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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상대반(挽裳對飯)
치마를 당기고 마주하여 밥을 먹는다
挽 : 당길 만(扌/7)
裳 : 치마 상(衣/8)
對 : 마주할 대(寸/11)
飯 : 밥 반(食/4)
일성록(日省錄) 정조 17년 11월 25일 조에 인용된 영조의 수교(受敎)는 이렇다. '다른 사람과 치마를 당기거나 마주 앉아 밥을 먹다가(挽裳對飯) 그 남편이 보고서 분을 내어 혹 화가 나서 잘못 죽였을 경우는 모두 가벼운 형률에 따르도록 하라.'
외간 남자가 아내의 치마꼬리를 끌어당기거나 아내가 외간 남자와 스스럼없이 겸상하고 앉아 밥을 먹는다. 우연히 이 광경을 목격하게 된 남편이 격분해 두 사람을 칼로 찔러 죽여도 살인죄로 기소하지 말고 가벼운 처벌에 그치라는 지시를 내린 내용이다.
이때 치마를 당기고 마주 앉아 밥 먹는다는 뜻의 만상대반(挽裳對飯)은 당시에 간통의 의미로 쓰던 말이다. 이 두 가지 행동은 이미 선을 넘은 허물없는 남녀 사이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기에 일종의 완곡 어법인 셈이다.
살인을 해도 가벼운 처벌에 그치라는 왕의 지침은 국가에서 혼외 성관계에 대한 처벌 의지가 그만큼 강했다는 뜻이기도 하고, 이렇게라도 하지 않고는 통제가 안 될 정도였다는 의미로도 읽힌다.
실제로 1785년 9월 평안도 철산 사람 서돌남은 아내 이씨가 김승추와 간통하자 둘을 붙잡은 후 아내의 머리카락을 모두 자르고 김승추의 머리통을 내려쳐서 죽였다. 정조는 살인한 서돌남의 석방을 명령했다. 아내 이씨의 간통 자백이 근거였다. 이런 예는 너무 많아 일일이 예거하기 힘들다.
1797년에는 경상도 함창 사람 최우룡이 술에 취한 상태에서 자신의 제수(弟嫂) 유씨를 희롱하며 몸을 더듬던 김흥재를 발로 차서 죽였다. 부부 사이의 일이 아니고 간통이 아님에도 정조는 최우룡의 감형을 명했다. 이같은 잇단 판결은 당시 백성에게 간통죄 또는 성희롱 죄가 살인죄에 우선한다는 인식을 확실하게 심어주었을 법하다.
간통죄가 헌재의 위헌 결정으로 62년 만에 폐지되었다. 간통죄가 부부 사이 정조 의무의 상징적 보루로 여겨졌던 만큼 사회적 파장이 적지 않은 듯하다. 다분히 수사학적 표현이긴 해도 밥을 같이 먹었다고 살인마저 용서되던 세상에서 자유와 자율의 성숙한 사회로 옮겨가는 전이를 보는 듯해서 금석(今昔)의 감회가 새롭다.
만상대반(挽裳對飯)의 죄 : 조선의 명판결
조선후기에 만상대반(挽裳對飯)이란 문구가 유행했다. 글자 그대로 ‘치마를 당기거나 마주하여 밥을 먹는다’는 뜻인데, 조선후기 영조(英祖)의 ‘자신의 부인이 타인과 마주하여 밥을 먹거나 타인이 부인의 치마를 당기는 것을 보고 남편이 분노하여 때려죽였다면 가볍게 처벌하라’는 수교로부터 유래됐다.
영조의 수교(受敎)
수교란 임금의 교령(敎令) 즉 하교이자 명령이다. 수교가 곧 법조문은 아니었지만 법과 유사한 효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수교 중 일부 법전에 실리는 조문들은 그대로 법률이 되기도 했다. 조선후기에 왕이나 조정의 신료들이 살인 사건을 판결할 때 반드시 법전의 조문과 더불어 수교를 함께 참고하였다.
영조의 수교대로 부인이 외간남자와 한 방에서 마주하고 밥을 먹는 행위를 곧바로 간통의 증거로 인정하고, 타인이 부인의 치마를 당기며 희롱하면 그 역시 화간의 행위로 간주하여 이들 간통 남녀를 남편이 살해해도 사죄로 처벌되지 않았다. ‘가볍게 처벌하라’는 영조의 수교는 심지어 살인자를 석방해도 좋다는 뜻으로까지 해석되었다.
영조의 조처는 부부 사이의 정절을 강조함으로써 여성들의 음행을 규제하는 동시에 간부(姦夫)에게도 죽음으로써 간음의 대가를 치를 수 있음을 환기시켜 음욕의 억제를 꾀하고자 한 것이었다. 이로 인해 조선후기의 수많은 부인들과 간통 남성이 간부(姦婦)·간부(姦夫)로 간주되어 죽임을 당하곤 했다.
간통남을 때려 죽이다
1785년(정조9) 9월 평안도 철산의 서돌남이 자신의 아내 이 씨가 김승추와 간통하자 둘을 붙잡아 아내의 머리카락을 모두 자른 후 김승추의 머리통을 내리쳐 살해하였다.
당시 정조의 판결은 서돌남을 석방하라는 것이었다. “비록 간통 현장을 직접 잡은 경우가 아니라도 치마를 잡아당기고 마주 앉아 밥을 먹는 등 의심스러운 증거가 있어 남편이 죽였다면 관대하게 처벌하라는 영조의 수교가 명백하다. 하물며 이번 옥사는 그 자와 간통했다는 말이 아내 이 씨의 공초로부터 나왔으니 어찌 남편 서돌남을 처벌할 수 있겠는가?”
치마를 당기는 희롱과 마주하여 밥먹는 일조차 간통의 증거로 삼을 수 있는데 하물며 서돌남의 아내가 간통을 자백한 마당에 서돌남을 관대하게 처벌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게 정조의 생각이었다.
조선후기에 이런 사건들이 적지 않았다. 1797년(정조21)의 경상도 함창에서 벌어진 일을 살펴보자. 김흥재가 잔뜩 술에 취해 최우룡의 제수(弟嫂) 유 씨를 희롱하고 몸을 더듬자 최우룡은 이를 참지 못하고 발로 김흥재를 걷어차 살해하였다. 정조는 부부 사이에 적용할 율문을 형과 제수 사이에도 적용하는 재량을 보였다.
사건 발생 이듬해인 1798년 5월 정조는 사람을 죽인 일이기는 하지만 최우룡을 감형하지 않을 수 없다고 판결했다. “인명을 살해한 죄가 지극히 무겁지만 남녀 간의 간음 역시 가볍지 않다. 법률을 살펴보면, 강간이수의 경우 사죄에 처하고, 간음한 장소에서 남녀가 잡히면 모두 죽일 수 있도록 허락했다.
또한 영조 임금께서 내린 수교를 상고해 보건대, 외간 남자와 마주앉아 밥을 먹거나 치마를 잡아당긴 일로 인해 남편이 아내를 살해하였다면 용서하라 하셨으니 이는 남녀를 분별하여 간음의 단서를 미연에 방지하려는 깊은 뜻이셨다.
이번 살인 사건은 영조 임금의 수교를 가져다 인용해도 좋을 듯하다. 만약 최아기(최우룡의 동생)가 김흥재가 자신의 아내(유 씨)를 희롱하고 등을 쓰다듬었다는 소리를 듣고 바로 김흥재를 구타 살해하였을 것이다.
희롱한 일은 마주앉아 밥을 먹은 일에 비교조차 되지 않고, 등을 쓰다듬은 일은 치마를 당긴 일보다 심각하니, 이를 보고 김흥재를 죽였다면 남편 최아기를 사죄에 처할 수 있겠는가? 물론 최우룡과 유씨는 형과 제수 사이다.
부부 사이에 적용되는 율문을 두 사람에게 적용하기는 참으로 어렵지만, 형수가 물에 빠지면 손을 잡아 구해 주는 의리로 미루어 본다면 외간 남자가 제수를 희롱하여 등을 쓰다듬는데 어찌 최우룡이 묵묵히 한마디 말도 없이 가만히 있겠는가? 이는 인정상 전혀 그럴 수 없는 일이다.
최우룡이 만약 반드시 죽이려는 마음으로 김흥재를 마구 때리고 찔렀다면 남편이 아닌 관계로 사죄에 처해야 마땅하겠지만, 한번 호통치고 한번 발로 찬 일은 분을 풀려는 데에서 나온 데 불과하다. 술에 취하고 잔뜩 배불리 먹은 김흥재가 뜻하지 않게 얻어맞고 내상을 입은 것이니 어찌 최우룡이 김흥재의 죽음을 예상했겠는가.
반복하여 이치를 궁구해 보아도 사죄에 처하는 것은 옥안을 신중히 살폈다고 하기 어렵다. ‘용서하라[宥]’는 글자는 이번 사건을 위해 준비된 듯하니 최우룡을 엄히 형신한 후 감형하도록 하라.”
정조는 제수를 희롱한 사내를 구타 살해한 최우룡을 감형함으로써, 남성이 ‘성희롱’을 일삼다가 죽을 수 있으며 또 죽어 마땅하다는 생각을 전국의 민인(民人)들에게 널리 알렸다. 조선후기에 간통한 부인은 물론 간통한 사내를 죽여야 한다는 생각은 백성들 사이에 더욱 더 깊숙하게 자리 잡았다.
간부(姦夫)를 칼로 찌르다
1793년(정조17) 7월 개성부의 음세형이 자신의 첩 순랑이 주지현과 간통하자 격분하여 간통한 사내 주지현을 칼로 찔러 살해하였다. 정조는 마지막 판부(判付)에서 음세형을 처벌할 수 없는 세 가지 이유를 들었다.
첫째, 음세형은 지아비이며 순랑은 첩이다. 순랑과 간통남 주지현의 음란한 행위는 모두 사람들이 알고 있는 바인데도 음세형이 어리석기가 이루 말할 수 없어 여러 차례 간음하는 현장에 있으면서도 적반하장(賊反荷杖)의 봉변을 당할까 두려워하였다. 사건 당일 다행히 음탕한 여인과 간부가 한 방에 같이 있는 것을 보고 그 자리에서 통쾌하게 간부를 찔렀으니 바로 ‘간통 현장에서 잡은’ 일에 해당한다.
둘째, 비록 첩이라 하나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며 난잡하게 이 남자 저 남자와 음행을 저지르는 것과 전연 다르다. 음세형과 순랑의 인연은 모두 근거가 있고 사는 거처 또한 일정하니 아무 남자와 관계를 맺는 부류와 다른 법이다. 음란한 부인이 다른 남자와 간통한 일로 간부를 죽인 남편을 사죄에 처할 수는 없다. 마지막으로 영조의 수교를 보건대, 외간 남자가 치마를 잡아당기거나 밥상을 마주하고 밥을 먹을 때, 그 남편이 발견하고 분한 마음이 생겨 혹 분노로 사람을 죽인 경우에도 모두 가벼운 율문을 따르라고 경외(京外)에 반포하시었다. 이번 사건에서 순랑과 주지현이 현장에서 체포되었으니 이를 치마를 당기고 함께 밥상을 마주한 일에 비할 수 있겠는가?
정조는 순랑의 음행이 만상대반의 정도를 넘어섰고, 간통현장에서 남녀를 즉살하면 용서할 수 있다는 조문을 인용하며 음세형을 사죄에 처할 수 없다고 보았다. 나아가 정조는 음세형을 살인죄로 처벌하자고 주청한 개성유수 김노영을 파직시키고 애초에 살인사건이 될 수 없는 일을 옥사로 보고한 초검관 및 복검관을 모두 파직시켰다. 간통 사건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세 명의 관료가 연이어 파직된 것이다.
정조는 신임유수를 개성에 내려 보내어 명령했다. “음세형은 신임 유수가 도임하는 즉시 관아 뜰에 잡아다 놓고 좋은 말로 타일러 훈계하고 방면하도록 하라. 그리고 순랑은 마치 아무 죄도 없는 듯이 처벌하지 않았다니 참으로 해괴한 일이다. 역시 신임 유수로 하여금 율문을 참고하여 처벌하도록 하라.”
간통한 아내를 살해한 일은 살인이 아니다
만상대반마저 죽을 수 있는 음행의 증거가 되었으니 간통의 자취가 분명하다면 살인마저 정당해졌다. 1780년(정조4) 8월 한양의 서부에서 벌어진 사건이다.
조명근이 자신의 아내 삼매가 장대한과 간통하는 현장을 보고 격분하여 칼로 찔러 아내 삼매를 살해하였다. 당시 정조는 삼매의 간통행위는 치마를 끌어당기거나 마주앉아 밥을 먹은 아내를 죽인 남편에게 감형하라는 영조의 수교를 인용할 필요조차 없는 음란한 짓이었다고 강조했다. 살인사건으로 취급할 수조차 없다는 뜻이었다.
“삼매의 소행이 어찌 치마를 끌어당긴 일이나 마주앉아 밥을 먹은 데 비할 것인가. 사노비인 삼매는 음란하여 아침에는 이 씨와, 밤에는 장 씨와 간음하니 모든 남자들이 남편이었다. 그 자취는 간통보다 심하고 증거는 현장에서 발각된 일보다 더하다. 이른바 삼매의 남편인 조명근은 단지 오장 육부도 없는 놈으로 분노를 참는 정도가 지나친데다 비할 바 없이 멍청한 자이다.
여러 차례 간부의 악독한 주먹을 맞아 유혈이 낭자했으되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마침내 간부가 몽둥이로 구타하고 삼매가 죽이려는 간계(奸計)를 드러내자 조명근이 하는 수 없이 차고 있던 칼로 삼매를 찔러 죽인 일이다. 설사 삼매가 원통하게 죽었고 조명근의 범행이 고의였다고 하더라도 사안이 과실에 가깝고 자식들이 많으면 호생(好生)의 덕을 펴는 법이다.
하물며 조명근은 7남 1녀를 두었으니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조명근을 특별히 석방하라. 장대한 같은 자는 만일 조명근처럼 어리석은 사람을 만나지 않았다면 죽은 지 오래일 것이로되, 지금까지 목숨을 부지했으니 정말 요행이라 하겠다. 이번 사건은 장대한 그 자로부터 말미암았으니 장대한을 영원히 삼매 집안의 노비로 삼도록 하라.”
정조는 삼매의 죽음은 당연한 일이고 원인을 제공한 간통남 장대한은 삼매의 집에서 죽을 때까지 노비로 일하도록 명했다.
다산의 문제 제기
정조의 판결에 대해 후일 다산은 조금 다른 생각을 개진했다. 장대한에 대한 처벌 수위가 약하다는 판단이었다. 다산은 본 사건의 보고서를 모두 읽은 후 자신의 안설(案說)을 달아 더 엄한 처벌을 했어야 마땅하다고 논했다.
“나의 생각으로 장대한의 죄는 아마도 이 정도에 그쳐서는 안 될 것으로 보인다. ‘대명률’에 무릇 간통 현장에서 간통한 남녀를 붙잡아 간부(姦夫)와 부인을 모두 죽인 경우 불문에 붙인다고 했고, 간통한 사내만을 죽인 경우에도 간통한 아내를 법에 따라 처벌한다고 했다. 그런데 ‘대명률’에 이러한 내용만 있을 뿐 간통한 부인을 죽인 경우 간통한 사내를 단죄하는 조문이 없다. 때문에 남편이 간통한 부인만을 죽인 경우 도리어 간통한 사내는 편안하게 살아남으니 법전의 조문이 엉성하고 소략하다는 비판을 면키 어렵다.”
다산은 ‘대명률’의 부족한 조문을 보충하기 위해 청나라의 법률마저 연구하였다. 조선후기에 다산만큼 청률에 해박한 지식인이 없었다. 다산은 “청률조례(淸律條例)를 살펴보면 ‘본 남편이 간통현장에서 즉시 간통한 부인을 죽인 경우 간통한 남자를 교형(絞刑)에 의율(擬律)한다’고 하였으니 이 조문을 조선에서 사용할 수 없다해도 중국과 조선의 공공의 견해임을 알 수 있다.”고 언급하였다.
즉 다산은 간통현장에서 간통한 부인만을 죽인 경우, 해당 간통남성을 교수형에 처할 수 있다는 청률의 정신이야말로 동아시아 유교사회의 보편적 정서와 의리임을 강조한 것이다.
이에 다산은 “지금 장대한의 경우는 간통현장에서 즉시 붙잡힌 것과는 다르므로 비록 사죄에 처하는 것으로 논하기 어렵지만 섬으로 유배 보내지 않을 수 없다. 장대한이 삼매와 한 집에서 동거하였으니 어찌 간통의 명백한 증거가 아니겠는가?”라고 주장했다.
이미 간통의 증거가 명백하므로 현장에서 죽여 없앴다면 아무 문제가 없을 터이나 간통 현장에서 발각된 것은 아니므로 사죄에 처할 수는 없을 듯하다. 그렇다고 다산은 간통한 아내만을 엄형하고 간통한 남자에 대해 엄벌하지 않는다면 간통과 간음의 문제가 사라지지않는다고 생각했다.
다산은 청률의 간부(姦夫)에 대한 처벌 조문을 인용하여 비록 장대한을 교수형으로 처벌할 수 없지만 먼 섬으로 유배 보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단지 삼매 집안의 노비로 살게 한다면 죗값이 너무 가볍다는 게 다산의 생각이었다. 음행 남녀에 관한 다산의 처벌은 이토록 엄중했다.
▶️ 挽(당길 만)은 형성문자로 輓(만), 鋔(만)과 동자(同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재방변(扌=手: 손)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免(면→만)이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그래서 挽(만)은 ①당기다, 잡아당기다 ②끌다 ③말다, 말아 올리다 ④짜다, 짜서 얽어매다 ⑤애도하다 ⑥만사(輓詞, 挽詞: 사람의 죽음을 애도하는 말) 따위의 뜻이 있다. 유의어로는 引(끌 인), 曳(끌 예), 牽(이끌 견/끌 견) 등이고 반의어로는 推(밀 추, 밀 퇴)이다. 용례로는 어떤 일을 하지 못하게 붙들고 말리는 것을 만류(挽留), 바로잡아 회복함을 만회(挽回), 잡아당김 또는 끌어당김을 만인(挽引), 붙들어 말림을 만집(挽執), 당기어 부러뜨림을 만절(挽折), 뒤에서 밀고 앞에서 끎 또는 사람을 추거하는 일을 추만(推挽), 손을 잡아 이끎을 견만(牽挽), 위로하고 만류함을 위만(慰挽), 그만두거나 하지 못하도록 붙들고 말림을 반만(攀挽), 사람이나 마소들이 수레를 끄는 힘을 일컫는 말을 만예력(挽曳力), 치마를 당기고 마주하여 밥을 먹는다를 이르는 말을 만상대반(挽裳對飯) 등에 쓰인다.
▶️ 裳(치마 상)은 ❶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옷의(衣=衤; 옷)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동시에 가로막다는 뜻을 나타내기 위한 尙(상)으로 이루어졌다. 아랫도리를 가로막는 옷, 치맛자락을 말한다. ❷회의문자로 裳자는 '치마'나 '아랫도리'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裳자는 尙(오히려 상)자와 衣(옷 의)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尙자는 집 위에 八(여덟 팔)자를 그린 것이다. 裳자는 이렇게 집을 그린 尙자에 衣자를 결합한 것으로 '집에서 입는 옷'이라는 뜻으로 만들어졌다. 사실 소전 이전에는 常(항상 상)자가 '아랫도리'나 집에서 입는 옷이라는 뜻으로 쓰였었다. 하지만 후에 '항상'이라는 뜻으로 가차(假借)되면서 지금은 裳자가 '아랫도리'를 뜻하게 되었다. 고대에는 衣자는 '상의'로 裳자는 '하의'로 구분했다. 그래서 의상(衣裳)이라고 하면 위아래 옷을 갖춰 입는다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裳(상)은 ①치마 ②아랫도리 옷 ③바지 따위 ④산뜻한 모양 ⑤보통(普通)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치마 군(裙)이다. 용례로는 난간의 밑 가장자리에 돌려 붙인 널빤지를 상판(裳板), 의복으로 옷이나 모든 옷을 의상(衣裳), 붉은 치마를 적상(赤裳), 다홍빛 치마를 홍상(紅裳), 푸른 치마를 청상(靑裳), 검은 치마를 현상(玄裳), 노랗게 물들인 치마를 황상(黃裳), 얇고 가벼운 비단으로 지은 치마를 나상(羅裳), 매달아서 길게 늘이는 물건을 갑상(甲裳), 속치마를 내상(內裳), 바지나 치마 앞자락 위에 덧입는 치마를 정상(淨裳), 대장간에서 불똥을 막기 위하여 두르는 치마를 화상(火裳), 모시로 지어 만든 치마를 저상(紵裳), 겉에 입는 치마를 표상(表裳), 수놓은 치마를 수상(繡裳), 무지개와 같이 아름다운 치마를 예상(霓裳), 검은 치마를 의상(蟻裳), 치마를 걷어 올림을 건상(攓裳), 젊은 여자가 곱게 차려 입은 연두색 저고리와 다홍치마를 일컫는 말을 녹의홍상(綠衣紅裳), 아내 행실은 다홍치마 적부터 그루를 앉힌다로 아내를 잘 순종하게 하려면 시집 오자 마자 곧 버릇을 가르쳐야 한다는 말을 교처홍상(敎妻紅裳),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는 뜻으로 같은 조건이라면 좀 더 낫고 편리한 것을 택한다는 말을 동가홍상(同價紅裳), 애써 법을 정함이 없이 인덕으로 백성을 교화시키고 나라를 다스리는 일을 일컫는 말을 의상지치(衣裳之治), 치마를 걷고 발을 적신다는 뜻으로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는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말을 건상유족(蹇裳濡足) 등에 쓰인다.
▶️ 對(대할 대)는 ❶회의문자로 対(대)의 본자(本字), 对(대)는 통자(通字), 对(대)는 간자(簡字)이다. 부수(部首)를 제외한 글자 종기둥에 사람이 손(寸)을 대고 서 있다는 뜻이 합(合)하여 대하다, 마주보다를 뜻한다. 부수를 제외한 글자는 타악기(打樂器)를 받치는 도구를 나타낸다. 이 도구는 좌우(左右) 두 개로 한 쌍이 되어 있고 또 이 도구에 악기(樂器)를 걸고 사람이 마주 앉음, 對(대)는 쌍으로 하는 일, 또 마주 앉다, 대답하는 일을 말한다. ❷회의문자로 對자는 '대하다'나 '마주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對자는 丵(풀무성할 착)자와 寸(마디 촌)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丵자는 뜻과는 관계없이 촛대로 응용되었다. 對자의 갑골문을 보면 여러 개의 초가 꽂힌 긴 촛대를 들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누군가를 마주하기 위해 불을 밝힌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對자는 불을 밝혀 누군가를 마주한다는 의미에서 '대하다'나 '마주하다'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對(대)는 (1)서로 비슷하거나 같은 짝이나 상대 (2)어떤 명사(名詞) 앞에 쓰여 ~에 대한 ~에 대항하는의 뜻을 나타내는 말. 사물들이 서로 상대, 대립, 대비됨을 나타내는 말 (3)장기에서 쌍방이 말 하나씩을 맞바꾸어 따먹는 일 (4)대구(對句) (5)경의(經義) 같은 것을 시험(試驗)으로 문대(問對)하는데 쓰이는 그 대답 (6)성(姓)의 하나 등의 뜻으로 ①대하다, 마주하다 ②대답하다 ③대조(對照)하다, 맞추어 보다 ④상대, 맞수 ⑤짝, 배우자(配偶者) ⑥대구(對句) ⑦벌(옷을 세는 단위) ⑧쌍(두 짝으로 이루어 진 것의 단위) ⑨문체(文體)의 이름 ⑩대(對)하여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대답할 유(兪), 대답 답(答), 허락할 락(諾)이다. 용례로는 어떤 사건 또는 시국에 대한 방책을 대책(對策), 사람이 어떤 행위를 할 때, 그 목적이 되는 사물이나 상대가 되는 사람을 대상(對象), 마주 대함이나 상대함을 대응(對應), 어떠한 일에 대응할 준비를 함 또는 그러한 준비를 대비(對備), 마주 대하여 서로 의견을 주고받으며 이야기하는 것 또는 그 이야기를 대화(對話), 어떠한 일에 대응하는 조치를 대처(對峙), 마주 대하여 섬이나 둘이 서로 버팀을 대립(對立), 사람이 상대의 물음이나 요구 또는 부르는 말에 응하여 어떤 말을 하는 것 또는 그 말을 대답(對答), 양자가 맞서서 우열 등을 결정함을 대결(對決), 서로 맞서서 버티어 겨룸을 대항(對抗), 외부 또는 외국에 대함을 대외(對外), 서로 맞대어 비교함을 대비(對比), 어떠한 일에 대처할 안을 대안(對案), 마주 대하여 말함을 대언(對言), 마주 대하여 말함 또는 그 말을 대담(對談), 두 사물이 맞서 있는 상태를 반대(反對), 서로 마주 보고 있음 또는 그 대상을 상대(相對), 상대하여 견줄 만한 다른 것이 없음을 절대(絶對), 마주 대하여 버팀이나 적으로 여김을 적대(敵對), 응접하여 대면함을 접대(接對), 상대하여 응답함을 응대(應對), 소를 마주 대하고 거문고를 탄다는 뜻으로 어리석은 사람은 아무리 도리를 가르쳐도 알아듣지 못함을 이르는 말을 대우탄금(對牛彈琴), 증세에 맞게 약을 써야 한다는 뜻으로 문제의 핵심을 바로 보고 대처해야 함을 이르는 말을 대증하약(對症下藥), 손님을 접대하는 도리를 일컫는 말을 대객지도(對客之道), 군명을 받들어 그 뜻을 널리 인간 백성에게 드높임을 일컫는 말을 대양휴명(對揚休命), 강 건너 불이라는 뜻으로 어떤 일이 자기에게는 아무 관계도 없다는 듯이 관심이 없음을 이르는 말을 대안지화(對岸之火), 눈을 비비고 다시 보며 상대를 대한다는 뜻으로 다른 사람의 학식이나 업적이 크게 진보한 것을 말함을 일컫는 말을 괄목상대(刮目相對), 응대하는 말이 매우 유창하거나 사물의 처리가 매우 신속함을 일컫는 말을 응대여류(應對如流), 밤비 소리를 들으면서 침상을 나란히 놓고 눕는 다는 뜻으로 형세나 친구 사이가 좋음을 이르는 말을 야우대상(夜雨對牀), 좋지 못한 얼굴빛으로 서로 대함을 일컫는 말을 악안상대(惡顔相對), 묻는 대로 지체 없이 대답함을 이르는 말을 응구첩대(應口輒對) 등에 쓰인다.
▶️ 飯(밥 반)은 ❶형성문자로 飰(반)은 통자(通字), 饭(반)은 간자(簡字), 飯(반)과 동자(同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밥식변(飠=食; 먹다, 음식)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反(반)이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反(반)은 위에서 물건을 덮고 아래로부터도 그것을 받는 일, 밥식변(飠=食)部는 먹는 것, 먹는 일, 飯(반)은 입에 머금고 잘 씹어 먹다, 먹는 것, 밥, 본디는 食(식)과 飯(반)은 같은 말이며 먹는데도 먹는 것에도 같이 쓴 것인데 나중에 곡식의 주식(主食)을 가리켜 飯(반)이라고 일컫게 되었다. ❷형성문자로 飯자는 '밥'이나 '식사', '먹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飯자는 食(밥 식)자와 反(되돌릴 반)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反자는 손으로 무언가를 뒤집는 모습을 그린 것이지만 여기에서는 발음역할만을 하고 있다. 사실 사전상으로 보면 飯자와 食자는 같은 뜻을 갖고 있다. 다만 이전에는 食자가 주로 '먹다'나 '음식' 자체만을 뜻했었다면 飯자는 곡식(穀食) 위주의 식사를 뜻했었다. 하지만 지금의 食자와 飯자는 관습적으로만 구분할 뿐 의미상으로는 큰 차이가 없다. 그래서 飯(반)은 반축(飯柷)과 같은 뜻으로 ①밥 ②식사 ③먹다 ④먹이다 ⑤사육하다 ⑥기르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밥 식(食)이다. 용례로는 아침저녁의 끼니를 드리는 일을 반공(飯供), 식후에 먹는 과일을 반과(飯果), 밥그릇 또는 밥을 담는 그릇을 반기(飯器), 중국에서 식단을 이르는 말을 반단(飯單), 수저나 숟가락을 반비(飯匕), 밥 짓는 일을 맡아 보는 계집종을 반비(飯婢), 격식을 갖추어 차린 밥상을 반상(飯床), 밥을 짓거나 하면서 심부름하는 어린 승려를 반승(飯僧), 밥을 담는 그릇이나 밥통을 반우(飯盂), 중국 음식을 하는 음식점을 반점(飯店), 숭늉을 반탕(飯湯), 염습할 때에 죽은 사람의 입에 구슬과 씻은 쌀을 물리는 일을 반함(飯含), 밥을 지을 수도 있게 된 알루미늄으로 만든 밥 그릇을 반합(飯盒), 밥과 국을 반갱(飯羹), 밥과 과자를 반과(飯菓), 밥알을 반과(飯顆), 밥상을 반대(飯臺), 끼니로 먹는 음식을 반식(飯食), 끼니 때 밥에 곁들여서 한두 잔 마시는 술을 반주(飯酒), 밥에 곁들여 먹는 온갖 음식을 반찬(飯饌), 밥주머니라는 뜻으로 무능하고 하는 일 없이 밥이나 축내는 사람을 조롱하는 반낭(飯囊), 입에 든 밥을 뿜어낸다는 뜻으로 아주 크게 웃음을 반분(飯噴), 거칠고 반찬 없는 밥이라는 뜻으로 안빈낙도함을 일컫는 말을 반소사(飯疏食), 밥을 담는 주머니와 술을 담는 부대라는 뜻으로 술과 음식을 축내며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을 이르는 말을 반낭주대(飯囊酒袋), 식사가 끝난 후에 울리는 종이라는 뜻으로 때가 이미 지났음을 이르는 말을 반후지종(飯後之鐘), 밥이 오면 입을 벌린다는 뜻으로 심한 게으름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반래개구(飯來開口), 제사의 제물을 진설할 때 밥은 서쪽 국은 동쪽에 놓음을 이르는 말을 반서갱동(飯西羹東), 열 사람이 한 술씩 보태면 한 사람 먹을 분량이 된다는 뜻으로 여러 사람이 힘을 합하면 한 사람을 돕기는 쉽다는 말을 십시일반(十匙一飯), 집에서 먹는 평소의 식사라는 뜻으로 일상사나 당연지사를 이르는 말을 가상다반(家常茶飯), 술과 밥주머니라는 뜻으로 술과 음식을 축내며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을 이르는 말을 주대반낭(酒袋飯囊), 옷걸이와 밥주머니라는 뜻으로 옷을 입고 밥을 먹을 뿐이지 아무 쓸모 없는 사람을 두고 이르는 말을 의가반낭(衣架飯囊), 먼지를 밥이라 하고 진흙을 국이라 하는 어린아이의 소꿉장난이라는 뜻으로 실제로는 아무 소용없는 일을 이르는 말을 진반도갱(塵飯塗羹), 한 끼의 식사에 천금같은 은혜가 들어 있다는 뜻으로 조그만 은혜에 크게 보답함을 이르는 말을 일반천금(一飯千金), 개밥의 도토리라는 속담의 한역으로 따돌림을 당하거나 외톨이가 되는 것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구반상실(狗飯橡實), 종에게 흰 밥을 주고 말에게 싱싱한 풀을 준다는 뜻으로 주인의 인심이 넉넉하여 남을 후대함을 이르는 말을 백반청추(白飯靑蒭), 따뜻한 의복을 입고 맛있는 음식을 먹는다는 뜻으로 풍족한 생활을 이르는 말을 온의미반(溫衣美飯), 한 술 밥의 덕이라는 뜻으로 보잘것없이 베푼 아주 작은 은덕을 이르는 말을 일반지덕(一飯之德), 여행 길에 하룻밤 묵어 한 끼 식사를 대접받는다는 뜻으로 조그마한 은덕을 입음을 이르는 말을 일숙일반(一宿一飯), 아침에는 밥 저녁에는 죽이라는 뜻으로 가까스로 살아 가는 가난한 삶을 이르는 말을 조반석죽(朝飯夕粥)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