理馬)와 승문원(承文院)의 제원(諸員)이 나누어 쓰고 이를 가져가지 않기에 비나 눈을 견디지 못하고 쓰러지거나 손상된다. 그리고 압마관(押馬官)들이 중국말을 알아 듣지 못하므로 말먹이를 재촉할 수가 없어 기갈이 들어 죽는다.’ 하였다. 이제는 강을 건널 적에 마장 등의 물품을 일일이 대조 점검할 것이며, 일을 잘 아는 통사(通事)가 함께 호송하며 가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선조 20년(1587 정해 / 명 만력(萬曆) 15년) 8월 10일(정묘) 1번째기사
사은사 배삼익이 중국에서 물품을 내린 일과 《대명회전》이 수찬되었음을 아뢰다
사은사(謝恩使) 배삼익(裵三益)이 치계하기를,
“전일 사신(使臣)이 방물(方物)을 유실하고 관우(館宇)에 실화(失火)하였으므로 특별히 사신을 보내어 진사(陳謝)하였습니다. 예부(禮部)가 ‘조선 국왕(朝鮮國王)이 주청(奏請)하여 진사하니 충성과 근신함이 아름답다. 칙서로 표창하자.’고 제청(題請)하고 대홍저사망의(大紅紵絲蟒衣)·채단(彩緞) 4표리(表裏)를 논상하였습니다. 신들은 이를 받들어 가지고 갑니다. 그리고 《회전(會典)》1177) 은 벌써 수찬을 끝내어 총재관(總裁官) 이하를 차등 있게 논상하였습니다. 신은 정고(正稿)를 등서(謄書)하여 가지고 왔으며, 또 예부에 정문(呈文)하여 먼저 간행이 완료된 것을 가지고 갈 것을 청했더니, 비답(批答)하기를 ‘책이 완성되는 것을 보아 간행 배포되는 날에 제청(題請)하여 시행하겠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비망기를 내리기를,
“중조(中朝)가 우리 나라가 사죄(謝罪)하는 데 예를 극진히 하였다고 하면서 칭찬의 말을 극도로 하였다. 그리고 칙서를 내려 표창하며 물품 하사가 중첩되니, 황은(皇恩)이 망극하나 실상은 매우 부끄럽고 두렵다. 간책(簡冊)에 기록하면 족히 빛이 날 것이며, 다른 나라가 들으면 반드시 영광스럽게 여길 것이니, 스스로 생각하건대 박한 덕으로 어떻게 이런 것을 얻을 수 있겠는가. 오늘의 일은 실로 조정의 여러 어진 사람들의 충성을 다하여 주선함으로써 이룬 것이니, 더욱 여기에 감동됨이 있다. 《회전》은 반포해 내릴 것을 준허하였으니 이는 나라의 목숨이 재조(再造)된 것이기에 조종(祖宗)들께 사례해야 한다. 이런 뜻을 정원은 알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회계하기를,
“《회전》을 인행(印行) 반포하는 날이 정해졌으니 우리 나라 조종(祖宗) 2백 년 동안의 억울한 누명과 수치가 하루아침에 씻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는 실로 종사(宗社)의 전에 없던 경사입니다. 또 칙서를 내리고 옷까지 하사하여 은혜가 중첩되었으니, 이는 성상의 계지(繼志)의 효성과 사대의 정성이 이루신 일입니다. 그런데도 겸허하게 자처하지 않으시고 그 아름다움을 조정에 돌리시니, 신들은 감격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원하건대 성상께서는 정성스럽고 삼가며 나태하지 마시고, 더욱 외천(畏天)의 정성을 돈독히 하시어 종사의 무강한 기쁨을 영원하게 하소서.”
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丁卯/謝恩使裵三益馳啓曰: “以前日使臣遺失方物, 失火館宇, 別遣陳謝也。 禮部題請: ‘朝鮮國王具奏請陳謝, 忠愼可嘉。 寫勑奬論賞。’ 大紅紓絲蟒衣彩段四表裏。 臣等齎擧以去。 且《會典》已畢修, 總裁官以下論賞有差。 臣謄書正稿以來, 且呈文禮部, 請先刊完持去, 則批云: ‘案候書成, 刊布之日, 題請施行。’ 云云。” 備忘記曰:
天朝以我國謝罪, 謂之盡禮, 極其褒辭。 降勑奬諭, 賜齎稠疊, 皇恩罔極, 實深慙懼。 書之簡冊, 足以輝映, 諸國聞之, 必以爲榮。 自念湔薄, 何以得此? 今日之事, 實由朝廷諸賢, 盡忠周旋, 有以致之, 尤有感於斯也。 至於《會典》已準, 頒降有日, 此則國命再造, 將有辭於祖宗矣。 此意政院知悉。
回啓曰: “《會典》印頒有期, 我祖宗二百年抱冤蒙恥之事, 一朝湔雪。 此實宗社無前之慶。 且降勑賜服, 恩數稠疊, 無非聖上繼志之孝, 事大之誠, 有以致之。 而謙虛不居, 歸美朝廷, 臣等不勝感激之至。 伏願聖上, 恪謹匪懈, 益篤畏天之誠, 以延宗社無疆之休。” 傳曰: “知道。”
선조 20년(1587 정해 / 명 만력(萬曆) 15년) 9월 13일(기해) 1번째기사
진사사 배삼익 등에게 상을 내리다
방물(方物)을 도둑맞고 옥하관(玉河館)이 불에 탄 것 때문에 진사사(陳謝使)로 배삼익(裵三益)을 차임하여 북경에 보냈는데, 황제가 우리 나라에서 지성으로 사대(事大)한다 하여 칙서를 내려 표창하고, 또 망룡의(蟒龍衣)를 하사하였다. 이에 상이 모화관(慕華館)에 출영하여 권정례(權停禮)로 하례를 받고 배삼익에게는 내구마(內廐馬) 한 필을 내려 주었으며, 승문원 도제조·부제조, 그리고 주본(奏本)을 지은 사람에게도 모두 마필(馬匹)을 하사하였다.
○ 10월, 황해도 관찰사가 되어 救荒과 賑濟에 힘쓰다.
선조 21 1588 55세
선조 21년(1588 무자 / 명 만력(萬曆) 16년) 2월 3일(병진) 2번째기사
헌부가 이민각의 사정을 받아준 황해 감사 배삼익의 파직을 청하다
사헌부가 아뢰기를,
“황해 감사 배삼익(裵三益)은 이민각의 뜻을 사정(私情)에 의해 받아 주었으니 파직하고, 이민각은 일정한 기간 동안 서용하지 마소서.”
하니, 답하기를,
“배삼익은 추고하라. 이민각은 추고하면 자연히 법에 의해 처리되겠지만, 우선 아뢴 대로 하라.”
○황해도의 갯벌을 개간하여 屯田을 만들어 國用으로 하는 것을 반대하여 관철시키다.
○ 7월 1일, 병으로 체차되어 오는 도중 海州 靑丹驛에서 졸하다.
○ 9월, 奈城縣 虎崖山에 장사 지내다.
○ 19년 병술에 하절사 윤자신(尹自新)과 하지사(賀至使) 성수익(成壽益)이 회동관(會同館)에 있을 때에 실화(失火)의 죄를 물어 사신 이하 관원이 모두 나포(拿捕)되어 국문받도록 되자 우리나라는 배신 배삼익(裵三益)과 원사안(元士安)을 보내 표(表)를 받들어 진사(陳謝)하니, 황제가 칙서를 내려 왕의 충성과 근신함이 칭찬할 만함을 포장(褒獎)하고 망의(蟒衣)와 채단(綵段)을 내려 주었다. 《일월록》
○ 감사(監司) 배삼익(裵三益)이 대성(臺省)에 있으면서 일을 의논하기를 신중히 하고 이해 관계로 마음이 흔들리는 일이 없었다. 전일에 송사련이 안당의 집을 무고하였는데, 그 뒤에 그 자손이 분풀이를 하려고 법정에 송사하였으나 세력이 약하여 이길 수 없었으며, 법관들이 모두 회피하여 판결하지 못하였었는데, 배삼익이 즉시 판결하니 여론이 모두 통쾌하게 여겼다. 《조야첨재(朝野僉載)》
학봉집 제4권
조월천에게 답하는 편지
성 안으로 들어와 달이 두 번이나 찼기에 가을 소리를 들을 적마다 고향 땅을 그리는 탄식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삼가 보내 주신 서찰을 받들고서 무릎을 꿇은 채 읽노라니, 훤하신 얼굴을 직접 뵈온 듯하며, 또한 관직 생활이 평안하실 것으로 생각되는바, 실로 그리운 마음이 위로가 됩니다.
다만 이미 사임하고서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결정을 하여 정사(呈辭)하기까지 하였으나 방백에게 견제를 당하여 마음대로 하지 못한다고 하셨는데, 이는 현재 외직(外職)에 보임된 자들의 공통된 걱정입니다. 저 성일과 같은 자는 본디 붙잡는 사람이 없는데도 관직을 탐하는 마음에 못 떠나고 있으니, 이는 실로 부끄러운 일입니다.
여우(汝友)가 마침내 해주(海州)의 청단역(靑丹驛)에서 죽고 말았으니, 애통할 뿐입니다. 그의 처자식들이 이달 그믐날에 관을 부여잡고 남쪽으로 돌아갔는데, 그 모습을 차마 볼 수가 없었습니다. 붕우들은 거의 다 죽었고, 남아 있는 이들은 또 남쪽과 북쪽에 띄엄띄엄 떨어져 있으니, 흰 머리의 이 인간이 이 세상에 무슨 정나미가 있겠습니까.
서애는 이번 정사(政事)에서 사재(四宰)가 되었는데, 신하의 의리에 있어서 나아가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저는 이달 초에 설사병을 얻어 거의 죽었다가 살아나 일을 살핀 지 겨우 이틀밖에 안 되었습니다. 기력이 피곤하여 더 이상 쓸 수가 없습니다. 단지 벼슬과 학문이 양쪽 다 넉넉하여서 선비들의 바람에 부응하시기만을 축원드립니다.
권장중(호문)에게 보낸 편지
전에 산속 암자에 있을 적에 보내준 서찰을 받고서 근황이 몹시 좋다는 것을 알았으니, 기쁜 마음을 어찌 다 말할 수 있겠는가. 다만 강에 봄물이 불어나 돌아가는 종이 나에게 하직 인사도 하지 않고 갔으며, 근래에는 한창 농사철이어서 또 심부름꾼을 보내어 소식을 전하기도 어려웠네. 이 때문에 소식이 늦어지게 되었으니, 나의 불민스러움이 몹시 죄스럽네. 지금 권질(權姪)을 만나 보고서 또 덕음을 받들었는바, 서로 아껴 주는 마음이 없다면야 어찌 이렇게까지 할 수 있겠는가. 감사하는 마음을 금할 길 없네.
나는 산에서 하상(河上)으로 내려온 지가 이미 며칠 되었으니, 모레쯤 산으로 돌아갈 것이네. 청성산(靑城山)의 좋은 유람이 오랫동안 꿈속에 들어오는데도 아직 한번도 하지 못하였네. 학산(鶴山)에서 한 약속을 생각할 적마다 부끄러운 마음이 들지만, 어쩌겠는가. 4월 초하루가 지난 뒤 만약 여산(廬山)으로 찾아간다면 나 역시 갈 수가 있을 것이네.
그리고 이어 여우(汝友)를 불러서 함께 이야기를 나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기를 간절히 바라네.
보내준 시를 공경스레 읽어보고는 맑은 풍모를 접하는 것만 같아서 나도 모르는 새 구름과 산이 겹친 듯하니, 졸렬한 나의 시로 그대의 눈을 더럽히지 못하겠네. 한번 웃어 주기나 바라네. 나머지는 이만 줄이네.
선조 30년(1597 정유 / 명 만력(萬曆) 25년) 10월 16일(계유) 3번째기사
경리 양호의 뜻을 받아들여 남방에 즐비한 시체들을 거두어 묻기로 하다
경리의 접반사 이덕형이 아뢰기를,
“경리가 기고(旗鼓)를 시켜 말을 전하기를 ‘지금 여러 장수들의 보고를 받으니 남방의 일로에 쌓인 시체가 널려 있는데 남원이 더욱 심하여 매우 참혹하다고 한다. 국왕께 아뢰어 관리를 차출해서 거두어 묻게 하라.’ 하기에, 신들이 대답하기를 ‘의정 유성룡【성룡은 영남 사람이다. 천성이 영오하고 어려서부터 퇴계 선생의 문하에서 배웠으며 문학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기축 옥사의 변이 일어나자 의정으로서 최영경(崔永慶)의 죽음을 구제하지 못하여 당시 사람들이 좋지 않게 여겼다. 경인년에 일본과 통신할 때에 사신을 보내자고 건의하여 조정을 욕되게 하였으면서도 마음에 만족치 못해 또 왜적과 화친을 도모하여 국사를 그르쳤으니 통탄할 일이다. 이에 앞서 휴가를 얻어 안동 땅에 귀향하여 어머니를 뵙자마자 즉시 집에서 10리 남짓한 거리의 정자에다 온 시골의 선비들을 모아놓고 술을 마신 일이 있었다. 배용길(裵龍吉)은 배삼익(裵三益)의 아들로 강개한 선비였는데, 그 자리에 있다가 술잔을 잡고 나아가 말하기를 ‘선생께서 오늘 선비들과 함께 모여서 회포를 푸는 것은 또한 한 가지 아름다운 일로 참으로 즐길 만합니다만 선생께서 임금에게 몸을 맡겨 어버이를 살피지 못한 지가 5∼6년이나 되었습니다. 선생께서 여기에 머무실 날도 며칠에 불과한데 날마다 사람들과 이 정자에서 술에 취해 노시면 어버이를 뫼시는 시간은 적고 선비와 만나는 날은 많아서 효도하는 도리에 어긋날까 두렵습니다.’ 하니, 성룡이 매우 부끄러워했고 온 좌중도 마음이 섬뜩하여 즉시 파연하였다. 전 정(正) 조목(趙穆)도 퇴계의 제자로서 학행이 그 문하에서 높았다. 일찍이 성룡에게 편지를 보내 말하기를 ‘선생이 평소 배운 것이 단지 화친을 주장하여 국사를 그르치는[主和誤國] 네 글자뿐입니까? 나는 당신이 성현의 글을 알면서 이런데 이를 줄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하니, 성룡이 심히 유감을 품었다. 큰 절도가 이러하니 문장의 작은 기예야 무슨 취할 것이 있겠는가. 】이 안성 등 지방에 가보니 시체가 들판에 널려 있으므로 남아 있는 백성과 승려들을 시켜 묻었다고 한다. 이러한 뜻도 즉시 아뢰어 거행하겠다…….’ 하였으므로 감히 아룁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알았다. 이것은 좌의정이 마땅히 할 일이다.”
하였다.
先生曰。裵三益。是柳西厓之同接友也。裵之葬也。西厓爲銘其墓。裵之子龍吉。不用柳文。更請于李山海。人皆笑之。 윤선거 魯西集 石室語錄
二十九日。看西厓集。我國經世之文。當以西厓爲第一。辭氣甚溫潤。議論甚精覈。裵三益碑。有情景最好。但不著其名。可疑。남극관 몽예집(夢囈集) 端居日記
임연재 장인 남신신의 묘표
處士英陽南公墓表 孤山 이유장 찬
公諱藎臣。字公輔。自號洛江漁隱。其先有姓名金忠。以中朝達官。嘗奉使外國。漂到國南。賜姓南氏。改名敏。封英毅公。以英陽爲貫。其子孫遂爲東方大姓。高祖諱富良。果毅將軍上護軍。曾祖諱貞貴。從仕郞昌德宮錄事。祖諱敬彝。宣務郞通禮門通贊。考諱軾。承仕郞榮川訓導。妣鐵城李氏。通訓大夫司醞署令諱泙之女。左議政原之曾孫。公生于弘治乙丑十一月九日。歿于嘉靖庚戌五月三日。配草溪卞氏。成均進 士百源之女。生于正德庚午九月二十五日。歿于萬曆丁丑五月十一日。生子男四人女二人。男致元,致亨,致利,致貞。女適洪國良,裴三益。致亨。成均生員。裴三益。登文科。官至黃海監司。公之敎諸子。以元亨利貞四德。命其名。且爲歌詞。詠歎淫泆。使之興起其心。又以朱文公十二訓。誘掖奬勸之故。諸子多以德行稱於鄕。而第三子諱致利。世所稱賁趾先生者。早有斯文重望。雖不幸短命。未得有爲於一時。而百歲之下。公論未泯。鄕人相與俎豆而崇奉之。亦可見家庭訓誨之所及也。公之藏。在安東治東五里柞棫洞坤 向之原。卞氏墓。在其後。後來諸房子孫。或存或絶。獨生員公之後。頗衍昌。有秀才斗元。以墓道無樹爲懼。將立石表墟。請識於惟樟。晩生末學。其於昔賢遺躅。無所徵信。而敢就賁趾公所草誌文。僭加檃括。以備顯刻。銘曰
世在嘉靖。髦士咸造。浪跡江湖。亦各從好。長歌短詠。作人之謨。爲此詩者。其知道乎。柞棫之原。碩人所藏。爲詔來世。無敢毀傷。
임연재 배삼익 선생 교유인물록
인동 장달수 편
목차
*퇴계 선생
*남명 선생
*박승간(朴承侃) 1508년(중종 3)∼1588년(선조 21).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자열(子悅), 호는 인암(忍庵).
*안방경(安方慶) 1513년(중종 8)∼1569년(선조 2).
본관은 죽산(竹山). 자는 선응(善應), 호는 구배헌(灸背軒).
*박소립(朴素立) 1514년(중종 9)∼1582년(선조 15).
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예숙(豫叔). 판서 박세무(朴世茂)의 아들이다.
*양희(梁喜)1515년(중종 10)∼1580년(선조 13). 경남 함양출신.
본관은 남원(南原). 자는 구이(懼而), 호는 구졸암(九拙菴).
*김부필(金富弼) 1516년(중종 11)∼1577년(선조 10) 예안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언우(彦遇). 호는 후조당(後彫堂).
*변영청(邊永淸)1516년(중종 11)∼1580년(선조 13). 안동
본관은 원주(原州). 자는 개백(開伯), 호는 동호(東湖).
*이희검(李希儉)1516년(중종 11)∼1579년(선조 12).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경질(景質), 호는 동고(東皐) 또는 국재(菊齋).
*권동보(權東輔)1517년(중종 12)∼1591년(선조 24). 봉화 유곡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진경(震卿), 호는 청암(靑巖).
*민운서(閔雲瑞) 1517년(중종 12) 영주 출신 임연재와 사마시 동방
본관은 영천(榮川) 자는 역경(繹卿)
*허엽(許曄) 1517년(중종 12)∼1580년(선조 13). 서울 출신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태휘(太輝), 호는 초당(草堂).
*황응규(黃應奎 )1518년(중종 13)∼1598년(선조 31). 풍기 출신
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중문(仲文), 호는 송간(松澗).
*우배언(禹拜言) 1519년(중종 14) 서울 출신
본관은 단양(丹陽) 자는 수선(受善)
*이숙량(李叔樑) 1519년(중종 14)∼1592년(선조 25).
본관은 영천(永川). 자는 대용(大用), 호는 매암(梅巖).
*배신(裵紳) 1520년(중종 15)∼1573년(선조 6).
본관은 성산(星山). 자는 경여(景餘), 호는 낙천(洛川).
*곽한(郭瀚) 거주지 봉화(奉化)
본관은 현풍(玄風) 자 대용(大容)
*곽황(郭趪)
본관은 현풍(玄風) 자는 경정(景靜)
*강제(姜霽) 예천 용궁 출신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명원(明遠), 호는 백석(白石).
*박민준(朴民俊) 밀양출신 임연재와 문과 동방
본관은 죽산(竹山). 자는 경일(景逸). 호는 관재(寬齋)
*이후백(李後白) 1520년(중종 15)∼1578년(선조 11). 서울 출신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계진(季眞), 호는 청련(靑蓮).
*오수영(吳守盈) 1521년(중종 16)∼1606년(선조 39). 예안
본관은 고창(高敞). 자는 겸중(謙仲), 호는 춘당(春塘) 또는 도암(桃巖).
*김극일(金克一) 1522년(중종 17)∼1585년(선조 18). 안동 출신.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백순(伯純), 호는 약봉(藥峰).
*정복시(鄭復始) 1522년(중종 17)∼1595년(선조 28).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이건(以建), 호는 계담(桂潭)‧계헌(桂軒).
*유홍(兪泓) 1524년(중종 19)∼1594년(선조 27).
본관은 기계(杞溪). 자는 지숙(止叔), 호는 송당(松塘).
*이준민(李俊民)1524년(중종 19)∼1590년(선조 23).
본관은 전의(全義). 자는 자수(子修), 호는 신암(新菴).
*조목(趙穆) 1524년(중종 19)∼1606년(선조 39). 예안 출신
본관은 횡성(橫城). 자는 사경(士敬), 호는 월천(月川).
*김부의(金富儀) 1525년(중종 20)~1582년(선조 15) 예안 출신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신중(愼仲), 호는 읍청정(挹淸亭)이다.
*송원(宋瑗) 1525년(중종 20) 진천 출신 임연재와 문과 동방
본관은 진천(鎭川) 자는 희거(希蘧)
*김위(金偉) 임연재 선생이 사마시에 합격할 때 문과에 급제 남원 출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여기(汝器), 호는 만취(晩翠).
*금응협(琴應夾) 1526년(중종 21)∼1596년(선조 29). 예안 출신.
본관은 봉화(奉化). 자는 협지(夾之), 호는 일휴당(日休堂).
*이양원(李陽元) 1526년(중종 21)∼1592년(선조 25). 서울 출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백춘(伯春), 호는 노저(鷺渚).
*노경복(盧景福)
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수중(綏仲).
*석경일(石擎日) 임연재와 문과 동방
본관은 화원(花園). 자는 성보(誠甫).
*신호(申濩)
본관은 영천(永川). 자는 덕홍(德弘). 아버지는 신광필(申光弼)이다.
*민응기(閔應祺) 영주 출신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백향(伯嚮), 호는 우수(尤叟) 또는 경퇴재(景退齋).
*구봉령(具鳳齡) 1526년(중종 21)∼1586년(선조 19). 예안 지내
본관은 능성(綾城). 자는 경서(景瑞), 호는 백담(柏潭).
*정탁(鄭琢)1526년(중종 21)∼1605년(선조 38). 예천 출신.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자정(子精), 호는 약포(藥圃)‧백곡(栢谷).
*문응구(文應龜) 1528년(중종 23) 의성 출신. 임연재와 사마시 동방
본관은 선산(善山) 자는 정서(廷瑞)
*안봉(安鳳) 1528년(중종 23) 서울 출신
본관은 충주(忠州) 자는 서경(瑞卿)
*이제민(李齊閔) 1528년(중종 23)∼1608년(광해군 즉위).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경은(景誾), 호는 서간(西澗).
*곽간(郭趕)1529년(중종 24)∼1593년(선조 26).
본관은 현풍(玄風). 자는 원정(元靜), 호는 죽재(竹齋).
*윤자신(尹自新) 1529년(중종 24)∼1601년(선조 34).
본관은 남원(南原). 자는 경수(敬修). 전적 윤식(尹湜)의 아들이다.
*전응창(全應昌) 1529년(중종 24) 대구 출신 임연재와 사마시 동방
본관은 경산(慶山), 자는 성지(成之)
*금난수(琴蘭秀) 1530년(중종 25)∼1604년(선조 37). 봉화 출생.
본관은 봉화(奉化). 자는 문원(聞遠), 호는 성재(惺齋) 또는 고산주인(孤山主人).
*이응기(李應麒) 1530년(중종 25)∼1588년(선조 21). 서울 출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정서(廷瑞).
*이희중(李喜中) 1530년(중종 25) 진주 출신. 임연재와 사마시 동방
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정경(正卿)
*고응척(高應陟) 1531년(중종 26)∼1605년(선조 38). 선산 출신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숙명(叔明), 호는 두곡(杜谷)‧취병(翠屛).
*김부륜(金富倫) 1531년(중종 26)∼1598년(선조 31). 예안 출신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돈서(敦敍), 호는 설월당(雪月堂).
*양사기(楊士奇) 1531년(중종 26)∼1586년(선조 19).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응우(應遇), 호는 죽재(竹齋).
*정윤희(丁胤禧) 1531년(중종 26)∼1589년(선조 22). 서울 출신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경석(景錫), 호는 고암(顧庵) 또는 순암(順庵).
*조사언(曹士彦) 1531년(중종 26) 밀양 출신 임연재와 사마시 동방
본관은 청도(淸道) 자는 준경(俊卿)
*권호문(權好文) 1532년(중종 27)∼1587년(선조 20). 안동 송야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장중(章仲), 호는 송암(松巖).
*김효원(金孝元) 1532년(중종 27)∼1590년(선조 23).
본관은 선산(善山). 자는 인백(仁伯), 호는 성암(省菴).
*박점(朴漸) 1532년(중종 27)∼미상.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경진(景進), 호는 복암(復庵).
*이희(李熹) 1532년(중종 27)∼1592년(선조 25).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자수(子脩), 호는 율리(栗里).
*황정욱(黃廷彧) 1532년(중종 27)∼1607년(선조 40).
본관은 장수(長水). 자는 경문(景文), 호는 지천(芝川).
*정유일(鄭惟一) 1533년(중종 28)∼1576년(선조 9). 봉화 내성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자중(子中), 호는 문봉(文峰).
*권문해(權文海) 1534년(중종 29)∼1591년(선조 24). 예천 출신
본관은 예천(醴泉). 자는 호원(灝元), 호는 초간(草澗).
*남치리(南致利) 1534년(중종 29)∼1580년(선조 13). 안동 노림
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의중(義中), 호는 비지(蕡趾).
*박운(朴蕓) 1535년(중종 30) 예천출신
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언수(彥秀). 호는 병백당(病柏堂)
*권용중(權用中)1536년(중종 31)~미상.
본관은 안동(安東).자는 중정(仲正)이다.
*홍성민(洪聖民) 1536년(중종 31)∼1594년(선조 27).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시가(時可), 호는 졸옹(拙翁).
*유영립(柳永立) 1537년(중종 32)∼1599년(선조 32). 서울 출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입지(立之).
*조종도(趙宗道) 1537년(중종 32)∼1597년(선조 30). 임연재와 사마시 동방
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백유(伯由), 호는 대소헌(大笑軒).
*김성일(金誠一) 1538년(중종 33)∼1593년(선조 26). 안동 출신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사순(士純), 호는 학봉(鶴峰).
*안제(安霽) 1538년(중종 33) 안동 출신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여지(汝止) 호는 동고(東皐)
*이산해(李山海) 1539년(중종 34)∼1609년(광해군 1).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여수(汝受), 호는 아계(鵝溪)‧종남수옹(終南睡翁).
*이성중(李誠中) 1539년(중종 34)∼1593년(선조 26). 임연재와 사마시 동방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공저(公著), 호는 파곡(坡谷).
*김륵(金玏)1540년(중종 35)∼1616년(광해군 8). 영주 출신
본관은 예안(禮安). 자는 희옥(希玉), 호는 백암(柏巖).
*김우옹(金宇顒)1540년(중종 35)∼1603년(선조 36). 성주(星州) 출신.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숙부(肅夫), 호는 동강(東岡) 또는 직봉포의(直峰布衣).
*남치형(南致亨) 1540년(중종 35) 안동(安東) 노림
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양중(養仲)
*오운(吳澐) 1540년(중종 35)∼1617년(광해군 9). 영주 거주
본관은 고창(高敞). 함안 출생. 자는 태원(太源), 대원(大源) 호는 죽유(竹牖)‧죽계(竹溪).
*김복일(金復一) 1541년(중종 36)∼1591년(선조 24). 예천 거주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계순(季純), 호는 남악(南嶽).
*김은휘(金殷輝)1541년(중종 36)∼1611년(광해군 3).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경회(景晦).
*이덕홍(李德弘) 1541년(중종 36)∼1596년(선조 29). 예안 출신
본관은 영천(永川). 자는 굉중(宏仲), 호는 간재(艮齋).
*홍혼(洪渾) 1541년(중종 36)∼1593년(선조 26).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혼원(渾元), 호는 시우당(時雨堂).
*김시회(金時晦) 1542년(중종 37)∼1581년(선조 14). 청안 출신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양오(養吾), 호는 양진재(養眞齋).
*류성룡(柳成龍)1542년(중종 37)∼1607년(선조 40). 안동 하회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이견(而見), 호는 서애(西厓).
*강신(姜紳) 1543년(중종 38)∼1615년(광해군 7).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면경(勉卿), 호는 동고(東皐).
*권두문(權斗文) 1543년(중종 38)∼1617년(광해군 9). 영주 출신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경앙(景仰), 호는 남천(南川).
*원사안(元士安) 1543년(중종 38) 서울 출신
본관은 원주(原州). 자는 언인(彦仁). 호는 만송(萬松)
*황섬(黃暹) 1544년(중종 39)∼1616년(광해군 8). 영주
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경명(景明), 호는 식암(息庵)‧돈암(遯庵).
*정인관(鄭仁寬) 나주 출신
본관은 광주(光州). 자는 백유(伯裕). 아버지는 정표(鄭彪)
*심희수(沈喜壽) 1548년(명종 3)∼1622년(광해군 14).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백구(伯懼), 호는 일송(一松) 혹은 수뢰루인(水雷累人).
*유근(柳根) 1549년(명종 4)∼1627년(인조 5).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회부(晦夫), 호는 서경(西坰).
*홍이상(洪履祥) 1549년(명종 4)∼1615년(광해군 7).
본관은 풍산(豊山). 초명은 인상(麟祥). 자는 군서(君瑞)‧원례(元禮), 호는 모당(慕堂).
*유영경(柳永慶) 1550년(명종 5)∼1608년(광해군 즉위).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선여(善餘), 호는 춘호(春湖).
*송상현(宋象賢) 1551년(명종 6)∼1592년(선조 25).
본관은 여산(礪山). 자는 덕구(德求), 호는 천곡(泉谷).
*고종후(高從厚)1554년(명종 9)∼1593년(선조 26). 광주 출신
본관은 장택(長澤). 자는 도충(道冲), 호는 준봉(隼峰).
*한응인(韓應寅) 1554년(명종 9)∼1614년(광해군 6).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춘경(春卿), 호는 백졸재(百拙齋)‧유촌(柳村).
*이정립(李廷立) 1556년(명종 11)∼1595년(선조 28).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자정(子政), 호는 계은(溪隱).
*임몽정(任蒙正)1559년(명종 14)∼1602년(선조 35).
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직초(直初), 호는 운호(雲湖).
*장운익(張雲翼)1561년(명종 16)∼1599년(선조 32). 서울 출신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만리(萬里), 호는 서촌(西村).
*정희번(鄭姬藩)
본관은 온양(溫陽). 자는 자한(子翰), 호는 고송(孤松).
퇴계 선생
*退溪先生輓
濂洛眞傳屬晦翁。微言昭載簡編中。先生獨自追前緖。天意元應相我東。
絶學復明知有賜。斯文不墜是誰功。摳衣十載蒙恩重。慕切羹牆淚欲空。
退溪先生文集
詩
*裴汝友,趙士敬,琴聞遠,朴彦秀蕓諸君。同枉顧溪齋。因往遊孤山。明日。寄呈二絶句。
聞說山潭辦釣船。夢中乘弄覺猶仙。勝遊此日身如縶。空把殘杯款款傳。
敗閑吾迹太無端。負我非山我負山。臥想諸君追賞處。玉峯搖影鏡潭寒。
書
*答裴汝友三益○丁卯
別後悠戀。伻來接翰。知函丈從容。淸福益茂。滉積謗之餘。召命異常。震越罔措。幸賴姑停之旨。苟偸度日。第以春和後作如何出場。撓慮不淺。佔畢翁果有如南冥所云。然亦甚有扶植處。何可深斥。作院立祠。正不可不爾也。幸勿疑貳。勸卒成之爲佳。
*答裴汝友
遠辱手字。知迪掖淸暇。爲慰且喜。滉老病縻伏。事多惶汗。不知稅駕之所也。再蒙印寄年譜。又重校改正之力。皆賴公克就。何幸如之。但秦元定之秦字。終不可曉。然別人決無秦元定者。且先生本葬於此地。非自他處遷葬也。疑蔡西山以某年某日。遷葬於此。以見先生與西山。缺同志同道。沒後亦同歸一原之意耳。然則秦當改蔡。爲得之。如何如何。餘不具。曹大而想相見。一書爲傳之。
남명 선생
*曺南冥先生輓
聞說南州又失公。頭流萬壑一時空。天心不悔斯文禍。士類長悲此道竆。
山海至今留夜月。䨓龍無復襲春風。身縻千里難奔走。白首緘辭愧素衷。
박승간(朴承侃) 1508년(중종 3)∼1588년(선조 21).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자열(子悅), 호는 인암(忍庵).
증조부는 박병균(朴秉鈞)이고, 조부는 박숙(朴䃞)이고, 아버지는 박형(朴珩)이다.
외조부는 김만일(金萬鎰)이고, 처부는 권호(權顥)이다.
1531년(중종 26) 생원시에 합격하고, 1540년(중종 35) 문과에 급제하였는데, 이때 동생 박승임(朴承任)도 급제하였다.
승문원저작(承文院著作)‧첨정(僉正)‧성균관사성(成均館司成) 등을 역임하였다. 이후 간혹 개령(開寧)‧밀양(密陽) 등지의 수령(守令)으로 나갔다가 1559년(명종 14) 9월에는 강릉(江陵)으로 전임(轉任)하였다. 전라감군어사(全羅監軍御使)‧군기시정(軍器寺正)을 지내고 1562년(명종 17)에는 경상점마(慶尙點馬)를 하였다.
臨淵齋先生文集
詩
*送朴密陽子悅之官
遠客逢秋雨。那堪又送行。關河愁去路。雲樹惜離情。
山水樓居勝。詩書禮俗成。何當過單父。鈴閣聽琴鳴。
안방경(安方慶) 1513년(중종 8)∼1569년(선조 2).
본관은 죽산(竹山). 자는 선응(善應), 호는 구배헌(灸背軒).
안순(安恂)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홍문관부제학 유진(兪鎭)의 딸이다.
1540년(중종 35) 생원이 되고, 같은해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권지부정자(承文院權知副正字), 예문관검열‧대교‧봉교 등을 거쳐, 1545년(명종 즉위) 이후 사헌부감찰‧예조좌랑‧함경도도사‧영서도찰방(迎署道察訪)‧형조정랑‧장악원첨정 등을 역임하였다.
1550년 성균관사예로 《인종실록》을 찬수하였고, 지평‧경기도도사‧남원부사를 거쳐 1557년 사간원사간을 지냈다.
1561년 이후 병으로 벼슬을 떠나 있다가 1564년 홍문관교리‧동부승지를 거쳐 1565년 형조참의에 이르렀다. 이해에 문정왕후(文定王后)와의 불화로 외직에 나가 청홍도관찰사를 지냈고, 1568년 장례원판결사‧영흥부사를 역임하였다. 관직에서 물러나서는 용인에 기거하면서 거처를 남록구배헌(南麓灸背軒)이라 하였다.
臨淵齋先生文集
詩
*廣州南廳。次安都事 方慶 韻。
壁上看遺句。詩人思一般。山寒日色暮。木落歲華殘。
憂抱何時盡。歡情此夜闌。臨淵齋未就。歸計負蒼巒。
박소립(朴素立) 1514년(중종 9)∼1582년(선조 15).
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예숙(豫叔). 판서 박세무(朴世茂)의 아들이다.
1555년(명종 10)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이듬해 승정원주서(承正院注書)가 된 뒤, 홍문관정자(弘文館正字)‧수찬(修撰)‧이조좌랑 등을 역임하였다.
1563년 이조정랑이 되었으나 당시 명종의 총애를 받던 척신 이량(李樑)과 사이가 나빠 대사헌 이감(李戡)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이량이 술책을 써서 자기 아들을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갑과로 뽑히게 한 뒤 전랑(銓郞)으로 추천하였다.
그러나 상피제(相避制)에 의해 아들이 취임하지 못하고 아들의 친구인 유영길(柳永吉)이 후임으로 추천되자 이를 못마땅하게 여겨 좌랑(佐郞) 윤두수(尹斗壽) 등과 함께 이를 반대하였다.
이문형(李文馨)‧허엽(許曄)‧기대승(奇大升) 등도 이에 동조하였으나, 국정을 전단하는 이량과 이감에 의해 “부박(浮薄)하며 선동한다.”는 죄명으로 관직에서 추방되었다.
그러나 심의겸(沈義謙)의 도움으로 다시 홍문관부교리(弘文館副校理)로 복직되었다.
1567년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재직하던 중 명종이 후사없이 죽자 원상(院相) 이준경(李浚慶), 도승지 이양원(李陽元) 등과 같이 덕흥군(德興君)의 셋째아들 선조를 왕으로 즉위시키는 데 공을 세워 대사성(大司成)이 되었다.
1571년(선조 4)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도승지‧대사헌. 경상감사 등을 거쳐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臨淵齋先生文集
詩
*贈朴監司豫叔 素立
攬轡南荒七十州。恢恢隨處刃能遊。剛柔便合恩威施。文武兼懷將相憂。
夢斷西城空步月。心懸北闕幾登樓。今朝好伴春風去。臨別裁詩勸少留。
첨정(僉正) 양응곤(梁應鵾)의 아들이다.
노정(盧禎)‧이후백(李後白)과 함께 도의와 학문을 닦아 영남의 삼걸(三傑)이라 일컬어졌다.
1546년(명종 1)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정언‧지평 등을 지내고, 1568년(선조 1)에 예빈시정(禮賓寺正)으로 춘추관편수관을 겸직하여 《명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벼슬은 파주목사‧사간‧의주목사‧승지를 거쳐, 1580년에는 장례원(掌隷院)의 판결사(判決事)를 지냈다.
1581년 동지사(冬至使)로 청나라에 갔다가 옥하의 객관에서 병사하였다. 뒤에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함양의 구천사(龜川祠)에 제향되었다
臨淵齋先生文集
詩
*上梁使君東老先生 喜
零落梅花散竹風。三春羇思雨聲中。東郊皁葢歸來晩。尊酒無緣一醉同。
風流意氣最靑春。湖學來遊迹已陳。報道諸君莫相訝。麻衣當日讀書人。
紅白梅花爛漫開。不妨終夕酌金罍。佳人莫怪遲遲去。留待東峯月上來。
김부필(金富弼) 1516년(중종 11)∼1577년(선조 10) 예안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언우(彦遇). 호는 후조당(後彫堂). .
아버지는 대사헌 연(緣)이며, 어머니는 창녕조씨(昌寧曺氏)로 치당(致唐)의 딸이다. 1537년(중종 32)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유학하면서 김인후(金麟厚)와 교유하였다. 1556년(명종 11) 41세의 나이로 이황의 문하에 나아가 제자로서의 예를 올렸으며, 여러 차례 벼슬이 내렸지만 사양하고 학문에 정진하였다. 이에 이황이 “후조주인(後彫主人)은 깨끗한 절개를 굳게 지켜, 임명장이 문전에 이르러도 기뻐하지 않는구나 …….”라는 시를 지어 그의 지조와 절개를 높이 평가하였다. 평소 효제를 학문의 근본으로 삼았으며, 일생 ≪심경 心經≫을 애독하였다고 한다. 1571년(선조 4) 스승 이황이 사망하자 소의(素衣)·소대(素帶)·소식(素食)하며 심상(心喪) 1년을 행하였다. 아우 김부의(金富儀), 4촌형 김부인(金富仁), 4촌아우 김부신(金富信)·김부륜(金富倫), 고종 금응훈(琴應壎)·금읍협(琴應夾)과 한 동네에 살면서 학문을 토론하고 덕업을 권장하여 향리에서는 ‘오천7군자(烏川七君子)’라 칭송되었다. 1570년 이황이 역동서원(易東書院)을 건립할 때 적극적으로 협조하였으며, 1574년에는 조목(趙穆)과 함께 도산서원 건립을 주도하였다. 구봉령·권호문·조목 등 동문들과 두루 교유하였으며, 학문과 행실로서 사림들 사이에 신망이 높았다. 1822년(순조 22)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문순(文純)의 시호가 내렸다. 예안의 낙천사(洛川祠)에 위패가 봉안되었다.
저서로는 ≪후조당문집 後彫堂文集≫이 있다.
後彫堂先生文集
詩
*病中寄贈裵汝友 三益
朝日初昇客馬鳴。墻頭花拂故人行。衣裳顚倒還欹枕。空負尊前眼拭靑。
변영청(邊永淸)1516년(중종 11)∼1580년(선조 13). 안동
본관은 원주(原州). 자는 개백(開伯), 호는 동호(東湖).
원주부원군(原州府院君) 변광(邊廣)의 아들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1546년(명종 1)에 진사가 되고, 1549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집의(執義)를 거쳐 남원부사‧대구부사‧상의원정(尙衣院正) 등을 역임하였다.
특히, 1570년(선조 3) 8월에는 선정을 하여 왕으로부터 말 안장을 받기도 하였다.
저서로 시집인 《동호집(東湖集)》이 있다.
東湖先生文集
次裴豐基汝友[三益]韻
人[一作孰]道靑鳬有險程。奉親榮養是安行。天恩日重常思報。宦海風多每戒盈。
客裏相逢頗慰意。樓頭送别㪅關情。悠悠歲月衰慵甚。欲和佳詩句未成。
이희검(李希儉)1516년(중종 11)∼1579년(선조 12).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경질(景質), 호는 동고(東皐) 또는 국재(菊齋).
태종의 아들 경녕군(敬寧君) 이비(李裶)의 현손으로, 이영정(李令禎)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강황(姜璜)의 딸이고, 지봉 이수광(李睟光)의 아버지이다.
1546년(명종 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학유‧정랑‧교리 등을 거쳐 승지‧오위장을 지내고 사간에 이르렀다.
이때 왕실의 인척임을 기화로 횡포를 부리는 이량(李樑)을 탄핵하였다가 도리어 장단부사로 좌천되었으나 드디어 이량이 쫓겨나게되자 다시 우승지에 제수되었다.
1572년(선조 5) 진하부사(進賀副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어 병조참의‧대사헌을 거쳐 호조‧형조‧병조의 판서를 지내고, 지경연사(知經筵事)를 지냈다.
저서로는 《동고집》이 있다.
臨淵齋先生文集
* 挽李判書 希儉
雅量能容物。沈機可決疑。經綸相業大。參贊廟謨宜。
共道身長健。誰知病未毉。緘辭揮老淚。不獨爲吾私。
권동보(權東輔)1517년(중종 12)∼1591년(선조 24). 봉화 유곡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진경(震卿), 호는 청암(靑巖).
아버지는 우찬성 충재 권벌(權橃)이다.
약관으로 향시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헌릉참봉(獻陵參奉)에 음서(蔭敍)되었으며, 1542년(중종 37)에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1547년(명종 2) 소윤 윤원형(尹元衡)이 대윤 윤임(尹任)일당을 몰아낸 것을 비방하는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에 관련되어 아버지가 삭주로 귀양갔다가 1년 만에 죽자, 그는 사섬시직장(司贍寺直長)을 버리고 20년 동안 두문불출하였다. 선조 때 아버지의 무죄가 밝혀져 복관되자, 다시 벼슬길에 나와 관직이 군수에 이르렀다.
그러나 벼슬을 사양하고 전원으로 돌아가 계곡 위에 석천정사(石泉精舍)를 짓고 산수를 즐기면서 지냈다.
臨淵齋先生文集
詩
*次權靑巖 東輔 韻
磊落平生不附依。功名豈願到黃扉。乾坤已晩三春色。雨露新生萬物輝。
鈴索初閒人散後。簿書多暇客來稀。時時點筆歸田賦。世事從今與我違。
*次權震卿韻
執管窺文豹。空慚見一斑。情緣親骨肉。恩義重丘山。
未變將頹俗。難迴旣倒瀾。歸田如遂願。屨杖欲追攀。
違拜龐床久。徒勤仰德風。鴈飛迴北塞。詩寄自南中。
短髮生新白。衰顔落舊紅。巖亭一樽酒。千里若相逢。
*朝天別章[靑巖權東輔]
少時隨父亦朝天。屈指于今五十年。鶴野微茫烟塹列。鳳城迢遞海門連。
昌黎大地千秋在。孤竹淸風萬古傳。聖代觀周歸去日。奚囊應富錦雲牋。
專對公曾誦六經。使乎今日賀西行。孤燈旅夜思家夢。五漏趨朝戀土情。
玉柱風輕臚響咽。金爐香動珮聲淸。欽承綸綍回車舝。東國千年享太平。
祭文[前草溪郡守權東輔]
天生偉人。實關於時。公稟異質。應玆昌期。決科筮仕。以大厥施。出宰二州。令聞交馳。宣室徵召。俾處憲司。玉署銀臺。人望攸宜。投無不可。厥聲。奉命朝天。敷奏帝庭。竣事回輈。復命于京。嘉乃丕績。錫之恩榮。西海連凶。餓殍煢煢。簡在王心。往哉汝諧。萬里初還。疾纏形骸。鞠躳盡瘁。誓死以報。孤忠耿耿。切冀寸效。盡心撫循。殫慮竭力。病不可毉。卒殞于職。訃聞震悼。賜賻稠疊。朝野之傷。位不滿德。自公髫齔。穎脫文詞。慨然志學。退翁爲師。睽離未久。九仞功成。相對談論。刮目而驚。曁乎晩節。益輸至情。茫茫今日。永隔幽明。設祭柩前。矢心以辭。庶幾肹蠁。以諒余悲。
민운서(閔雲瑞) 1517년(중종 12) 영주 출신 임연재와 사마시 동방
본관은 영천(榮川) 자는 역경(繹卿)
아버지는 참봉 민희건(閔希騫)
명종(明宗) 13년(1558) 진사시 합격
훈도(訓導)
臨淵齋先生文集
詩
*悼同年閔澤卿 雲瑞
別離經二載。人世異存亡。春風聞一笛。不忍過山陽。
허엽(許曄) 1517년(중종 12)∼1580년(선조 13). 서울 출신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태휘(太輝), 호는 초당(草堂).
군자감부봉사 허한(許瀚)의 아들이며, 허봉(許篈)‧허균(許筠)의 아버지이다.
진사시를 거쳐 1546년(명종 1)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였다.
1551년 부교리를 거쳐 1553년 사가독서한 뒤, 장령으로 있을 때 재물을 탐한 죄로 파직되었다.
1559년 필선으로 서용되고, 이듬해 대사성에 이르렀다.
1562년 지제교를 겸하였을 때 박계현(朴啓賢)과 함께 왕의 소명을 받고 옥취정(玉翠亭)에 들어가 율시(律詩)로 화답하였다. 이해 동부승지로 참찬관이 되어 경연(經筵)에 참석하여 조광조(趙光祖)의 신원을 청하고 허자(許磁)‧구수담(具壽聃)의 무죄를 논한 사건으로 파직되었다.
1563년 삼척부사로 서용되었으나 과격한 언론 때문에 다시 파직되었다.
1568년(선조 1) 진하사(進賀使)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향약의 설치‧시행을 건의하였다.
1575년 부제학을 거쳐 경상도관찰사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사퇴하고, 동지중추부사의 한직에 전임되었다가 상주의 객관에서 객사하였다.
어려서 나식(羅湜)에게 《소학》‧《근사록》 등을 배웠고, 서경덕(徐敬德)의 문인으로 학문을 익혔으며, 노수성(盧守成)과 벗하였다. 동‧서인(東西人)의 대립시 김효원(金孝元)과 함께 동인의 영수가 되어 당시 사류의 지도급 인물이 되었다. 벼슬을 30년간이나 지냈으면서 생활이 검소하였다.
《율곡집》에 보면 이론이 모순된 점이 많고 문의(文義)에 잘 통달되지 못하였다고 하였으며, 이황(李滉)은 학문 토론에 접하여 차라리 학식이 없었다면 착한 사람이 되었을 것이라고 개탄하였다.
박순(朴淳)과는 동문이었으나 당파가 서로 달라 사이가 벌어졌고, 말년에 경상도관찰사로 있을 때 김정국(金正國)이 찬수한 《경민편(警民編)》을 보충 반포하고, 《삼강이륜행실(三綱二倫行實)》의 편찬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청백리에 녹선(錄選)되고, 개성의 화곡서원(花谷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초당집》‧《전언왕행록(前言往行錄)》 등이 있다.
臨淵齋先生文集
*挽許巡相 曄 (경상감사)
閥閱陽川後。登庸際運昌。乾坤承寵渥。日月近淸光。望道憂何遠。看書樂未央。云亡今遽爾。天意亦茫茫。自解澄淸轡。唯思蔽芾棠。如何數晨夕。忽復異存亡。咨訪勞心力。馳驅冒雪霜。那知餞行酒。忍酌弔魂觴。將餞聞喜。到襄陽承訃。故末句云。
황응규(黃應奎 )1518년(중종 13)∼1598년(선조 31). 풍기 출신
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중문(仲文), 호는 송간(松澗).
아버지는 우찬성 황사우(黃士祐)이며, 어머니는 오수정(吳壽楨)의 딸이다.
주세붕(周世鵬)‧이황(李滉)의 문인이다.
1543년(중종 38) 사마시에 합격, 성균관에 입학하여 여러 차례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뒤 태학(太學)에서 그 재주를 아껴 추천하여 전함사별제(典艦司別提)가 되고 장흥고직장(長興庫直長)에 이르렀다.
1569년(선조 2) 52세로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 전생서주부(典牲署主簿)에 임용되고, 호조‧형조‧공조의 정랑과 좌랑 등 여러 벼슬을 역임하였다.
1588년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은거하였고, 소명이 있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양곡을 균량으로 바쳐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오르고, 1594년 동지돈령부사가 되었다.
또한, 향병대장(鄕兵大將)으로 추대되어 마을사람들에게 의기를 고취하고 장정‧군량 등을 모집하여 출전하였다.
초서(草書)를 잘 썼다. 저서로 《송간고》가 있다.
臨淵齋先生文集
詩
*黃仲文 應奎 日晩不至。詩以催之。辛未
芳草西郊春晝遲。郵亭風暖柳垂絲。踏靑歸去堪乘興。其柰傍無白也詩。松澗居白也洞故云
*示丹丘守仲文 (단구는 단양의 별칭 즉 단양군수))
寄語丹丘守。烟霞無恙不。春花度嶺去。潭島醉風流。
*次仲文韻
逢君玉雪面。愧我眞龍鍾。相思不相見。一嶺分西東。
朝天別章[松磵黃應奎]
聞說聖皇帝。闢門達四聰。覆盆光遍照。陰谷日傍通。
中朝悟市虎。外國拂讒蜂。一域臣民謝。吾王盡付公。
*祭文[黃應奎]
吾友汝友。今亡矣夫。士喪領袖。國失鴻儒。公之德行。欲書先吁。揚言未克。只自摧心。北關佩符。南土彈琴。恩威幷行。召杜齊賢。謂我故人。載酒林泉。深觥巨酌。長歌詠詩。襄陽承召。實荷聖知。薇垣烏府。靡不歷敭。喉舌銀臺。論思玉堂。使乎燕京。詠於甘棠。盡瘁致疾。毉藥不良。可惜氣節。今也則亡。陸行水浮。踰嶺到鄕。國恩專蒙。舟車自公。身雖云亡。榮莫與同。皇華使節。變作丹旌。故郡歷宿。吏民傷情。顧我衰病。未能匍匐。柩過門前。伏枕痛哭。奠不以躳。替人告誠。慙痛罔極。永負平生。
松澗先生文集
*次裴汝友[三益]韻
煙雨淸明節。山城近午炊。梅花何遜閣。春草惠連池。
解酒眠初罷。臨鞍日已移。幽懷㪅多緖。呼紙寫新詩。
*次裴汝友
春晝多情緖 故廬無酒杯 鳥啼花發處 何以獨徘徊
*次裴汝友韻
吾亦願閒長未閒 君何求去苦難還 秋風落葉淸江郡 相對蕭蕭更晩山
*裴汝友以陳謝赴燕寄詩送別 二首
聞說聖皇帝 闢門達四聰 覆盆光遍照 陰谷日傍通
中朝悟市虎 外國拂讒蜂 一域臣民謝 吾王盡付公
미수록
辰居君作使 行李向幽燕 華表鶴千載 長城客萬年
煙花三月路 楓葉九秋天 太史周南滯 將詩替贈鞭
우배언(禹拜言) 1519년(중종 14) 서울 출신
본관은 단양(丹陽) 자는 수선(受善)
아버지는 제용감 부정 우안국(禹安國)
명종(明宗) 10년(1555) 생원 진사 양시 합격
臨淵齋先生文集
詩
*贈禹受善
濛濛春雨灑寒梅。東閣深深晝不開。正好聯床相取醉。如何咫尺未歸來。
이숙량(李叔樑) 1519년(중종 14)∼1592년(선조 25).
본관은 영천(永川). 자는 대용(大用), 호는 매암(梅巖).
호조참판 농암 이현보(李賢輔)의 아들이다.
일찍이 이황(李滉)의 문하에 나아가 학문을 닦았는데, 문장은 청려전아(淸麗典雅)하고 필법은 절묘하였다고 한다.
1543년(중종 38)에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과업(科業)에는 뜻을 두지 않고 성리학의 연구에만 치중하였는데, 후일 천거에 의하여 왕자사부(王子師傅)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임진왜란 때에는 격문을 지어 의병의 궐기를 촉구하기도 하였으나 난중에 죽었다.
대구의 연경서원(硏經書院)에 제향되었다.
臨淵齋先生文集
詩
*過李大用 叔樑 樂益亭
溪柳巖桃各自誇。客來春日欲西斜。主人遠在汾川上。虛負東風一歲華。
*次李大用愛日堂韻
從來勝地本無恒。小閣重新光價增。白首羹牆追舜慕。衷情一一見良能。右重新
愛慕深情各有施。舊名新號映江湄。坐看今古堂興廢。喜懼飜成沒世悲。右換名
論刑殷血漲秦川。避弋冥鴻勢固然。聖代只今臻至治。紫芝何必詠遺篇。右四皓
弟勸兄酬樂一時。那知異日各分離。山川本屬公家物。亭觀何須作我私。右傳後
故園東望幾回春。山水亭中物色新。勝槩一川分上下。欲投簪笏躡芳塵。右寓興
배신(裵紳) 1520년(중종 15)∼1573년(선조 6).
본관은 성산(星山). 자는 경여(景餘), 호는 낙천(洛川).
참봉 배사종(裵嗣宗)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밀양박씨로 박동선(朴東善)의 딸이다.
어려서 조식(曺植)에게 수학하였으나, 뒤에 이황(李滉)의 문인이 되었다.
1561년 진사시에 합격한 뒤, 1565년 관천(館薦)으로 남부참봉(南部參奉)에 제수되었고, 경기전참봉(慶基殿參奉)‧빙고별좌(氷庫別座)를 거쳐, 1572년 동몽교관(童蒙敎官)이 되어 학도들을 가르쳤다.
이듬해 벼슬을 버리고 고향 현풍으로 돌아가고자 하였으나, 노수신(盧守愼)‧허엽(許曄) 등의 만류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해 겨울에 죽었다.
그의 스승인 조식이 죽자 나라에서 그의 행적을 알고자 하였으므로 많은 문도 중에 천거되어 조명(朝命)으로 〈남명선생행록(南冥先生行錄)〉을 지어 올렸다. 뒤에 현풍 도동서원(道東書院) 별사(別祠)에 봉향되었다.
저서로는 《낙천선생문집》 2권이 있다.
臨淵齋先生文集
詩
*次裴敬汝 紳
人間歡笑不曾開。此日逢君醉一迴。絃斷瑤琴塵滿匣。龍門千載有餘哀。
곽한(郭瀚) 거주지 봉화(奉化)
본관은 현풍(玄風) 자 대용(大容)
아버지는 참봉 곽자보(郭子保)
명종(明宗) 4년(1549) 생원시에 합격
臨淵齋先生文集
詩
*次郭大容 瀚
獨立秋山第一峯。雲烟變態爲誰容。留連滿酌三杯酒。洗盡塵中十載胷。
곽황(郭趪)
본관은 현풍(玄風) 자는 경정(景靜)
조부는 곽거(郭琚) 아버지는 곽지정(郭之貞) 외조부는 엄한백(嚴漢伯)
명종(明宗) 11년(1556) 병진(丙辰) 별시(別試) 을과(乙科) 1위로 급제
예안현감으로 선치를 하였고 퇴계 선생과 교유하였다. 군수(郡守)를 역임하였다.
臨淵齋先生文集
詩
*次郭景靜 趪 韻
別院無餘事。春禽弄晩聲。殘紅飄樹盡。新綠滿庭生。
嗜酒身長醉。看書眼更明。西廂堪寂寞。幽抱與誰評。
강제(姜霽) 예천 용궁 출신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명원(明遠), 호는 백석(白石).
아버지는 인의(引儀) 강응청(姜應淸)이다.
1549년(명종 4) 생원시와 진사시에 모두 합격하고, 1561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그뒤 여러 고을의 수령을 거쳐 영덕현감을 지내고, 이조정랑(吏曹正郞)이 되었다.
臨淵齋先生文集
詩
*贈姜白石明遠 霽
六載重相見。蹉跎兩老翁。梅窻殘月曉。香夢正矇矓。
*鳥嶺龍潭。同姜白石明遠聯句。
散作晴天雪。喧成白日䨓。白石。
不知今古客。誰是謫仙才。臨淵。
布衣還作錦衣榮。臨淵。
匹馬飜成五馬行。白石。
主屹山靈知我否。臨淵。
白頭依舊一書生。白石。
박민준(朴民俊) 밀양출신 임연재와 문과 동방
본관은 죽산(竹山). 자는 경일(景逸). 호는 관재(寬齋)
증조부는 준산(峻山). 조부는 겸인(兼仁), 아버지는 흥손(興孫)
명종(明宗) 7년(1552) 생원 진사 양시 합격
명종(明宗) 19년(1564) 갑자(甲子)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15위
한림. 지평. 교리. 학사 김응조 찬 묘갈
臨淵齋先生文集
詩
*贈朴景逸 民俊
梅月相逢夜已深。樽前輸盡百年心。不愁歸路林間黑。爲有君家住翠岑。
이후백(李後白) 1520년(중종 15)∼1578년(선조 11). 서울 출신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계진(季眞), 호는 청련(靑蓮).
관찰사 이숙함(李淑瑊)의 증손으로, 현감 이원례(李元禮)의 손자이며, 이국형(李國衡)의 아들이다. 어려서 어버이를 여의고 큰아버지 집에 살면서도 어버이의 상을 예법대로 치렀다. 하루는 집안 어른이 그에게 단술을 권하자 비록 단술이라도 ‘주(酒)’자가 붙은 이상 상주가 마실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1535년(중종 30) 향시(鄕試)에 장원하고 곧 상경하여 이의건(李義健)‧최경창(崔慶昌)‧백광훈(白光勳) 등에게서 배웠다.
1546년(명종 1) 사마시에 합격하고, 1555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주서를 거쳐, 1558년 승문원박사로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그뒤 전한이 되고, 이어 시강원설서‧사서‧정언‧사간‧병조좌랑‧이조정랑‧사인 등을 역임하였다.
1567년(선조 즉위) 원접사(遠接使)의 종사관이 되어 명나라 사신을 맞았고, 그해에 동부승지에 발탁되었으며, 이어 대사간‧병조참의를 거쳐 도승지를 역임하였다.
1571년 정시문과에 장원하고, 이어 예조참의‧홍문관부제학‧이조참판을 역임하였으며, 1573년 변무사(辨誣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어 인성왕후(仁聖王后: 仁宗의 妃)가 죽어 복제문제가 일어나자 3년상을 주장하여 그대로 시행되었다.
1574년 형조판서가 되고 다음해 평안도관찰사가 되어 선정을 베풀었다.
그뒤 이조판서와 양관(兩館)의 제학을 지내고, 호조판서로 있을 때에 휴가를 얻어 함안에 성묘를 갔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청백리에 녹선되고, 앞서 종계변무(宗系辨誣)의 공으로 1590년 광국공신(光國功臣) 2등으로 연양군(延陽君)에 추봉되었다.
문장이 뛰어나고 덕망이 높아 사림의 추앙을 받았다. 함안의 문회서원(文會書院)에 제향되었고, 저서로는 《청련집》이 있다. 시호는 문청(文淸)이다.
臨淵齋先生文集
*挽李判書 後白
州里歡迎日。親賓哭送時。哀榮忽此異。倚伏竟誰知。
寤寐勤王事。絲毫斷己私。蒼生今已矣。無復任安危。
詩追隴西李。化被召南棠。爲國心常赤。傷時鬢已蒼。
巨川方作楫。大廈忽摧梁。揮涕縻官守。空吟殄瘁章。
오수영(吳守盈) 1521년(중종 16)∼1606년(선조 39). 예안
본관은 고창(高敞). 자는 겸중(謙仲), 호는 춘당(春塘) 또는 도암(桃巖).
아버지는 좌승지에 증직된 오언의(吳彦毅)이며, 어머니는 진성이씨(眞城李氏)로 송재 이우(李堣)의 딸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1555년(명종 10)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605년(선조 38) 수직(壽職)으로 용양위부호군(龍驤衛副護軍)이 되었다. 어려서 이황의 형제들과 함께 외할아버지인 이우에게 글을 배웠고, 뒤에 이황을 스승으로 섬겨 일거일동을 지시에 따르니 스승도 《이정전서(二程全書)》를 손수 베껴주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72세의 고령으로 직접 전쟁에 참가하지 못함을 한탄하여 조목(趙穆)과 김성일(金誠一)에게 글을 보내 국방에 전력함을 독려하고, 이여송(李如松)에게도 글을 보내 전공을 치하하였다.
글씨를 잘 써서 금보(琴輔)‧이숙량(李叔樑) 등과 함께 선성삼필(宣城三筆)의 칭호를 얻었다. 군위의 남계서원(南溪書院)에 봉향되고, 저서로는 《춘당문집》 2권이 있다.
臨淵齋先生文集
詩
*醉呈吳謙仲 守盈
世事饒歡戚。人生足是非。碧山應不負。何日是言歸。
春塘先生文集
詩
*次裴汝友 三益,金惇叙同舟錄。
日下分手又隔年。湖天萬里更茫然。兩鄕相照春宵月。不識如今幾缺圓。
水禽驚起半江雲。孤月娟娟欲破昏。箇裏思鄕心不斷。更隨征鴈過高原。
江心風定簇危檣。萬頃蒼波接海長。記得扁舟騷興載。賴君詩思墨花香。
김극일(金克一) 1522년(중종 17)∼1585년(선조 18). 안동 출신.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백순(伯純), 호는 약봉(藥峰).
증 통례 만근(萬謹)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증 좌승지 예범(禮範)이고, 아버지는 증 이조판서 진(璡)이며, 어머니는 여흥민씨(驪興閔氏)로 병절교위 세경(世卿)의 딸이다. 아버지로부터 엄격한 가정교육을 받고, 커서는 아우 명일(明一)·성일(誠一)과 함께 이황(李滉)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였다. 1546년(명종 1)에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교서관정자에 임명되었다. 그 뒤 수의부위·사용을 거쳐, 1551년에 승문원정자·저작·박사가 되었다. 1553년 승정원주서가 되고, 얼마 뒤 형조좌랑·사헌부감찰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홍원현감(洪原縣監)을 역임하였다. 1556년 청홍도도사(淸洪道都事)를 거쳐, 1558년 성균관직강·형조정랑·예조정랑이 되었다. 그리고 다음 해 경상도도사를 거쳐, 1560년에 다시 예조정랑이 되었다. 얼마 뒤 군기시첨정과 평해군수를 역임하였다. 1566년에는 사재감첨정을 거쳐 다시 예천군수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1569년(선조 2) 성균관사성과 사도시정(司歸寺正)을 거쳐, 외직으로 성주목사를 역임하였다. 성주목사 시절 ≪계몽익전 啓蒙翼傳≫을 간행해 스승 이황으로부터 격려를 받기도 하였다. 1575년 밀양부사에 임명되고, 1582년 내자시정, 이듬해에는 사헌부장령을 겸하였다. 그는 주로 지방관을 역임했고, 효성이 매우 지극하였다. 문장은 고결하고 창고(蒼古)해 한 글자도 진부한 말이 없었다고 한다. 더욱이 시에 뛰어나 시인으로서 명성이 높았다. 저서로는 ≪약봉일고 藥峰逸稿≫가 있다. 안동의 사빈서원(泗濱書院)에 배향되었다.
臨淵齋先生文集
詩
*贈金伯純 克一,權震卿。(권동보)
靑巖主與藥峯歸。千里親知更有誰。攀折柳枝聊寄意。驛樓明月儻相思。
*余曾叨召命。金伯純有贈行詩三篇。余病久未奉和。適伯純奉檄之凝川。凝川乃嶺外名區。黌舍紫薇亭。是余十年陳跡。惜別念舊。謹步雅韻。
銅魚能理劇。氓俗久懷音。未穩東山臥。長懸北闕心。
鄰交先立幟。詩病幾施針。政失民多散。其穌正自今。
湖海三年客。樓臺幾度臨。凝流明似鏡。回峙列如簪。
夢裏尋眞境。醒來負宿心。何時梅閣上。一笑聽鳴琴。
半世身多病。三霜淚滿顔。金蘭此會處。伯仲舊遊間。
鱷爲韓公徙。珠能合浦還。應知衙罷後。拄笏看堆山。
정복시(鄭復始) 1522년(중종 17)∼1595년(선조 28).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이건(以建), 호는 계담(桂潭)‧계헌(桂軒).
천문교관(天文敎官) 정화(鄭華)의 아들이다.
동생 정복원(鄭復元)과 함께 송도에서 서경덕(徐敬德)에게 수업하였다.
1546년(명종 1) 사마시를 거쳐 1555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권지부정자가 되었다. 내외의 여러 관직을 거쳐 1567년 고부군수가 되었으며, 이때 간신들이 국론을 분열시켜 국정을 어지럽히고 많은 충신과 현사(賢士)가 죽음을 당하게 됨에 통탄하여 그 신원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왕은 이 장계사건에 대하여 연소문관이 공론을 빙자하여 반대당의 신원을 요구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하여 처벌하고자 하였으나, 윤원형(尹元衡)의 변명으로 화를 면하였다.
그뒤 무고함이 밝혀져 선조초 지평에 임명되었으며, 계속하여 호조참의‧돈령부도정을 역임하다가 1592년(선조 25) 은퇴하였다.
시문에 밝았으며, 유영경(柳永慶)과 교유하면서 시문으로 자연과 인정을 노래하는 글을 많이 남겼다.
저서로 《계담집》이 있다.
臨淵齋先生文集
詩
*次鄭以健 復始 淸風閣韻
人間無處不風波。此日舟中覺轉多。世事從來不如意。會須歸臥故山家。
船頭終日半江風。悵望龜潭水若空。醉眼矇矓看不見。滿山紅紫有無中。
유홍(兪泓) 1524년(중종 19)∼1594년(선조 27).
본관은 기계(杞溪). 자는 지숙(止叔), 호는 송당(松塘).
판서 유여림(兪汝霖)의 손자이고, 생원 유관(兪綰)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의령남씨(宜寧南氏)로 사복시정(司僕寺正)에 증직된 남충세(南忠世)의 딸이다.
1549년(명종 4) 사마시에 합격하고 1553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 정자‧전적‧지제교‧지평‧장령‧집의 등 문관요직을 역임하였다.
1557년 강원도암행어사로 나가 민심을 수습하고, 1563년 권신 이량(李樑)의 횡포를 탄핵하였다.
이듬해에 시관(試官)으로 이이(李珥)를 뽑았으며, 1565년 문정왕후(文定王后) 상사 때에는 산릉도감(山陵都監)으로 치산의 일을 맡았으며, 춘천부사가 되어서는 선정을 베풀어 선정비가 세워졌다.
1573년(선조 6) 함경도병마절도사로 회령부사를 겸하였고, 그뒤 개성부유수를 거쳐 충청‧전라‧경상‧함경‧평안도의 관찰사와 한성판윤 등을 역임하면서 치적을 쌓았다.
1587년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그동안 조선왕조의 시조가 고려의 권신 이인임(李仁任)의 아들로 잘못된 것을 바로잡았으며, 1589년 좌찬성으로서 판의금부사를 겸하여 정여립(鄭汝立)의 역옥(逆獄)을 다스렸다. 이러한 공으로 1590년 종계변무(宗系辨誣)1등, 토역(討逆) 2등에 책훈(策勳)되어, 평난공신(平難功臣)호를 하사받고 보국숭록대부(輔國崇錄大夫)‧기성부원군(杞城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이조판서‧우의정에 승진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선조를 호종하였고, 평양에서는 세자(뒤의 광해군)와 함께 종묘사직의 신위를모시고 동북방면으로 나아가 도체찰사를 겸임하고, 이천(伊川)에서 격문을 여러 도로 보내어 각 도의 의병들을 격려, 지휘하여 방수태세(防守態勢)를 갖추었다.
이듬해에 왜적이 서울에서 물러나자, 먼저 서울에 들어와서 불탄 도성을 정리하고 전재민을 구호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1594년 좌의정으로서 해주에 있는 왕비를 호종하다가 객사하였다.
성품이 중후관대하고, 의리를 위하여 기개를 굽히지 않았으며, 시문에 뛰어났고 장서가 많았다. 유저로는 《송당집》 4권이 있다. 시호는 충목(忠穆)이다.
臨淵齋先生文集
詩
余以陳謝使赴京。兪相公 泓 贈余以瓊琚。旣還。相公亦作西行。來索詩。謹次其韻錄呈。
如公先進豈吾儔。每近風儀讓一頭。萬里山河經北塞。千年文物見東周。
應知弄筆雲烟動。何用臨歧涕淚流。病裏空慚木瓜報。只堪西望好廻輈。
朝天別章[松塘兪泓]
斗南聲價世無儔。鄭履迢迢鳳沼頭。論事尋常存大體。誦詩三百聘宗周。
風湌薊樹連天遠。雨過灤波抱野流。老覺離懷添一倍。不堪西日送行輈。
이준민(李俊民)1524년(중종 19)∼1590년(선조 23).
본관은 전의(全義). 자는 자수(子修), 호는 신암(新菴).
참봉을 지낸 이공량(李公亮)의 아들이며, 남명 조식(曺植)의 생질이다.
1549년(명종 4)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홍문관정자에 제수되고, 이어서 1554년 사간원정언이 되어서는 당시의 부허한 사장(詞章) 중심의 문풍을 경계하고, 경학을 장려하여 덕행을 권장할 것을 상소하였다.
그뒤 1556년에는 황해도사로서 중시에 병과로 급제, 홍문관수찬에 올랐다.
이듬해에 사헌부지평이 되어서는 김진(金鎭)‧이명(李銘) 등과 함께 당시의 권신인 이량(李樑)에 의부하여 윤원형(尹元衡)일파를 축출하니, 사람들이 휼목(譎目)이라 하였다.
반대파의 미움을 사서 영월군수로 좌천되었고, 이어서 1561년 강릉대도호부사가 되었으나, 관할구역인 대창역(大昌驛)에서 아들이 어머니를 살해하는 변고가 일어나 책임을 지고 면직되었다.
그뒤 세자시강원문학으로서 세자교육에 힘쓰다가 강계부사를 지냈다. 선조가 즉위하자 승정원으로 자리를 옮겨 좌승지를 역임하고, 1570년(선조 3) 평안도병마절도사가 되어 오랫동안 국방을 담당하였다.
그뒤 경기관찰사‧공조참판을 역임하고, 1575년 평안도관찰사로 나아가 북변을 잘 다스렸다.
그뒤 내직으로 옮겨 병조판서‧지의금부사‧의정부좌참찬을 지냈는데, 특히 국방문제에 관심이 많았고, 일을 잘 처리하였다.
붕당의 논쟁이 심하여지자, 병을 칭탁하고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진주의 임천서원(臨川書院)에 제향되었고, 시호는 효익(孝翼)이다.
臨淵齋先生文集 附錄
*朝天別章[新菴李俊民]
光國在專對。王心從此寧。雪霏來自鎬。共倒酒千甁。
조목(趙穆) 1524년(중종 19)∼1606년(선조 39). 예안 출신
본관은 횡성(橫城). 자는 사경(士敬), 호는 월천(月川).
아버지는 참판 조대춘(趙大椿), 어머니는 안동권씨(安東權氏)로 권수익(權受益)의 딸이다.
15세 때에 이황(李滉)의 문하에 들어가서 학업에 더욱 정진하였다.
1552년(명종 7)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며, 과업을 포기하고 학문에만 매진하였다.
1566년 공릉참봉에 봉직되었으나 학덕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사양하고 이황을 가까이 모시면서 경전연구에 주력하였다.
그뒤 집경전참봉(集慶殿參奉)에 제수되었으며, 1572년(선조 5) 이후 동몽교관‧종부시주부‧조지서사지(造紙署司紙)‧공조좌랑 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1576년 봉화현감에 제수되자 사직소를 올렸으나 허락되지 않아 봉직하면서 향교를 중수하였다.
1580년 이후 전라도도사‧경상도도사‧충청도도사‧형조좌랑‧신녕현감‧영덕현령‧전생서주부‧공조정랑‧상서원판관 및 금산‧단양‧합천 등의 군수, 장원서장원 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1594년 군자감주부로 잠시 있으면서 일본과의 강화를 극력 반대하였다.
그뒤 장악원정‧사재감정‧예빈시정‧공조참의‧공조참판 등을 제수받았으나 모두 재덕과 노병을 이유로 사직소를 올려 사퇴하였다. 그는 이황과 동향인 예안에서 생장하여 일찍 이황의 문하생이 된 이후로 일생 동안 가장 가까이 스승을 모신 팔고제(八高弟)의 한 사람이다.
퇴계 사후 문집의 편간, 사원(祠院)의 건립 및 봉안 등에 있어서 항상 성의를 다하였다.
도산서원 상덕사(尙德祠)에 배향 되었다.
臨淵齋先生文集
詩
*與趙士敬 穆,琴聞遠 蘭秀,朴彦秀 蕓。同往溪齋謁先生。因遊孤山。翼日泛舟中流。時微雨霏霏。先生詩適至。伏次其韻。
枉費推移下水船。舟遊赤壁愧蘇仙。無端忽被催詩雨。卻喜瓊琚一札傳。
堪笑塵間事萬端。一筇今復出靑山。慇懃爲與居人說。鷗鳥深盟亦未寒。
*次趙士敬韻
愁來欲唱沁園春。滿酌雲安麯米春。可笑詩人同意味。臨池終日惜餘春。
*同趙士敬,楊應遇 士奇 遊白雲臺。次板上韻。丁丑
淡月依俙照古臺。碧山環擁畫圖開。相逢夜坐禪堂靜。樽酒何妨醉一迴。
*草菴次月川韻
山水亭臨洛水灘。幾年鷗鷺舊盟寒。民情未易鳴琴化。山色要將拄笏看。
大抵身心方是急。一時衣服不須完。眼前世事堪悲歎。直欲排雲刳我肝。
身佩銅魚只汗顔。簿書叢裏敢求閒。人情任見浮雲變。物意空知倦鳥還。
廊廟有才扶世道。櫟樗無術濟時艱。鈴齋未草歸田賦。慚愧三年負碧山。
玉立參差千萬岑。秋風蠟屐試高尋。雄臨海上看鵬背。宴坐燈前識佛心。
蘧子知非追往昔。陶翁覺是勉來今。寧將此學終茅塞。晨起惺惺整我襟。
*戲趙士敬
月川襟韻儘風流。作意登山上上頭。還被簡書牽挽去。淸秋虛負半天遊。
著意登登向上時。功專勇往不遲疑。聞君纔到中峯去。何異爲山一簣虧。
*次趙士敬
登眺東南地盡頭。雲中何處是丹丘。別來眞境空回首。還似蘧蘧夢蝶周。
*送別趙士敬
芳草南郊日色遲。一杯松下送君歸。故山薇蕨經春雨。抽出新芽正嫰肥。
김부의(金富儀) 1525년(중종 20)~1582년(선조 15) 예안 출신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신중(愼仲), 호는 읍청정(挹淸亭)이다.
아버지는 관찰사 연(緣) 형은 후조당 부필
퇴계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1555년(명종10)에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천거로 집경전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였다.
易東書院 創建時 서원 일을 주관하여 山長에 천거되었다. 저서는 <挹淸亭遺稿>가 있다.
臨淵齋先生文集
詩
*同金惇敍 富倫 愼仲 富儀。 登丹陽二樂樓。次板上韻。癸亥
扁舟初發漢江流。此日來登古郡樓。鄕思蒼茫迷遠樹。客懷撩亂滿芳洲。
山銜落日村仍暮。洞鎖歸雲路轉幽。把筆題詩聊遣興。一杯時復洗煩愁。
송원(宋瑗) 1525년(중종 20) 진천 출신 임연재와 문과 동방
본관은 진천(鎭川) 자는 희거(希蘧)
아버지는 참봉 송응국(宋應國)
명종(明宗) 10년(1555) 생원시 합격
명종(明宗) 19년(1564) 문과 급제
창평현령 재임중 임진왜란으로 죽었다.
臨淵齋先生文集
詩
*雲橋驛別宋希蘧 瑗
與君相別十年前。白首重逢是亦天。共枕虛堂秋月下。聯鞍禿嶺晩雲邊。
一生聚散眞難料。半世浮沈只自憐。惆悵明朝山海隔。須憑歸鴈尺書傳。
김위(金偉) 임연재 선생이 사마시에 합격할 때 문과에 급제 남원 출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여기(汝器), 호는 만취(晩翠).
아버지는 김사걸(金士傑)이다.
성혼(成渾)의 문인으로 이이(李珥)와 교유하였다.
1558년(명종 13)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571년(선조 4) 담양부사가 되었으며, 그뒤 내외의 여러 관직을 거쳐 홍문관직제학과 형조참의를 지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병든 몸으로 어가를 호종하였다.
말년에는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여 독서로 여생을 보냈으며, 뒤에 도승지에 추증되었다.
臨淵齋先生文集附錄
朝天別章[金偉]
吾君忠義世同諳。簡送周庭奉玉函。專對華音驚薊北。遠遊風采動江南。
頭搶鳳闕香雲繞。袖惹爐烟瑞日涵。昭雪國羞今正急。暫時離恨不須談。
금응협(琴應夾) 1526년(중종 21)∼1596년(선조 29). 예안 출신.
본관은 봉화(奉化). 자는 협지(夾之), 호는 일휴당(日休堂).
아버지는 예안훈도(禮安訓導) 금재(琴榟)이다.
1555년(명종 10) 사마시에 합격하고, 1574년(선조 7) 그의 행의(行義)가 조정에 알려져 집경전참봉(集慶殿參奉)을 제수받았다. 다시 경릉(敬陵)‧창릉(昌陵)의 참봉, 왕자사부(王子師傅)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취임하지 않았다.
1587년 조정에서는 그를 유일(遺逸)로 뽑아서 6품직을 초수(超授)하고 하양현감(河陽縣監)을 제수하였으나, 얼마되지 않아서 부모의 봉양을 이유로 사직하였다.
1595년 익찬(翊贊)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이황(李滉)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충신독경(忠信篤敬)과 궁행실천(躬行實踐)에 힘썼다. 특히, 《심경(心經)》과 《근사록(近思錄)》의 공부를 중시하였으며, 저서로는 《일휴집(日休集)》이 있다.
일휴당집
寄呈裵汝友[三益]朝天以代靣別
遥聞啣命出丹墀攸是東風解凍時久服獨勞能不怨定知專對喜爲辭依依楊柳客懷遠杳杳關河人去遲兩地相朘不相見悠悠別恨㪅無涯
이양원(李陽元) 1526년(중종 21)∼1592년(선조 25). 서울 출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백춘(伯春), 호는 노저(鷺渚).
정종의 아들인 선성군(宣城君) 이무생(李茂生)의 현손이며, 이원부령(利原副令) 이학정(李鶴汀)의 아들로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1555년(명종 10)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 검열(檢閱)이 되고, 그뒤 저작(著作)을 거쳐 1563년 호조참의가 되었다.
이해에 종계변무사(宗系辨誣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들어가 객사한 정사(正使) 김주(金澍)를 대신하여 명나라의 《태조실록(太祖實錄)》과 《대명회전(大明會典)》에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아버지가 고려의 이인임(李仁任)으로 잘못 기재된 것을 바로잡고 돌아와 그 공으로 가자(加資)되었다.
그뒤 평안도‧충청도‧경기도의 관찰사, 형조판서‧대제학‧대사헌 등을 역임하고, 1590년(선조 23) 종계변무(宗系辨誣)의 공으로 광국공신(光國功臣)3등에 책록되고 한산부원군(漢山府院君)에 봉하여졌으며, 이듬해 우의정에 승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유도대장(留都大將)으로 수도의 수비를 맡았으나 한강방어의 실패로 양주(楊州)로 철수, 분군(分軍)의 부원수(副元帥) 신각(申恪)과 함경도병마절도사 이혼(李渾)의 군사와 합세하여 해유령(蟹踰嶺)에 주둔, 일본군을 맞아 싸워 승리한 뒤 영의정에 올랐다.
이때 의주에 피난하고 있던 선조가 요동(遼東)으로 건너가 내부(內附)한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탄식하며 8일간 단식하다가 피를 토하고 죽었다.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臨淵齋先生文集附錄
朝天別章[鷺渚李陽元]
解邑分源迥。天淵更挹淸。袖中藏霹靂。庫裏貯縱橫。博學推專對。懷咨卜遠行。便蕃紆聖眷。遴選協輿情。玉舘驚回祿。螺函缺下誠。負辜宸籲切。持節命毛輕。鶴野連遼碣。烟花繞鳳城。丹忱伸拜叩。白日荷光明。洞釋何須謝。包含不大聲。歸來應報喜。增秩耀諸卿。
노경복(盧景福)
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수중(綏仲).
아버지는 노팽수(盧彭壽)이다. 효행이 있었다.
1579년(선조 12) 문과에 급제하고 의흥현감, 영천(영주)군수, 형조정랑 등을 지내고
수직으로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
臨淵齋先生文集
詩
*次盧綏仲
朱草迷雙眼。黃花負九秋。霜嚴山瘦立。石亂水鳴流。
世事空搔鬢。人情只點頭。何方拋斗粟。遵海傍仙洲。
석경일(石擎日) 임연재와 문과 동방
본관은 화원(花園). 자는 성보(誠甫).
아버지는 석규(石圭) 처부는 완산령(完山令) 이원(李遠)
1564년(명종 19) 문과 급제하였으며, 관직은 봉상주부(奉常主簿)를 거쳐 전적(典籍)에 이르렀으며 중학교수(中學敎授)를 겸하였다. 영남(嶺南)의 문관(文官)으로, 성품이 어리석고 정직하여 어려서부터 공부하기를 하루에 백 글자를 정해놓고 반드시 천 번을 읽은 후에야 그쳤다. 10여 년 공부하고 나니,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마음과 눈으로 꿰뚫어 알 수 있었다. 이렇게 열심히 공부하여 명경과에 급제를 하였다. 벼슬을 하던 어느 날 새벽 석경일(石擎日)이 타는 말이 달아났다. 석경일은 급히 일어나는 바람에 첩의 자줏빛 장의(長衣)를 입고서 침모(寢帽)를 쓴 채 말을 찾으러 다녔다. 말은 달려서 중학(中學) 속으로 들어갔는데, 석경일이 중학에 이르렀을 때는 이미 날이 새고 말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문밖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는데, 학리(學吏)가 장의와 바지도 안 입고 맨발인 석경일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순식간에 구경꾼들이 모여들어서는 석경일을 미친 사람이라고 했다. 학유(學儒)가 이런 이야기를 듣고는 그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 세상에 알리는 바람에 웃음거리가 되고 말았다. 결국 석경일은 이 일 때문에 불우한 생을 살다 죽었다.
臨淵齋先生文集
詩
*次石誠甫 擎日
千里辭親作遠遊。悠悠半載困淹留。聊將嶺海同歸約。共作關山一夜愁。
步月幾時頻望遠。看雲隨處更登樓。羇懷脈脈無人會。誰道功名要黑頭。
雞叫孤村夜色微。遊人起坐欲行時。繁霜著地明如雪。冷月當軒細似眉。
雲外亂山愁疊疊。馬前長路歎遲遲。歸寧一念無時歇。吟罷新詩有所思。
京國羇栖久。關河跋履初。東風吹破絮。西日促飢驢。
路向寒蕪盡。詩成醉睡餘。白雲長入望。何處是吾廬。
신호(申濩)
본관은 영천(永川). 자는 덕홍(德弘). 아버지는 신광필(申光弼)이다.
진사로서 1546년(명종 1)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로 급제하고 사도시첨정(司䆃寺僉正)을 지냈다. 글을 잘 지어 문명(文名)이 있었다
臨淵齋先生文集
詩
次申從事 濩 韻。呈叔正求和。丙戌往新溪時
之子在秀林。相隨鶴與琴。雲烟長靉靆。洞壑自幽深。
爲吏眞同隱。耽書不是淫。平生少知己。願託百年心。
민응기(閔應祺) 영주 출신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백향(伯嚮), 호는 우수(尤叟) 또는 경퇴재(景退齋).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1565년(명종 20) 왕자의 사부(師傅)가 되어, 선조연간에도 그 직에 머물렀다. 선조 때 그가 《용학석의(庸學釋義)》를 저술하여 왕에게 올리자 왕은 그것을 간행할 것을 명하고, 친히 지은 시를 부채에 써서 하사하였다.
벼슬은 현감에 그쳤으나, 그가 가르쳤던 광해군이 1608년 즉위하여 왕자 때의 사부였던 그를 하락(河洛)‧박광전(朴光前) 등과 함께 추모하면서 제물(祭物)을 내려주었으며, 1610년(광해군 2) 당상관으로 증직하라는 전교가 있어 좌승지로 추증되었다.
臨淵齋先生文集
詩
*贈閔伯嚮 應祺
家住愚溪小洞門。一軒風月爽詩魂。分明記得前宵夢。花下逢君細話言。
今晨偸暇簿書叢。路入雲山幾萬重。靑眼故人凝望久。小亭開酌爲從容。
凍雨新晴後。微風乍起時。靑山圍立立。白日上遲遲。
病客偶乘興。幽人况有期。相看俱白髮。一笑兩心夷。
구봉령(具鳳齡) 1526년(중종 21)∼1586년(선조 19).
본관은 능성(綾城). 자는 경서(景瑞), 호는 백담(柏潭).
문정공(文貞公) 구휘(具褘)의 8세손이며, 구겸(具謙)의 아들이다.
1545년 이황(李滉)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였다.
1546년(명종 1)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1560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봉교(奉敎)를 거쳐 홍문관정자(弘文館正字)에 이르고, 1564년 문신정시(文臣庭試)에 장원하여 수찬‧호조좌랑‧병조좌랑을 거쳐, 1567년에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그뒤, 정언‧전적‧이조좌랑‧사성‧집의(執義)‧사간을 두루 거치고, 1573년(선조 6) 직제학에 올랐으며, 이어 동부승지‧우부승지‧대사성‧전라관찰사‧충청관찰사 등을 지냈다.
1577년 대사간에 오르고, 이듬해 대사성을 거쳐 이조참의‧형조참의를 지냈다.
1581년 대사헌에 오르고, 이듬해 병조참판‧형조참판 등을 지냈다. 그는 한때 암행어사로 황해도‧충청도 등지에 나가 흉년과 기황(飢荒)으로 어지럽던 민심을 수습하기도 하였다. 당시는 동서의 당쟁이 시작될 무렵이었으나 중립을 지키기에 힘썼으며, 시문에 뛰어나 기대승(奇大升)과 비견되었고, 또한 〈혼천의기(渾天儀記)〉를 짓는 등 천문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만년에 정사(精舍)를 세워 후학들과 경사(經史)를 토론하였다.
죽은 뒤 용산서원(龍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백담문집》 및 그 속집(續集)이 있다. 시호는 문단(文端)이다.
臨淵齋先生文集
詩
*次具景瑞 鳳齡 韻
旱魃驕三夏。田疇一半空。靑山將歲暮。白髮又秋風。
暫借樽中綠。時回面上紅。關心多少事。都入浩歌中。
鈴齋堪寂寞。一臥度炎凉。護藥衣巾濕。吟花筆硯香。
功名危羿彀。世路劇羊腸。早晩桃村下。優游作醉狂。
相逢不多語。只道苦思君。小幕遮朝日。輕風拂曉氛。
浮沈元似夢。聚散正如雲。何日投簪笏。林泉絶世紛。
*次具景瑞韻 乙亥
淸江如玉繞山流。翠栢蒼松谷自幽。仍坐巖臺留半日。可能消遣一生愁。
*輓具景瑞 丙戌
人物超三代。文章軼漢唐。一時爭嘆賞。半世任翺翔。經幄論思地。湖堂翰墨場。班行瞻氣象。道路望輝光。敎育成多士。澄淸化兩方。恩波及泉壤。惠澤被桑鄕。聖眷逢千載。沈痾臥一床。水邊連卜築。林下共徜徉。歲月嗟遲暮。川原隔渺茫。深期今已矣。千里淚沾裳。
栢潭先生文集
*過嶺一律。奉裵使君汝友三益。
客路曾遊歷。南風五月凉。林霏衣袖濕。溪草馬蹄香。
歲月霜黏鬢。江山雪沃腸。樊籠暫脫翮。乘興欲成狂。
*裵汝友客居。苦鼠聒。求貍奴子。
籠送烏圓眼熖光。群鼷應不聒淸床。從今好着遊仙枕。夢繞故園山水鄕。
*豐基齊雲樓次韻。奉汝友兼示具汝膺。
身登寥廓俯雲空。兩袖飄飄九萬風。分寸躋攀終得力。須從平地積深功。
*過嶺一律。奉裵使君汝友三益。
客路曾遊歷。南風五月凉。林霏衣袖濕。溪草馬蹄香。
歲月霜黏鬢。江山雪沃腸。樊籠暫脫翮。乘興欲成狂。
*竹嶺劚苓臺。別主守裵汝友醴泉守李俊秀。
溪仙曾賞處。此地會吾君。碧岫一輪月。靑天幾片雲。
古今人事改。離合路岐分。莫厭樽前醉。明朝別恨紛。臺是退溪先生所號
*次裵汝友金城東軒韻
石髓尋眞境。桃花訪碧流。行隨會稽路。吟倚岳陽樓。
日映千峯畫。風生萬壑秋。飄飄客窓夢。欲趁羽仙遊。
*次東軒韻。示柳仲精, 裵汝友。
亢旱甘霖霈。靑山赤日淪。歡聲遍遙野。喜氣達淸宸。
舊說仁無敵。今徵德有隣。遨頭催省稼。呼僕戒車巾。
親知成會合。梅閣雨昏時。興入鳴芩鹿。吟賡伐木詩。
榮名魚九島。人事繭千絲。共約重逢日。秋晴月滿池。
*裵汝友赴豐基任。致牋求詩。此非吟詩之時。而旣重其求。玆獻相勵之意而已。
南州第一古基城。新被汪恩五馬行。二白雄巒圍作鎭。兩仙遺院化流聲。
醫民正有三年艾。勵志須防萬丈坑。儒術本宜無別徑。後威先敎是要程。
郡望有太小二白山。周愼齋爲郡作書院。退溪先生繼守。啓請賜額。
*見襄陽府使裵汝友書。知與安竹溪汝止, 江陵府使郭苞山元靜。同遊鏡浦臺。疾病憂悴之中。吟成一律。呈奉襄陽。
聞說仙遊斥鹵中。文星瑞彩照遐窮。笙簫月榭松鳴籟。氷雪雲空浪卷風。
酒興竹溪腸吐錦。詩情曲海筆飛鴻。主人儒雅苞山老。相對豪吟盪客胸。
정탁(鄭琢)1526년(중종 21)∼1605년(선조 38). 예천 출신.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자정(子精), 호는 약포(藥圃)‧백곡(栢谷).
현감 정원로(鄭元老)의 증손으로, 정이충(鄭以忠)의 둘째아들이며,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1552년(명종 7) 성균생원시를 거쳐 1558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65년 정언을 거쳐 예조정랑‧헌납 등을 지냈다.
1568년 춘추관기주관을 겸직하고,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572년(선조 5) 이조좌랑이 되고, 이어 도승지‧대사성‧강원도관찰사 등을 역임하고 1581년 대사헌에 올랐으나, 장령 정인홍(鄭仁弘), 지평 박광옥(朴光玉)과 의견이 맞지 않아 사간원의 계청(啓請)으로 이조참판에 전임되었다.
1582년 진하사(進賀使)로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돌아와서 다시 대사헌에 재임되었다.
그뒤 예조‧형조‧이조의 판서를 역임하고, 1589년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시 다녀왔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좌찬성으로 왕을 의주까지 호종하였다. 경사(經史)는 물론 천문‧지리‧상수(象數)‧병가(兵家) 등에 이르기까지 정통하였다.
1594년에는 곽재우(郭再祐)‧김덕령(金德齡) 등의 명장을 천거하여 전란중에 공을 세우게 하였으며, 이듬해 우의정이 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72세의 노령으로 스스로 전장에 나가서 군사들의 사기를 앙양시키려고 하였으나, 왕이 연로함을 들어 만류하였다.
특히, 이해 3월에는 옥중의 이순신(李舜臣)을 극력 신구(伸救)하여 죽음을 면하게 하였으며, 수륙병진협공책(水陸倂進挾攻策)을 건의하였다.
1599년 병으로 일시 귀향하였다가 이듬해 좌의정에 승진되고 판중추부사를 거쳐, 1603년 영중추부사에 오르고 이듬해 호종공신(扈從功臣) 3등에 녹훈되었으며,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에 봉하여졌다. 예천의 도정서원(道正書院)에 제향되었고, 저서로는 《약포집》‧《용만문견록(龍灣聞見錄)》 등이 있다. 시호는 정간(貞簡)이다.
臨淵齋先生文集卷附錄
祭文[中樞府事鄭琢]
惟靈。與我幷世。生又一鄕。夙與道交。義分非常。尋源德川。聯枕信宿。泮齋三秋。復作遠客。一自筮仕。離合不一。公之補外之年。多余在朝之日。幸公數載以前。喜公復入朝列。有患有慶。或憂或疾。奉職偸暇。尋問不輟。公頃觀周。喜見回轍。旋驚傷痢。勉莅棠茇。何知臨別一晤。是公永訣之日。千里曳柩。旅魂何託。嗚呼哀哉。不可動之節。不可奪之志。今不可得以復見。柰何柰何。已矣已矣。舟櫬悠悠。遠圃淸秋。臨江來奠。猶髣髴乎心目。數聲長號。腸痛欲裂。
藥圃先生續集
詩
*桃村八詠裴臨淵三益別墅
桃源本在武陵中。千古風煙秘不通。說與人間神境界。生憎當日捕魚翁。右村名
有水無山唯智樂。有山無水亦仁偏。主人占勝兼山水。動靜何憂落一邊。右山水亭
臺下羣魚自在游。揚鱗縱鬣不知休。仍思至理盈天地。倂與鳶飛上下流。右臨淵觀魚
石逕苔斑花木深。煙中隱隱暮鐘音。芒鞋竹杖獨歸去。採藥僊翁何處尋。右玄沙訪眞
誰把紅桃夾岸栽。枝枝輝暎碧波開。東風且莫輕吹擺。怕有遊人覓路來。右春
落盡羣花春又歸。南原綠草正芳菲。天敎躑躅生新色。白白紅紅暎翠微。右夏
陣陣西風入夜牕。呌霜新雁下澄江。一輪山月明如晝。黃菊叢邊擁酒缸。右秋
天地嚴凝雪片零。四山環匝玉爲屛。寒江釣罷歸來好。月下柴扉夜不扃。右冬
문응구(文應龜) 1528년(중종 23) 의성 출신. 임연재와 사마시 동방
본관은 선산(善山) 자는 정서(廷瑞)
아버지는 습독관 문목(文穆). 형은 문응기(文應麒) 문응린(文應麟)
명종(明宗) 13년(1558) 생원시 합격
臨淵齋先生文集
詩
*贈文廷瑞 應龜
遠別多年欲白頭。相逢今日意悠悠。五更燈下聯床夢。飛入冰山第幾樓。
안봉(安鳳) 1528년(중종 23) 서울 출신
본관은 충주(忠州) 자는 서경(瑞卿)
아버지는 안맹손(安孟孫) 처부는 정사량(鄭思亮)
명종(明宗) 10년(1555) 생원시에 합격
명종(明宗) 16년(1561) 문과에 급제
양양부사 동지중추부사를 지냈다.
臨淵齋先生文集
詩
*襄陽舘。次主倅安瑞卿 鳳。
白頭勳業竟何成。到處溪山作醉行。珍重主人留客意。一簾朝雨亦多情。
*寄安瑞卿
黃昏投古舘。之子渡西川。聚散應關命。悲歡亦係天。
眼竆靑嶂外。魂斷小橋邊。轉輾懷人意。煩君欲寄傳。
이제민(李齊閔) 1528년(중종 23)∼1608년(광해군 즉위).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경은(景誾), 호는 서간(西澗).
함원수(咸原守) 이옹(李顒)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채중경(蔡仲卿)의 딸이다.
1552년(명종 7)에 사마시를 거쳐, 1558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후 여러 문한관(文翰官)을 거쳐, 1562년 정언에 올랐다. 이어서 부수찬‧정언‧수찬‧병조좌랑‧지평‧교리 등을 역임하다가 1566년에 문과중시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뒤 병조정랑‧이조정랑을 거쳐 1571년(선조 4) 경주부윤으로 외직에 나갔고, 이어서 양주목사를 거쳐 특별히 경기도감사에 발탁되었다.
이후 임진왜란의 와중에서 대사간‧대사헌을 맡아 국론을 조정하여 국가를 안정시키다가, 1594년 지중추부사로 한직에 물러났으나 실직(實職)이 없이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승진할 정도로 중망을 받은 인물이었다.
臨淵齋先生文集
詩
*次監司李景誾 齊閔
斗粟從知荷聖恩。生成無路答乾坤。自憐多病猶留滯。松月蒼蒼夢故園。
곽간(郭趕)1529년(중종 24)∼1593년(선조 26).
본관은 현풍(玄風). 자는 원정(元靜), 호는 죽재(竹齋).
사인 곽지견(郭之堅)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상산김씨(商山金氏)로 부사 김수돈(金守敦)의 딸이다.
1546년(명종 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며, 1550년 형조좌랑에 임명되었다.
1552년 대동찰방 겸 수은어사(大同察訪兼搜銀御史)로 있을 때 중국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오는 심통원(沈通源)의 짐이 너무 많은 것을 보고 모두 뒤져서 불살라버렸다. 이 사실이 관찰사를 통하여 조정에 보고되어 심통원이 파직당하자, 그의 보복이 두려워 미친 사람 행색으로 가장하고 소(䟽)를 올린 즉시 서울을 떠났다.
그뒤 10여년 동안 피신하여 살았으며, 1566년 다시 성균관전적에 제수되었다. 당시 문정왕후(文定王后)가 불교의 부흥을 꾀하자 이에 반대하는 상소를 하였다가 언관의 자리에서 밀려났다.
그러나 그뒤 공조‧형조‧예조의 좌랑과 정랑‧통례원통례‧성균관사성‧장악원판사‧사제감‧종부시정‧영천군수‧공주목사‧강릉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서사원(徐思遠)과 함께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을 찾아가 함께 싸우다가 김성일이 죽고 진영이 와해되자 돌아오던 중 죽었다.
저서로는 《죽재문집》 2권 1책이 있다. 월암사(月巖祠)에 봉향되었다.
臨淵齋先生文集
詩
*洛山逢郭元靜 趕○時元靜 自楓岳到此
翼嶺繁華異昔年。使君風味政蕭然。一自紅糚蓬島去。臨瀛無復有眞仙。
梨花古樹洛山亭。一笑逢君醉復醒。襄陽自是神仙界。卻愧從前久役形。
行盡長亭與短亭。是身長醉不曾醒。千年雪岳多蔘朮。采采從今欲養形。
*次元靜韻
千里逢今夕。三人會一時。俱爲嶺南客。寧有海東期。
暮舘仍聞笛。高臺或賦詩。悤悤明日別。不耐悵臨歧。
海山殘照裏。湖閣淺斟時。白首他鄕夢。寒松晩歲期。
濃雲如潑墨。疎雨似催詩。已是吾心定。何須謾泣歧。
白頭相對細論心。滿酌淸樽北海深。晩泊蘭舟微雨洒。一湖風物入詩吟。
*東閣。與盧公瑞,郭元靜,李德元聯句。 友는 임연재
海雨飜盆滯客程。瑞。 滯程還慰主人情。靜。 池荷盡日傳香遠。元。 任聽歌兒唱渭城。友。
樽前俱是異鄕人。靜。 白首相知二十春。友。 數日同歡情未盡。元。 天敎好雨散如綸。友。
池面沈沈雨氣昏。友。 倚樓相笑倒深樽。瑞。 憑君莫怕歸期晩。瑞。 萍水交情是弟昆。友。
臨瀛舘裏雨紛紛。元。 杯酒相歡共討文。瑞。 待得秋風重結約。友。 莫敎惆悵賦停雲。靜。
*寄元靜
未見尋常願見之。相逢卻怨卽分離。如何七日同歡樂。別後還如未見時。
*次寄郭元靜
積雨初晴日。凉風乍起秋。那堪井梧葉。摵摵動鄕愁。
윤자신(尹自新) 1529년(중종 24)∼1601년(선조 34).
본관은 남원(南原). 자는 경수(敬修). 전적 윤식(尹湜)의 아들이다.
1546년에 진사가 되었고, 1562년(명종 17)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성균관에 보임, 여러 벼슬을 거친 뒤 회양부사로 부임하여 학문을 크게 진흥시켰다. 태인현감‧호조정랑‧사예 등의 관직을 거쳐 1585년(선조 18) 호조참판이 되었다.
1586년 성절사로 명나라에 갔다가 숙소에서 실화(失火)하여 문죄당하였다.
1589년 기축옥사 때 전주부윤이 되어 역적 정즙(鄭緝)을 잡은 공으로 가자(加資)되었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우승지로서 왕을 호종하여 피난할 때 보산역(寶山驛)에 이르러 종묘서제조(宗廟署提調)가 되어 종묘의 신주를 임시로 송도에 묻었다.
1594년 지돈령부사‧형조참판을 역임하고, 이듬해 지의금부사‧원접사(遠接使)를 지내고, 1597년 한성부판윤‧공조판서를 거쳐 다음해 지중추부사‧호조판서를 지냈다.
1600년 의인왕후 박씨(懿仁王后朴氏)가 죽자, 빈전도감(殯殿都監)과 인산도감(因山都監)의 제조가 되었다.
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으로 용원부원군(龍原府院君)에 추봉되었다. 성품은 말이 적고 강직하며 관직에 임하여는 도량형에 한치의 어김이 없이 오직 국사에 전념하였다.
문장과 시에도 능하여 당대에 유명하였으나, 세상이 알아주는 것을 꺼려하여 전하여지는 것이 없다.
臨淵齋先生文集
詩
*送尹敬修 自新 朝天
官聯國子慣相隨。十數年來久別離。憐我如今長抱病。喜君依舊更能詩。
三年漢曲猶難見。萬里皇都詎易期。悵望西郊行漸遠。不堪搔首立多時。
전응창(全應昌) 1529년(중종 24) 대구 출신 임연재와 사마시 동방
본관은 경산(慶山), 자는 성지(成之)
아버지는 전순(全珣) 형은 전경창(全慶昌)
명종(明宗) 13년(1558) 생원시 합격
선조(宣祖) 5년(1572) 문과 급제
충청도사를 지냈다.
臨淵齋先生文集
詩
*贈全成之
竹裏寒花半欲開。東君消息逐風來。淸香月下猶堪賞。句在無言百十迴。
遠別如今問幾時。江雲渭樹兩相思。淸樽共對梅花月。酒盡何妨更典衣。
*贈全成之
憶昔追遊處。南郊是別筵。靑燈今半夜。白髮老同年。
憂患三霜後。睽離十載前。悤悤明日去。脈脈意難傳。
*鳴鳳途中。示全成之。
策馬登鳴鳳。山蹊高復低。幽巖生宿草。落葉下寒溪。
樹木郊原古。雲烟洞壑迷。孤臣雙涕淚。西日近鴉栖。
*次曺俊卿韻贈成之
南州相識豈無他。稱弟稱兄義若何。年去年來來又去。傍人休笑訪君多。
금난수(琴蘭秀) 1530년(중종 25)∼1604년(선조 37). 봉화 출생.
본관은 봉화(奉化). 자는 문원(聞遠), 호는 성재(惺齋) 또는 고산주인(孤山主人).
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 금헌(琴憲)이며, 어머니는 영양남씨(英陽南氏)로 교수 남식(南軾)의 딸이다. 처음 김진(金進)에게 글을 배웠고, 뒤에 이황(李滉)의 문하에 들어가서 수학하였다.
1561년(명종 16)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1577년(선조 10) 제릉(齊陵)의 참봉을 비롯하여 집경전(集慶殿)과 경릉(敬陵)의 참봉을 지내고, 1585년 장흥고봉사(長興庫奉事)가 되었다.
그뒤 직장(直長)‧장례원사평을 지냈으나,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노모의 봉양을 위해 고향에 은거하다가 정유재란 때 고향에서 의병을 일으키니 많은 선비들이 호응해서 참가하고 지방민들은 군량미를 헌납했다.
그해 성주판관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1599년 고향인 봉화의 현감에 임명되어 1년 만에 사임하고 집에 돌아왔다.
좌승지에 추증되고 예안(禮安)의 동계정사(東溪精舍)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성재집》이 있다.
臨淵齋先生文集
詩
*與趙士敬 穆,琴聞遠 蘭秀,朴彦秀 蕓。同往溪齋謁先生。因遊孤山。翼日泛舟中流。時微雨霏霏。先生詩適至。伏次其韻。
枉費推移下水船。舟遊赤壁愧蘇仙。無端忽被催詩雨。卻喜瓊琚一札傳。
堪笑塵間事萬端。一筇今復出靑山。慇懃爲與居人說。鷗鳥深盟亦未寒。
*贈琴聞遠
夜月生東嶺。霜風欲暮秋。故鄕歸未得。雲樹夢悠悠。
故都王氣歇。雲物只依俙。萬里驅征馬。霜風透薄衣。
惺齋先生文集
詩
*裴汝友 三益 有丹溪柳家壁上詩。遂用其韻。
聞說丹溪古哲人。地名佳勝有攸因。靈襟不屑丹爐液。日向湯盤澡雪新。
*與汝友約頭流之遊
扶搖南極出塵蹤。雲外珠林喜得從。這裏風流奇興在。竹林烟月暮晨鍾。
*次裵汝友戲嘲折花韻二絶
雪滿家山始別離。江城行到鴈飛時。驛亭一夜梅花發。消息吾先問北枝。
何事南行悵遠離。萱堂久曠日三時。傍人莫道貪花者。爲惜光陰取晩枝。
*與裵汝友,趙士敬,朴彦秀 蕓 共遊孤山。敬次退溪先生寄贈韻。
良宵穩放月潭船。身世飄如鶴背仙。造次冮山增氣色。師門更荷兩詩傳。
溪齋前日問更端。仁知吾家水與山。好是扁舟明月夜。五更風露不知寒。
琴聞遠孤山亭。次退陶先生韻。[裵三益]
陶翁門下共依歸。暇日仙區志莫違。壁倒蒼松鱗甲老。臺臨曲水羽觴飛。
江山窈窕秋如畫。風露凄淸夜襲衣。矧有吾家眞箇景。一輪潭月送淸輝。臨淵裵三益
이응기(李應麒) 1530년(중종 25)∼1588년(선조 21). 서울 출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정서(廷瑞).
종실 계양군(桂陽君) 이증(李璔)의 5대손으로, 이문형(李文衡)의 아들이다.
성제원(成悌元) 문인
1549년(명종 4) 사마시를 거쳐 1561년 식년시에 병과로 등제하였다.
그뒤 봉교, 호조‧예조‧공조의 좌랑, 직강‧사성‧경상도사‧종부시첨정‧사옹원정‧예빈시정‧통천군수‧철원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1581년(선조 14) 평산부사 재임중에 황해도구황어사(黃海道救荒御史) 김응남(金應南)으로부터 사무에 태만하다 하여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그뒤 장악원정을 거쳐 공주목사‧해주목사 등을 역임하였다
臨淵齋先生文集附錄
祭文[海州牧使李應麒]
惟靈。
三韓閥百夫特。蚤拔身多踐歷。出兩臺入經幄。無疾言絶遽色。和而嚴寬而栗。靜必正動必直。擢專對手奉勅。西海饉荒政急。由銀臺簡方伯。一心勞萬命活。咸遠期曰柱石。胡不弔奄摧折。殯郵舍尤慘怛。位不滿德不食。所可慰庭有玉。余在道久承渥。第中情未㬥白。玆酹奠倍痛哭。
이희중(李喜中) 1530년(중종 25) 진주 출신. 임연재와 사마시 동방
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정경(正卿)
아버지는 이전(李琠). 형은 이희정(李喜精)
명종(明宗) 13년(1558) 생원시 합격
臨淵齋先生文集
詩
*贈李同年正卿 喜中
黃花未發子愆期。花正開時我北歸。若待鸎花三月暮。定應還似菊花時。
고응척(高應陟) 1531년(중종 26)∼1605년(선조 38). 선산 출신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숙명(叔明), 호는 두곡(杜谷)‧취병(翠屛).
고몽담(高夢聃)의 아들이다.
김범(金範)의 문인으로 1549년(명종 4)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고향에서 학문연구에 전심하여 《대학》‧《주자혹문(朱子或問)》 등을 읽고 깨달은 바가 많았다.
둘째형이 당나라 한유(韓愈)의 문장을 읽기를 권하였으나, 성현의 글이 있는데 하필이면 한유의 문장을 배울 것이냐고 거절하였다. 여러 해 동안 《대학》을 탐독하였는데 심지어 식사까지 거르며 학문에 열중하여 마을사람들이 미친 사람처럼 여겼다.
1561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이듬해 함흥교수로 부임하였다가, 1563년 사직한 뒤 시골에 묻혀 도학을 연마하였다.
또한, 《대학》의 여러 편을 시조로 읊어 교훈시를 만들고, 사상을 시‧부‧가(歌)‧곡(曲)으로 체계화하였다.
1595년 풍기군수에 이어 회덕현감(懷德縣監)과 사성 등을 역임하고 다시 낙향하였다.
1605년 경주부윤에 부임하였으나, 곧 사직하였다.
1702년(숙종 28) 선산의 낙봉서원(洛峰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두곡집》‧《대학개정장(大學改正章)》이 있으며, 시조작품에는 〈도부(道賦)〉‧〈탄시(嘆詩)〉‧〈차기음(差綦吟)〉‧〈두곡우음(杜谷偶吟)〉‧〈유감(有感)〉‧〈임인제야시(壬寅除夜詩)〉 등이 있다.
臨淵齋先生文集
詩
*次烏川諸友韻。和贈高叔明 應陟。
空翠霏霏細似烟。荷香時送晩風前。樓臺晝寂無人問。一笑相看豈偶然。
*次高都事叔明韻
淸癯詩老舊知心。遠別多年阻好音。鈴閣歲除悲白髮。感君靑眼爲來尋。
處靜爲功是養心。學琴何用覓知音。煩君立腳頻回首。須向眞源著眼尋。
*寄高叔明
聞道臨陂倅。春來理故田。應憐猿鶴怨。不是簿書愆。
五馬榮何戀。三牲養未便。唯須重會合。白髮醉樽前。
김부륜(金富倫) 1531년(중종 26)∼1598년(선조 31). 예안 출신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돈서(敦敍), 호는 설월당(雪月堂).
아버지는 생원 김유(金綏)이며, 어머니는 순천김씨(順天金氏)로 김수홍(金粹洪)의 딸이다.
퇴계 이황(李滉)의 문인으로 1555년(명종 10) 사마시에 합격, 1572년(선조 5)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집경전참봉(集慶殿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585년에 전라도 동복현감(同福縣監)으로 부임하여 향교를 중수하고 봉급을 털어 서적 8백여 책을 구입하는 등 지방교육 진흥에 많은 공헌을 하였고, 또 학령(學令) 수십 조를 만들어 학생들의 교육에도 힘썼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가산을 털어 향병(鄕兵)을 도왔고, 봉화현감이 도망가자 가현감(假縣監)이 되어 선무에 힘썼다. 그리고 관찰사 김수(金晬)에게 적을 막는 3책(三策)을 올렸는데, 충심이 지극한 내용이었다.
김성일(金誠一)‧이발(李潑)과 도의를 강마하였으며, 만년에 관직에서 물러난 뒤 향리에 설월당이라는 정자를 짓고 후진을 양성하는 데 전념하였다. 《대학》과 《심경》을 깊이 연구하였으며, 예학에 대해서도 사우간에 많은 질의가 있었다.
저서로는 《설월당집》 6권이 있다.
臨淵齋先生文集
詩
*同金惇敍 富倫 愼仲 富儀。 登丹陽二樂樓。次板上韻。癸亥
扁舟初發漢江流。此日來登古郡樓。鄕思蒼茫迷遠樹。客懷撩亂滿芳洲。
山銜落日村仍暮。洞鎖歸雲路轉幽。把筆題詩聊遣興。一杯時復洗煩愁。
*醉別金惇敍西行
白髮三秋別。靑燈十載情。留連攀一醉。風雨夜何更。
*次金惇敍贈金肅夫(김우옹)韻
江閣一宵話。芹宮十載情。愁雲翳落日。寒雨打殘英。
後會知何處。佳期偶此成。西風如惜別。滿樹作秋聲。
*次金惇敍韻
千里相思腸欲摧。羇懷鬱鬱向誰開。歡娛漸逐流年去。疾病空隨暮境來。
敬叔固知君子也。樊須難免小人哉。多君立腳能堅定。愧我疎慵喚不迴。
書
*答金惇敍 乙酉
謹承辱訊。備委近日爲况萬安。三益曾叨薇垣。坐閱七箇月之久。其間難處之事。隨日而出。如朴景進李仲擧之論。逢彼之怒不少。適以身病遞爲司成。庸駭之責。出於徐君受之疏。可笑可歎。爲宗正未久。又此移換極憫。君受之心。路人所知。至以西厓爲巨姦。使之不安其位。前數日又作仁同之行。未知泥道行色復何如。令人悵悵。肅夫爲銓亞。而上敎以肅夫前許叔獻。至此攻之爲反覆。肅夫聞之。必不肯來。時事至此。不勝憂慮。然天若祚宋。豈至倒地耶。
*答金惇敍 丙戌
一話旅舍。星霜已換。南望懸懸。未敢暫忘。往來無便。書疏難通。尋常悵悵。卽承去十二月十七日寄問。憑委衙中失火之患。仰感之餘。驚歎亦極。李忠順衛已作古人。何慟如之。自此溫溪一洞。尤索然矣。他日經過。其何以爲懷也。三益數年來。累叨非分。不意又蒙異恩。長在鎖直。日夜悚惕柰何。
*答金惇敍
謹承書問。憑審政履萬勝。感慰交切。况蒙遠貺魚束鐵物。尤出望外。足見故人情意委曲。三益叨此異寵。日月已多。疾病支離。勢難支吾。近頭引告祈免。以安愚分切切。方面之人。責己重矣。寧有希望之心耶。幸母以迎送之勞。豫爲過慮也。三刀入夢。數得鄰邑。則東閣相逢。兩翁白頭。衰晩雖甚。猶可傾盡三杯。敍盡平生。舊習未除。其無詩興之動耶。
*答金惇敍
傾仰之至。忽承情訊。仍審氣味淸裕。三益依舊隨波。他不足道。先生文集。裒集幾何。幸力圖之。平安使相柳令公卒於中途。慘痛不可言。貴冊三件。閣在弊止。慮爲蠧魚所損。時常點看爾。
雪月堂先生文集
詩
*黃江途中。次裵克齋汝友。三益
澆愁跌宕三杯後。和睡經過十里間。箇裏風煙渾不識。覺來依舊看靑山。
*星山金肅夫宇顒, 朴仲章, 景章來哭先生墓。歸時過宿枕流。要見柳應見雲龍而, 見成龍, 裵汝友, 金士純及彦遇, 愼仲, 李輔卿憑, 琴夾之兄議先生誌文諸事。謹呈拙句。
鷄酒來千里。相逢感慨情。山堂搜往事。江閣會羣英。
至論須先定。淸詩要共成。寒江流不歇。摠是斷腸聲。
*與後凋兄。往見裵汝友。歸路號韻。
夕陽江上燦金沙。百步煙生八九家。傾盡玉甁扶醉去。任從驢背晩風斜。
*丹陽途中卽事。寄汝友。
春草細如織。野花濃似燃。別懷雲靄靄。行意水漣漣。
鷄肋知何味。羊腸信不平。生來無所學。今日愧羣賢。
양사기(楊士奇) 1531년(중종 26)∼1586년(선조 19).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응우(應遇), 호는 죽재(竹齋).
아버지는 돈령주부(敦寧主簿) 양희수(楊希洙)이며, 봉래 양사언(楊士彦)의 아우이다.
1552년(명종 7) 진사시에 합격하고, 그 이듬해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호조좌랑을 거쳐 원주‧부평 등 7읍(邑)의 수령(守令)을 역임하였다.
가는 곳마다 청백(淸白)하여 칭송을 받았다. 선조대왕이 등극한 뒤 상소를 올려 외적의 침범에 대한 방어대책을 진언했는데 과연 뒷날 그 예언이 맞아들었다.
1586년(선조 19) 병으로 앓아눕게 되자 스스로 죽을 날을 점쳤는데, 틀림이 없이 그날에 나이 56세로 죽었다.
그는 시에도 뛰어났으며, 형 양사준(楊士俊)‧양사언 등 세 형제가 모두 대과에 급제하고 문필에 뛰어나 세상에 평판이 높았다.
臨淵齋先生文集
詩
*贈楊應遇
別君三日意悠悠。愁對靑燈白盡頭。傳食南中爲客久。幾時旌旆發榮州。
*次應遇留別韻
冰雪關河遠。西風又颯然。浮沈悲末路。愁病感流年。
白首今朝別。淸樽何處邊。南來有北鴈。頻寄尺書傳。
정윤희(丁胤禧) 1531년(중종 26)∼1589년(선조 22). 서울 출신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경석(景錫), 호는 고암(顧庵) 또는 순암(順庵).
아버지는 좌찬성 정응두(丁應斗)이며, 어머니는 군수 송충세(宋忠世)의 딸이다.
퇴계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1552년(명종 7) 진사시를 거쳐, 1556년 알성문과에 장원하여 전적이 되고, 이듬해 정언에 이어 병조좌랑‧수찬‧지평‧부교리‧이조정랑을 역임하고, 1560년에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다시 부교리‧사인‧필선‧장령‧집의를 거쳐, 1566년 문과중시에 다시 장원하여 문명을 떨쳤다.
이듬해 판결사를 거쳐, 수년간 수령으로 근무하였다.
1578년(선조 11) 남양부사로 재직시에 경기감사로부터 관아의 공역(供役)이 번중(煩重)하다는 이유로 파직이 청하여졌으나 왕의 배려로 면책에서 그쳤다.
그뒤 장단부사를 거쳐 예조‧호조의 참의를 지내고, 1588년 강원도관찰사로 나갔다가 이듬해 돌아와서 죽었다.
문장이 뛰어났고, 특히 사륙문(四六文)에 능하여 한때 홍문관과 예문관의 서책을 많이 찬술하였다. 저서로는 《고암집》이 있다.
臨淵齋先生文集卷附錄
祭文[江原監司丁胤禧]
惟靈。東南之美。湖海之精。鶴鳴矯翼。雲路蜚英。不有其躳。贊我王明。庶幾先後。式效忠貞。云胡一疾。遽返冥冥。胤禧晩歲披霧。意消鄙萌。惟期一笑。相對眼靑。豈謂不淑。丹旐南行。屬有功慘。肺病交嬰。伻奠泂酌。冀歆悃誠。
조사언(曹士彦) 1531년(중종 26) 밀양 출신 임연재와 사마시 동방
본관은 청도(淸道) 자는 준경(俊卿)
아버지는 참봉 조진탁(曹振鐸). 동생은 조사길(曹士吉)
명종(明宗) 13년(1558) 생원시 합격
臨淵齋先生文集
*次曺俊卿韻贈成之
南州相識豈無他。稱弟稱兄義若何。年去年來來又去。傍人休笑訪君多。
권호문(權好文) 1532년(중종 27)∼1587년(선조 20). 안동 송야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장중(章仲), 호는 송암(松巖).
안주교수(安州敎授) 권육(權䅅)의 아들이다.
1549년(명종 4) 아버지를 여의고 1561년 29세에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1564년에 어머니상을 당하자 벼슬을 단념하고 청성산(靑城山) 아래에 무민재(無悶齋)를 짓고 그곳에 은거하였다.
이황(李滉)을 스승으로 모셨으며, 같은 문하생인 유성룡(柳成龍)‧김성일(金誠一) 등과 교분이 두터웠고 이들로부터 학행을 높이 평가받았으며, 만년에 덕망이 높아져 찾아오는 문인들이 많았다.
집경전참봉(集慶殿參奉)‧내시교관(內侍敎官) 등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56세로 일생을 마쳤으며, 묘지는 안동부 서쪽 마감산(麻甘山)에 있다. 안동의 청성서원(靑城書院)에 제향되었다.
그는 평생을 자연에 묻혀 살았는데, 이황은 그를 소쇄산림지풍(瀟灑山林之風)이 있다고 하였고, 벗 유성룡도 강호고사(江湖高士)라 하였다.
작품으로는 경기체가의 변형형식인 〈독락팔곡(獨樂八曲)〉과 연시조인 〈한거십팔곡(閑居十八曲)〉이 《송암집》에 전한다.
臨淵齋先生文集
詩
*次韻示權章仲 好文
小少知心證在天。暮年情緖各蕭然。金溪十里吾廬好。早晩歸耕山一邊。
*寄示權章仲
莫向溪邊柳。臨分折一枝。金溪有別業。欲賦去來辭。
細雨村墟遠。春光上柳枝。相看兩衰鬢。滿酌不須辭。
*呈權章仲
庭沙似雪又添霜。白月輝輝夜未央。滿酌三杯淸興發。恰如寒水洗心腸。
*次章仲韻
久別相逢雙眼明。樽前一笑話平生。年來愁病鬢重白。一字吟來斷幾莖。
卷石能成太華岑。功程須著始終心。他年結社金溪畔。麗澤何妨逐日尋。
*次權章仲韻
吾行己是近君家。况復天敎亂雪花。已覺閒情甘似蔗。誰知宦味薄如紗。
盤無長物何須市。樽滿新醅不用賖。咫尺相思猶不見。明朝水隔又山遮。
*寄權章仲
未見靑城面。空傳一札來。襄陽千里外。離恨若爲裁。
書
*答權章仲
謹承淸問。如對慰慰。三益曾到花山中。熱雨致劇素祟。彌留積日。僅得扶曳還郡。而元氣大敗。食飮失味。憫嘆憫嘆。初擬歷敍阻抱。在湖樓委人以致意。好事多魔柰何。近若將理穌完。則自襄陽過西厓。仍叩松扉。亦所料也。白紙二束。送助吟咏之用。乞揮筆一寄。以刮塵眸。家禮儀節亦送。幸照察。
*與權章仲 庚辰
遠想新春。茂膺淸福。詩思益佳。健羨之至。恨未得致身於觀物堂中。共把一杯也。三益年去年來。衰病又添。白髮種種。歸思難禁。柰何柰何。頃因權秀才。見君瓊章。簿領盈前。無暇吟成一句。可恨。
*與權章仲 癸未
爲問邇來學履如何。詩思如何。隔歲遠懷。猶未得一書。况復相就以聽緖論耶。三益年齒衰邁。疾病侵尋。自九月初。又得聤耳之痛。淋漓惡汁。將兩箇月不絶。支離辛苦不可言也。春初切欲歸省先壟。北變出於意外。不暇爲受由計。南望隕涕。柰何柰何。儻得一便。欲於明春定作一行。但未知造物兒處分。而又未知與左右一敍否也。只祝餞迓益毖。
*答權章仲 甲申
遠別多年。得承手翰。蘇慰極矣。况蒙瑤唾散在簡頭。寶玩不已。三益入城以後。塵埃愁憫。精神耗喪。僅僅支遣。頓無詩句意思爾。近以暑證。祈恩遞免。爲司成數日。昨又叨此非分。憫蹙柰何。君處江湖。必發一笑也。高韻欲與希玉。從後和上爲料。
*朝天別章[松巖權好文]
春光如海滿長安。遠別寧爲少婦顔。國子先生凌萬里。朝臣送者動千官。
井蛙如我空衰鬢。雲鳳惟公擧逸翰。蘆荻䕺中愁露宿。塵沙磧裏苦風餐。
鴨江綠漲催橫棹。鶴野靑蕪乍卸鞍。九死欲酬王事盬。一生何恨客程難。
楊州柳色風前碧。楓闕荃顔日下丹。朝禹塗山鳴劒佩。觀周文物盛衣冠。
華夷誰道燕山隔。閶闔休言舜日殘。專對九闕攀玉輦。慰陳二火拜金鑾。
想趨彤陛香烟細。曉闢明堂落月寒。夏雨征驂寧自怨。秋風歸鴈可相歡。
莫憐鄕國春花落。休羨遼天暮鳥還。自古男兒四方志。何須寂寞老三韓。
松巖先生續集
詩
*和裴正字汝友
翳壁殘燈雁打更。一杯相倒十年情。不嫌果下歸程黑。只爲東岑桂影明。
*次裴學錄汝友送歸韻 a
南歸萬里嶺雲低。獨立西風眼轉迷。最憶故園秋色好。晩楓新月草堂西。
*次低字。贈裴汝友護送官。
嶺海千重八眼低。歸來相望暮雲迷。壺中自有閑天地。底事南遊又向西。
*送裴學正汝友還京
鄕關鷄黍約。歲歲賦南行。黃菊三秋興。靑雲萬里情。
玉蟾期未缺。霜雁夢難成。遙想催歸國。朝陽一鳳鳴。
*聞基川西軒多山景。喜吟。時裵汝友爲倅
聞來最勝郡西軒。小白山光太半分。出世縱難鴻自擧。入林何必鹿爲群。
凉生坐席千峯雨。翠滴吟樽萬壑雲。衙罷想應多寄適。莫言塵簿不饒君。
*裵豐基汝友來訪有詩。次贈。
綠樹陰中卓午天。枕書眠處喜跫然。飛談未罷還相別。恨鬳靑山望眼邊。
*次襄陽府使裵汝友
石室三冬蟄。銅章萬里遊。相思關嶺隔。風雪路悠悠
*送裴學主汝友還京 一首見元集
守拙居窮巷。還慚負聖時。菊秋欣得遇。楓岸惜相離。
松月宜呼酒。江山浪入詩。西鞭應促著。會面未重期。
*正月十日。遊廬江。與金士純, 裴汝友, 李共父, 權彦晦及諸友十餘人。大醉次吟。丙子
東風滿江雪 臨別更傳杯 落日半峯在 應敎歸興催
*豐基郡守裴汝友春日訪錦溪。有詩。次送。
錦里詩仙去幾春。風煙寥落澗之濱。晩尋勝跡誰閑客。高挹餘芳儘可人。
某水某丘空綠草。一花一石帶淸塵。應知杖屨逍遙處。欲謝浮名濫幅巾。
*追和退陶先生妙峯庵題。戲呈豐基太守裴汝友。
山色秋來興正濃。亭亭雨後翠浮空。塵途久結簪纓侶。雲壑誰期杖屨同。
茶鼎睡餘湔俗慮。蘿窓吟罷憶仙蹤。山跧未辦雲遊約。一笛荒郊伴牧童。
*奉呈裴掌令汝友
苔騎石室久離羣。名字人間恐漏聞。鳧渚幾懷裴吏部。龍山孤負孟參軍。
那堪俛首趨靑瑣。自決終身臥白雲。只恨不才添匠眼。聖朝煩擬作徵君。
*是月向京。到鳥嶺龍湫。與金彦純三昆季裵汝友共吟。
落木騷騷山雨紛。磨天層嶂褪寒雲。遍看勝景龍渾曲。鳴玦淸流洗耳聞。
*望後二日。和裵上舍汝友遊陶山韻。
身墮雲泉特地奇。亂蠅塵事任希夷。名途不願馳輪鞅。釣築誰同抵死期。
行藏誰是又誰非。天在山中世自違。砂洞月瀾春興動。夢隨鷗鷺共飛飛。
一番遊興趁春初。隨意芳郊引小車。遲日暖風多浪詠。向來何但苦三餘。
志士端宜學遂初。國庠於道指南車。羡君往作羣英會。講得應知匪緖餘。
*謾呈裴校理裴君三益。以豐守瓜滿歸家。除校理。辭不赴。故云。
桃源東面絶凡塵。接屋連墻問幾春。立脚欲爲方外士。掉頭乍免世間人。
歸園可啜陶潛菊。去國欣羹張翰蓴。近擬孤撑漁艇訪。泛波紅葉恐非眞。
김효원(金孝元) 1532년(중종 27)∼1590년(선조 23).
본관은 선산(善山). 자는 인백(仁伯), 호는 성암(省菴).
증조부는 김수현(金秀賢)이고, 조부는 김덕유(金德裕)이며, 부는 현감 김홍우(金弘遇)이다.
조식(曺植)‧이황(李滉)의 문인으로, 1564년(명종 19) 진사가 되고, 1565년 알성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병조좌랑‧정언‧지평 등을 역임하였다.
1573년(선조 6) 사가독서(賜暇讀書)하고, 1574년 다시 지평을 맡았다. 명종말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죽은 뒤에 척신계(戚臣系)의 몰락과 더불어 새로이 등용되기 시작한 사림파의 대표적인 인물로, 1572년 오건(吳健)이 이조전랑(吏曹銓郞)에 추천하였으나, 사림으로 척신 윤원형(尹元衡)의 문객이었다는 이유로 이조참의 심의겸(沈義謙)이 반대하여 거부당하였다.
그러나 1574년 조정기(趙廷機)의 추천으로 결국 이조전랑이 되었다.
1575년 심의겸의 동생 심충겸(沈忠謙)이 이조전랑으로 추천되자, 전랑의 관직은 척신의 사유물이 될 수 없다는 이유로 이를 반대하고 이발(李潑)을 추천하였다. 이러한 일을 계기로 심의겸과의 반목이 심해지면서, 사림계는 동인과 서인으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즉, 훈신(勳臣)‧척신들에 의한 정치체제의 개혁을 둘러싸고 선조 즉위 직후부터 전배(前輩)와 후배(後輩)의 대립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는데, 척신정권 때 정계에 진출하여 심의겸의 도움을 받은 사림이 전배이고, 소윤의 몰락 이후 심의겸과 무관하게 정계에 진출한 부류가 후배로, 이들 후배 사림은 심의겸의 척신적 처지에 대하여 비판적이었다.
이러한 대립은 이조전랑 추천과 임명을 둘러싼 대립을 계기로 점차 심화되어, 심의겸을 중심으로 한 전배는 대부분 서인이 되고, 김효원을 중심으로 한 후배는 동인이 되었다. 김효원의 집이 동부의 건천동(乾川洞)에 있다고 해서, 그 일파를 동인이라 불렀다.
두 사람의 대립이 점차 심해지자, 우의정 노수신(盧守愼), 부제학 이이(李珥) 등이 분규의 완화를 조정하고자 두 사람 모두 외직으로 내보낼 것을 건의하여, 심의겸은 개성부유수로, 김효원은 경흥부사로 나갔다.
그러나 김효원을 지지하는 후배들이 그를 축출한 것이라 반발하여 다시 부령부사로 옮기게 하였으나, 이 역시 부령이 변방이라 하여 반발하므로 다시 삼척부사로 옮기게 되었다.
결국 노수신과 이이의 조정은 실패하였고, 선조는 당쟁의 완화를 위한 조처로 이조전랑의 추천‧교대제도를 폐지하기에 이르렀다. 뒤에 사간의 물망에 올랐으나 선조가 허락하지 않아 내직에 복귀하지 못하였고, 당쟁이 더욱 심해지면서 안악군수로 자청해 나갔다.
그뒤 10여년간 한직(閑職)에 머물며 당쟁이 일어난 것에 대하여 책임을 느끼고 시사(時事)에 대해서는 입을 열지 않았다. 나중에 선조의 특명으로 영흥부사로 승진하여 재직중에 죽었다.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삼척의 경행서원(景行書院)에 제향되었다.
문집으로는 《성암집》이 있다.
臨淵齋先生文集
詩
*東郊別金仁伯 孝元
白首相逢此一樽。靑郊芳草政銷魂。洛山古寺東臺畔。何日攜君看海暾。
*祭文[安岳郡守金孝元]
嗟嗟汝友。何至於斯。人莫不然。我又何悲。浮生如寄。生不足貴。得正而死。死亦安矣。昔公僑寓。于我之鄰。一笑莫逆。道義相親。有過相規。有善相觀。終日諄諄。斷斷心肝。蚤識依歸。退陶門牆。如入芝室。久而逾芳。中間聚散。餘十五年。天涯地角。消息杳然。情意則孚。千里同席。嗤彼俗子。一膜胡越。我刺西州。公來觀察。公餘多暇。玉斝銀燭。晤言靡他。往復其昔。詩囊無底。鄰雞喚晨。竊瞷眉宇。頓减風神。退伏于室。心口相語。有何傷損。衰謝如許。徐又自解。之子燕譽。精彩炳炳。其又何慮。于後齊安。迎接台軒。人皆危公。百口一言。其時奉書。勉以將理。答云平安。言者過矣。俄奉先聲。將巡海邑。始疑終釋。謂必勿藥。川原撼頓。觸冒炎蒸。眞元暗傷。敗證來乘。還朝有命。輿以就道。竟復于舘。天乎不弔。頃賜我書。閏之廿八。銀鉤縱橫。飛動猶昨。私心有喜。竚竢康寧。誰意承訃。只隔二蓂。旅櫬搖搖。嶺路阻長。秋深故山。松栢荒凉。一慟相訣。草木離披。嗚呼哀哉。知耶不知。
省菴遺稿
*挽觀察使裵三益 임연재집 미수록
末路悲歌斷。浮生一夢催。斯人不重見。吾道已焉哉。文彩 風流雋。詩書禮樂恢。天池鵬未擊。泉路玉先摧。寂寞平生事。荒凉瘴海隈。悲鳴轅馬顧。失涕路人哀。自忝交遊後。深慚樗櫟才。追隨聞緖論。零落隔風裁裁字疑誤。次第審書札。含悲檢酒杯。山陽他日笛。不忍弔寒梅。
박점(朴漸) 1532년(중종 27)∼미상.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경진(景進), 호는 복암(復庵).
박세정(朴世貞)의 아들이다.
1569년(선조 2)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여 이듬해 정언(正言)에 제수되었다. 이어 홍문관부수찬(弘文館副修撰)‧이조좌랑(吏曹佐郞)을 거쳐, 1573년 명천현감(明川縣監)이 되었다.
그 뒤로 직제학(直提學)‧사간‧좌부승지(左副承旨)‧참지(參知) 등을 거쳐 1584년 황해감사(黃海監司)가 되었다.
그뒤 도승지‧이조참의(吏曹參議) 등을 지내다가 임진왜란 전해인 1591년에 당쟁에 휘말려 서인이 몰락할 때 관직을 삭탈당하여 벼슬길에 더 이상 나가지 않았다.
臨淵齋先生文集
詩
*送朴景進 漸 朝天
夙昔聞名姓。神交若舊知。風雲千里會。鱗羽十年期。世故能牽挽。人間足別離。如何阻咫尺。忽復向京師。去去經西塞。行行近北夷。遼城看月古。燕市聽歌悲。搖落秋光晩。蒼茫物色衰。萍蓬愁遠道。霜雪斷寒肌。井坐吾猶愧。鵬遊子不疑。山河尋禹迹。禮樂見周儀。分袂從今夕。論文又幾時。都門空悵望。雙鬢亂如絲。
이희(李熹) 1532년(중종 27)∼1592년(선조 25).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자수(子脩), 호는 율리(栗里).
참의 이인문(李仁文)의 증손으로, 이위수(李威壽)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장중우(張仲雨)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뛰어난 재질을 보이더니 이황(李滉)에게 수학하여 크게 이름을 떨쳤다.
1561년(명종 16)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574년(선조 7)에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뒤 성균관‧이조‧호조‧병조에서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지방의 현령을 거쳐,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에 군수로 있었다. 난이 일어나자 관군과 의병을 지휘하여 왜적과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臨淵齋先生文集附錄
朝天別章[李憙]
西郊春晩送行輈。矯矯爭稱第一流。丹悃無他思報國。素懷非但爲觀周。
百年宗社冤猶在。七日秦庭哭未休。此去應添新雨露。秋風相待刮雙眸。
황정욱(黃廷彧) 1532년(중종 27)∼1607년(선조 40).
본관은 장수(長水). 자는 경문(景文), 호는 지천(芝川).
영의정 황희(黃喜)의 후손으로, 행호분위 부호군(行虎賁衛副護軍) 황열(黃悅)의 아들이다.
1552년(명종 7) 사마시에 합격하고, 1558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사관(史官)이 되고, 이어 승문권지(承文權知)‧예문관검열‧봉교를 거쳐 시강원설서에 제수되었다.
1561년 호조‧예조의 좌랑을 역임하고 해미현감으로 나아갔으며, 성균관직강이 되었다.
1565년 헌납 겸 지제교‧부수찬을 거쳐 지평을 지냈다. 당시 세자가 정해지지 않은 상황에서 명종이 병이 나자, 그는 훌륭한 선비를 뽑아 종실을 가르칠 것을 청하였다.
1580년(선조 13) 진주목사를 거쳐 충청도관찰사가 되었다.
그뒤 승지로 올라 1584년 종계변무주청사(宗系辨誣奏請使)로 명나라에 가서 사명을 완수하고 돌아왔다. 그 공으로 동지중추부사가 되고 이어 호조판서로 승진하였다.
1589년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에 연좌되어 파직되었다가 곧 복직되었다.
이듬해 종계변무의 공으로 광국공신(光國功臣) 1등이 되어 장계부원군(長溪府院君)에 책봉되면서 대제학이 되었다. 이어 예조판서‧병조판서를 역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호소사(號召使)가 되어 왕자 순화군(順和君)을 배종(陪從)하여 관동으로 피신하였다. 여기서 의병을 모집하는 격문을 돌렸으나, 왜군의 진격으로 회령에 들어갔다가 국경인(鞠景仁)의 모반에 의하여 왕자와 함께 포로가 되어 안변의 토굴에 감금되었다.
이때 왜장 가토(加藤淸正)로부터 선조에게 보내는 항복권유문을 쓰도록 강요받았다. 처음에는 이것을 거절하였으나, 그의 손자와 왕자를 죽이겠다는 위협을 받자 아들 황혁(黃赫)이 대신 썼다.
한편, 그는 항복권유문이 거짓임을 밝히는 또 하나의 글을 썼으나 선조에게 전달되지 못하였다.
이듬해 왜군이 부산으로 철수할 때 석방되었으나 항복 권유문을 기초한 문제는 동서인(東西人) 간의 정치쟁점이 되었고, 이후 정권을 장악한 동인의 집요한 공격을 받아 길주에 유배되었다.
1597년 왕의 특명으로 석방되었으나 복관되지 못한 채 죽었다. 문장‧시‧서예에 능하였다.
저서로는 《지천집》이 있다. 뒤에 신원되었으며,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臨淵齋先生文集
詩
*送代言黃景文 廷彧 以奏請使朝天
掄才今代搢紳間。穎脫如公古所難。宗社百年猶忍恥。臣民一日可懷安。
山河疆理須詳記。文物繁華亦壯觀。待到秋風回馬首。九重優渥洗三韓。
정유일(鄭惟一) 1533년(중종 28)∼1576년(선조 9). 봉화 내성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자중(子中), 호는 문봉(文峰).
정목번(鄭穆蕃)의 아들이며, 퇴계 이황(李滉)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52년(명종 7) 생원이 되고, 1558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진보‧예안의 현감을 거쳐 영천군수 등을 지냈다.
그뒤 설서‧정언‧직강‧지평‧이조좌랑 등을 역임하였다.
1570년(선조 3) 사가독서(賜暇讀書)하고 이듬해 사인으로 춘추관편수관이 되어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한 뒤 대사간‧승지‧이조판서 등을 지냈다.
시부(詩賦)에 뛰어나 명망이 높았으며, 또한 성리학에 있어서도 사문(師門)의 정통성을 이어받아 주자학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발전시켜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사상의 핵심으로 함으로써 이가 발하여 기가 이에 따르는 것이 사단(四端)이며, 기가 발하여 이가 이것을 타는 것이 칠정(七情)이라 주장한 퇴계설을 추종, 발전시켰다.
관직을 물러난 뒤 《한중록(閑中錄)》‧《관동록(關東錄)》‧《송조명현록(宋朝名賢錄)》 등을 저술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 안동의 백록리사(栢麓里祠)에 봉안되어 있다.
저서로는 《문봉집》, 편서로는 《명현록》이 있다.
臨淵齋先生文集
詩
*送鄭子中 惟一 之任榮川
陪奉年年玉座前。那堪魂夢白雲邊。榮乘五馬渾閒事。養用三牲豈偶然。
東閣梅香風裊裊。南臺秋晩月姸姸。應知舞綵歸來處。歷歷珠璣散萬篇。
*大和驛。次鄭子中韻。
峽路重重幾里過。滿山紅葉當春花。大和爲驛兼爲縣。林外蕭條三兩家。
同里同時不後先。幾迴相醉一樽邊。月明遼鶴歸何處。古驛留詩十七年。
*鄭子中留詩在昌遠驛壁上。讀而悲之。仍次其韻。
羇懷中夜孰知之。松月蒼蒼入夢思。千里東關馬蹄遍。一春南國鴈書遲。
自憐客裏還爲客。堪笑歧邊又有歧。同學故人今已矣。此生誰與話心期。
권문해(權文海) 1534년(중종 29)∼1591년(선조 24). 예천 출신
본관은 예천(醴泉). 자는 호원(灝元), 호는 초간(草澗). 아버지는 권지(權祉)이다.
1560년(명종 15)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좌부승지‧관찰사를 지내고 1591년에 사간이 되었다. 이황(李滉)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유성룡(柳成龍)‧김성일(金誠一) 등과 친교가 있었다.
저서로는 우리나라의 고금문적(古今文籍)을 널리 참고하여 단군시대로부터 편찬 당시까지의 지리‧역사‧인물‧문학‧식물‧동물 등을 총망라하여 운별(韻別)로 분류한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과 문집으로 《초간집》이 있다. 예천 봉산서원(鳳山書院)에 제향되었다.
草澗先生文集
*裵司諫汝友三益。用柳太守君實韻寄來兩絶。因風和呈。
鏡中華髮歎衰遲。作客他鄕歲暮時。千里好音飛度嶺。故人先獲我心知。
媿我迂疏見事遲。多君風采立淸時。男兒事業非徒耳。後日須令太史知。
*次裵汝友贈山僧韻。醉中。走筆書于軸末。
甁錫無常着。三千世界通。梵風雙樹上。具葉一函中。
眼遍雲山碧。心隨水月空。相逢欲贈語。其奈坐詩窮。
남치리(南致利) 1534년(중종 29)∼1580년(선조 13). 안동 노림
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의중(義中), 호는 비지(蕡趾).
아버지는 남신신(南藎臣)이고, 형은 남치형(南致亨), 남치원(南致元)이며 동생은 남치정(南致貞)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으로 문과에 두 번이나 실패하고 자신의 수양을 위한 학문에만 열중했다. 30세 때인 1572년(선조 6) 향시에 합격하였으나 문과에는 응하지 않고 관직에 나아가지 않은 채 이황의 《이학통록(理學通錄)》과 《계몽전의(啓蒙傳疑)》 원고를 정리하고 교정하여 간행하는데 힘썼으며 이러한 학행은 36세 때인 선조 12년 조정에서 뛰어난 선비 9인을 천거할 때, 높이 평가되어 정구(鄭逑), 성호(成浩), 이덕홍(李德洪) 등과 함께 취재(取才) 없이 6품에 서용되었다. 이와 같이 중앙과 지방으로부터 뛰어난 인물로 선망을 받았으나 38세로 요절함에 따라 더 큰 업적을 남기지 못하였다. 시문이 뛰어나 《언행잡록(言行雜錄)》 등의 저술을 남겼으며, 1649년(인조 27) 사림(士林)의 공의로 학덕을 기리기 위해 노림서원(魯林書院)을 세워 제향되었다. 그의 스승은 김언기(金彦璣)이며 제자는 배용길(裵龍吉) 등이 있다. 족한당(足閒堂) 백인국(白仁國) 등과 학문적 교류를 가졌다.
臨淵齋先生文集
詩
*贈南養仲義仲 致利
興起衰門有幾人。邇來諸族望於君。寧將一藝爲能事。須著眞功究本根。
聯璧歸來試一場。季方曾不讓元方。應知得喪關天數。美玉終非韞匵藏。
養仲中司馬。義仲見屈故云。
書
*與南義仲
豚兒來。得聞近况深慰。尊伯氏葬期。何其太緩耶。踰月之制。聖人所定。吉凶禍福。非所論也。君之守古禮似矣。而獨不行葬制可乎。臘月正是寒極。零殘奴僕。當此木花埽無之年。何以堪役。地脈已凍。莎土之覆。亦不得如例。春間再役。人力亦窘。竆家之事。此亦不可不慮也。如何如何。
박운(朴蕓) 1535년(중종 30) 예천출신
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언수(彥秀). 호는 병백당(病柏堂)
퇴계 이황 문인. 사마시 합격.
증직은 참판
臨淵齋先生文集
詩
*與趙士敬 穆,琴聞遠 蘭秀,朴彦秀 蕓。同往溪齋謁先生。因遊孤山。翼日泛舟中流。時微雨霏霏。先生詩適至。伏次其韻。
枉費推移下水船。舟遊赤壁愧蘇仙。無端忽被催詩雨。卻喜瓊琚一札傳。
堪笑塵間事萬端。一筇今復出靑山。慇懃爲與居人說。鷗鳥深盟亦未寒。
권용중(權用中)1536년(중종 31)~미상.
본관은 안동(安東).자는 중정(仲正)이다.
부친은 성균관진사(成均館進士) 권세종(權世種)이다. 형은 권이중(權以中)이고, 동생은 권처중(權處中)‧권득중(權淂中)이다.
1568년(선조 1) 33세로 증광시에 진사 3등 6위로 입격하였다. 1574년(선조 7) 정시에 유생으로 입상하여 급분(給分)의 상을 받았다. 1595년(선조 28)에 순안어사(巡按御史) 김상준(金尙寯)이 권용중(權用中)이 1592년(선조 25)에 봉납(捧納)한 곡식의 회계 장부를 제대로 기록하지 않고,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 백성의 곡식을 거두었다고 보고하였다. 이를 조사한 의금부가 이것이 사실이 아니므로 권용중의 죄를 거둘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어사의 의견이 중함을 주장하면서 권용중의 죄를 거두지 않았다. 이후 통례원상례(通禮院相禮)‧내자시정(內資寺正)‧사복시정(司僕寺正)‧사옹원정(司饔院正)에 제수되었다.
臨淵齋先生文集附錄
祭文[新溪縣監權用中]
惟靈。拔萃之才。邁倫之識。休休有容。爲善最樂。髫年志遠。千里遊學。親炙陶山。入門旣正。中閎外肆。日著名行。夙遊芹泮。射策天門。相失之瘦。孰知所存。鸞鳳委翅。嘆栖枳棘。芝香自聞。馹招有日。再亞薇垣。凜凜志節。言論警俗。有諍臣風。密侍經幄。謇謇匪躳。嘉猷屢進。效大人忠。任委成均。士知趨向。銜命上國。帝庸嘉尙。寄專方面。民爭顒望。方期大施。何奪之速。壽未耳順。位不滿德。幸余幷世。晩託契義。韻合志同。許以知己。作尉四載。値公觀察。詎意凶變。儀刑永隔。柳車旣飭。乃始匍匐。豈但哭私。爲時慟惜。
홍성민(洪聖民) 1536년(중종 31)∼1594년(선조 27).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시가(時可), 호는 졸옹(拙翁).
관찰사 홍춘경(洪春卿)의 아들이다.
1561년(명종 16) 진사가 되고, 1564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정자‧교리 등을 지냈다.
1567년 사가독서(賜暇讀書)한 뒤 대사간을 거쳐, 1575년(선조 8) 호조참판에 이르러 사은사로 명나라에 건너가 종계변무(宗系辨誣)에 대하여 힘써, 명나라 황제의 허락을 받아 가지고 돌아왔다.
그뒤 부제학‧예조판서‧대사헌‧경상감사 등을 역임하였다.
1590년 종계변무의 광국공신(光國功臣) 2등에 책록되고, 익성군(益城君)에 봉하여졌다.
이듬해 판중추부사가 되었다가 건저문제(建儲問題)로 정철(鄭澈)이 실각하자, 그 일당으로 몰려 북변인 부령으로 유배되었다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특사로 풀려나 복관되어 대제학을 거쳐, 호조판서에 이르렀다.
당시 신진사류의 지도급 인물이요, 윤두수(尹斗壽)와 함께 서인으로 유능한 선비였다.
저서로는 《졸옹집》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拙翁集
詩○七言律詩
*戲裵汝友
聞道故人能畏畏。神明誘子策扶持。閑情易動杯中物。春意輕搖帳裏兒。
鋤去二難寧復患。秋來一笑以爲期。只憂此癖猶馮婦。下到車時不自知。
유영립(柳永立) 1537년(중종 32)∼1599년(선조 32). 서울 출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입지(立之).
아버지는 사인 유감(柳堪)이며, 어머니는 창녕조씨(昌寧曺氏)로 동지돈령부사(同知敦寧府事) 조윤무(曺允武)의 딸이다.
1568년(선조 1) 사마시에 합격, 생원이 되고 그해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뒤 사인‧지평‧영변판관‧보성군수‧철산군수‧공주목사 등을 역임하고, 1582년 종성부사가 되었는데, 이듬해 이탕개(尼蕩介)의 난으로 1만여명의 야인이 침입하자, 우후 장의현(張義賢), 판관 원희(元喜) 등과 이를 막으려다 마침내 성이 함락되자 그 책임으로 하옥되었다.
곧 풀려나 승지‧개성유수를 거쳐 1586년 경상도관찰사, 1588년 전라도관찰사, 1591년 함경도관찰사를 역임하고 이듬해 강원도관찰사가 되었다.
이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산 속으로 피신하였다가 가토(加藤淸正) 휘하의 왜군에게 포로가 되었으나 뇌물로 매〔鷹〕를 바치고 탈출, 국위를 손상시켰다는 이유로 대간의 탄핵을 받고 파직당하였다.
유성룡(柳成龍)의 변호로 곧 복직되어 병조참판을 역임하였다.
臨淵齋先生文集
詩
*奉別柳立之朝天
弧矢當年志四方。壯遊今日試晨裝。衣冠濟濟漢官盛。禮樂彬彬周業昌。
遼野霜風秋欲老。燕山雪月夜何長。思親戀闕情多少。羇夢頻頻返故鄕。
조종도(趙宗道) 1537년(중종 32)∼1597년(선조 30). 임연재와 사마시 동방
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백유(伯由), 호는 대소헌(大笑軒).
아버지는 참봉 조언(趙堰)이며, 어머니는 대사성 강로(姜老)의 딸이다.
정두(鄭斗)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58년(명종 13) 생원시에 합격한 뒤 천거로 안기도찰방(安奇道察訪)이 되었다.
이때 이황(李滉)의 문하생들인 유성룡(柳成龍)‧김성일(金誠一) 등과 교유하였다.
그뒤 사도시직장(司䆃寺直長)‧상서원직장(尙瑞院直長)‧통례원인의(通禮院引儀)‧장례원사평 등을 역임하고, 1583년(선조 16) 양지현감(陽智縣監)으로 나가 선정을 베풀어 표리(表裏)를 하사받았으며, 1587년 금구현령(金溝縣令)을 역임하였다.
1589년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되었다가 무고함이 밝혀져 석방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영남으로 돌아와 초유사(招諭使) 김성일과 함께 창의하여 의병모집에 진력하였고, 그해 가을 단성현감을 지냈다.
1596년에는 함양군수가 되었는데, 다음해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명을 받고 안음현감 곽준(郭䞭)과 함께 의병을 규합, 황석산성(黃石山城)을 수축하고 가족까지 이끌고 들어가 성을 지키면서 가토(加藤淸正)가 인솔한 적군과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경사(經史)에 밝았으며, 기개가 높고 해학을 즐겼다.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함안의 덕암서원(德巖書院), 안의의 황암서원(黃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대소헌집》이 있다. 시호는 충의(忠毅)이다.
臨淵齋先生文集
詩
*同趙伯由 宗道 向丹山口占
塵土勞勞未賦歸。仙潭風月夢依依。行行半日丹山路。空翠霏霏欲濕衣。
*寄趙伯由
聞道咸陵子。秋風到驛亭。相思頭欲白。旣見眼終靑。
夜朗樓迎月。花黃酒滿甁。何方天與便。一醉兩忘形。
*送趙伯由赴擧
迎梅時雨政霏霏。烟樹茫茫野色微。三載相思霞谷子。一春消息問君歸。
*次伯由韻 辛巳
草草山堂會。人間豈偶然。開樽悅情話。臨鏡惜流年。
京洛難馳馬。江湖欲割鮮。詩朋今滿座。句句摠珠聯。
*夢見趙聞慶伯由 (주)이 시는 임연재선생이 명나라에 진사사로 가면서 지은 시이다
廣寧衝雨客。聞喜割雞人。迢遞隔千里。分明成一身。
三生都是夢。萬事孰爲眞。起坐空惆悵。靑燈夜向晨。
김성일(金誠一) 1538년(중종 33)∼1593년(선조 26). 안동 출신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사순(士純), 호는 학봉(鶴峰).
아버지는 김진(金璡)이다. 퇴계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1568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권지부정자가 되고, 이듬해 정자가 되었다. 이어서 검열‧대교 등을 거쳐 1572년 봉교가 되어 노산묘(魯山墓)를 노릉(魯陵: 端宗의 陵)으로 봉축하고 사육신(死六臣)의 관작을 회복시켜 그들의 후손을 녹용(錄用)하도록 진언하였으며, 군덕(君德)과 시폐(時弊)를 논하였다.
1574년 부수찬을 거쳐 다시 정언이 되어 변장(邊將)으로부터 초피덧저고리〔貂裘〕를 뇌물로 받은 우의정 노수신(盧守愼)을 탄핵하였다.
이듬해 이조‧병조의 좌랑을 역임하고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1577년 사은사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파견되어 종계변무(宗系辨誣)를 위해 노력하였으며, 돌아와 이듬해 홍문관교리가 되고, 이어서 장령‧검상‧사인 등을 역임하였다.
1580년 함경도순무어사(咸鏡道巡撫御史)로 함흥‧삼수‧길주‧종성 등을 살피고 돌아와, 변장으로서 직무에 충실한 혜산첨사 김수(金燧)를 당상관에 승품하고, 영건만호(永建萬戶) 우응장(禹應長)과 정현룡(鄭見龍)‧김광옥(金光玉) 등을 선전관(宣傳官)에 기용할 것을 건의하였다.
1583년 사간이 되고, 이어서 황해도순무어사로 다녀와 군기관리(軍器管理)를 소홀히 하고 창곡(倉穀)을 부실하게 한 황주목사 윤인함(尹仁涵)의 파직을 건의하였다.
이듬해 나주목사로 부임하여 민원(民寃)의 처리에 노력하고, 오랫동안 끌어온 이 고을 임씨(林氏)‧나씨(羅氏)간의 송사(訟事)를 해결하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또한, 이곳 금성산(錦城山)기슭에 대곡서원(大谷書院)을 세우고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조광조(趙光祖)‧이언적(李彦迪)‧이황 등을 제향하는 한편 선비들을 학문에 전념하게 하였다.
1586년 나주 사직단(社稷壇)의 화재에 책임을 지고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와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 이황의 《자성록(自省錄)》‧《퇴계집》 등을 편집, 간행하였다.
1588년 종부시첨정이 되고, 이어서 봉상시정‧경기추쇄경차관(京畿推刷敬差官)‧예빈시정‧사성 등을 역임하였다.
1590년 통신부사(通信副使)로 일본에 파견되었는데, 이듬해 돌아와 일본의 국정을 복명할 때 “왜가 반드시 침입할 것”이라는 정사(正使) 황윤길(黃允吉)과는 달리 민심이 흉흉할 것을 우려하여 왜가 군사를 일으킬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고 상반된 견해를 밝혔다. 그해 부호군에 이어 대사성이 되어 승문원부제조를 겸하였고, 홍문관부제학을 역임하였다.
1592년 형조참의를 거쳐 경상우도병마절도사로 재직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일의 복명에 대한 책임으로 파직, 서울로 소환중, 허물을 씻고 공을 세울 수 있는 기회를 줄 것을 간청하는 유성룡(柳成龍) 등의 변호로 직산(稷山)에서 경상우도초유사로 임명되어 다시 경상도로 향하였다.
의병장 곽재우(郭再祐)를 도와 의병활동을 고무하는 한편, 함양‧산음(山陰)‧단성‧삼가(三嘉)‧거창‧합천 등지를 돌며 의병을 규합하는 동시에 각 고을에 소모관(召募官)을 보내 의병을 모았다.
또한, 관군과 의병 사이를 조화시켜 전투력을 강화하는 데 노력하였다. 그해 8월 경상좌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가 곧 우도관찰사로 다시 돌아와 의병규합‧군량미확보에 전념하였다.
또한, 진주목사 김시민(金時敏)으로 하여금 의병장들과 협력, 왜군의 침입으로부터 진주성을 보전하게 하였다.
1593년 경상우도순찰사를 겸하여 도내 각 고을의 항왜전(抗倭戰)을 독려하다가 병으로 죽었다. 정치적으로 동인(東人)에 가담, 1590년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옥사한 최영경(崔永慶)의 신원(伸寃)을 위해 서인(西人)의 영수 정철(鄭澈)을 규탄하였으며, 그후 동인이 남인‧북인으로 갈릴 때 유성룡‧김우옹(金宇顒) 등과 입장을 같이하여 남인을 이루었다.
저서로는 《해사록(海槎錄)》‧《상례고증》 등이 있으며, 문집으로 《학봉집》이 있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臨淵齋先生文集
詩
*浮石途中。口占示金士純。
聯鞍向浮石。野逕蓬蒿深。殘照掛東嶺。夕霏從北林。
鳥鳴醒睡耳。風過爽詩襟。一半烟霞趣。悠然入短吟。
*次金士純
太白山連峙。迤南控地維。樓高仙作宅。桐老鳳栖枝。
遠棄人間累。超尋物外期。天遊眞可樂。餘事和新詩。
*與金鶴峯宿靑城山次韻
論交休道白頭新。肝膽相傾絶點塵。架揷詩書作長物。園收芋栗不全貧。
高情肯與靑山負。閒興時從白鳥親。十里金溪有舊業。歸來歲晩是爲鄰。
*贈別金士純
君向洛陽路。竹嶺雲萬重。草草今朝別。依依昨夜逢。
微波生素幕。疎雨滴孤松。班行如問我。衰白病兼慵。
溪水泠泠曲曲淸。離人腸斷不禁情。丁寧默向山靈禱。莫使陰氛翳日明。
奉別金士純西行 丙子
遠別襄陽空斷腸。關河冰雪路茫茫。鵾鵬始起滄溟闊。鴻鵠高飛羽翮長。
萬里羈心懸鳳闕。一春歸夢繞桑鄕。沿途物色供詩料。收拾應須滿錦囊。
書
*答金士純 乙亥
頃承尊書。無便未復。迨嘆迨嘆。聞君用松明夜讀云。其然否乎。燈油次眞荏兩斗,白粒五斗汗表。伏惟照領。僕病疲已劇。而官事又擾。鬪訟日繁。可悶可悶。餘祝自愛益毖。
*與金士純 丁丑
謹問尊况萬重。三益病疲已劇。而官務又擾可憫。秋山向晩。正好相對一敍。乞毋忘白雲之約如何。心經一卷推諸義仲處。偸暇一閱。始玆封上。
*與金士純
晩聞榮省有日。欣慰可言。卽惟尊履益毖。三益自五月患痢不絶。多試藥餌。尙未見效甚憫。今以不得已之故。發向安東。仍歷拜尊所。直到襄陽是計。未卜者事故之如何耳。洛中爻象如何。幸細示也。心腹撓憫。自力布此。僅能問何如。他皆未暇及也。
학봉속집 제1권
시(詩)
*배여우(裵汝友) 삼익(三益) 의 부석(浮石) 운을 차운하여 도중에서 입으로 부르다.
(주)학봉 선생 38세 때인 (1575, 선조 8)이다
선방은 높은 곳에 자리잡았고 / 禪居在天近
가파른 산 구름 깊이 들어가 있네 / 危峭入雲深
우연히도 연하의 짝이 되어서 / 偶結煙霞伴
둘이 함께 소나무 숲 찾아가누나 / 同尋松桂林
저녁 종은 먼 골짝서 울리어 오고 / 暝鐘生遠壑
내리는 비 옷소매에 흩뿌리누나 / 飛雨灑寒襟
긴 휘파람 불면서 사정 지나니 / 長嘯過沙井
용 울음과 객 울음이 뒤섞이누나 / 龍吟雜客吟
*내성(奈城)에 묵으면서 배임연(裵臨淵)이 지은 시의 운을 차운하다.
내 그대와 한차례 이별한 뒤에 / 與子一爲別
희화(羲和)는 해 어쩜 그리 빨리 몰았나 / 羲馭何駸駸
삼 년 동안 초토를 바라보면서 / 三年望草土
벗 부르는 새소리만 괜히 들었네 / 求友空聞禽
이번에 온 것 역시 다행인 거로 / 今來亦云幸
며칠 밤을 달 함께 쳐다보았네 / 數夜月同襟
어찌 한갓 병만 서로 걱정하리요 / 豈徒病相愛
나눈 교분 금란지교(金蘭之交) 바로 그거네 / 交契是蘭金
신천에서 묵은 병을 씻어 내면서 / 神泉滌舊痾
시냇가서 찬 이불을 함께 덮었네 / 溪上連寒衾
또한 역시 조의루도 함께 있으며 / 亦有趙倚樓
빙옥 같은 맑은 시구 토해 내었네 / 氷玉生淸吟
서로 간에 이태백(李太白)의 도움을 받아 / 相將倚太白
신령 비결 찾아가며 기뻐하였네 / 靈閟欣參尋
그 어찌 뜻했으랴 남북 사람이 / 何意南北人
솔과 계수 숲속에서 함께 지낼 줄 / 共此松桂林
탕반에는 일신이라 새기었나니 / 湯盤銘日新
이 도는 함께 공경하는 바이네 / 此道同所欽
일어나서 보내온 시 화답하고는 / 振衣和來篇
애오라지 마음속에 보존하누나 / 聊用存諸心
*황해 감사(黃海監司) 배여우(裵汝友)에 대한 만사 임연재집에는 미수록
경월이 서해 바다 빠뜨려지니 / 卿月淪西海
백성들이 소당 잃고 통곡하누나 / 民星哭召棠
황화의 노래 아직 안 끝났는데 / 皇華歌未闋
해로의 원망 어쩜 그리도 긴가 / 薤露怨何長
성상 은혜 앞뒤로 다 융숭하여서 / 聖眷隆前後
슬픔 기림 죽은 뒤에 미치어 왔네 / 哀榮及在亡
친우들은 명 짧은 걸 비통해하고 / 親朋悲運促
조정에선 인재 잃어 애석해하네 / 朝著惜才良
상여 줄을 잡고서는 눈물 뿌리고 / 執紼空沾血
노 멈추고 부질없이 술을 부으니 / 停橈謾奠觴
물가 구름 수심 깊어 다시 뭉치고 / 渚雲愁更結
가을 해는 참담하여 빛을 잃었네 / 秋日慘無光
강 외로이 떠가는 배 안에서는 / 一木孤舟裏
온 가족이 흰줄 잡고 곁에 서 있네 / 全家素紼傍
고향 올 땐 잠시 길을 함께 왔건만 / 還鄕暫同路
멈춰 쉬는 데는 홀연 다른 땅이네 / 稅駕忽殊方
개미 사는 둔덕에서 첫꿈을 꾸니 / 蟻穴初成夢
인간 세상 기장밥은 몇 번 익었나 / 人間幾熟粱
뜬 인생은 참으로 초초도 한데 / 浮生眞草草
이 세상은 다시금 또 망망하구나 / 斯世更茫茫
생각자니 내 일찍이 서로 잘 지내 / 顧我曾同好
그대에게 좋은 영향 많이 받았네 / 從君早襲芳
풍진 세상 반평생을 사는 동안에 / 風塵半世後
이별한 채 지낸 것이 십 년 넘었네 / 離別十年强
얻고 잃음 구름처럼 천 번 변했고 / 得喪雲千變
영고성쇠 한바탕의 꿈과 같았네 / 榮枯幻一場
사람들 말 송곳 틈도 파고들지만 / 人言錐間誋
맺은 정이 어찌 틈이 벌어지리요 / 交道肯乖張
늘그막에 저버리지 않기로 했던 / 末路期無負
그 충언을 잊지 않을 것만 같았네 / 忠言擬勿忘
동쪽으로 온단 소식 들려 오기에 / 東來消息近
서쪽 보며 꿈과 혼 치달려 갔네 / 西望夢魂忙
한 번 곡에 끝내 서로 헤어졌으니 / 一哭終相失
나의 남은 생은 모두 상심뿐이리 / 殘生儘可傷
강배에 가 곡할 길이 또 막혔기에 / 江舟又阻哭
병석에 누워 다만 애만 끓이네 / 病枕只摧腸
숙초에다 남은 눈물 떨어뜨려서 / 宿草空餘淚
다른 해에 북망산을 적실 것이리 / 他年洒北邙
안제(安霽) 1538년(중종 33) 안동 출신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여지(汝止) 호는 동고(東皐)
조부는 안처정(安處貞). 아버지는 안수(安琇) 외조부는 금원복(琴元福)
처부는 권서운(權瑞澐)
명종(明宗) 16년(1561) 생원 진사 양시합격
선조(宣祖) 13년(1580) 문과급제. 정랑을 지냈다.
臨淵齋先生文集
詩
*贈安汝止
遠別空相憶。重逢是不期。鄕音雖未改。客鬢已俱衰。
湖海頻開酒。樓臺共賦詩。情歡那可恃。明日又分歧。
이산해(李山海) 1539년(중종 34)∼1609년(광해군 1).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여수(汝受), 호는 아계(鵝溪)‧종남수옹(終南睡翁).
내자시정(內資寺正) 이지번(李之蕃)의 아들이다.
1558년(명종 13)에 진사가 되고, 1561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등용되고, 이듬해 홍문관정자가 되어 명종의 명을 받아 경복궁대액(景福宮大額)을 썼다. 이어 부수찬이 되고 1564년 병조좌랑‧수찬을 역임하였으며, 이듬해 정언을 거쳐 이조좌랑이 되었다.
1567년(선조 즉위) 원접사종사관(遠接使從事官)으로 명나라 조사(詔使)를 맞이한 뒤 이조정랑‧의정부사인‧사헌부집의‧상의원정(尙衣院正)‧부교리를 역임하고, 직제학이 되어 지제교를 겸하였다. 이어 교리‧응교를 지내고 사가독서를 마친 뒤 1570년 동부승지로 승진하였다.
1577년 이조‧예조‧형조‧공조의 참의를 차례로 역임하고 대사성‧도승지가 되었다.
1578년 대사간, 580년 병조참판에 이어 형조판서로 승진하였다.
이듬해 이조판서를 거쳐 우찬성에 오르고, 다시 이조‧예조‧병조의 판서를 역임하면서 제학‧대제학‧판의금부사‧지경연춘추관성균관사(知經筵春秋館成均館事)를 겸하였다.
1588년 우의정에 올랐고, 이무렵 동인이 남인‧북인으로 갈라지자 북인의 영수로 정권을 장악하였다. 다음해에 좌의정에 이어 영의정이 되었으며, 종계변무(宗系辨誣)의 공으로 광국공신(光國功臣)3등에 책록되고, 아성부원군(鵝城府院君)에 책봉되었다.
저서로 《아계집》이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臨淵齋先生文集
詩
*次李汝受 山海 韻
塵愁似蠒千絲繞。世事如碁一局敲。淸夢自能尋故隱。夜來長弄釣漁舠。
*朝天別章[鵝溪李山海]
人間璧水通河水。天上文星作使星。王事驅馳幾時了。公家離別向來輕。
遼雲冷濕征裘重。關月平分故國明。無限鄕心何處苦。柳花時節滯秦京。
이성중(李誠中) 1539년(중종 34)∼1593년(선조 26). 임연재와 사마시 동방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공저(公著), 호는 파곡(坡谷).
세종의 아들 계양군(桂陽君) 이증(李璔)의 현손이며, 금천부수(錦川副守) 이감(李瑊)의 아들이다. 이중호(李仲虎)‧이황(李滉)의 문인이다.
1558년(명종 13) 진사시에 합격하고, 1570년(선조 3)에 승사(承仕)로서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71년 검열‧주서를 거쳐 1573년 사복시주부‧부수찬‧정언, 호조‧예조‧병조의 좌랑, 홍문관수찬, 이조좌랑에 지제교를 겸임하고, 사가독서하였다.
1575년 동서분당이 되자 동인으로 지목되어 한산군수로 외보되었다.
1576년 홍문관부교리, 1581년 의정부검상‧사인을 지내고 1583년 홍문관응교‧전한을 거쳐 이듬해 직제학‧동부승지‧우승지를 역임하였다.
1585년 좌승지, 이듬해 대사간, 1587년 홍문관부제학에 경연참찬관을 역임하였다.
1589년 대신들의 추천으로 이조참판이 되고 이듬해 옥당(玉堂)‧대사헌‧동지돈령부사가 되었다.
1591년 옥당 장관으로 시폐12조와 세자책봉을 거론하려던 참에 충청감사로 외보되고, 같은해 8월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 파직되었다.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수어사가 되어 임금을 호종하여 평양에 이르러 호조판서가 되고 선조의 요동(遼東)피난을 반대하였다.
7월에는 중국 구련성(九連城)에 파견되어 명나라의 원병을 청했고, 그 원병이 오자 이여송군(李如松軍)의 군량조달을 위하여 진력하다가 1593년 7월 함창에서 과로로 병사하였다. 뒤에 호성공신(扈聖功臣)에 녹훈되고 완창부원군(完昌府院君)에 봉해졌다.
저서로는 《파곡유고》가 있다.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臨淵齋先生文集
詩
*次李公著 誠中 韻。別黃景明 暹。
西林千里杳歸程。花柳三春獨送行。憑報鵝州坡谷子。幾時重對說平生。
鵬摶萬里有前程。湖海相逢又送行。芳草萋萋春欲暮。不禁離思滿襟生。
坡谷遺稾
*寄呈裵汝友
斟酌基川七日程。別來三歲斷人行。憑君欲寄南中信。竹外梅花太瘦生。
김륵(金玏)1540년(중종 35)∼1616년(광해군 8). 영주 출신
본관은 예안(禮安). 자는 희옥(希玉), 호는 백암(柏巖).
아버지는 진사 김사명(金士明)인데, 백부인 형조원외랑 김사문(金士文)에게 입양되었다.
이황(李滉)의 문인
1576년(선조 9)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1578년 검열‧전적을 거쳐서 예조좌랑‧ 정언이 되었다.
1580년 전적 겸 서학교수가 되고 홍문록(弘文錄)에 등록되었다.
이듬해 부수찬‧지평‧직강 등이 되고, 1584년 영월군수로 갔을 때 노산군(魯山君: 단종)의 묘를 배알하고 제청(祭廳)‧재실(齋室)‧찬청(饌廳)을 묘 옆에 짓고 처음으로 ‘노산군’이라는 호칭을 신주(神主)에 써서 부인 송씨(宋氏)의 신위와 함께 모셔 신임군수마다 죽던 변을 막았다.
3년 후에 돌아와 선조로부터 많은 치하를 받고, 교리에 서용되고, 1590년 집의‧사간‧검열‧사인‧사성‧사복시정이 되었다. 임진왜란 때에는 형조참의를 거쳐 안동부사가 되었다가, 경상도 안집사(安集使)로 영남에 가서, 충성스럽고 의기있는 선비들에게 국가의 뜻을 알리고, 왜적을 토벌하도록 장려하고 백성들을 잘 다스렸다.
이듬해 경상우도관찰사가 되어 전라좌‧우도의 곡식을 운반하여 기근이 든 백성들을 구제하고자 하였다. 이어 도승지‧대사간‧한성부우윤‧대사성을 거쳐, 1594년 동지의금부사‧이조참판‧부제학 등을 역임하였다.
이듬해 대사헌이 되어 〈시무16조〉를 상소하였는데, 모두 치안에 좋은 대책이라는 평을 들었다.
1599년 명나라 장수를 접반하고 형조참판에서 충청도관찰사로 나갔다.
1612년 하절사(賀節使)로 명나라에 가서 명나라 군사가 조선에 남아 있는 것처럼 꾸며 일본의 재침략을 막아 달라는 청을 올려, 명나라로부터 일본에게 재침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칙서를 보내게 하고 돌아왔다. 곧, 대사성이 되고 안동부사로 나아가 범람하는 낙동강의 재해를 막기 위하여 제방을 수축하여 후세에까지 칭송을 들었다.
그러나 김직재(金直哉)의 무옥(誣獄)에 연루되고 또 앞서 광해군의 생모인 공빈 김씨(恭嬪金氏) 별묘(別廟)의 의물(儀物)을 종묘의 의물과 똑같게 하는 것에 반대한 것과 관련되어 강릉으로 유배가게 되었는데, 여러 대신들의 변호로 풀려났다. 영천의 구산서원(龜山書院)에 제향되었고 저서로는 《백암문집》이 있다. 이조판서가 추증되었고, 시호는 민절(敏節)이다.
臨淵齋先生文集
詩
*靑巖亭。次金希玉 玏 韻。
世路艱難劇太行。人間歲月又茫茫。邇來憂國頭如雪。猶喜乾坤復一陽。
栢巖先生文集
詩
*基城次具栢潭韻。贈主倅裴汝友。三益○丙子
握手還嗟別恨隨。只緣人世事多歧。朝畦雨過驚禾黍。夜閣風生動柳枝。
官對亂峰仍作堞。村依積石自成籬。遨頭治化須寬惠。山郡從今變鞏基。
又
雨歇雲猶黑。溪通水漸淪。村農歌草野。國老賀楓宸。
祖稅堪輸郡。饔飧可借鄰。遨頭無一事。端合岸高巾。
김우옹(金宇顒)1540년(중종 35)∼1603년(선조 36). 성주(星州) 출신.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숙부(肅夫), 호는 동강(東岡) 또는 직봉포의(直峰布衣).
아버지는 삼척부사 칠봉 김희삼(金希參)이다..
남명 조식(曺植). 퇴계 이황 문인.
1567년(명종 22)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홍문관(弘文館) 정자(正字)를 역임하고, 1573년(선조 6)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한 뒤 오랫동안 경연관(經筵官)으로 있었다. 1576년 부교리가 되고 이어 이조좌랑·사인 등을 지냈으며, 1579년에는 부응교가 되어 붕당의 폐를 논하였다. 그해 사가독서(賜暇讀書)하도록 되었으나 소를 올려 사양하고 이듬해 선위사(宣慰使)로 일본 사신 겐소(玄蘇)를 맞이하였는데, 사신의 접대에 여악(女樂) 금지하도록 진언하였다. 1582년 홍문관직제학, 1583년 대사성(大司成)을 거쳐 안동부사(安東府使)로 나갔다가, 대사성이 되고, 대사간을 거쳐 1584년 부제학이 된 뒤 전라도관찰사·안동부사를 역임하였다. 1589년 기축옥사가 일어나자 정여립(鄭汝立)과 조식의 문하에서 함께 수학하였다는 이유로 회령에 유배되었고, 그곳에서 《속강목(續綱目)》 15권을 찬(撰)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으로 사면되어 의주 행재소(行在所)로 가서 승문원제조로 기용되고, 이어서 병조참판을 역임하였다. 이듬해 명나라 찬획(贊劃) 원황(袁黃)의 접반사(接伴使)가 되고, 이어 동지중추부사로 명나라의 경략(經略) 송응창(宋應昌)을 위한 문위사(問慰使)가 되었으며, 왕의 편지를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에게 전하였다. 그해 상호군을 거쳐 동지의금부사가 되어 왕을 호종하고 서울로 환도하여, 한성부좌윤·혜민서제조 등을 역임하였다. 1594년 대사성이 되고, 이어서 대사헌·이조참판을 거쳐 1597년 다시 대사성이 되었으며, 이어서 예조참판을 역임하였다. 1599년 사직하고 인천에서 한거하다 이듬해 청주로 옮겨 그곳에서 죽었다. 유성룡(柳成龍)·김성일(金誠一) 등과 가까워 정치적으로도 이들과 입장을 같이하는 동인(東人)으로서, 서인 정철(鄭澈)·이경률(李景慄)·이징 등이 쟁단을 일으키려 한다 하여 파직을 주장하기도 하였으나, 이이에 대하여만은 존경하는 태도를 취하였다.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청주의 봉계서원(鳳溪書院), 성주의 회연서원(檜淵書院)·청천서원(晴川書院), 회령의 향사(鄕祠)에 제향되었다. 1661년(현종 2)에 문집이 간행되었으며 1723년(경종 3)에는 이현일(李玄逸)이 지은 신도비가 세워졌다. 저서로는 《동강집 東岡集》·《속자치통감강목 續資治通鑑綱目》 등이 있으며, 편서로 《경연강의 經筵講義》가 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臨淵齋先生文集
詩
*贈金肅夫 宇顒
春入頭流夏海山。邇來魂夢費追攀。海山今日重來過。猿鶴依然識我顔。
*次金惇敍贈金肅夫韻
江閣一宵話。芹宮十載情。愁雲翳落日。寒雨打殘英。
後會知何處。佳期偶此成。西風如惜別。滿樹作秋聲。
祭文[安東府使金宇顒]
維我與公。膠漆之固。豈無他人。維子之故。相與之密。相識之蚤。豈無他人。維子之好。識公於司馬聯名之歲。知子於太學同寓之日。半年兮虀鹽。攻苦兮一榻。豈曰無衣。與子同澤。伯仲壎篪。及爾如貫。忠信先孚。相觀誾侃。葢其臭味之同。有以相感兮。豈比夫名利場追逐之朋伴。宦海廿載。升沈不一。其間會合。極不多得。歲丙戌而西征。見夫君於臺閣。情綢繆之依昔。曰故意之難忘。余欲假節於關東。以觀夫楓嶽之勝。而公亦云莫能先卬。豈知夫朝天之路。海西之行。乃至病公於康彊也。我老作宰。寔維公鄕。自慙居崇。未覩民康。待公之還。欲與商量。尙賴澹臺。試割武城。聞公之訃。魂飛魄驚。丹旐兮翩翩。故山兮松檜。往卽兮眞宅。噭號兮無柰。一炷兮淸香。觴酒兮豆肉。英靈兮不昧。庶鑒兮心曲。
남치형(南致亨) 1540년(중종 35) 안동(安東) 노림
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양중(養仲)
아버지는 남신신(南藎臣). 형은 남치원(南致元) 동생은 비지 남치리(南致利)
선조(宣祖) 6년(1573) 생원시 합격
臨淵齋先生文集
詩
*次南養仲 致亨 韻
雨後靑山錦作苔。縈迴一水繞臺來。抽身簿領尋眞境。病裏何妨醉酒杯。
*示養仲
崎嶇峽路細逶迤。纔度山腰又水湄。頗覺一溪名五色。滿林秋葉各呈姿。
오운(吳澐) 1540년(중종 35)∼1617년(광해군 9). 영주 거주
본관은 고창(高敞). 함안 출생. 자는 태원(太源), 대원(大源) 호는 죽유(竹牖)‧죽계(竹溪).
오수정(吳守貞)의 아들이다. 이황(李滉)‧조식(曺植)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61년(명종 16) 생원시에 합격하고 1566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성균관의 학유‧학정‧박사‧전적‧직강 등을 역임하였다.
1583년(선조 16) 경원부 아산보(阿山堡)의 추장 번호(藩胡)가 난을 일으키자 북도조전장(北道助戰將)으로 나가 공을 세웠다.
그뒤 충주목사 겸 편수관(編修官)을 거쳐 성균관사성을 지낸 뒤 사재감정이 되고, 1589년 광주목사(光州牧使)로 나아갔다가 해직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령에서 의병을 일으켜 곽재우(郭再祐)의 휘하에서 소모관(召募官)‧수병장(收兵將) 등으로 활약하였다. 그때 백령(白嶺)에서 의병을 모집하였는데 전후 2만여명에 이르렀다.
특히 의령부근의 전투와 현풍전투에 군공이 뛰어났다.
1593년 상주목사가 되고, 이듬해 합천군수를 지냈다.
1597년 정유재란 때 다시 합천부근의 왜적을 쳐서 공을 세워 도원수 권율(權慄)의 추천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오르고, 명장 진린(陳璘)제독의 접반사(接伴使)로 활약하였다.
1599년 첨지중추부사를 거쳐 장례원판결사에 승진하였으나 병으로 사직하였다.
1608년 다시 기용되어 경주부윤이 되었으며, 1616년(광해군 8) 공조참의에 올랐으나 병으로 사직하였다.
이때 시정득실(時政得失)을 진술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곽재우와 동고분전한 17장(將)의 한 사람으로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에 책록되고 병조참판에 증직되었다. 영주의 산천서원(山泉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는 《죽유문집》이 있고, 편서는 《동사찬요(東史纂要)》가 있다.
臨淵齋先生文集
詩
次吳大源韻贈允師
仙遊昨自正陽迴。踏盡淸溪白石隈。明月印天光似鏡。大風掀壑響如䨓。
愁心不暇尋諸殿。病腳猶思步古臺。山映樓邊成一別。幾時靑眼得重開。
初罷仙遊下狗顚。頻迴白首意悠然。平看驛路明波外。艶見棠花落照邊。
孤鶩似霞霞似鶩。長天如海海如天。風光處處供詩眼。不覺吟哦卻聳肩。
김복일(金復一) 1541년(중종 36)∼1591년(선조 24). 안동/예천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계순(季純), 호는 남악(南嶽).
아버지는 생원 김진(金璡)이며, 병마절도사 김성일(金誠一)의 아우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1564년(명종 19) 사마시에 합격하고, 1570년(선조 3)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학유(學諭)‧전적(典籍)을 역임하고, 형조‧호조‧공조의 낭관을 지냈다.
그뒤 전라도어사로 나가 탐학한 관리들을 숙청하였으며, 1587년 울산군수에 이어 창원부사가 되어 폐단이 심한 그곳을 잘 다스렸다. 이어 경주교수(慶州敎授)가 되어 학생들을 경학으로써 인도하여 도의를 크게 일으켰으며, 성균관의 사예‧사성 및 풍기군수 등을 지냈다.
안동의 사빈서원(泗濱書院)에 제향되었다.
臨淵齋先生文集
詩
*挽金季純 復一 妻權氏
夫子西遊長別離。辛勤門戶獨維持。可憐泉下無竆恨。不見男㛰女嫁時。
김은휘(金殷輝)1541년(중종 36)∼1611년(광해군 3).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경회(景晦).
아버지는 증찬성 김호(金鎬), 어머니는 전의이씨이며, 백부 김석(金錫)에게 입양되었다.
정지운(鄭之雲)의 문인으로 여러 차례 과거에 실패하고 음보로 활인서별제‧사포서별제‧수운판관(水運判官)‧통례원인의‧감찰‧종부시주부‧호조좌랑‧공조좌랑‧형조정랑‧호조정랑‧종친부전적‧통례원상례 등을 역임하였다. 외직으로는 교하현감‧임피현령 및 청도‧단양 등 여러 고을의 군수를 거쳐 광주목사(廣州牧使)를 지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집, 체찰사 정철(鄭澈)의 종사관으로 종군하였다.
이듬해 관병과 의병의 연합군을 이끌고 수원의 독성산성(禿城山城)을 지키다가 정철이 무고를 당하자 낙향하였다.
그뒤 조정에서 호패법(號牌法)을 시행하려 하자 그 불편한 점을 상소하였고, 정여립(鄭汝立)을 여러 차례 규탄하였다. 재질이 민첩하고 지략이 뛰어났다.
만년에 수직(壽職)으로 첨지중추부사가 되었다.
臨淵齋先生文集附錄
朝天別章[金殷輝]
聖心方軫畏天憂。簡卜臣僚乃拔尤。專對應回千世慶。片言知洒一時羞。
忘身不顧嬰身疾。爲國空懷去國愁。花柳鳳城春欲晩。不堪斜日獨憑樓。
이덕홍(李德弘) 1541년(중종 36)∼1596년(선조 29). 예안 출신
본관은 영천(永川). 자는 굉중(宏仲), 호는 간재(艮齋).
습독(習讀) 이현우(李賢佑)의 손자이며, 형조참판 이현보(李賢輔)의 종손자이다.
10여세에 이황(李滉)의 문하에 들어가 오로지 학문에 열중하여 스승으로부터 자식처럼 사랑을 받았다. 모든 학문에 뛰어났으나 특히 역학에 밝았다.
1578년(선조 11) 조정에서 이름난 선비 아홉 사람을 천거할 때 제4위로 뽑혀 집경전참봉(集慶殿參奉)이 되고, 이어 종묘서직장(宗廟署直長)‧세자익위사부수(世子翊衛司副率)를 역임하였으며,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세자를 따라 성천까지 호종하였다.
이때 상소문에 구선도(龜船圖)를 첨가하여 바다에는 거북선과 육지에는 거북거(龜車)를 사용할 것을 진언하였다. 다음해 봄에 영춘현감으로 나아가 난리 중에 굶주리는 백성을 구제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臨淵齋先生文集
詩
*贈別李宏仲 德弘。兼示石誠甫。
長夏吟衰病。秋風又送行。殘燈照古舘。細酌到深更。
竆達皆由命。榮枯各異情。吹噓無寸力。誰薦石先生。
*朝天別章[艮齋李德弘]
國恥誰曾雪。緘誠幾赴京。激天今有聖。專謝幸逢卿。
遼海春初綠。燕都花又明。蒙恩旋駕日。歌舞出長城。
艮齋先生文集
詩
*呈陳謝使臨淵裴令公三益
國恥誰曾雪。緘誠幾赴京。格天今有聖。專對幸逢卿。
遼海春初綠。燕都花又明。蒙恩旋駕日。歌舞出長城。
又
萬里燕京路。風輕花柳春。觀周解劍子。專對誦詩人。임연재집 미수록
天霽游絲斂。山明瑞霧新。秋來望竣事。何必費離神。
홍혼(洪渾) 1541년(중종 36)∼1593년(선조 26).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혼원(渾元), 호는 시우당(時雨堂).
중추부도사(中樞府都事) 홍필세(洪弼世)의 아들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1566년(명종 21)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정자가 되고, 1568년(선조 1) 주서와 검열을 거쳐 전적에 올랐으며, 곧 공조좌랑이 되었다.
1573년 정언과 지평을 거쳐 1573년 집의가 되고, 이듬해 동부승지가 되었다.
1583년 대사간‧이조참의를 거쳐, 뒤에 병조와 형조의 참의를 두루 역임하였다.
또한, 판결사와 강원도관찰사 및 성주‧양주의 목사를 지냈다.
1592년 임진왜란 때는 부제학이 되어 왕의 몽진을 호종하였으나, 과로로 인해 신병을 얻었다. 송도에서 다시 이조참의가 되었으나 병이 위독해지자 직을 사임하고 고향인 예산에 돌아가서 곧 죽었다.
이조참판에 추증되고, 그의 가족은 10년간 국가로부터 진휼(賑恤)을 받도록 특전을 받았다. 유성룡(柳成龍)과 교유가 돈독하였다.
臨淵齋先生文集
詩
*次贈洪渾元 渾
臺上來遊風較喧。海波如雪白飜飜。琴歌一醉忘歸去。西日看看下寺門。
千巖競秀近天靑。半沒烟雲半露形。縹緲如逢羽衣客。風吹鶴馭入冥冥。
陽關一曲若爲情。白首臨歧笑不成。蕭寺今宵須信宿。滿山寒雨海雲平。
與君相別久。書到眼雙明。須知一字貴。不覺萬金輕。海岸濤聲壯。譙樓夜氣淸。何方逢月下。共此小爐烹。
*酬洪渾元
雲氣冥濛白似綿。海山朝暮混方圓。不禁半夜思歸夢。千里江南有瘦田。
初來荷葉正田田。關月今經幾缺圓。鈴索夜閒愁寂寂。一燈相對擁重綿。
引領山西望德風。淸秋何幸一樽同。仙區不可無君語。須趁春花馬首東。
김시회(金時晦) 1542년(중종 37)∼1581년(선조 14). 청안 출신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양오(養吾), 호는 양진재(養眞齋).
아버지는 헌납 김충갑(金忠甲)이다.
1567년(선조 즉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71년에는 예문관대교로서 홍섬(洪暹)‧이이(李珥) 등과 함께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고, 부평부사 등을 지냈다.
1580년에는 한효순(韓孝純)‧이항복(李恒福) 등과 함께 홍문록에 올라 장래가 촉망되었으나 이듬해 죽었다.
臨淵齋先生文集
詩
*送金養伯朝天 서장관으로 갔다
鴨水橫關塞。燕山擁帝京。遙憐萬里客。獨騎匹馬行。
日午庚炎酷。秋凉夜月淸。歸來重握手。應說此時情。
류성룡(柳成龍)1542년(중종 37)∼1607년(선조 40). 안동 하회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이견(而見), 호는 서애(西厓).
류공작(柳公綽)의 손자로, 황해도관찰사 류중영(柳仲郢)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진사 김광수(金光粹)의 딸이다. 퇴계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1566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권지부정자가 되고 이듬해 검열이 되었다. 1569년(선조 2)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와 감찰, 전적 등의 벼슬을 거치고 양관대제학,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을 지냈다. 도학과 문장과 덕행을 겸했다 하여 특히 영남 유생들의 추앙을 받았다. 시호는 문충(文忠), 안동의 호계서원(虎溪書院), 병산서원(屛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臨淵齋先生文集
詩
*送柳而見 成龍 赴燕京
秋月冰壺第一流。相思幾日白渾頭。如何京洛重逢地。又作關河遠別愁。
倚劒風霜懷耿耿。望雲湖海夢悠悠。煩君珍重勤王事。餘事新詩儻刮眸。
*次而見韻。題弘上人軸。
能事何年畢。垣墉復墍茨。捐吾數斗俸。助爾一炊資。
幽室依巖背。淸軒向水湄。主人同臭味。登眺豈無時。
*次而見韻 戊寅
與君連日對繩床。坐見南山晩色蒼。蜂蝶紛紛過牆去。一園春盡菜花香。
恩召臨門寵渥深。此行惟在格君心。蒼生近日愁炎熇。歸去須分殿閣陰。
*次西厓韻呈崔方伯 顒
客臥何曾穩著床。終南松月夢蒼蒼。曉來不分風霜緊。猶喜寒花送晩香。
白髮荒城歲月深。淹留忍事只灰心。薄雲似欲欺行袂。時度山腰結午陰。
*次西厓韻
昨見家書至。荒園松菊存。熊魚自有味。義利豈難言。
可笑隨流俗。都緣昧本根。遲回不能去。只是戀君恩。
書
*答柳應見 雲龍 而見 癸未
遠回自北。卽惠問字。感荷感荷。爲問近日。僉况如何。懸懸不已。三益積月之病。往來無常憫憫。京中爻象。近來如何。而見時未還朝耶。景純病滯城中甚危云。令人驚慮。士純,季純其已還耶。故山水災。古所未有。聞之憫歎而已。
西厓先生別集
詩
*豐基客舍。留別裴汝友。
丙子夏。余以獻納召還京。時汝友爲郡守。朝雨。汝友留余。旣而雨晴。乃發戲書。
臨分不厭酒杯深。脉脉都傷去住心。山日向晴官道直。莫愁天際有輕陰。
강신(姜紳) 1543년(중종 38)∼1615년(광해군 7).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면경(勉卿), 호는 동고(東皐).
생부는 우의정 강사상(姜士尙)이고 강사안(姜士安)에게 입양되었다. 생모는 임간(任幹)의 딸이며, 양모는 윤광운(尹光雲)의 딸이다.
1567년(명종 22) 수석으로 진사가 되고, 1577년(선조 10)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1589년 문사랑(問事郞)으로 정여립옥사(鄭汝立獄事)의 처리에 참여하여 평난공신(平難功臣) 3등에 책록되고 진흥군(晉興君)에 봉해졌다.
이조낭관‧홍문관직을 역임하고, 1592년 승지‧강원도관찰사가 되었으나 임진왜란을 맞아 함경도순찰사를 거쳐, 1594년 도승지, 1596년 서북면순검사(西北面巡檢使)와 대사간을 역임하였다.
정유재란 때 명나라 군사와 함께 왜군을 격퇴한 뒤에 1602년 경기도관찰사, 1609년 우참찬, 다음해 좌참찬을 역임했다.
기로소에 들어갔으며, 시호는 의간(毅簡)이다
臨淵齋先生文集
詩
*納凉亭。別姜勉卿 紳。
三月三十日。餞君兼餞春。風光如惜別。况此意中人。
권두문(權斗文) 1543년(중종 38)∼1617년(광해군 9). 영주 출신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경앙(景仰), 호는 남천(南川).
아버지는 장악원주부 권유년(權有年)이다.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나 이름이 높았다.
1572년(선조 5) 친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교서관에 임명된 뒤 검열 등을 거쳐 1586년 형조정랑‧청도군수 등을 지냈다.
1592년 창평군수가 되었으나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들 권주(權𪐴)와 함께 적에게 잡히게 되었다. 적 가운데 있으면서 적의 정세를 세밀히 탐지해 관군에게 알렸는데, 이때의 일을 기록한 것이 《호구일록(虎口日錄)》이다. 원주에 이르렀을 때 깊은 밤을 이용하여 아들과 함께 탈출하였다.
이듬해 행재소에 이르러 봉상시주부가 되었고, 환도 후 군자시첨정(軍資寺僉正)을 거쳐 예천‧진산‧영천‧금산 등의 수령이 되었다.
1602년에 사섬시정을 거쳐 간성(杆城)의 수령을 지내고 내자시정‧통례원정을 역임하였다. 책 읽기를 좋아하여 많은 서적을 수장하였으며 여러 책을 교수(校讐)하고 주석을 달았다.
저서에는 《남천집》이 있다.
臨淵齋先生文集
詩
*次權景仰 斗文 韻
春意融融滿眼前。一江風月浩無邊。留連半醉迷歸路。隔岸漁家生白烟。
*龜城鐵甘川邊。與權景仰,黃希天,若天敍別。辛巳○已下關東錄
江邊惆悵立多時。靑眼相逢摠舊知。山日欲西歸路遠。臨歧把酒且遲遲。
南川先生文集
詩○五言絶句
*西亭追別基城倅裴汝友 三益 之襄陽
追及西亭下。別杯傍野川。金剛如可對。他日共尋仙。
원사안(元士安) 1543년(중종 38) 서울 출신
본관은 원주(原州). 자는 언인(彦仁). 호는 만송(萬松)
선조(宣祖) 1년(1568) 생원시에 합격하고
선조(宣祖) 7년(1574) 문과에 급제
1586년(선조 19) 하성절사(賀聖節使) 윤자신(尹自新)과 하동지사(賀冬至使) 성수익(成壽益)이 명나라에 들어가 회동관(會同館)에서 실화하여 문죄 당하자 선조 20년 진사사(陳謝使) 임연재 선생의 서장관이 되어 함께 왕명을 받들어 중국으로 가며 선생과 많은 시를 수창하였다.
이듬해 11월 직강으로 있을 때 전해에 동지사 성수익이 방물(方物)을 잃어버린 것을 충분히 조사하여 기록하지 못하였다고 하여 사헌부로부터 탄핵을 받아 추국을 당하였다.
臨淵齋先生文集
詩
*金郊舘。次王鶴韻。示元彦仁 士安。
落日照疎林。花明春色深。悠揚片時夢。潦倒十年心。
宿鳥爭巢噪。閒雲入壑沈。題詩非好事。要欲和君吟。
*大同江樓船。次彦仁韻。
浮碧樓前駕鶴仙。風吹羅袂影蹁蹮。肩輿直向雲梯去。如入無何別有天。
*次陳簡齋韻示彦仁
我行中國界。皇城杳幾許。大化無內外。邊民得按堵。是時但多風。密雲久不雨。凶荒年復年。菜色遍卒伍。承命此遠來。豈非關天數。十年空委質。未有絲毫補。官榮祿亦厚。性拙資又魯。唯知佩聖訓。生平愼取予。與子幸同調。萬里作羇旅。山河記所歷。信美非我土。淸和四月暮。時節迫炎暑。黃流漲野來。轉覺行色苦。逢人物色猜。日夜思歸去。要爲子長遊。肯學樊須園。遇興筆頻拈。消愁杯屢擧。丈夫志四方。不作兒女語。
*高嶺次彦仁
經過山水幾重重。身似羈禽脫舊籠。風土漸殊時物異。不堪矯首海天東。
*睡起用前韻次萬松 彦仁號
詩句新成到後村。怳聞仙客嘯蘇門。初如宿病頭邊去。還覺淸瀾口角飜。
中夜旅魂迷路返。異鄕人語近城喧。西關護送多軍馬。忍見留連未下番。
*鞍山途中。次萬松韻。
衰病餘生寄馬鞍。鄕音誰復報平安。蕭蕭短髮千莖白。耿耿微衷一寸丹。
河水北來沈翠壁。雲山東望鬱蒼巒。客愁無處堪消遣。推枕寒床夜已殘。
*用前韻遣憫
東還何日便懸鞍。寄傲南窻審易安。歲月閒消一樽綠。容顔更駐九還丹。
蒼苔白石門前水。翠栢靑松屋後巒。塵土十年勞夢想。可憐憔悴此生殘。
行裝草草一吟鞍。萬里驅馳席未安。半世常揮憂國淚。十年空佩壽民丹。
雲成關路桑麻雨。秋入鄕山錦繡巒。南郭東城須作會。白頭相對菊花殘。
*次萬松偶吟韻
人世生涯詎有涯。一年行李困塵沙。吟邊不覺詩頻就。愁裏唯知酒可賖。
譯老催裝朝日早。華兒促馬夕陽斜。空廻白首思鄕國。還被雲山望眼遮。
*疊前韻自敍
山水亭臨洛水涯。蒼巖白石滿汀沙。豹身欲向南山隱。鵬翮那知北海賖。
虛閣秋凉琴韻暢。荒臺風亂釣絲斜。淸宵步月思千里。誰遣浮雲作祟遮。
*牛家庄途中。次萬松。
遼河地近白龍堆。漠漠黃雲晝不開。戍卒幾驚烽火報。將軍頻送羽書來。
城池未見金湯固。戎馬那堪日夜催。安得揮戈淸北塞。單于境上獨登臺。
*高平途中。次前韻。
莫道瞿塘灔澦堆。平原成海路難開。揚塵此日迤西去。流火何時自北來。
萬里嚴程身已老。百年歸計夢先催。故鄕無處登高望。欲上閭山更築臺。
*盤山雨中。次萬松。
坐滯終朝雨。還停半日行。迷人雲氣暗。求友鳥聲嚶。
斷斷無他技。勤勤有素情。衣沾何足惜。長路任泥生。
*廣寧滯雨。次萬松。
縹緲閭山翠黛橫。逶迤山下有孤城。凌雲樓觀臨胡境。撲地閭閻似帝京。
民物幾時遭殺掠。兵戈無日見昇平。靑燈一夜愁何似。春草茫茫雨裏生。
*關王廟。次萬松。
際會風雲草昧中。奇謀深計用無竆。如何倡義期殲賊。畢竟懷私不執弓。
可忍黎元方鼎沸。那堪黃屋久塵蒙。將軍一死關時運。亦是堂堂百代雄。
*十三山途中。次前韻。
人生役役元無定。世事紛紛豈有竆。潛伏須知魚在沼。高飛方覺鳥傷弓。
劉伶有祝吾詒婦。寗戚傳經孰訓蒙。歸臥北牕拋斗粟。淵明眞箇是豪雄。
*次萬松詠千葉石榴韻
重英已覺東方少。嫰色空知上苑多。卻喜尋芳猶未晩。客牕終日對仙葩。
*詠鄰家槿花。次萬松韻。
誰家好事築花階。玉葉瓊枝向外低。不許人看眞可笑。明朝風急落荒蹊。鄰花不許看
造化無心花自開。花將落去又誰催。不須枉比人生死。且對殘花進一杯。元有生死往來何異是之句。
*過還鄕河。次萬松。
問名慰我思悠悠。如見朋親宛在洲。一笑停驂問河伯。不知何日大刀頭。
*途中逢雨。次萬松。
征馬初逢雨。躊躇惜障泥。疎疎灑阡陌。密密暗山溪。
野曠晴光動。雲沈暮色迷。留人惟有燕。簷外盡情啼。
*十八里鋪。次萬松。
處處逢人物色猜。故山東望首空回。行行午到孤城外。烟雨濛濛鬱未開。
*過萬柳庄。次萬松。
垂柳陰陰翠滴沙。烟霞深鎖巧藏遮。嚴程日暮逢寒雨。虛負風流第一家。
*永平城外。次萬松。
永平城外鑿深壕。壕裏荷花幾丈高。一曲采蓮聞咫尺。相思何必更容舠。
*大灤河。次萬松。
小灤河接大灤河。路入長堤柳影斜。日下長安行漸近。天邊故國望還賖。
繁華文物逢千載。周匝城池擁萬家。客裏光陰如逝水。羲和爲我莫催車。
楊柳靑靑芳草萋。卻疑身是過隋堤。興亡不改夷齊國。勝敗難期魯蜀雞。
雨腳乍來山日暗。䨓聲微動海雲迷。採薇亭上移時坐。絺絡風吹頓覺凄。
*次萬松
荏苒經三月。辛勤指九天。靑騾頻見蹶。白日只堪眠。
才盡慚詩聖。愁多任酒顚。時看石榴樹。花發正如燃。
*次萬松
城臨三里外。路連一關中。山遠看如畫。河淸望若空。
塵迷玄帝廟。雲鎖梵王宮。去去衝炎熱。皇都杳幾重。
*出河大門。次萬松。
身留玉河舘。夢斷漢江頭。卻向都門出。還投古驛休。
初疑騎白鶴。更訝駕靑牛。只恨前途阻。黃流漲野疇。
*宿通州舘。次萬松。
故國天涯去路迢。秋風客意正憀憀。勳名只可期伊傅。事業何須數管蕭。
*次萬松詠猿
嘯月吟風自在身。可憐憔悴久依人。常呼舊侶聲何及。長抱孤雛志未伸。
燕北雪霜那記日。荊南烟雨幾經春。年來我亦羇栖者。不待悲啼淚滿巾。
*次萬松詠鸚鵡
乾坤何納納。形影獨依依。偶爾忘虞網。終焉蹈禍機。
呑聲憐碧觜。鎩羽惜靑衣。西路空迢遞。飜然幾日歸。
*次萬松夢見宦海風波有感韻
風波飜覆異深淵。性命存亡只在天。何似老來成一夢。投簪歸去好山川。
虛舟身世泛澄淵。早晩風波任彼天。何事夢中經此險。故山秋月滿前川。
*疊前韻以嘲
萬事無心淡玉淵。須知人定亦勝天。若敎盡節方休退。白首何時臥一川。
*祭文[內資寺僉正元士安]
嗚呼。上年之春。余忝朝京。公於此時。爲使者行。相知雖晩。萬里同征。公視如弟。我事如兄。我有疾病。公則强健。道里云遠。保攝當愼。旣謹眠食。且戒酒色。我受公言。相規共勅。箕城日暖。樓閣崢嶸。鴨水風和。舟楫縱橫。人亡孤竹。遺像儼然。鶴歸華表。詩句流傳。尋奇訪古。遇物起興。公倡我和。我發公應。長途往來。幾費吟詠。玉河門掩。星月耿耿。盤山水漲。車馬滑滑。行路艱難。中心鬱悒。憂愁攻中。風土傷人。公於半道。遽作吟呻。及還于朝。厥疾猶纏。海西之行。咸恐難痊。公念靡盬。不憚獨賢。黜陟之外。又畀荒政。黽勉驅馳。舊疾漸病。陳章乞歸。上眷逾固。及至再奏。病已沈痼。綸音纔下。凶訃遽到。凡在朝紳。孰不悲悼。嗚呼哀哉。皇賜蟒衣。公盡其職。國覩會典。公有其力。功多報輕。咸待後日。長途方騁。大限俄竆。天耶命耶。胡至於此。嗚呼哀哉。今我之來。公柩適至。庶幾奔哭。以申鄙誠。嚴程有限。賤疾又縈。有志莫遂。中心如割。玆將悲戚。遙薦菲薄。英靈如在。庶幾歆格。
황섬(黃暹) 1544년(중종 39)∼1616년(광해군 8). 영주
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경명(景明), 호는 식암(息庵)‧돈암(遯庵).
찬성 황사우(黃士祐)의 손자로, 동지돈령부사(同知敦寧府事) 황응규(黃應奎)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의빈도사(儀賓都事) 이수려(李壽旅)의 딸이다. 정탁(鄭琢)의 문인이다.
1564년(명종 19) 성균관유생이 되고, 1570년(선조 3)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 한성부참군‧해운판관‧황해도사‧호조좌랑 등을 거쳐 1577년 서천군수가 되었다.
이때 선정을 베풀어 송덕비가 세워졌다. 정언을 거쳐, 사간‧집의‧도승지 등을 역임하고 성주목사가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에는 병조참지로서 대가(大駕)를 호종(扈從)하고, 평안도모운사(平安道募運使)에 선임되어 군량 수운에 공을 세웠다.
이듬해 호조참의로서 대가를 따라 해주에 이르러 모군(募軍)과 식량공급 등 당면 국방정책을 건의하였다.
1594년 안동부사가 되고, 뒤에 다시 이조와 호조의 참의, 도승지 등을 역임하였으며, 호조‧이조‧예조의 참판을 거쳐, 대사헌‧지제교 등을 지냈다. 광해군 즉위 후에는 퇴관한거(退官閑居)하면서 후진교육으로 여생을 보냈다.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풍기 우곡서원(愚谷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식암집》이 있다. 시호는 정익(貞翼)이다.
臨淵齋先生文集
詩
*次李公著 誠中 韻。別黃景明 暹。
西林千里杳歸程。花柳三春獨送行。憑報鵝州坡谷子。幾時重對說平生。
鵬摶萬里有前程。湖海相逢又送行。芳草萋萋春欲暮。不禁離思滿襟生。
朝天別章[息菴黃暹]
早托龍門喜未闌。白頭無恙舊心肝。吾州錢一知明府。國子鱣三表長官。
壯志鵬摶圖萬里。孤蹤匏繫老三韓。螭庭謝盡陪臣罪。更達君王席不安。
식암집
早托龍門喜未䦨。白頭無恙舊心肝。吾州錢一知[月日] 府。國子鱣三表長官。
壯志鵬摶圖萬里。孤蹤匏繫老三韓。螭庭謝盡陪臣罪。更達君王席不安。
按節行期卜暮春。銀槎幾日繫天津。病餘又作江南覲。歧路離筵少一人。 미수록
정인관(鄭仁寬) 나주 출신
본관은 광주(光州). 자는 백유(伯裕). 아버지는 정표(鄭彪)
중종(中宗) 38년(1543) 진사시에 합격하고
명종(明宗) 7년(1552) 문과에 급제
성균관전적. 부사를 지냈다.
臨淵齋先生文集
詩
次鄭季裕韻。兼柬伯裕 仁寬。
一犂春雨細無聲。梅閣風來曉氣淸。多病故人傷遠別。自憐雙鬢已星星。
元方風致久聞聲。江海襟靈徹底淸。難弟如君那易得。不堪臨別喚奴星。
驪駒不耐唱離聲。淚落東風鐵水淸。此後無因問消息。夜來空望少微星。
심희수(沈喜壽) 1548년(명종 3)∼1622년(광해군 14).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백구(伯懼), 호는 일송(一松) 혹은 수뢰루인(水雷累人).
정자(正字) 심건(沈鍵)의 아들이며, 인순왕후(仁順王后)의 종제이고, 이연경(李延慶)의 외손자이다.
노수신(盧守愼)의 문인으로, 1570년(선조 3)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갔다. 이해 이황(李滉)이 죽자 성균관을 대표하여 장례에 참여하였고, 1572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에 보임되고 1583년 호당(湖堂)에 뽑혀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1589년 헌납으로 있을 때 정여립(鄭汝立)의 옥사가 확대되는 것을 막으려다 조정과 뜻이 맞지 않아 한때 사임하였다가 이듬해 부응교가 되었다.
1591년에는 응교로서 선위사(宣慰使)가 되어 동래에서 일본사신을 맞았으며, 이어 간관이 되어 여러 차례 직언을 하다가 선조의 비위에 거슬려 사성으로 전직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는 의주로 선조를 호종하여 도승지로 승진하고, 대사헌이 되었다. 때마침 명나라 조사(詔使)가 오자 다시 도승지가 되어 응접하니 그가 중국어를 잘 하였기 때문이다.
이해 겨울 형조판서를 거쳐 호조판서가 되어 명나라 경략(經略) 송응창(宋應昌)의 접반사(接伴使)가 되어 오래도록 서도(西道)에 있었으며, 송응창을 설득하여 관서의 기민구제(飢民救濟)에 진력하였다.
1599년 예문관제학‧예조판서를 거쳐 이조판서가 되고, 홍문관‧예문관의 대제학을 겸하고서 안으로는 사명(辭命)을 장악하고 밖으로는 접빈(接賓)에 힘썼다. 좌찬성‧우찬성 등을 거쳐 우의정에 올랐으며, 청백리(淸白吏)에 뽑혔다.
1606년 성균관에서 익명의 투서가 나왔는데, 선조가 이를 색출하기 위하여 유생들의 심문을 고집하자 그는 불가함을 말하여 뜻을 관철시켰으며, 그해 가을에 좌의정에 올랐다.
이듬해 선조의 생부인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을 추숭하려 하자 예전(禮典)에 어긋남을 강력하게 표하여 그 논의를 중지시켰다.
1607년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다시 좌의정으로 입상(入相)하였다.
그러나 권신 이이첨(李爾瞻) 등이 국정을 장악하여 임해군(臨海君)을 극형에 처하려 하자 이의 부당함을 주장하였다.
1613년(광해군 5) 계축옥사가 일어나 부원군 김제남(金悌男)이 죽고 이이첨 등이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옥사의 주모자로 몰아 해치려 하자 이항복(李恒福)‧이덕형(李德馨) 등과 강력하게 그 부당성을 논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듬해에 영창대군의 처형은 인륜에 어긋나며, 그 가해자인 강화부사 정항(鄭沆)을 참수하라고 주장하다가 광해군의 노여움을 산 정온(鄭蘊)을 적극 변호하여 귀양에 그치게 하였다.
1615년 영돈령부사(領敦寧府事)로 있을 때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 허균(許筠)과 중국 야사(野史)에 나타난 종계문제(宗系問題)로 다투다가 궐외로 축출되고 이듬해 폐모론이 다시 일자 둔지산(屯之山)에 은거하여 《주역》을 읽고 시를 읊으며 자신의 지조를 지켰다.
1620년 판중추부사에 임명되었으나 끝내 나가지 않았다. 문장에 능하고 글씨를 잘 썼다.
저서로는 《일송집》이 있다. 상주의 봉암사(鳳巖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臨淵齋先生文集
詩
*烈山縣。次沈一松 喜壽 韻。
紅白花殘柳影低。淸溪碧草小橋西。山鳥亦知春事盡。隔林終日盡情啼。
유근(柳根) 1549년(명종 4)∼1627년(인조 5).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회부(晦夫), 호는 서경(西坰).
유영문(柳營門)의 아들이며, 진사 유광문(柳光門)에게 입양되었다. 황정욱(黃廷彧)의 문인이다. 사마시를 거쳐 1572년(선조 5) 별시문과에 장원하고, 1574년에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으며, 1587년 이조정랑으로서 문신정시(文臣庭試)에 다시 장원하였다. 이해 일본의 중 겐소(玄蘇)가 사신으로 오자, 문장이 뛰어났으므로 선위사(宣慰使)에 특임되어 그를 맞았다.
1591년 좌승지로서 건저문제(建儲問題)로 하여 정철(鄭澈)이 화를 당할 때 그 일파로 몰려 탄핵을 받았으나, 문재(文才)를 아끼는 선조의 두둔으로 화를 면하였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주에 임금을 호종하면서 예조참의‧좌승지를 거쳐, 예조참판에 특진되었다.
1593년 도승지로 경성안무사(京城安撫使)가 되어 민심을 수습, 이어 한성부판윤에 올라 사은부사로 명나라에 다녀와 경기도관찰사가 되고, 1597년 운향검찰사(運餉檢察使)로 명나라에서 들어오는 군량미의 수송을 담당하였다. 이밖에도 임진왜란으로 인한 명나라와의 관계에서 많은 일을 하였다.
1601년 예조판서가 되어 동지사로 다시 명나라에 다녀왔고, 1603년에는 충청도관찰사로 있으면서 온조묘(溫祚廟)를 다시 세울 것을 건의하였다.
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 3등에 녹훈되고 진원부원군(晉原府院君)에 봉해졌다. 대제학에 이어 좌찬성이 되었다. 광해군 때 대북파가 국경을 농단하고 1613년(광해군 5) 폐모론까지 일어나자, 괴산으로 물러나고 정청(庭請)에 참여하지 않아 관작이 삭탈되었다가 1619년 복관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다시 기용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627년 정묘호란 때 강화에 왕을 호종하던 중 통진에서 죽었다. 괴산의 화암서원(花巖書院)에 제향되었다.
문집으로 《서경집》을 남겼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臨淵齋先生文集附錄
朝天別章[西坰柳根]
吾邦邈在海東邊。二百年來上畏天。使事有愆宜自列。人才不數簡時賢。
遙知客路淸和節。獨過灤河大小川。努力功名及身健。會看霄漢著新鞭。
홍이상(洪履祥) 1549년(명종 4)∼1615년(광해군 7).
본관은 풍산(豊山). 초명은 인상(麟祥). 자는 군서(君瑞)‧원례(元禮), 호는 모당(慕堂).
부사직 홍수(洪修)의 아들이다.
1573년(선조 6) 사마시를 거쳐 1579년 식년문과에 갑과로 장원급제하였다.
그뒤 예조와 호조의 좌랑을 거쳐, 정언‧수찬‧지제교‧병조정랑 등을 두루 지낸 뒤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뒤이어 이조정랑을 거쳐, 호당(湖堂)에 있을 때 왕이 유신(儒臣)들을 선발하여 경서(經書)를 교정(校正)할 때는 꼭 참여하였다.
그뒤 집의‧응교를 역임하고, 태복시정(太僕寺正)이 되었다가 사간과 사인 등을 거쳐, 황해도안무사(黃海道安撫使)가 되었다.
1591년 직제학을 거쳐 동부승지가 되고, 다시 이조참의가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는 예조참의로 옮겨 왕을 호가(扈駕)하여 서행(西行)하였고, 곧 부제학이 되었다가 성천에 도착하여 병조참의에 전임하였다.
1593년 정주에서 대사간에 임명되었고, 이듬해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다시 좌승지가 되었다가 곧 경상도관찰사가 되었다. 비변사와 긴밀하게 연락하여 일본의 장군 고니시(小西行長)와 가토(加藤淸正) 사이의 이간을 계획, 추진하기도 하였다.
1596년 형조참판을 거쳐 대사성이 되었으나, 영남의 유생 문경호(文景虎) 등이 성혼(成渾)을 배척하는 상소를 반박하고 성혼을 두둔하다가 안동부사로 좌천되었다.
1607년 청주목사가 되고, 1609년(광해군 1) 대사헌이 되었다가 1612년에 이이첨(李爾瞻)‧정인홍(鄭仁弘)의 일파에 몰려나서 개성유후사유후(開城留後司留後)로 좌천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저서로는 《모당유고》가 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臨淵齋先生文集附錄
朝天別章[慕堂洪履祥]
日邊槎影指長安。悵望雲泥不可攀。衣帶御香金殿曉。路經遼海暮春寒。
觀周始愜男兒願。惜別休驚壯士顔。賸愧臨分無贈語。應須努力更加餐。
陳謝之行揀最精。斗南淸譽動時英。皋比上座新師範。綠野開堂舊典刑。
金樹晨 缺 仙仗肅。玉河秋水旅魂驚。靑綾猥伴同時直。堪笑如今尙竊榮。
先生姓裴而頃以祭酒銜命。故二三及之。
유영경(柳永慶) 1550년(명종 5)∼1608년(광해군 즉위).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선여(善餘), 호는 춘호(春湖).
참봉 유의(柳儀)의 아들이며, 예조참판 유영길(柳永吉)의 동생이다.
1572년(선조 5) 춘당대문과(春塘臺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여 정언 등 청요직(淸要職)을 역임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사간으로서 초유어사(招諭御史)가 되어 많은 의병을 모집하는 활약을 보였고, 1593년에 황해도순찰사가 되어 해주에서 왜적을 맞아 60여급을 베는 공을 세웠다. 그 공로로 행재소(行在所)에서 호조참의에 올랐다.
1594년에 황해도관찰사가 되었고, 1597년 정유재란 때에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로서 가족을 먼저 피란시켰다는 혐의로 파직되었다가 이듬해 병조참판에 서용되었다. 당론이 일어날 때에는 유성룡(柳成龍)과 함께 동인에 속하여 있었는데, 동인이 다시 남인‧북인으로 갈라지자 이발(李潑)과 함께 북인에 가담하였다.
1599년 대사헌으로 있을 때에 남이공(南以恭)‧김신국(金藎國) 등이 같은 북인인 홍여순(洪汝諄)을 탄핵하면서 대북‧소북으로 갈리자, 그는 유희분(柳希奮) 등과 함께 남이공의 당이 되어 영수가 되었다.
이때 그는 대북파에 밀려 파직되었다가 1602년 이조판서에 이어 우의정에 올랐는데, 대북파의 기자헌(奇自獻)‧정인홍(鄭仁弘) 등과 심한 마찰을 빚었고 뒤이어 세자문제로 더욱 분란을 일으켰다.
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책록되고, 전양부원군(全陽府院君)에 봉하여진 뒤 선조에게 존호를 올리고 윤승훈(尹承勳)의 뒤를 이어 영의정에 올랐다.
그뒤 같은 소북파인 남이공과 불화하여 그는 탁소북(濁小北)으로 분파하였으며, 선조 말년에 왕의 뜻을 따라 영창대군(永昌大君)을 광해군에 대신하여 옹립하려 하였다.
1608년 선조는 죽기 전에 영창대군을 부탁하였는데, 그는 그 유교칠신(遺敎七臣)의 한 사람이었다. 광해군이 즉위하자 그는 대북 이이첨(李爾瞻)‧정인홍의 탄핵을 받고 경흥에 유배되었다가 사사(賜死)되었다. 유생의 명단인 청금록(靑衿錄)에서 그의 이름이 삭제되기도 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관작이 복구되었다.
臨淵齋先生文集
詩
*示柳善餘 永慶
野水春猶早。層冰半已消。十年愁遠別。邂逅永今朝。
暮境悲雙鬢。逢春雪未消。相看莫辭醉。遠別在明朝。
송상현(宋象賢) 1551년(명종 6)∼1592년(선조 25).
본관은 여산(礪山). 자는 덕구(德求), 호는 천곡(泉谷).
현감 송복흥(宋復興)의 아들이다.
20세에 진사가 되었으며 1576년(선조 9)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정자에 분관되고, 저작(著作)‧박사(博士)에 승임(陞任)되었다. 이후 승정원주서(承政院注書)겸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에 임명되었다가 경성판관으로 나갔다.
1583년 지평으로 들어와 예조‧호조‧공조의 정랑이 되었다.
이듬해부터 두 차례에 걸쳐 종계변무사(宗系辨誣使)의 질정관(質正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다시 지평이 되었다가 은계도찰방(銀溪道察訪)으로 좌천되었다.
그뒤 다시 지평을 지내고 배천군수로 나갔다가 3년 만에 전직되어 경력(經歷)‧집의‧사간과 사재감(司宰監)‧군자감(軍資監)의 정(正)이 되었다.
1591년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오르고 동래부사가 되었다. 왜침의 소문이 들려오는 가운데 방비를 굳게 하고 선정을 베풀었다.
이듬해 4월 13일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14일 부산진성을 침범한 왜군이 동래성으로 밀어닥쳤을 때 적군이 남문 밖에 목패(木牌)를 세우고는 “싸우고 싶으면 싸우고, 싸우고 싶지 않으면 길을 빌려라(戰則戰矣 不戰則假道).” 하자 이때 부사인 그는 “싸워 죽기는 쉬우나 길을 빌리기는 어렵다(戰死易 假道難).”고 목패에 글을 써서 항전할 뜻을 천명하였다.
그뒤 적군은 성을 포위하기 시작하고 15일에 전투가 전개되었다. 그는 군사를 이끌고 항전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성이 함락당하자 조복(朝服)을 덮어 입고 단좌(端坐)한 채 순사하였다. 왜장 히라요시(平義智) 등이 그의 충렬을 기려 동문 밖에 장사지내주었다 한다.
후에 이조판서‧좌찬성에 추증되었다. 부산 충렬사‧개성 숭절사(崇節祠)‧청주 신항서원(莘巷書院)‧고부 정충사(旌忠祠)‧청원 충렬묘(忠烈廟)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泉谷先生集
挽裵監司 三益 임연재집 미수록
太平觀察名聲久。病守行期負弩軀。朱紱胡爲仍素翣。享衢遽爾變窮途。
向來物產元稀有。此後人才不得踰。怊悵白頭浮海夢。淸秋遙落奈城蕪。
荊州邸裏杯曾凸。孺子亭前語末終。半世離愁勞肺久。百年人事轉頭空。
匣昏故物餘龍釰。絃斷新聲擲鳳桐。營幕夜寒棠樹落。天南歸路月如弓。
고종후(高從厚)1554년(명종 9)∼1593년(선조 26). 광주 출신
본관은 장택(長澤). 자는 도충(道冲), 호는 준봉(隼峰).
의병장 고경명(高敬命)의 아들이다.
1570년(선조 3) 진사가 되고 1577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교서관정자가 되었다. 이어서 전적‧감찰‧예조좌랑을 거쳐 1588년 임피현령(臨陂縣令)이 되었으나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1591년 지제교(知製敎)로 기용되었으나 다시 탄핵을 받고 향리 광주로 내려갔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라도관찰사 이광(李洸)은 전라도 관군을 인솔하고 서울로 향하다가 공주에 이르렀을 때 왕이 북으로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군대를 해산하였는데, 그는 아버지 고경명의 뜻에 따라 아우 고인후(高因厚)와 함께 각지에 흩어진 군졸들을 설득하여 다시 모아 수원에 있는 광주목사 정윤우(丁允佑)에게 인계하고, 돌아오는 길에 태인에서 고경명의 의병군과 합류하였다.
다시 아버지의 명에 따라 금구‧김제‧임피 등지에 격문을 돌려 의병을 모집하고 군량을 모아 여산의 본진에 돌아왔다.
이때 왜적이 황간‧영동에 머무르며 장차 금산을 공략하고 전주를 경유, 호남지방을 유린하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뒤, 금산으로 가서 방어사 곽영(郭嶸)과 더불어 왜적의 침략을 막기로 하였다.
그러나 왜적이 침입하자 싸우기도 전에 관군은 붕괴되고 의병군마저 흩어져 아버지와 아우가 전사하자 그 시체를 거두어 장례를 치렀다.
이듬해 400여명의 의병을 규합, 복수의병군(復讐義兵軍)을 조직하여 하동에 이르러 왜적의 형세를 살폈다.
이때 왜적은 대군으로 진주를 공략한 뒤 호남 지방으로 침입하려 하므로 진주를 지키기 위하여 휘하 의병을 이끌고 진주성으로 들어가 김해부사 이종인(李宗仁), 창의사 김천일(金千鎰), 충청병사 황진(黃進), 경상병사 최경회(崔慶會) 등과 진주성을 사수하기로 하였다.
진주성이 적에게 포위되어 격전이 계속된 지 9일째인 6월 29일 목사 서예원(徐禮元)이 적의 대공세 앞에 겁을 먹고 도망치자 진중은 혼란을 일으켜 무너지게 되었다. 왜적이 성안으로 물밀듯이 몰려와 전세가 불리함을 느낀 그는 북향하여 재배한 뒤 김천일‧최경회와 함께 남강에 투신, 순절하였는데, 이들 세 사람을 ‘삼장사(三壯士)’라고 불렀다.
도승지에 이어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광주의 포충사(褒忠祠)와 진주의 충민사(忠愍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효열(孝烈)이다.
臨淵齋先生文集附錄
朝天別章[準峯高從厚]
玉帛西馳禮益虔。漢庭專對正須賢。早知妙選傾朝望。莫把閒愁惱別筵。
花雨霏微浿江路。柳絲低拂薊門烟。回天筆力神應助。更待恩綸下日邊。
한응인(韓應寅) 1554년(명종 9)∼1614년(광해군 6).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춘경(春卿), 호는 백졸재(百拙齋)‧유촌(柳村).
부사직(副司直) 한경남(韓敬男)의 아들이다.
1576년(선조 9) 사마시를 거쳐, 이듬해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에 뽑혔고, 곧이어 승정원주서‧예조좌랑‧병조좌랑‧지평‧정언을 지내고, 1584년 종계변무주청사(宗系辨誣奏請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성균관직강을 거쳐, 1588년 선천군수로 부임하여 이듬해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을 적발, 그 공으로 호조참의가 되고, 이어 도승지가 되었다.
1590년 종계변무의 공으로 광국공신(光國功臣) 2등에 오르고, 정여립 모반을 고변한 공으로 평난공신(平難功臣) 1등에 책록되었다.
1591년 예조판서에 승진하여 진주사(陳奏使)로 다시 명나라에 들어가 일본의 도요토미(豊臣秀吉)가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하여 조선에 길을 빌려 달라는 사실을 고하여 명나라의 조선에 대한 의심을 풀게 하였다.
이듬해 돌아오는 길에 의주에서 왜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개성에 이르자 피난길에 오른 선조를 만나 왕을 따라 다시 평양으로 갔다가, 제도도순찰사(諸道都巡察使)로 임진강 방어에 임하였다.
그러나 가토(加藤淸正)의 유인작전에 속아 전군이 붕괴하자, 왕을 뒤따라 의주의 행재소(行在所)로 달려가 공조판서에 임명되었다. 요동(遼東)에 건너가 원병(援兵)의 급속한 출병을 요구하였고, 12월 이여송(李如松)이 원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자 한어(漢語)에 능한 그는 접반관(接伴官)으로 이여송을 맞이하였다.
이듬해 청평군(淸平君)에 봉해지고, 서울이 수복되자 질서회복에 힘썼으며, 호조판서로서 군량미 보급에 진력하였다.
1595년 주청사(奏請使)로 명나라에 다녀오고, 다음해 평안감사로서 당시 평안도에 있던 많은 명나라 장병과의 화합을 도모하였다.
1599년 사은사(謝恩使)로 다시 명나라에 정유재란 때의 원군을 사례하고 돌아와서 우찬성에 올랐다.
1600년 이조판서, 다음해 호조판서‧병조판서를 거쳐, 1605년 부원군(府院君)에 진봉되고, 1607년 우의정에 올랐다. 시호는 충정(忠靖)이다. 초서(草書)에 뛰어났으며, 저서로는 《백졸재유고》가 있다.
臨淵齋先生文集
詩
*次猪足東軒韻示韓春卿 應寅
千里鄕關隔。那堪苦憶家。留連一杯酒。零落數枝花。
囊裏黃金少。頭邊白髮多。看書妨病眼。字字亂橫斜。
*示春卿
松檜參天幾十圍。縈回石磴入雲微。蔽空紅葉凝淸露。風擺時時滴濕衣。
數日尋眞泉石間。貪看五色白雲顔。自知觀海難爲水。纔出寒溪無好山。
一水玲瓏秋雨後。千林蕭瑟晩風時。無竆淸債供詩眼。忘卻山蹊步步危。
*次春卿韻
隔嶺相思顔欲凋。秋風昨夜又蕭蕭。寥亮笛聲聞漸近。玉人應在玉峯腰。
羣峯削立玉爲巖。天外森羅氣象巉。扶杖徐行不知倦。天風披拂動凉衫。
*寄春卿
杜老夔州峽。吟詩句句淸。煩君因驛使。時寄峴山城。
*奉別韓春卿
妙齡聲譽重南金。出入淸班睿眷深。雲翮摶風飛不已。霜蹄騰路去誰禁。
驚迴幾夜思親夢。輸盡平生報國心。今日離亭莫惆悵。聖明天子有徽音。
*次韓春卿韻
衰鬢渾如雪。逢春猶未消。思歸歸未得。風雨意寥寥。
江南春尙早。空作未歸人。白頭相識少。休恠訪君頻。
이정립(李廷立) 1556년(명종 11)∼1595년(선조 28).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자정(子政), 호는 계은(溪隱).
아버지는 판결사 이시무(李時茂)이며, 어머니는 종실(宗室) 의원군(義原君) 이억(李億)의 딸이다. 이이(李珥)‧성혼(成渾)의 문인이다.
1576년 사마시에 합격, 1580년에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들어갔다.
1582년에 수찬으로 있을 때, 대제학 이이에게 추천되어 이덕형(李德馨)‧이항복(李恒福)과 함께 경연(經筵)에서 《통감강목(通鑑綱目)》을 시강하여 삼학사(三學士)의 한 사람으로 칭송을 받았다. 그해 사관(史官)이 되고, 예조좌랑‧정언이 되었다.
이듬해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이조좌랑으로 있을 때 어사가 되어 호남에 내려가 기근에 허덕이는 백성을 진구하였다.
그뒤 형조참의‧좌승지 등을 거쳐, 1589년(선조 22)에 기축옥사를 다스린 공으로 평난공신(平難功臣)이 되었다. 장령‧집의‧응교‧직제학을 거쳐, 1592년 임진왜란 때에는 예조참의로 왕을 호종하였다. 왕의 행차가 금교역(金郊驛)에 이르렀을 때에 그가 선조에게, 종묘와 사직의 위판(位版)이 지금 개성에 남아 있다고 아뢰니 선조가 크게 놀라면서 즉시 모셔오라 하였다.
그는 급히 개성으로 달려가, 사람들이 모두 “이미 적장이 와 있으니 죽음이 있을 뿐이다.”고 말렸으나, 죽음을 무릅쓰고 성에 들어가 종묘사직의 위판을 평양으로 모셔갔다. 이어 병조참판이 되었다가 1593년에 부친상을 당하여 한때 관직을 떠났다.
1595년에 한성부좌윤‧황해도관찰사를 역임, 광림군(廣林君)에 봉하여졌고, 1596년에 대사성이 되었다.
뒤에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저서로는 《계은집》이 있다. 시호는 문희(文僖)이다.
溪隱先生遺稿
詩○七言四韻
*入直玉堂上番裵校理三益之子中司馬。詩以寄之。
曾折蓮花一朶新。至今孤夢澤宮春。雖慙雁㙮稱先輩。合向人間作賀賓。金玉堂深傳喜語。雲霄路逈見通津。傳聲欲托蘇程契。聞其子與我同甲 東閣無因接後塵。
임몽정(任蒙正)1559년(명종 14)∼1602년(선조 35).
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직초(直初), 호는 운호(雲湖).
황주목사 임윤(任尹)의 손자로, 이조판서 임국로(任國老)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한원(韓垣)의 딸이다. 사마시를 거쳐 1584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듬해 예문관검열이 되고 1591년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이듬해 수찬이 되었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나매 왕을 호종하지 않았다.
그뒤 병조정랑이 되었으나, 의주로 피난하는 선조를 호종하지 않은 죄로 한때 파직되었다.
1597년 부교리가 되어 선유어사(宣諭御使)로 한산도에 다녀왔다.
이듬해 동부승지‧대사간‧예조참의 등을 역임하였다.
1599년 대사간이 되었을 때 김신국(金藎國)‧남이공(南以恭) 등이 권력을 전단하자 임취정(任就正)‧민몽룡(閔夢龍)과 함께 이들을 탄핵하여 관직을 삭탈하였다.
1600년 부제학‧대사성이 되었으며, 다음해 병으로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여 죽었다.
어려서부터 시를 잘 써서 명성을 떨쳤다.
臨淵齋先生文集附錄
*朝天別章[雲湖任蒙正]
紫微深處玉堂仙。道重詩書德業全。皋席一年臨璧水。靈槎萬里向雲天。
行過浿渡初殘雪。路入楡關且蛻蟬。鶴去遼山空夜月。人亡燕市但寒烟。
黃金臺想尊賢日。孤竹城知讓國年。觀樂旣追吳季札。問津應學漢張騫。
君親百代羞方雪。侯伯千秋禮莫愆。北斗舊趨郞席下。西橋今負祖筵邊。
春生京國頻相憶。病臥山城獨自憐。男子平生壯遊志。任敎歸夢繞幽燕。
장운익(張雲翼)1561년(명종 16)∼1599년(선조 32). 서울 출신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만리(萬里), 호는 서촌(西村).
장일(張逸)의 아들이며, 우의정 장유(張維)의 아버지이다.
1579년(선조 12) 사마시에 합격하고, 1582년 식년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전적‧공조좌랑을 거쳐 고산찰방으로 좌천되었다가 예조정랑으로 돌아왔다.
선천군수로 있을 때에는 평안도 목민관으로는 으뜸가는 치적을 남겼다. 장령을 거쳐, 1591년 양양부사로 재직중 정철(鄭澈)의 일당이라 하여 온성으로 귀양갔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귀양에서 풀려나 망혜령(芒鞋嶺)을 넘어 왕을 호종하였다.
특히, 중국어에 능통하여 왕의 총애를 받았고, 이듬해 집의로서 주청사(奏請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뒤 도승지‧해주목사‧형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이조판서로서 접반사(接伴使)가 되어 명나라 제독 마귀(麻貴)를 영접하고, 그와 함께 울산싸움에 참전하였다. 후에 형조판서가 되었다. 시호는 정민(貞敏)이다.
臨淵齋先生文集
詩
*宣川次贈張萬里 雲翼
萬里燕山路。行行幾歷過。唯堪戀京國。那得念鄕家。
已覺關河遠。還驚日月多。逢君開一笑。聊復賞年華。
정희번(鄭姬藩)
본관은 온양(溫陽). 자는 자한(子翰), 호는 고송(孤松). 대사헌 정유(鄭裕)의 아들이다.
1570년(선조 3)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585년 충주목사가 되었는데 선정을 베풀어 표리(表裏)를 하사받았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장령으로서 왕을 의주까지 호종하였다. 그해 10월 직무를 태만히 한다 하여 간원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가 얼마 뒤 12월에 사간이 되었고, 이듬해인 1593년 정월 동부승지가 된 뒤 우부승지‧좌부승지‧우승지를 거쳐, 같은해 10월 공조참의‧병조참의‧병조참지를 역임한 뒤 다시 1594년 11월에 좌승지‧우승지 및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 등 주로 근시직(近侍職)을 구임(久任)하였다.
1604년 호종의 공으로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책록되고 온성군(溫城君)에 봉하여졌다.
臨淵齋先生文集附錄
*祭文[延安府使鄭姬藩]
惟靈。鍾山嶽秀。孕江湖精。生而沈厚。長而高明。承詩禮訓。抱致澤心。博覽墳典。通達古今。豹變鄕閭。蜚英朝著。敭歷淸要。翺翔玉署。乘槎帝所。帝嘉乃忠。宗祊得正。公實有功。西路饑荒。德音來宣。夙夜盡瘁。二豎交纏。沈緜數月。奄至不淑。聖主震悼。黎庶巷哭。念予後生。托契金蘭。猥被容接。吐露肺肝。傾葢龜城。樽酒相樂。邂逅洛中。屢下陳榻。矧忝屬府。喜有二天。白頭靑眼。感舊潸然。那知一夕。訃音遽傳。芝焚蕙歎。栢摧松悲。敬奠馨香。靈應有知。歸路迢迢。嶺南千里。永隔幽明。悲傷曷已。

첫댓글 정말 방대한 자료입니다.
임연 선조 관련 자료를 어떻게 많이 저로서는 매우 놀랍습니다.
부끄러운 마음과 고마운 마음이 교차합니다.
제가 스크랩해 가도 될런지요?
그렇게 하십시요 자료가 충분치 못해 부끄럽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