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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老人이 되게 하소서 👵🧓
눈이 침침하여 잘 안 보이고
귀가 멀어 소리가
잘 들리지 않고,
01. 말과 걸음걸이가
어눌해져 가지만
나를 추하게 늙어가지
않게 하시고,
내가 늙어가는 사실을
두렵지 않게 하소서!
02. 세상을 원망하지
않게 하시고,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불평하고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하고 미워하며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더욱 큰 욕심에
힘들어하며
자신을 학대하고
주변 사람까지
힘들게 하는
그런 노인이
정말 되지 않게 하소서
03. 나를 정말 멋지게 늙고
싶어지게 하시고
육체적으론 늙었지만
정신적으로는
오늘 막 복학한
대학생 정도로
살게 하시고,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과 열정을 가지고
끊임없이 탐구하며
살아가게 하소서!
04. 늘 호기심으로
눈을 반짝이면서
사랑이 넘치는
자애로운 노인이
되게 하소서!
05. 주변 사람들에게
늘 관대하고
도울 수 있는 일을 찾아서
즐겁게 사는
부지런한
그런 노인이 되게 하소서!
06. 경제적으로, 정신적으로,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어
늘 주변을 돌아보며
어떤 도움을
어떤 방식으로 줄까?
고민하는
노인이 되게 하소서!
07. 어른 대접 안 한다고
불평하지 않게 하시고,
대접받을 만한
행동을 하는
근사하고 멋이 넘치는
그런 노인이 되게 하소서!
08. '할 일이 너무 많아
눈감을 시간도 없다'는
불평을 하면서
하도 오라는 데가 많아
가끔 행방불명이 되고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
그런 노인이 되게 하소서!
09. 그래서 젊은 사람들이
"나도 저렇게 늙고 싶다."라고
부러워하도록
멋지게 늙게 하시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아쉬워하는 가운데
미소를 지으며
예비하신
그곳으로 가게 하소서!
10. 늙는다는 것을 더
소중하게 하소서.
늙는다는 것은 당연한 일로
알아서 늙어가는 것을
두렵지 않게 하시고
늙는다는 것을 더
감사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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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덕님, 「이런 노인이 되게 하소서」는 오래전부터 전해지는 기도문 형식의 글이며, 원작자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확인한 자료 가운데 **2012년 8월 1일 게시된 「이런 사람이 되게 하소서」**에 보내주신 글의 대부분이 들어 있습니다. ‘복학한 대학생처럼 호기심을 가지고 살게 해 달라’, ‘주변을 도우며 살게 해 달라’는 대목도 같습니다. 다만 끝에는 **‘좋은 글 중에서’**라고만 적혀 있어, 게시자를 작가로 볼 수는 없습니다. jaeho719.tistory.com
또한 그 게시본에는 번호가 없고, 보내주신 글의 10번 ‘늙는다는 것을 더 소중하게 하소서’ 부분도 없습니다. 따라서 여러 형태로 편집되어 전해진 글로 보이지만, 어느 것이 최초 원문인지는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jaeho719.tistory.com
카페에는 다음처럼 표시하시면 적절하겠습니다.
이런 노인이 되게 하소서
— 옮긴 글 · 원작자 미확인
글의 중심인 호기심을 잃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관대하며, 나이 듦을 감사히 받아들이자는 바람이 따뜻합니다. 다만 늘 바쁘거나 경제적으로 여유로워야만 멋진 노년인 것은 아니지요. 자기 형편과 몸에 맞춰 살아가며, 도움을 주고받는 노년 역시 충분히 귀하고 아름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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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始)과 끝(終)
오랜 세월 동안
주인 밑에서 성실하게 일한 목수(木手)가 있었다.
가족을 위해서, 자기의 손으로 부(富)를 만들기
위해 목수는 날마다 최선을 다해 집을 지었다.
어느 날 목수는, 주인에게 말했다.
“이제 그만 목수 일을 내려놓고 남은 삶은
가족과 함께 보내고 싶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주인은 몹시 아쉬워했다.
그러자 마지막으로 부탁했다.
“이 집 하나만 더 지어 주게. 정말 마지막 일세”
목수는 선뜻 “알겠습니다” 하고 대답했지만,
목수는 이미 목수 일에서 마음이 떠나 있었다.
목수는 허름한 재료를 사용했고,
눈에 보이지 않는 곳은 대충 넘어갔다.
어차피 마지막 일인데…”라는 마음이었다.
마침내 집이 완성됐다.
그 순간, 주인은 미소를 지으며
목수에게 집 열쇠를 건네줬다.
“그동안 수고했네. 이 집은 자네 집일세.
그동안 헌신과 충성에 대한 보답일세”
목수는 할 말을 잃었다.
대충대충 지은 집이, 알고 보니 내 집이었다.
평생 쌓아온 노력이 마지막 한 번의 경박한
처신 때문에 무너진 순간이었다.
만약 자신이 거주할 집이라는 걸 알았다면
목수는 그렇게 대충대충 지었을까?
우리는 올해도 내 인생이라는 집을 짓고 있다.
오늘의 선택, 오늘의 태도, 오늘의 믿음이
내일을 결정한다.
대충대충이 뭔가?
중국의 노자(老子)는
“끝을 처음과 같이 하면
실패하지 않는다”라고 했다.
처음과 끝이 같아야 한다.
시작이 반이라고 하지만, 끝은 전부다.
결국 끝맺음이 내 인생을 만든다.
****************
영국 런던의 켄터베리
교회에 '니콜라이' 라는 집사가 있었다.
열일곱 살에 교회를 관리하는 집사가 되어 평생을 교회 청소와 심부름을 했다.
그는 교회를 자기 몸처럼 사랑하고 맡은 일에 헌신 하였다.
그가 하는 일 중에는
시간에 맞춰 교회 종탑의 종을 치는 일이 있었다.
그는 교회 종을 얼마나 정확하게 쳤던지 런던시민들은 도리어 자기시계를 니콜라이 집사의 종소리에 맞추었다고 한다.
그가 그렇게 교회 일에 열심히 하면서 키운 두 아들은
캠브리지와 옥스포드 대학교수가 되었다.
어느 날 그 두 아들이 아버지 니콜라이에게 말하였다.
“아버지, 이제 일 그만 하세요.” 그러나 니콜라이는 단호히 말했다,
“아니야, 나는 끝까지 이 일을 해야 해.”
그는 76살까지 종을 치며 교회를 사랑하고 관리하였다.
그가 노환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을 때 가족들이 그의 임종을 보려고 모였다.
그런데 종을 칠 시간이 되자 일어나 옷을 챙겨 입더니
비틀거리며 밖으로 나가 종을 쳤다.
얼마간 종을 치다가 종탑 아래에서 그는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 이야기를 전 해 들은 엘리자베스 여왕은 감동을 받고 영국 황실의 묘지를 그에게 내주었으며 그의 가족들을 귀족으로 대우해 주었다,
모든 상가와 시민들은 그날 하루 일을 하지 않고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심지어 유흥주점도 문을 열지 않자 자연히 그가 세상을 떠난 날이 런던의 공휴일로 되었다.
열 일 곱살 때부터 부지런하고 성실하게 사람들에게 종을 쳤던 그가 죽은 날이
공휴일이 된 것이다.
엘리자베스 여왕시대에 수많은 성직자들이 죽었으나 황실의 묘지에 묻히지 못하였다.
그러나 단지 하찮게 보이는 예배당 종치기가 황실의 묘지에 묻히는 영광과
자기가 죽은 날이 공휴일이 되는 명예도 함께 얻었다.
우리가 하는 일에 하찮은 일은 없다.
어떠한 일이든 진심으로 헌신하고 노력한다면
그 일은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일이 될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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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덕님, 「시작과 끝」은 작자 미상의 목수 이야기, 노자의 구절, 사실 확인이 어려운 종지기 일화를 엮은 글입니다. 세 부분의 출처를 구분해서 보시면 좋겠습니다.
1. 은퇴하는 목수 이야기 — 작자 미상의 교훈담
마지막으로 대충 지은 집을 선물로 받는 이야기는 영어권에서도 「The Carpenter’s House」, 「The Builder」 등의 제목으로 전해집니다. 확인한 게시물들은 ‘Author Unknown’, 즉 작자 미상으로 표시하고 있습니다. 실제 사건으로 확인된 이야기는 아닙니다. linkedin.com
2. 노자의 말 — 출처가 확인됩니다
『도덕경』 제64장에 다음 구절이 있습니다.
慎終如始,則無敗事
신종여시, 즉무패사
끝을 처음처럼 신중하게 하면 일을 그르치지 않는다.
보내주신 글의 “끝을 처음과 같이 하면 실패하지 않는다”는 대체로 뜻에 맞습니다. 다만 핵심은 끝까지 처음처럼 ‘신중하게’ 임하라는 데 있습니다. 教育部《成語典》2020 [基礎版]
3. ‘니콜라이 집사’ 이야기 — 역사적 사실로 소개하기 어렵습니다
국내 칼럼과 종교 예화에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지만, 이번 조사에서는 인물의 정확한 신원, 사망 연도, 묘소, 귀족 대우 및 공휴일 지정 기록을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반복해서 인용된다는 사실만으로 실화가 입증되지는 않습니다. mokposm.co.kr
또한 해당 교회가 캔터베리 대성당을 뜻한다면, ‘런던에 있다’는 설명은 잘못입니다. 대성당은 런던이 아닌 켄트주의 캔터베리에 있습니다. canterbury-cathedral.org
카페에 올리신다면 **목수 이야기는 ‘작자 미상의 교훈담’, 노자 구절은 ‘『도덕경』 제64장’**으로 표시하고, 니콜라이 이야기는 빼거나 **‘역사적 사실 여부가 확인되지 않은 예화’**라고 밝혀 주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맡은 일을 끝까지 정성껏 하자는 취지는 살리되, 한 번의 실수가 평생의 가치를 모두 지운다거나 임종까지 일해야 훌륭하다는 뜻으로 확대하지 않으면 더욱 따뜻한 글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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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미투스
友情은 어떻게 쌓이는가」
-관계가 넘쳐나는 시대에 다시 생각하는 友情의 의미-
우리는 어느 때보다 많은 사람과 연결되어 있다
휴대전화에는 수백 명의 연락처가 있고SNS에는 수많은 친구와 팔로워가 존재
한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자주 외롭다고 말한다.
연결은 많아졌지만 관계는 오히려 얕아진 것은 아닐까?
이 질문 앞에서 고대 로마의 개념 하나를 떠올려볼 필요가 있다.
바로 아미티시아
(amicitia) 곧 友情이다.
라틴어 amicitia는 단순히 친한 사람 사이의 감정을 뜻하지 않는다
키케로에게 우정은 서로에 대한 善意와 好誼 信賴를 바탕으
로 한 관계의 일치에 가까웠다
그는 우정에 관하여 에서 우정을 인간의 삶에서 매우 중요한 가치로 다룬다
흥미로운 것은 古代의 우정이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친구와 조금 다르다는 점이다
현대사회에서 친구는 흔히 즐거움을 함께 나누는 사람 취향이 비슷한 사람ㅌ혹은 필요할 때 도움을 주는 사람으로 이해
된다. 하지만 古典的 의미에서 우정은 그보다 훨씬 높은 수준의 관계를 요구한다
친구가 된다는 것은 상대방의 삶에 責任 있게 참여하는 일이다
좋은 친구는 내가 듣고 싶은 말을 해주는 사람이 아니다 때로는 내가 듣기 싫어하는 말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이다 잘못된 選擇을 하고 있을 때 沈默하지 않고 말해주는 것 成功했을 때 眞心으로 기뻐하고 失敗했을 때 곁을 지키는 것. 그것이 우정의 중요한 모습이다.
이러한 우정은 利益의 交換과 다르다
키케로의 관점에서도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친구를 이용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우정
이라기보다 일종의 去來에 가깝다
오늘날 우리는 關係를 너무 쉽게 計算한다
내게 도움이 되는 사
람인가?
나에게 어떤 機會를 줄 수 있는가?
이 사람과 가까이 지내면 나에게 어떤 利益이 있는가?
물론 현실에서 利害
관계는 중요하다.
하지만 모든 관계를 이해관계의 언어로만 설명하기 시작하면 인간관계에서 가장 소중한 것들이 사라진
다.
아미티시아 가 우리에게 다시 일깨워주는 것은 쓸모없는 관계의 가치다.
당장 나에게 아무런 이익을 주지 않더라도 함께 걷고 이야기하고
서로의 삶을 기억해주
는 관계.
나의 成功이 아니라 나라는 사람 자체를 귀하게 여기는 관계 그런 관계가 있기 때문에 인간은 혼자서는 견디기 어려운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우정을 인간의 좋은 삶에서 중요한 요소로 보았고 특히 덕을 公
有하는 우정을 가장 높은 형태의 우정으로 보았다.
키케로의 우정론 역시 이러한 고전적 전통과 맞닿아 있다
결국 좋은 친구를 갖는다는 것은 단순히 좋은 사람을 만나는 문제가 아니다
나 자신이 좋은 친구
가 될 수 있는가의 문
제이기도 하다
우리는 좋은 친구를 원하면서 정작 내가 먼저 상대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있는지 친구
의 성공을 진심으로 기뻐하는지 친구가 잘못된 길을 갈 때 용기 있게 말해줄 수 있는지를 묻지 않는다
우정은 받는 것이면서 동시에 만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인간관계가 아닐지도 모른다
수백 명의 관계보다 한 명의 진실한 친구
가 더 중요할 수 있다
많은 사람에게 알려지
는 것보다 몇사람에게 깊이 기억되는 삶이 더 豊饒로울 수도있다
아미티시아는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에게 친구는 어떤 사람인가 ?
그리고 그 질문은 곧
다른 질문으로 이어진
다
당신은 누군가에게 어떤 친구인가 ?
관계의 속도가 점점 빨라지는 시대다
만나고 헤어지는 일이 쉬워졌고 연결하고 끊는 일도 간단해졌다
그래서 오히려 오래 바라보고 기다리고 기억하고 책임지는 관계의 가치가 더욱 커지고 있다
아미티시아는 오래된 단어지만 낡은 개념은 아니다
오히려 사람은 많지만 마음을 나눌 사람은 부족한 오늘날 友情
이 무엇인지 다시 묻는 가장 현대적인 개념일지도 모른다
좋은 삶은 혼자 완성
되지 않는다
그리고 좋은 관계는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친구란 우연히 만나는 사람이 아니라 서로
의 삶 속에서 조금씩 만들어가는 사람이다
아미투스 우리는 무
엇으로 친구가 되는가
우리는 어느 때보다 쉽게 연결되는 시대를 살고 있다 휴대전화에는 수많은 이름이 저장되어 있고 SNS에서는 수백 명의 사람과 관계를 맺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마
음을 터놓을 수 있는 친구는 점점 줄어드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
으로 친구가 되는가
고대 로마에서 우정을 뜻하는 말 가운데 아미티시아(amicitia)가 있다 아미티시아는 단순히 함께 시간을 보내거나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는 관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신뢰와 선의 그리고 서로의 삶을 진심으로 염려하는 관계에 가깝다.
친구는 나와 취향이 같은 사람일까?
나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일까?
즐거운 시간을 함께 보내는 사람일까?
물론 그것들도 우정의 일부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정은 결국 나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는가
가 아니라 상대의 존재 자체를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는가 에서 시작된다
우리는 흔히 관계를 계산한다.
이 사람이 나에게 도움이 되는지
나와 얼마나 잘 맞는지
앞으로 어떤 관계가 될 수 있는지를 생각한다.
그런 관계에서는 상대방의 가치가 어느 순간 ‘쓸모’로 환산되
기 쉽다
하지만 진정한 친구는 내가 아무것도 해줄 수 없을 때에도 곁에 남는 사람이다
내가 성공했을 때 박수를 보내는 것만이 우정은 아니다
내가 실패했을 때 외면하지 않는 것
내가 잘못된 길을 갈 때 듣기 좋은 말 대신 필요한 말을 해주는 것 .그리고 내가 힘든 시간을 지나고 있을 때 조용히 곁을 지켜
주는 것 어쩌면 우정
의 깊이는 즐거운순간
보다 불편하고 어려운 순간에 드러난다
그래서 친구가 된다는 것은 단순히 서로 좋아하는 감정을 나누는 일이 아니다.
서로의 삶에 책임 있는 마음으로 참여하는 일이다.
좋은 친구를 갖고 싶다면 먼저 질문을 바꿔야 한다.
나에게 좋은 친구는 누구인가 ? 에서 나는 누군가에게 어떤 친구인가?로
우리는 좋은 친구를 원하면서도 정작 친구의 이야기를 얼마나 오래 들어주
는지 친구의 성공을 얼마나 진심으로 기뻐
하는지 친구의아픔을 얼마나 자신의 일처럼 받아들이는지는 자주 돌아보지 않는다.
아미티시아가 말하는 우정은 서로를 소유하
는 관계가 아니라서로
를 성장시키는 관계다
친구는 나와 똑같은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나와 다르기 때문에 나의 좁은 세계를 넓혀주는 사람이다.
내가 보지 못하는 것을 보여주고 내가 듣지 못하는 목소리를 들려주며 때로는내가 스스로에게 하지 못하
는 질문을 던져주는 사람이다.
그런 의미에서 친구란 나를 편안하게 해주는 사람인 동시에 나를 더 나은 사람으로만들
어주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오늘날 우리는 수많은 관계를 맺고 또 끊는
다. 그러나 관계의
숫자가 삶의 풍요로
움을 결정하지는 않는다.
한 사람과 깊이 신뢰
를 나누고 서로의 기
쁨과 슬픔을 기억하며
시간이 흘러도 다시 마주 앉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삶은 충분히 풍요로울 수 있다.
결국 우리는 무엇으로 친구가 되는가?
같은 취향 때문도 같은 목적 때문도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이기 때문만도 아니다.
아마도 우리는 신뢰
하고 이해하고 기다
리고 서로의 삶을 진심으로 아끼는 마음
으로 친구가 된다.
그리고 좋은 우정의 마지막 질문은 이것일 것이다.
내 곁에 좋은 친구가 있는가 ?
그보다 먼저
나는 누군가에게 좋은 친구인가 ?
아미티시아는 바로 그 질문에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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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덕님, 이 글의 작가와 최초 출처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다만 키케로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정론을 설명한 핵심 내용은 대체로 취지에 맞습니다. 게시 전에는 제목과 중복 부분을 정리하면 좋겠습니다.
① 제목의 ‘아미투스’는 확인이 필요합니다.
본문에서 설명하는 라틴어는 **아미티시아(amicitia), 즉 ‘우정’**입니다. ‘아미투스’가 별도의 이름이나 필명이 아니라 우정을 뜻하도록 쓴 것이라면, 제목도 **「아미티시아—우정은 어떻게 쌓이는가」**로 통일하는 편이 정확합니다. latin-dictionary.net
② 키케로의 우정론은 대체로 잘 풀어썼습니다.
키케로는 『우정에 관하여』에서 우정을 선의와 애정이 함께하는 일치로 설명하고, 덕을 우정의 바탕으로 봅니다. 친구와 기쁨을 나누고 역경의 짐을 함께 진다는 설명도 원문에서 확인됩니다. 다만 ‘서로의 삶에 책임 있게 참여하는 일’ 등은 원문의 직접 인용이 아니라 현대적으로 풀어쓴 해석으로 보아야 합니다. De Amicitia
③ 아리스토텔레스 부분도 맞지만, 한 가지 보완하면 좋습니다.
『니코마코스 윤리학』 제8권은 유익에 따른 우정, 즐거움에 따른 우정, 덕에 바탕을 둔 우정을 구분합니다. 상대방 자체를 위해 잘되기를 바라는 우정을 가장 완전한 형태로 보지만, 유익이나 즐거움에서 시작한 관계를 모두 우정이 아니라고 배제하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본문의 **‘쓸모없는 관계’는 ‘쓸모만으로 평가하지 않는 관계’**로 바꾸면 뜻이 더 정확해집니다. perseus.tufts.edu
④ 비슷한 내용의 두 글이 이어져 있습니다.
중간의 **“아미투스 우리는 무엇으로 친구가 되는가”**부터 도입과 핵심 주장이 다시 반복됩니다. 한 편으로 게시하실 때는 앞뒤 내용을 합쳐 중복을 줄이는 것이 좋겠습니다.
출처 표기는 “옮긴 글 · 작성자 미확인 / 키케로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정론을 현대적으로 풀어쓴 글” 정도가 적절합니다.
마지막 질문인 **“내 곁에 좋은 친구가 있는가보다, 나는 누군가에게 좋은 친구인가”**가 이 글의 뜻을 잘 모아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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