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경제사
필자 ‘브래드러드 들롱’은 자본시장 및 화폐금융 영역의 하버드와 보스턴의 교수다. 정의상 유토피아란 ‘모든 것이 완벽한 상태에 도달한 세상이다.’ 옥스퍼드 사전에는 “모든 사람이 완벽에 도달한 상상 속의 상태 혹은 장소”로 정의 되어있다. 인류 역사의 대부분은 여러 완벽한 이상의 유혹에 빠져 재앙으로 끝나는 데에 소모되었다. 인류는 1870년 이후 ‘맬더스’의 함정에서 벗어나 과거에는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수준의 물질적 풍요를 누리게 되었다. 농경의 발견 이래 1만 년 동안 인류가 겪은 지독한 빈곤에서 벗어날 수 있는 변화가 시작되었다. 그렇다고 GDP 대비 2010년의 인류가 1870년 인류보다 물질적으로 21배 더 풍요롭게 살았다는 의미는 아니다. 타임머신을 타고 1870년으로 돌아가서 당시 사람들에게 2010년이 되면 인류가 얼마나 더 부유하지를 말해준다고 해보자. 그들은 2010년의 세상을 지상낙원 유토피아라고 생각할 것이 확실하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150년이 지난 지금도 인류는 유토피아에 도달하지 못했다.
시장경제는 ‘재산권 property right’를 인정한다. 오늘날 하루에 2달러 이하로 살아가는 ‘최극빈층’은 세계 인구의 9%가 안 되나, 1870년에는 무려 70%였다. 이 세상에는 충분한 칼로리가 생산되어 누구도 굶주릴 필요가 없다. 이 세상에는 충분한 양, 이상의 물건이 매일 생산되어 사방으로 널려 있으니, 누구도 결핍을 느낄 필요가 없다. 시장경제는 이제 80억에 달하는 인간들이 놀라울 정도의 조정과 협동으로 고도의 생산적 분업을 조직해 내게끔 한다. 1870년 이후 인류의 기술과 물질적 부는 과거에는 상상도 못 할 정도로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오랜 기간 인간에게는 다음 해, 아니 당장 다음 주에 일용할 식량, 주거, 의류를 어떻게 획득할 것인가가 가장 절박하고 중요한 문제지만, 2010년의 평범한 가정은 이제 더 이상 이런 문제에 직면하는 일이 없어졌다.
1933년 ‘릴리언 크로스’가 손지갑으로 암살범 ‘주세페 장가라’를 치지 않았다면, 총알은 ‘안톤 체르마크’ 시카고 시장의 폐가 아니라 ‘루스벨트’ 대통령 당선인의 뇌를 관통했을 것이다. ‘루스벨트’가 죽고 ‘체르마크’가 살았다면, 1930년대 대공항 동안 미국의 역사는 지금과 달랐을 것이다. 철도가 건설되기 전에는 농산물을 육로로 160킬로 이상 운반하기는 불가능했다. 소나 말이 운반하는 만큼의 사료를 먹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주요 곡물과 생필품은 그 지방에서 자급자족하는 생활을 해야 한다. 가장 큰 운송 혁명은 석탄을 사용하는 증기선의 등장이었다. 한 달 이상 걸리는 리버풀과 뉴욕의 운송을 단 9일 만에 배는 주파했다. 이후 1870년대 유럽의 극빈층도 유럽에서 미국으로 바다를 건너와 일하러 갈 수 있었다.
1870년 이전 유럽 제국주의는 대체로 항구와 그 배후지에만 국한되는 문제는 아니다. 이후 내륙으로 거침없이 치고 들어가서 전 세계를 식민지로 만들었다. 1914년이 되면 유럽의 정복이나 지배를 받지 않은 나라는 모로코, 에티오피아, 이란, 아프가니스탄, 네팔, 태국, 티베트, 중국 정도 뿐이고 일본은 한국과 대만을 식민지로 만들었다. 전신을 전 세계로 확산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해저 전신 케이블 설치가 어려웠다. 최대 선박이 제작되지 않아 예멘에서 뭄바이까지 해저 케이블이 연결되었다. 이로써 영국에서 인도로 명령과 뉴스가 전달되는 데 몇 달의 시간을 허비할 필요가 없어졌다. 이것은 의사결정에 많은 정보와 신뢰와 보안을 개선했다. 투자 자본이 영국에서 미국으로 향하고 이윤을 창출했다. 오늘날의 ‘J.P JP모건체이스’와 ‘모건 스탠리’는 이 파트너십의 산물이다.
1870년의 부자들이 소유한 품목은 1770년의 부자보다 더 많이 소유했을 것이다. 품목은 집, 옷, 말과 마차, 가구 등으로 동일했다. 따라서 자신이 얼마나 부자인지를 과시하려면, 자신이 거느린 하인의 수를 보여주는 쪽이 효과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1870년대 이후로 변화가 왔다. “전화기. 축음기, 타자기, 카메라, 자동차 등 끝도 없이 새로운 것들이 줄줄이 나타났다.” 이때 미국 인구의 4%만이 수세식 화장실을 사용했다. 테슬라는 합스부르크 제국의 크로아티아 ‘크라지나’ 지역의 ‘스밀랸’ 마을에서 1856년 태어났다. 아버지는 사제로 글을 읽고 쓰지만, 어머니는 문맹이었다. 그는 전기공학자가 되고 싶었다. 헝가리 국영 전화회사에서 일했다. 그는 에디슨 회사에 취직하려고 추천서를 들고 도미해 취직한다.
‘에디슨’은 직류전기 시스템은 동네마다 발전소를 세워야 한다. 테슬라의 교류 전기 시스템은 장거리 전력선을 통해 전송이 가능하다. 에디슨의 직류 방식보다 효율적이고 저렴하다. 에디슨과 투자자는 전류 전쟁을 벌인다. 에디슨은 테슬라가 자기 밑에 있을 때 계획했던 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에디슨의 직류 시스템은 덜 위험하지만, 낮은 전압으로 장거리 송전을 해야 했으므로 전기 손실이 매우 컸다. ‘웨스팅하우스’와 ‘에디슨’ 양쪽 모두 표준의 자리를 얻기 위해, 전력망 건설의 속도전을 벌이다가 파산 지경에 이르렀다. 이긴 쪽은 ‘웨스팅하우스’와 ‘테슬라’였다.
1942년 ‘조지프 슘페테’가 쓴 ”자본주의는 결코 정지해 있을 수 없다. 자본주의의 엔진에 시동을 걸고 작동시키는 근본적인 자극은 자본주의 기업이 창출하는 새로운 소비재, 새로운 생산 방식이나 운송 방식, 새로운 시장, 새로운 형태의 산업조직이다. 이러한 창조적 파괴야말로 자본주의에 대한 본질적 사실이다. 창조는 막대한 부를 창출하며, 파괴는 빈곤을 가져온다. 그리고 이러한 위협 때문에 불확실성과 불안이 만들어진다. 기술적 가능성의 미래가 현실이 된다면, 파괴의 결과에 따른 반란을 억제하기 위해 누군가가 이 과정을 관리해야 한다“. 주장했다.
‘제임스 매디슨’은 <연방주의자 논집>에 ”민주주의란 항상 혼란과 갈등의 연속이었고, 개인의 안전이나 재산권과 양립할 수 없었으며 그 죽음이 폭력적인 만큼이나 삶이 짧았다‘라고 했다. 다시 말하지만, 18세기 후반 부자들과 권력자들 사이에서 민주주의 열정을 가진 이는 거의 없었다고 해도 좋다는 말이다. 모든 남녀에 보통 선거권을 준 나라는 1906년의 핀란드다. 영국은 1918년에 21세 남성과 30세 이상의 여성에게 선거권을 줬다. 미국의 여성 참정권은 수십 년 동안 치열하게 싸웠다. 1920년에야 의회에서 통과됐다.
1840년에 일리노이와 미시간 운하가 완공되면서 미시시피강과 오대호가 연결되었다. 당시 시카고의 인구는 4천 명이었다. 1900년에는 200만 명을 돌파한다. 미국은 금본위제를 버리고 금 1대 은 16의 비율로 은화의 자유로운 주조의 허용을 요구했다. 1893년 금융 공항에 대한 반작용이었다. “나는 돈도 친구도 없이 시카고에 왔어. 그런 주제에 사회가 받아들일 수 없는 이단적인 주장을 한다니, 어떤 사회도 그런 사람에게 생활비를 주지는 않아 사회의 현존하는 모습을 받아들이고 거기서 돈을 벌던 자 아니면 굶어 죽든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해, 나는 죽는 길은 선택하지 않았지만 그게 최선일지 모르겠네” ’대로우‘가 친구 제인 ’아담스‘에 보낸 편지다. ’아담스‘는 ’루스벨트‘ 행정부의 노동부 장관을 했던 인물이다.
흑인 지도자 ’브커 워싱턴‘은 흑인은 투표권이나 사회통합 백인과 동등한 대우를 주장하기 전에 교육과 일자리에 관심의 초점을 둬야 하며, 흑인 처지에 향상을 추구하는 북부 백인들 노력에 함께해야 한다. 흑인들은 기초 교육을 받아야 하고 스스로 복속하는 대가로 법치 질서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서있는 바로 그곳에서 물을 길어라.”가 워싱턴의 구호였다. 듀보이스는 교육이 문제의 해법이라 보면서 “재능 있는 상위 10%”라 불리는 엘리트를 위한 대학 교육을 주장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백인 우월주의는 흑인을 짓밟을 것이고, 뭔가 이루는 흑인이 없으면 백인들을 정당화할 것이다. “장장 3세기에 걸쳐 이들은 흑인을 대담하게 린치했고, 흑인 여성이 바른 행실을 하려면 강간했고, 흑인이 야망을 품으면 밟았고, 굴종, 외설적 행동, 무기력을 조장하고 강제했다.”. 하지만 “하나님을 지켜 남은 자들은 계속해서 살아남고 존속”하게 되어있으며 “이로써 흑인 혈통의 역량, 흑인들의 가능성”을 입증할 것이라고 말했다.
유럽에서도 부, 명예, 혈연적 귀족성이 사라지고 폭넓은 신분 상승의 기회가 주어지자, 평등을 지향하는 사회주의나 그렇게 오해받을 수 있는 것은 모두 매력을 잃었다. 프랑스 혁명으로 제2공화국 정치인은 겁을 먹었다. 1789년 이후 프랑스 정치에 교훈이 있다. 어떤 정부가 들어서든 파리의 군중들은 정부를 무너뜨릴 힘이 있으며, 이들 막기 위해서는 훈련된 군대를 투입 군중에 총격을 가하고, 데모대의 바리케이드를 날려버리도록 명령할 수 있는 ’나폴레옹‘이나 그와 같은 인물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당시 사회학자 ’드니 디르로‘는 ”마지막 성직자의 창자를 빼서 마지막 왕의 목을 매달자!”라고 말했다. 1791년 이후 프랑스에는 ’자코뱅‘ 공포 정치의 독재, 무능하고 부패한 5인 총재정부, ’제1통령‘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독재, 1848년까지의 군주제, 제1공화국, 제2공화국, ’나폴레옹‘의 조카 ’루이 나폴레옹‘의 제국 아닌 제국, 사회주의 ’코뮌‘, ’코뮌‘을 제압하고 왕정주의자 대통령으로 추대된 야심가인 전 국방장관 ’조루주 불랑제‘가 독일에 대한 복수, 헌법 개정, 군주제 회복 등의 약속을 내걸고 나섰을 때 정치적 혼란은 정점에 도달했다고 필자는 주장한다.
2024.10.05.
20세기의 경제사
브래드퍼드 들롱 지음
홍기빈 옮김
생각의 힘 간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