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년회다 뭐다 일 년 가운데 가장 바쁜 철이다. 나 역시 여기저기 불려(?) 다니느라 온 몸이 까라질 지경이다. 술이라면 자다가다 벌떡 일어나는 주당이지만 이제 슬슬 술이 무섭다(정말일까). 입맛도 딱 떨어졌다. 뱃속 든든히 채우며 입맛 살릴, 뭐 좋은 거 없을까?
보쌈김치가 단박에 입맛 살리는 집
서울 영등포 ‘일번가’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터. 80년대부터 90년대까지 ‘원투쓰리’, ‘ABC’, ‘카네기’, ‘UFO’ 같은 디스코텍이 젊은이들의 발길을 붙들어 맸던 곳이다. 영등포역에서 건너자마자 처음 만나는 골목 어귀에는 길가에 가마솥 걸어놓고 흐무러지게 퍼주던 감자탕집들도 한때 유명했다. 역전 동네라는 게 원래 뜨내기손님 받기 바쁘다 보니 햇수 묵히는 맛집들이 드물다. 그래도 영등포에는 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꽤 괜찮은 맛집들이 여럿 있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영등포 일번가에는 이제 손에 꼽을 정도로, 그 맛 그대로 오랜 세월 지키는 집이 거의 없다. 그 가운데 25년 세월, 결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그 맛 변하지 않은 집을 지면에나마 소개하려 한다. '00보쌈'이 바로 그 집이다. 내가 저 집에 처음 발을 들여놓은 게 1986년이다. 한창 성업하던 때 우연히 들렀다가 단골이 될 수밖에 없었다. 물론 맛 때문이다.
소주 마니아들은 동의하시리라 믿는데, 그저 안주로는 돼지고기가 제격이라는 사실이다. 그나마 싸고 맛있고 영양 풍부하고…, 누군들 돼지고기를 소주에 딱 맞는 최고안주라 안 할까? 소고기 좋아하는 분들도 많지만 사실 말이 나왔으니까 하는 얘기지만, 소고기야 국물 우려먹기에나 제격이지 씹는 맛이야 돼지고기 못 따라온다. 지난 시절, 탄광촌이나 먼지 많은 공장의 근로자들이 속을 씻어내기 위해 먹었던 돼지고기, 그리고 소주 한 잔.
돼지고기 요리 방법이야 널리고 널렸다. 그 가운데서도 기름기 쪽 빠지도록 삶아내 맛깔스러운 보쌈김치에 싸서 넘길 때 목울대를 비집는 고소함과 시원함, 그야말로 일품이다. 그런데 이즈막 일부 프랜차이즈나 인테리어에만 신경 쓴 신식(?) 보쌈집에 가보면 무슨 비싼 복어 회 쳐 놓은 것도 아니고, 세숫대야만한 접시에 종잇장처럼 썰어 날쌍하게 늘어놓은 품이 정나미가 다 떨어진다. 보쌈김치는 왜 그리 데면데면, 간사시리 고기와 따로 노는지.
그저 삶은 돼지고기는 옛날 장터마당에서 국밥집 할머니가 썰어주시듯 두툼하면서도 흐드러지게 담아내야 제 맛이다. 비게고 살코기고 간에 칼질은 대충대충, 담아낸 모양은 한 주먹 아무렇게나 집어 올린 품이라야 한다. 보쌈김치는 일단 시원해야지. 적당하게 달고, 아삭하게 씹히면서 배추물이 스르르, 혀끝에 감돌아야 한다. 어쩌다 어금니에 걸리는 굴은 당연히 싱싱해야 하고, 톡 터지면서 바다 냄새까지 오롯하게 풍겨야 제 맛이다.
'00보쌈'은 적어도 내가 드나들었던 지난 20여 년 세월, 변하지 않았다. 그 자리 그대로, 그 맛 그대로, 그 비결을 사장 이수희(54)씨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 인척 어른이 25년 전에 처음 시작했고 제가 이어받은 게 한 십여 년 됐어요. 비결이요? 그런 거 없어요. 그저 변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뿐이지요. 아무리 물가가 비싸도 제일 좋은 재료만을 쓰려고 노력합니다. 김치만큼은 제가 어른께 배운 방법 그대로 직접 담그고요. 겉절이 보쌈김치의 생명은 신선함이거든요? 그래서 우리 집은 이틀 이상 된 김치는 절대 손님상에 안 내 놓아요. 김치 담글 때 우리 집만의 비법이 있기는 하죠(웃음)."
사장 이수희씨는 참 넉넉한 사람이다. 후덕한 맏며느리상인 주인아주머니는 밖에 잠시라도 나갔다 올 때면 직원들 간식거리를 단 한 봉지라도 꼭 챙겨 들어온다. 그 맘씨 그대로 손님상을 늘 살핀다. 모자란 거 없어요? 뭐 더 갖다 드릴까? 하며 한시도 가만히 있지 않는다. 그게 단골이 끊어지지 않는 비결인 모양이다. 오죽하면 나는 집이 의왕시인데도 툭하면 영등포까지 찾아가거나, 서울에서 볼 일이 있으면 꼭 들러야만 직성이 풀린다.
여기까지 읽은 분들은 눈치 채셨겠지만 나는 돼지고기를 무척 좋아한다. 그 가운데서도 보쌈김치에 싸먹는 삶은 돼지고기를 가장 좋아한다. 다녀 본 집이 어디 한두 군데일까? 어쨌거나 주머니가 가벼운 연인들과 시골장터의 구수한 맛을 떠올리고자 하는 분들께 이집을 강력하게 추천한다. 인테리어 같은 겉모습에 신경 별로 안 쓰는 분이라면, 깊고 후덕한 인심, 제대로 된 옛 맛을 음미하고 싶은 분이라면 결코 후회하지 않으실 터!
꼭 한 번 가보실 분들을 위해
주말에는 예약이 필수겠죠? ☎ 02-2678-5664 대한민국에 하나밖에 없는 맛집이라고 우기지는 않겠습니다. 제가 20여 년 동안 드나든 집으로 추천할 만하기에 기사로 옮겨 봤습니다. 후덕한 인심과 시골장터에서 만날 수 있는 그런 맛(특유의 시원한 김치)은 감히 자신합니다.
출처: 오마이뉴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