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약전이 흑산도 유배 당시 그 지역의 바다생물에 대해 저술한 '자산어보(玆山魚譜)'는 어쩌면 '해족도설(海族圖說)'이라는 이름을 가진 우리나라 최초의 생물도감으로 태어날 수도 있었다. 그의 아우였던 다산 정약용과의 편지에서 알려진 대로 그림을 그려 색칠을 하고 설명을 첨부한 책이 저술되었다면 우리는 역사상 가장 자랑스러운 책 중의 하나로 바다생물도감을 보유할 뻔 했던 것이다. 정약용은 형인 정약전이 유배지인 흑산도 바다생물에 대한 도감저술 의도를 전한 편지의 답신에서 "해족도설은 무척 특이한 책이니 쉽게 생각하면 안됩니다. 도형(圖形)은 어떻게 하려구요? 글로 쓰는 것이 그림으로 그려 색칠하는 것보다 나을 것입니다"라고 조언을 한다. 컬러 인쇄술이 없던 당시의 상황과 유배중인 형의 처지를 헤아린 것으로 보이지만 복제가 어려운 도색된 그림책보다는 필사가 가능한 글자 위주의 책을 쓸 것을 조언한 정약용의 판단이 자못 아쉽다.
조선후기 일호(一濠) 남계우가 그린 여러 화접도(花蝶圖)에 그린 나비 그림은 현재까지 잘 보존되어 전해지고 있고, 이후 석주명이 37종의 나비를 분류하여 보고할 정도로 사실적이라는 점을 비추어 볼 때 당시 정약전이 세밀화로 해족도설로 남겼더라면 세계적인 명저가 되었을 것이 틀림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일호 남계우의 화접도(花蝶圖)의 일부. 조선 후기 남계우는 여러 장의 화접도를 남겼으며, 나비의 종류는 물론 암수의 구별도 가능할 정도로 상세하고 정확하게 그린 것으로 유명하다.
우리나라 사람이 저술한 최초의 식물도감은 1943년 정태현 박사가 저술한'조선산림식물도설(朝鮮森林植物圖說)'이다. 일제시대에 일본어로 발간된 이 도감의 저자명이 정태현(鄭兌鉉)이 창씨개명한 '하본태현(河本台鉉)'이라는 점은 실망스러운 일이지만 우리나라 식물 연구사에서는 적지 않은 의미를 가진 도감이다. 그 이전인 1923년 임업시험장 이시도야(石戶谷勤)와 정태현이 쓴 '조선삼림수목감요(朝鮮森林樹木監要)'이나 1937년 조선박물연구회에서 발행한 '조선식물향명집(朝鮮植物鄕名集)'은 도감이 아니라 각각 우리나라의 식물 분포목록집과 한글이름 목록집으로 도판을 포함하지 않고 있으므로 도감이라고 표현한 일부 온라인상의 기록들은 잘못된 것이다.
▲1923년 임업시험장 기사 이시도야 쓰토무와 기수 정태현이 우리나라 분포식물의 분포와 명칭 등을 정리한 조선산림수목감요(좌)와 1943년 정태현이 쓴 우리나라 최초의 식물도감인 조선삼림식물도설(우)
이후 정태현 박사는 자신이 쓴 '조선산림식물도설'의 일본어 기재사항을 한글로 옮기고, 식물 도판을 새로 제작해 1956년 국문으로 발행한 최초의 식물도감인 '한국식물도감(신지사)'을 저술한다. 이 도감은 한국전쟁을 거치며 우여곡절 끝에 눈물겨운 사연을 품고 발간되었는데, 도감 속 일부 식물그림을 그린 화가 정찬영의 인생역정이 고스란히 배어있기 때문이다.
해방 전까지 대표적인 한국여류화가였던 정찬영은 조선식물향명집의 공동저자 중의 한명인 도봉섭 경성약전 교수의 부인이다. 그녀는 아마도 남편과 정태현 박사가 공동저자로 되어야 마땅한 도감의 도판작업에 자신이 그려오던 채색 식물도를 기꺼이 제공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6.26전쟁이 발발하면서 도감제작 작업은 중단되고, 남편인 도봉섭 교수마저 납북되고 만다. 전쟁 중 세명의 자녀들을 기르면서도 목숨을 걸고 원고를 지켰고, 이후 자신의 식물그림을 제공하여 도감이 완성되었으나 끝내 남편이나 자신의 이름을 공저자로 올리지 못하고 서문의 마지막 단락에서만 간략한 사연 속에 이름만 밝힌 무정함의 원인이 궁금하고 애석하다.
▲정태현 박사가 1956년 저술한 우리나라 최초의 국문 식물도감인 한국식물도감
▲정찬영 여사의 원색 식물그림(좌)과 정태현 박사의 한국식물도감 도판에 원용된 식물 그림(우, 상;나팔꽃, 하;미나리아재비)
아무튼 이 도감은 이후 여러 과정을 거쳐 유사한 형태로 재출간되어 보급되었지만 특별히 발전한 형태의 도감으로 자리 잡지는 못한 것 같다. 이후 이창복 서울대 교수가 농촌진흥청의 용역으로 분야별로 저술한 일련의 도감들을 통해 비로소 우리나라에도 세밀하게 그려진 식물도가 포함된 도감들이 탄생하게 된다.
1966년 '한국수목도감(입업시험장)', 1969년 '야생식용식물도감'(임업시험장), 1971년 '약용식물도감(농촌진흥청)', 1973년 '초자원도감(농촌진흥청)'이 그것들인데 이후 이 도감들의 도판을 원용하고, 추가 종들을 보완해 1980년 약 4000종의 식물을 수록한'대한식물도감(향문사)'이 탄생하게 된다. 그 이후 이 도감은 식물 연구자와 학생들에게 가장 많은 인기를 누렸으며, 1999년 제6판을 마지막으로 절판되었다. 이후 사진과 그림을 같이 사용한 두 권으로 구성된 '원색 대한식물도감'으로 재발행 되었으나 이영노 교수의 '원색 한국식물도감(교학사)'에 비해 가성비와 인기도에서 밀리는 것 같다. 마키노 도미타로(牧野富太郎)의 '신일본식물도감'이 수십판이 넘게 재판될 정도로 국제적인 명저로 인정받고 있는 것에 비하면 아쉬움이 크다. '대한식물도감'은 일부 논란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식물도감 중에는 최고로 평가받고 있지만 기준도감으로서의 지속적인 발전이 없었고, 마키노 도미타로의 도감저술 형식을 그대로 사용했다는 점은 못내 아쉽게 느껴진다.
▲이창복 교수가 임업시험장과 농촌진흥청의 용역으로 저술한 용도별 식물도감들. 이 도감들은 1980년 대한식물도감으로 종합 집대성되어 오랬 동안 기준 도감으로 사랑 받았다.
생물학에서의 도감은 일상에서의 사전과 같은 역할을 한다. 도감은 생물종을 분류하는 기준을 제시해 연구의 혼선을 막아 주기 때문이다. 개체간 변이가 비교적 적은 동물에 비해 식물연구에 있어서 도감의 중요성은 훨씬 크다. 유리한 환경을 선택하여 이동할 수 있는 동물에 비해 식물은 단기간 내 서식지를 옮겨가기 어렵다. 그런 이유에서 식물은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같은 종 내의 형태적 변이 폭이 동물에 비해 훨씬 크므로 다양한 분류 지표(key)들을 정확히 제시한 도감의 중요성은 그래서 훨씬 크다.
우리나라는 여전히 일제 강점기의 나카이 다케노신(中井猛之進)이 22권의 방대한 분량으로 저술한 '조선삼림식물편(朝鮮森林植物篇, 1915~1939)'에 필적할 우리말 식물지를 보유하지 못하고 있다. 더 좋은 식물지를 만들기 어렵다면 최소한 종 분류의 기준이 될 만한 좋은 도감들이 지속적으로 발행되었으면 좋겠다. 많은 이유가 있지만 좋은 도감의 제작 자체로도 요즘 찾아보기조차 힘들 정도로 줄어든 분류학자의 부족으로 우려되는 자원의 침식이나 멸종의 방치를 막기 위한 한가지 수단으로서 활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