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생명의 길
행24.1-23
시 작 기 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 된 분들과 교제하는 것이 큰 위로가 됩니다. 그리고 가늘 길이 더 선면해 집니다. 말씀으로 그리고 만남으로 서로 나누는 예수님을 통해서 생명이 더 자라나게 됨을 느낍니다. 주님이 십자가 아래에서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을 하나의 공동체로 만들어 주셨음을 믿음으로 받습니다.
묵상 나눔을 통해서 안팎의 공격에서 살아남는 길은 전신갑주임을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적은 어둠의 세력의 권력자이고 내가 할 일은 하나님이 주시는 무기로 무장하는 것입니다. 진리와 의와 믿음과 구원 그리고 성령이 주시는 말씀과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무기를 저에게 주소서.
본 문 내 용
닷새 뒤에,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변호사 더둘로와 몇몇 장로들을 데리고 총독 앞에서 바울을 고소하였습니다. 더둘로가 말합니다. “벨릭스 총독님, 우리는 총독님 덕분으로 평안을 누리고 있으며, 총독님은 많은 개혁을 이루셨습니다. 이것에 관해서 모든 면에서 어디서나 인정하고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총독님을 붙들지 않겠으니, 너그러운 마음으로 우리의 고발을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이 자는 전염병 같은 자요, 온 세계의 유대인들 가운데 소동을 일으키는 자요, 나사렛 도당의 우두머리입니다. 그가 성전을 모독하기까지 하므로 우리는 그를 붙잡았습니다. 총독님이 친히 신문해 보시면 우리가 고발하는 이유를 아시게 될 것입니다.” 이에 곁에 있던 유대인들도 합세하였습니다.
총독이 바울에게 말할 기회를 주니, 바울이 대답하였습니다. “총독님이 여러 해 동안 이 나라의 재판장으로 계신 것을 내가 알고 기쁜 마음으로 변호하겠습니다. 내가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올라간 지 12일 밖에 되지 않은 것은 금방 아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고발자들은 내가 성전, 회당, 시내 어디에서나 누구와 논쟁을 하거나 군중을 선동하고 모으거나 하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고발을 정당화할 아무런 증거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나는 총독님께 이 사실을 고백합니다. 나는 그들이 이단이라고 하는 그 ‘길’에 따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과 예언서를 다 믿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나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있는 데, 그 소망은 의로운 사람과 불의한 사람의 부활이 장차 있으리라는 것입니다. 이 고발자들도 그것을 믿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언제나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거리낌 없는 양심을 가지려고 힘쓰고 있습니다.
나는 여러 해 만에, 구제금을 전달하고, 하나님께 제물을 바치려고 우리 나라로 돌아왔습니다. 그들은 내가 성전에서 성결에식을 하는 것을 보았을 뿐이고, 소동을 일으키거나 작당을 하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이 총독님 앞에서 직접 고발하는 것이 마땅하고, 그것도 아니면, 내가 의회에 끌려갔을 때, 이 사람들이 무슨 잘못을 찾아냈는지 말해 보라고 하셔야 합니다. 거기서 내가 외친 것은 ‘내가 당신들 앞에 선 것은, 죽은 사람의 부활에 관한 문제 때문입니다’라고 한 것 밖에 없습니다. “
벨릭스는 그 ‘길’에 관해서 꽤 정확히 알고 있었으므로, “천부장 루시아가 내려오거든, 이 소송을 처리하겠다”고 신문을 연기하였고, 바울을 지키되, 자유를 주고, 지인들이 와서 돌보아주는 것을 허락하라고 명하였습니다.
주 해
변호사 더둘로는 벨릭스 총독의 환심을 사려고 아부하는 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실제로는, 벨릭스는 그 때까지 다른 총독들에 비해서 가장 평화를 이루지 못하고 유대인의 미움을 받았고, 너그럽지 못하고 뇌물을 많이 받았다고 합니다. 바울은 짧게 정확한 사실로 그를 평가하면서 시작하고 있습니다. 진리를 선포하는 사람과 거짓된 말의 기술로 진실을 가리고 진리를 무너뜨리는 상반된 양쪽을 보게 됩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합리적 이유와 시간, 기간, 동기등을 사실과 증거에 입각해서 변호하였지만 그들은 유죄판결을 얻어내기 위해 거짓 증인과 억측과 정치적 술수를 이용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재판과 변호의 기술과 원칙을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이 재판의 실제 쟁점은 ‘부활’이라고 본문은 다시 강조하고 있습니다. 부활은 무엇이며 그 안에 들어있는 것이 무엇이며 언제 시작되어서 어떤 과정을 거쳐서 언제 이루지는 지, 어떻게 그 길에 다다를 수 있는 지, 그리고 그 안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지를 사실과 역사와 하나님과 그 나라의 실제를 통해서 이해하는 것이 우리 신앙의 핵심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그 ‘길’은, ‘구원의 길, 생명의 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길입니다(시1.1, 86.11, 25.4). 그리고 그 길은 최후 심판의 날에 부활하는 소망의 길입니다. 바울은 부활 소망을 품고 가는 그 길을 전한다고 하여서 소송당하고 공격당하고 살해음모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 분이 나타나심으로 실증된 사실입니다. 그것은 거짓으로 교묘히 꾸며낸 종교적 환상이 아니라, 역사이고 실제입니다. 부활은 모든 사람의 죄 때문에 심판받아 죽으신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신 것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영원’에서 아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생명이 나타난 것이고, 그 생명은 예수님께 있고 이제 십자가에서 함께 죽은 우리에게 주시는 생명입니다. 그리고 그 부활 생명이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역사가 되고 실제가 되고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리고 주님 다시 오실 날에 그 부활은 모든 믿는 자에게 완성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 ‘길’을 따라 가야합니다. 부활 소망을 품고 생명의 길을 따라 가야합니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양심에 거리낌없도록 한 마음으로 그 길을 가야합니다. 그러나 그 길을 가려할 때 사탄을 우두머리로 하는 어둠의 세력이 합세하여, 본문에 나오는 것처럼, 집요하게 붙들어서 끄집어 내리려고 할 것은 자명합니다.
나 의 묵 상
예수님이 주신 생명을 낭비하고 그 길의 장애물이 있을 때 멈추어 서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보는 눈이 약하니 실증된 부활을 보지 못하고 소망하지 않고 붙잡지 않았습니다. 한 마음으로 주님의 길을 가지 않았습니다. 두 마음, 우상숭배로 마음이 나뉘어 버렸습니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양심에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함께 죽고 그 안에서 부활한 것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들에게 주님의 부활소망과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영원한 생명이고 아버지가 약속하시어서 그 아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것을 부어주시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부활만큼 확실한 사실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삼위 하나님이 역사에서 공증하시고 이루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부활에 내 소망을 두고 사는 것이 좋습니다. 주님을 부활하게 하신 그 생명이 이제 나에게도 역사하고 있음을 믿음으로 받아 누림이 즐겁습니다.
기 도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양심에 거리낌이 없도록 흔들리지 말고 주님의 길을 가게 하소서. 주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부어주소서. 진리에서 벗어난 마음과 행동을 하지 않게 하소서.
예수님의 부활 소망과 예수님의 생명을 모든 사람 모든 민족에게 부어주소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을 찾아 구하는 물결을 일으키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