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일조 십일조는 구원의 조건은 아닙니다....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조건은 된다고 봅니다.
우리나라에 재정이 풍부한 교회는 10%도 안됩니다. 우리나라의 교회 중에서 80% 이상이 재정적으로 자립하지 못한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단교회에서 일체의 헌금이나 연보, 헌물등을 받지 않을까요? 물론 이단이 아니라고 하는 교회라 할지라도, 십일조를 강요하거나 십일조를 구원의 조건으로 주장하면 안됩니다. 십일조에 대한 비난은 보편적으로 몇가지로 나누어지는데 이것에 대해서 상세히 알아봅니다.
십일조를 비판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는 주장중 첫번째는, 십일조는 율법이므로 폐지되었다는 주장이다. 제사율법은 변역되었다....변역이란 바뀐 것을 의미한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제사도 폐하여진 것이 아니라 영적인 제사의 개념으로 바뀐 것이다. 만일 제사가 폐하여졌다면 예수님은 대제사장이 아니고, 우리도 더이상 제사장이 아니다.... 율법은 그 행위로 구원을 얻는다는 관점과 의롭게함이라는 관점에서는 폐하여졌으나, 죄를 깨닫게하고 그리스도로 안내하는 몽학선생으로서의 기능은 아직 갖고 있다. 예수님은 율법을 폐한 것이 아니라 율법을 재해석하셨으며, 완전케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롬3:20)
그렇다면 십일조는 율법일까?
"레위 족보에 들지 아니한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고 그 약속 얻은자를 위하여 복을 빌었나니 폐일언하고 낮은자가 높은자에게 복빎을 받았느니라"(히7:6)
하나님이 모세에게 율법을 주기 전에도, 십일조는 있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율법은 지켜야 하지만, 율법을 지키는 행위로 의롭다함을 받지는 못한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은 십일조를 내야하지만, 그것이 구원의 조건이 되지는 않는다. 다만 십일조는 그리스도인의 자발적인 의무라고 가르쳐야만 한다.
2) 예수님이 말씀하신 십일조
마태복음23장 23절과 누가복음 11장42절은 십일조에 대해서 모두 똑같이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아니하여야 할 것"을 언급하고 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마23:23, 눅11:42)
신약에서 십일조는 마23:23, 눅11:42와 눅18:12에서 다시 한번 언급되어지며, 히브리서에도 십일조는(개역성경:십분의 일로 번역되어짐) 언급되어진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눅18:12-14)
전자의 성경본문은 형식만 중요한 것으로 생각하는 바리새인들의 위선을 탓하시는 것이지 십일조 자체를 버리라는 말이 아니다. 십일조를 성경적이 아니므로 폐하여야 한다는 사람이 있다면 예수님 말씀도 잘못이라고 비판하기 바란다 "의인"(의롭다함)의 조건은 마당에 심은 풀과 같이 자신의 소득에 대한 정확한 액수의 십일조가 아니라,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믿음에 달려 있다. 만일 의롭다함의 조건이 십일조에 달려있다고 가르치는 자가 있다면, 그는 바리새인과 같은 사람일 것이다.
3) 연보와 십일조
또 제가 또 하나의 성경을 인용하면, 십일조를 비난하는 분들께서는 분명히 "그것은 십일조가 아니라 연보이다"라고 말할 것이 뻔하지만 성경을 잘 찾아 보면, 연보와 십일조는 서로 구별되어지거나 다른 용어가 아니다.
고전 16장 1절과 2절등에 사용된 "연보"란 단어는 "모금, 수집"(collection)이라는 뜻의 헬라어 "로기아"로 되어 있고, 고후 8:2에서는 "기쁨으로 드린다, 관용"이라는 의미의 "하플로테스"로 되어 있고, 고후9:5 에서는 "좋은 모금, 아름다운 말과 칭찬, 봉헌, 은전"이란 뜻의 "율로기아"로 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성경말씀에서 "연보"란 번역상 연보라고 표기되어 있을 뿐, 십일조나 헌금. 모금과 전혀 다른 용어라고 말할 수 없다. 누군가가 십일조를 형식적인 면에서 벗어나, 자발적인 기쁨으로 드려진다면 그것이 곧 연보와 같은 개념이 되어진다.
또한 그 증거로 역대하34장9절과 14절의 "연보"란 용어를 보자. 하나님은 자발적인 마음으로 즐겨 내시는 사람을 기뻐하시며, 십일조는 결코 폐하여진 적이 없다.
"예수께서 연보궤를 대하여 앉으사 무리의 연보궤에 돈 넣는 것을 보실새, 여러 부자는 많이 넣는데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연보궤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저희는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셨더라"(막12:41-44)
예수님은 액수에 많고 적음이나 정확한 액수에 대해서 말씀하시지 않았으며, 오직 자발적인 믿음에 대해서 말씀하셨는데, 그 내면적인 믿음을 중요시하였다.
4) 십일조의 유래와 의미
성경에서 십일조가 가장 먼저 언급되는 것은 창세기 14장 17-20절이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사 내가 가는 이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사 나를 평안히 아비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개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 (창28;20-22)
즉 십일조는 제사적인 의미도 아니며 율법적인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복을 빌어달라는 조건으로, 드리는 사람의 자발적인 약속이다. 단, 그것은 강제성이 있는 것도 아니고 자신이 자발적으로 "드리는 것"이었다.
"매 삼년 끝에 그해 소산의 십분 일을 다내어 네 성읍에 저축하여 너의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우거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로 와서 먹어 배 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신14:29)
다시 말해서 구약의 십일조란 일차적으로는 여호와 하나님과의 약속에 대한 개인적인 성취적인 제물로 사용되었다. 후에 십일조는 일차적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에 종사하는 사람들, 즉 분깃이 없는 레위 제사장들을 부양하는 목적이었으며, 가난한 사람들의 구제와 부양에도 쓰였다는 것이다. 이 십일조의 대상은 종교적인 레위인의 부양도 포함되었지만, 성중에 거하는 객과 과부와 고아같은 비종교적인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포함되었다. 이단들과 사이비 교회에서는 십일조나 헌금이 모두 교주나 지도자 개인에게 돌아간다. 다만 십일조나 헌금은 정상적인 교회에서는 평신도들로 구성된 재정부에서 취급한다.
5) 신약의 십일조
여러분이 흔히 십일조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마다 등장하는 구절인데, 마태복음23;23-24이다.
"화 있을 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는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소경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키도다"(마23:23-24)
박하와 회향과 근채는 음식의 향을 내기 위한 아주 작은 풀이다.
이것은 두 가지의 의미가 있다. 둘째 이렇게 작고 우리 집안에서 키우는 풀의 열매까지 우리는 정확한 액수를 내고 있다는 자랑과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겉치례에 대한 비평이다. 그들은 내면적인 믿음보다 십일조를 내는가 안내는가에 대한 것을 중요시하였던 것이다. 어찌 되었던 예수그리스도는 "버리지 말아야 함"을 강조하고 계시다는 것이다. 우리는 앞서 구약의 십일조에서 가장 처음 언급된 멜기세덱의 이야기를 다시 생각해보자. 멜기세덱은 과연 누구인가? 창세기에서는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제사장"이라고 되어 있다. 다시 말하자면 십일조는 율법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
"여기서는 죽을 자들이 십분 일을 받으나 저기는 산다고 증거를 얻은자가 받았느니라 또한 십분의 일을 받는 레위도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십분의 일을 바쳤다 할 수 있나니 이는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날 때에 레위는 아직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었음이라"(히7:8-10)
예수그리스도도 십일조를 비난하지 않았으며 금하지 않으셨다.
우리 교회는 그 물질을 관리하는 청지기에 불과하다.
5) 말라기에 대한 잘못된 비판
우리가 너무 잘 아는 십일조에 대한 말라기 말씀이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것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말3;10)
본인은 두가지의 비판을 하려고 한다. 말라기 2장은 분명히 그 대상이 "제사장"이다.(말2:1)
먼저 말라기에서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 하겠느냐?" 라는 문장을 보자.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것을 훔친 사람은 제사장같은 어느 특정된 사람이 아니라 일반적인 의미의 모든 전체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다. 우리 개역성경에도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적질하였으므로"라고 번역하고 있다. 다시 말하여 말라기의 십일조에 대한 성경말씀은 제사장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또 하나의 근거가 있다.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만일 You 가 제사장만을 말한다면 복을 주는 "너희"도 제사장을 말한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복은 제사장만이 받는 것이 아니다.
"레위 자손을 깨끗케 하되 금과 은 같이 그들을 연단하리니 그들이 의로운 제물을 나 여호와께 드릴것이니라"
이 문장이 제사장에게 하는 말이라면 그들은 'They" 가 아니고 "You" 가 되었어야 한다.
야곱은 모든 열두지파의 조상인것이다. 또 말라기에 대해서 정확한 액수(10%)를 내야만 복을 받는다는 주장이 대해서, 말씀을 드리고자 한다. 물론 본인은 정확한 십일조를 계산하여 자발적이며 기쁜 마음으로 바치는 그 믿음을 비난하고자 하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을 먼저 밝혀둔다. 성경에서 "온전한 십일조"라고 번역되어진 10절의 말씀은 완전하고 정확한 금액의 액수를 말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Whole tithe"(모든 십일조:히브리어 콜, all)라고 되어 있을 뿐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성경에서 십일조는 결코 율법적이 아니며, 폐지된 적도 없다. 다만 십원짜리까지 계산하는 정확한 10퍼센트의 액수만을 맞추는 형식적인 십일조는 성경에서 말하는 바람직한 십일조가 아닐 수도 있다.
"이러므로 내가 이 형제들로 먼저 너희에게 가서 너희의 전에 약속한 연보를 미리 준비케 하도록 권면하는 것이 필요한 줄 생각하였노니, 이렇게 준비하여야 참 연보답고 억지가 아니니라,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후9:5-7)
빌립보서 4장 16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 번 두 번 나의 쓸 것을 보내었도다. 내가 선물을 구함이 아니요, 오직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과실이 번성하기를 구함이라"
빌립보교회의 성도들은 바울에게 모금한 돈의 일부를 바울의 "쓸 것"으로 몇번 보내었다. 바울은 이것을 매우 고맙게 생각하고 그러나 내가 선물을 구하지 않는다고 사양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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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십일조에 관하여 나름 정리가 잘 되어졌다는 생각에 퍼 왔습니다.
또 다른 많은 생각들이 개혁의 재료로 사용되어지겠지만 예향을 고향과 같은 마음으로 찾아오는 그리스도인들이
좀 더 너그러운 마음으로 서로의 생각과 가치들을 공유했으면 좋겠습니다.
아직 십일조에대한 바른개념이 의문시됩니다 십일조가 정당하다고 주장하려는 이땅의 많은 목사님들의 글과 다른것이 없으시네요 생각해 봅시다
신구약의 갈림이 언제인가요 말라기와 마태복음인가요 ?
저는 십자가위에서 다이루었다하고 성령이 오신 때라 생각합니다
예수님도 구약 분이시지요 율법에따라 할례도받고 성전도 다녀오신 내용이 있지요
그러므로 당시에는 저것도 버리지 말아라 말씀하셨지요 그리고 다이루었다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신약을 봅시다 예수님은 시험받으실때도 성령에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받으시러 광야로 나갔다고했으며 빌라도앞에서도 주님은 자의로하지 않으시고 성렬의 인도로만 하셨습니다
신구약의 모든 구원의 역사는 성령의 작품입니다 온인류를 구원하시고자하신 하나님의 계획에 성령께서 역사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해야 복(바라크)을 받는다고 한다면 내가 왜죽었냐 성령의 구원의 역사를 헛것으로 만드는 결과입니다 나는 십일조는 성령훼방죄라 생각합니다 주님의 구원사역을 헛것으로 만드는 결코사함이 없는 무서운죄라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십일조는 절대로 해서는 않됩니다 로마케톨릭에서 면죄부를 팔때도 십일조만은 할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거짓이기 때문이었지요 교회가아무리 어려워도 해야할 헌금이있고 해서는안되는 헌금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좀더연구해서 주님의 깊은뜻을 서로 나누어 봅시다.이상내생각
그리스도인의 조건이된다 하심은 무슨뜻인지요
값 없이 은혜로 주신 구원에 조건이 있어야한다는 뜻은 아니겠죠
맞는 말씀이네요 ^^ 동감!
구원의 조건은 아니나 그리스도인의 조건이라...
제발 이런 말장난같은 논리는 이제 그만 보았으면 합니다.
십일조 정리는 이곳 예향에 잘 되어 있지 않나요?
구원받은 우리는 누구를 위해서 존재를 하는 겁니가? 하나님을 위해서 존재합니까? 우리자신을 위해서 존재합니까? 또한 재물은 누구를 위해서 존재하는겁니까? 우리 자신을 위해서 존재합니까? 하나님을 위해서 존재합니까? 그리고 10분의 1을 하나님께 드렸다면 나머지 10분의 9는 우리의 것이 되는겁니까?
구원의 조건은 아니더라도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의무라는 말씀이죠. 대한민국에도 국방, 납세, 교육, 노동의 의무가 있듯이, 하나님을 섬기는 그리스도인 역시 의무를 지켜야 그리스도인이라는 표지가 되는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세금 내고 있는데 교회에 또 10% 세를 내라는 겁니까? 그럼 합이 20%요.
ㅡㅡ 하나님께 가져다 드린다면 내지요
교회에 가져다 바치란 말이네요? 그쵸?
하나님 창고에 가기전, 목사 창고로 먼저가는디 그래도 해야 합니까 ?????
십일조 or 헌금이 목사 창고에 들어가는 곳이 교회인가요?
멜기세덱에게 바친 전리품의 10분의1을 영적인 의미로 생각하여
영적전쟁의 승리의 전리품인 10분의1을 드려야 하지않을까요?
영적인 의미인데 왜!
돈을 내야만 하는지...
영적전쟁의 승리의 전리품이 왜!
돈이어야 되나요.
뉴스엔조이에 들어가면 조성기목사님(작가이기도함)( 장신대출신임) 십일조는 없다" 저술에 관해서 인터뷰 기사도 떴어요
아마 보수 정통 십일조론자들에게 매맞을 각오로 저술해 내놓은것 같아요 얼마전에 성결교 어느목사님도 십일조제도 신약에는 없다면서 저술을 내놓기도 했어요. 세상을 보면 십일조안해도 대기업들 잘되고 이교 신앙 가진자들도 떵떵거리고 살더라고요. 저주받아야 하는데 말이지요. 지금 유대교인들인 유대인도 십일조제도 버렸답니다. 성경데로라면 레위인말고 고아와 과부를 위해 써야하는데 교회당유지와 다른용도로 쓰니 십일조제도 고수한 자들은 결국 목사사례비 교회당 운영 생각하는거죠.
억지논리 .말 갖다맞추기.
이 글이 어떤 근거에 의해서 억지 논리인가요? 이미 생각이 한쪽으로 치우치신거 같은데요/
십일조를 하는 자들은 율법주의자들이다. 라는 새로운 율법을 만들어 내는 개혁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즉 십일조를 하는 자는 예수님의 죽음을 헛되이 하는 것이라는 새로운 율법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기존에 있는 단점을 보완하고 새로운 비전을 목표로 삼아 새 틀을 짜는 것도 개혁입니다.
이곳에서 나름 개혁의 방향을 맞추어 놓고 심지를 굳게 가진 사람들도 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개혁을 마치 교회와 목사님들의 비리를 누가 잘 찾아내서 창피를 주고 망신을 주는가 하는 경연대회를 하고 있는 듯한 느낌 때문에 마음이 무겁습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점은 왜 개혁의 대상에서 나는 한 번도 거론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나는 예수님을 믿지도 않고, 교회를 다니지도 않고, 또 죄와 무관하게 살고 있기 때문은 아닌가요?
또 개혁은 잘 못된 생각과 행동을 인식하고 기존의 틀과 관점을 벗어나 개선하고 새로운 비전을 품고 나아가는 것이라 봅니다.
십일조가 잘못 되었다면 나는 어떤 기준을 가지게 되었으며 또 어떻게 실천하여 그 이후에는 어떻게 변화 되었는지 그 변화가 나에게 어떤 유익을 가져다 주었는지에 대해서 말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우리도 당신과 같은 변화를 받아 들일때 어떤 유익이 있게 될지 기대와 소망을 가질 수 있는 롤 모델이 되어 주실 분 있으신지 산 경험을 나누어 주시면 좋겠습니다.
또 교회와 목사님의 죄와 비리를 내 입으로 내 손으로 떠들고 비난해서 얻었던 유익에 대해서도 나누어 주십시오.
실제로 그와 같은 소식이나 뉴스를 들을때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오호라!! 또 한(묵) 발견!! 재미있는 가쉽거리가 생겼다는 마음입니까?
괴로운 심정입니까?
저는 제 형제중에 가장 아끼는 사람이 참으로 안타까운 행동과 이해하기 어려운 처지요 누가 봐도 비난의 손가락질을 하게 될 상황에 있을 때 침묵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입을 엽니다.
혹시 하나님께서 가는 귀가 먹었을까봐 소상히 아뢰며 구원의 손길을 달라고 간절히 외칩니다.
사람들 앞에서는 혹여나 누가 들을까봐 신음소리도 안냅니다.
물론 기회를 구하여 그에게 내가 본 그의 문제점과 해결점에 대해서 논의하고 함께 고민합니다.
어느 각도가 되었든 하나님 앞에서 해결 되어질 것을 전제로 목적을 둡니다.
언제나 문제의 해결은 하나님의 손에 있었음을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혹시 교회와 목사는 내 형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까? 적입니까?
한 사람의 목사가 잘 못 하면 한국 교회의 모든 목사들을 비난 해도 당연합니까?
그렇다면 이 곳 예향에 한 사람의 이단이 있으면 모두가 이단입니까?
개혁의 주체라면 또 이분들과 동조하는 사람들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교회의 성도들은 모두가 유기적 통일체 즉,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입니다.
만약 이러한 형제들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과 비전들이 내가 옳다 하는 방향으로 바꿔(개혁)져야 된다면 그들의 마음을 자물쇠로 잠구도록 방치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더더군다나 내가 나서서 그 철문에 직접 용접까지 할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 개혁의 분위기는 모든 교회와 목사들과 그들과 함께하는 사람들을 대적하여 싸우는 분위기입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개혁의 대상들을 적으로 만들고 나서 누구를 개혁할 것인지 심각하게 고려해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개혁은 누군가의 생각에서부터 출발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주신 생각에서 출발했는지 또 다른 누군가로부터 받은 생각인지 확인해 보아야 되는데..
그 열매를 보면 언제나 답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부탁하신 사랑과 온유와 절제로 이 일을 풀어가고 있는지 그들의 악함을 핑계와 구실로 삼아 그들과 같은 목소리의 톤으로 대응하고 있는지 한번 스스로를 점검해보는 시간들을 가져 봤으면 좋겠습니다.
일반인들의 카페가 아닌 예향의 카페인 이곳에서 저의 느낌과 바램을 나누었습니다.
예향이 예향되기를 소망합니다.
기독교인들이 인색하고 약삭빠르고 치졸해진 이유가 십일도 헌금 등등으로 교회에 다 내고 나면 이웃에 손을 펼수가 없겠죠......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
그럼 십일조도 꼭 지키시고, 할례도 받으시고, 무당을 보거든 돌로 쳐 죽이시고,, 율법의 하나도 빠트리지 마시고 다 이루세요.// 이미지님.. 심지어 율법적 십일조의 용도도 결국은 이웃사랑 실천이었습니다. 신명기 16장을 잘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십일조는 이미 국가에 세금을 다 낸후에, 왜 꼭 교회에다가만 왜 10퍼센트를 해야할까요. 그럼 우리 이웃은 뭘로 돌아봐야 할까요.. 그래서 신약에서 예수님은 약자에게 하는것이 나에게 하는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예수님은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잊지 말라 말씀하셨습니다. 왜? 그분은 유대인으로 태어나셨습니다. 할례도 받으셨습니다. 왜 유대인으로 태어나셨는지는 잘 아실거라 믿어요. 유대인으로 태어나셔서 유대관습을 지켜주면서 그들을 구원하기 원하셨던겁니다. 심지어 뭉둥병환자들을 고치시고, 당시 율법대로 깨끗해진 자신들의 몸을 제사장에게 가서 보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일들은 십자가에서 율법을 완성(Completion) 하기 전이셨습니다. 제사로는 우리가 완벽해질 수 없었으므로, 예수님 스스로 완전한 제물이 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완전한 제물이 되시면서 성전의 휘장을 찢으셨습니다. 이는 더이상 제사제도가 존재할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제사가 없는곳에 어찌 십일조의 논리가 따라다닐 수 있을까요. 이제우리는 인간 제사장이 아닌, 영원하신 대 제사장(그리스도)의 명령대로, 약자나 불쌍한 이들에게 베풀는것이, 예수님의 제물이 불완전한 것이 아닌, 완전한 제물이었음을 인정하는 태도입니다. 그런데 계속해서 십일조를 주장하는것은 계속해서 제사를 지내야 하고 , 인간 제사장을 세워야 한다는 논리를 주장하는것이나 마찬가지므로, 결국 예수님의 희생을 불완전한 것으로 보는것이나 마찬가지가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도대체 예수 그리스도는 왜 십자가에 달리셨나요.
이미지님께서는 십일조에 동의한다고 하셨습니다. 하든 안하든 그건 개인의 몫으로 남겨두는 풍토에서는 그게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인데
실제로 교회현장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다는게 문제라는 거죠. 말로는 개인의 몫이라고 할지 모르겠습니다만 대부분 노골적으로 십일조를
강조합니다. 또 교회에서 직분을 주는 기준에서 십일조를 데이터화하지요. 이런 풍토에서는 개인의 믿음의 선택과 자유 따위는 ' 기만적인 레토릭' 에
불과합니다. 예향과 개혁진영에서는 이제까지 강경한 ' 반십일조' 노선을 고수했습니다. 그러나 노선은 그렇다 할지라도 태도와 자세에서만큼은
율법적이어서는 안된다는 반성이 공존했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십일조를 신앙수준의 지표로 삼는것이나 십일조로 재물의 복을 보장받을 수 있다는 뻔뻔한 거짓말에 반대합니다.
그러나 십일조 생활을 지키면서 자신의 믿음을 점검하고 시험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존중합니다.
그건 개인이 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개인의 신앙에 국한하지 않고 일반화하고 심지어 남을 정죄하거나 가늠하는 척도로
이용하는 현실에는 비판적 시각이 필요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예향이 반대하는 것은 그런 류의 사기성 농후한 율법주의, 바리새적인
교만한과 자고함이지 스스로 결정하고 조용히 실행하는 평범한 성도들, 나아가 거두는것 만큼이나 건강하게 재정을 사용하는
일에 깊은 관심을 가진 교회와 성도들이 아닙니다. 예향이 무엇을 반대하고 무엇을 경계하는지 충분히 이해하셨기를 바라며
실제로 교회들이 얼마나 돈을 강조하는지, 그것이 성경의 정말 중요한 여러 가르침들보다 얼마나
더 비대해져있고 조화와 균형이 깨져있는지, 얼마나 심각한 공해인지, 얼마나 연약한 성도들이
그런 가르침에 피폐해져가는지 현장에 좀 더 민감해지시길 바래봅니다. 그건 결코 불평분자들의
막무가내 악다구니가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