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1~604 隋文帝. 이름은 양견楊堅. 수의 1대 황제.
자식덕분에 묻힌 정치력 먼치킨
아들과는 달리 명군 취급을 받으며, 이때만큼은 수나라도 안정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국토도 넓혔고 제도를 정비했으며 과거제의 전신인 선거제를 통해 중앙집권적으로 발전했다. 문제 때 연호가 개황(開皇, 581~600)이었기 때문에 이 시기를 개황의 치(開皇之治)라고 한다.
목차
1 중국역사에 남을 커다란 한획 중국 재통일
2 후대왕조에 길이 영향을 끼친 정치능력
3 문제의 아킬레스건 관롱집단
4 말년의 후계자 선정
1 중국역사에 남을 커다란 한획 중국 재통일 ¶
사실 수나라가 워낙 빨리, 그것도 성대하게 멸망했기 때문에 수나라 관련된 모든 인물에 대한 평가가 좋지 못해 수문제 또한 오랫동안 심하게 폄하당하거나 무시당했었다. 그러나 이런 평가는 서양학자들이 중국사를 공부하면서 일변하게 되는데, 특히 오래간 분열해있던 중국을 재통일시킨 점은 진시황의 중국통일과 버금가는 업적으로 평가받는다.
유럽은 로마 제국의 분열 이후 통일되지 못하고 조각조각 분열, 중국은 수문제에 의해 재통합당하면서 현재의 거대국가로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의의때문에 서양에서 세계사 중요 인물을 뽑으면 100위 안, 그것도 제왕들 중에서는 10위 안에 꼽힐 정도로 중요한 인물로 평가받고있다.
2 후대왕조에 길이 영향을 끼친 정치능력 ¶
게다가 권문귀족들의 강력한 반발에도 불구하고,[1] 각자의 토지를 지닌 소규모 자작농을 대규모로 늘리고 '삼장제'와 '균전제'를 확립시킨 것은 지대한 업적으로 수문제가 확립한 이런 토지정책은 중국의 마지막 왕조 청나라 시기까지 이어진 통일왕조들의 토지정책의 뼈대로 작용했다.
또한 사치를 줄이고 검소한 생활을 하면서 세금을 줄여주었고, 어떤 해에는 아예 세금을 징수하지 않았다. 또한 지방에까지 관리를 파견하고 500가를 향으로, 100가를 리로 조직하여 통치체계를 한차원 높게 끌어올렸으며, 어느 정도 제국의 기틀이 잡히자 관료들에게도 따로 경비를 마련해 주어 관료들과 귀족들이 함부로 백성들에게 폐를 끼치지 못하도록 하였다. 게다가 관료들의 부패를 끔찍히 싫어했던 탓에 관료들의 뇌물수수를 엄격히 밝히고, 뇌물과 관련이 있는 관료는 모두 참했다.(이러니 귀족들의 평가가 나쁠수 밖에...)[2]
이런 통치가 계속되자 귀족계층의 반발과 분노와는 다르게, 오랜 전란으로 피폐해져있고 지쳐있던 백성들의 기쁨과 신뢰는 상상을 초월하게 높았다. 양견의 통치하에서 수나라 백성들의 삶은 급격하게 부유해졌으며 등록된 인구 또한 폭발적으로 상승했다.[3] 이때 쌓인 국부가 상상을 초월해 그 이전 왕조들은 꿈도 꾸지 못했던 황하-양자강을 연결시키는 대운하건설을 처음으로 시도했던 것이 수문제 양견이었다.[4]
이처럼 수문제는 스스로 조악한 옷을 입고, 검소한 식단을 유지하며, 모든 일을 하층민의 삶에 따라 시도하려 한 보기드문 명군이라 할 수 있었고, 이에 '한이 고조가 통일하고 문경치세를 거쳐 한무제시절에야 이룩한 번영을 양견은 그가 통일하고 그가 이루어냈다.'라는 찬사를 받을 정도의 먼치킨적인 정치능력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가 이룩한 정치제도들은 후에 당나라 율법의 기초가 되어 중국통일왕조체제의 뼈대로 군림하게 된다.
3 문제의 아킬레스건 관롱집단 ¶
허나 이처럼 모든 것에 하층민을 중심으로 정책을 수행하는 것은 자신들이 무시당한다 여긴 권문세족들의 분노를 불러일으켰고, 수많은 반란이라는 형태로 되돌아왔다.
수문제 시절에야 워낙 문제의 뛰어난 정치력때문에 금새 진압당했지만 문제 또한 위기를 느끼고 귀족들의 관심을 돌리기위해 대규모 정복전쟁을 시작[5]하였으며 이런 악순환은 아들 수양제가 폭주할 수 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아간다. 귀족들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대규모궁전을 증축하고, 대운하를 건설하고, 대규모 정벌사업을 벌이는 활동이 그것이다.[6]
이는 양견이 관롱집단이라는 장안주변 귀족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성장한 제왕이라는 점에서 발생하는 역학관계로, 그들 덕에 제왕이 된 탓에 그들의 세력과 의견을 무시하기가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들은 양견의 정치철학과 다르게 대규모농장을 바탕으로한 귀족정치를 열망했다. 따라서 말년 점차노골적이 되는 관롱집단과의 결별에서 양견은 숙청과 비리척결이라는 초강수를 쓰게 되고 이에따른 반발과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정치에 대한 관심을 잃게된다[7].
이런 점에서 수나라의 빠른 몰락은 예견된 수순이었을지도 모른다.[8]
4 말년의 후계자 선정 ¶
다섯 아들 모두가 정실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에 겉으로만 봐선 큰 문제가 없었고, 황후인 문헌황후 독고씨(文獻皇后 獨孤氏)도 당대에 보기드문 여걸로써 결혼 시 '자신 이외의 여인에게서 자식을 보지않는다.'라는 약속을 받아낼 정도였으며, 통치 시에도 수문제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9]
장남인 양용을 폐태자하고 아들인 수양제를 태자로 삼은 것도 문헌황후의 입김이었다고 한다. 솔직하고 자유분방한 양용은 첩실을 둔 것을 숨기지 않았지만 간교한 양광은 첩실을 숨겨 일처일부제 지지자였던 문헌황후가 총애해 태자로 삼게 되었다고. 허나 이 점은 수문제와 문헌황후가 힘들여 이룩한 평생의 공로를 말아먹을만한 실책이었다.
말년엔 다시 양용을 태자로 만들고, 양광을 폐위시키려하나, 양광의 부하에 의해 암살당한다. 또는 양광의 쿠데타에 놀라 충격을 받아 죽었다고도 한다. 여기에는 일화가 있는데, 양광이 남조의 황녀로 수문제의 후궁이 되었던 진씨의 미모에 반해 그녀를 겁탈하려고 했다(겁탈했다는 말도 있다). 이에 진씨가 울면서 수문제에게 하소연하자, 수문제는 그제서야 양광의 진모를 알고 "황후가 나를 망쳤구나!"(이때 이미 문헌황후는 사망)하고 한탄하며 양용을 복위시키려 했지만 양광이 선수를 쳐서 사망. 이후 진씨는 양광의 후궁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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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수문제와 인척관계로 연결된 관농집단의 집단적 반발+발란, 특히 대규모지주가 경제정책의 중심이었던 양자강 이남의 남조에서의 반발이 심각했다. 간단히 생각하자면 한번 정복전쟁으로 통일을 달성한 이후, 대규모 지주들을 조지는 2차 통일전쟁을 시작했다고 생각하면 간단하다. 결국 수나라를 무너트린 것도 대규모지주출신인 관농집단의 이연이 건립한 당이었다. 애초에 수나라의 왕족 양씨와 당나라를 건국한 이연의 이씨 가문이 모조리 한 고을에 모여살던 세력이었다.
[2] 다만 이 점은 자신들의 특권을 빼앗긴 귀족들(당시 관료들도 대다수는 귀족출신이었다.)의 반발을 불러왔다. 수나라가 막장취급을 당하며 급격히 붕괴한 이유중에 하나가 귀족계층의 반발이다.
[3] 수나라의 붕괴과정에서 누락된 수많은 인구들은 후 측천무후-당현종 시절의 전성기 당나라에 가야 겨우 복구가 된다.
[4] 다만 양견은 대운하공사를 시작하고 얼마 안 되어 대운하건설로 백성들이 고통받는다는 말때문에 곧바로 대운하건설을 중단한다. 문제는 아들놈이 더한 스케일로 시작했다는 게...
[5] 고구려와 수 사이의 전쟁은 이 때부터 시작된다. 물론 시작은 고구려의 선빵이었지만, 수의 입장에서도 매치할만한 상대가 필요했기 때문에 즐거운 마음으로 싸우러 나갔다.
[6] 지금보면야 골때리는 짓이지만 그 당시에 권문세족들은 모두 환영하고 찬성하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 이후 수나라가 멸망하면서 수양제가 대표격으로 욕을 먹는 것이지 이런 대규모사업을 제왕 혼자 할 수 있을 정도로 수나라의 황권은 강력하지 못했다. 주요 세도가들의 지지가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7] 이 관롱집단, 특히 6진중에서도 무천진을 중심으로 하는 무천진 군벌은 당나라까지 영향을 미치다가 결국 당나라 고종대에야 겨우 소멸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측천무후. 다만 측천무후가 날려버린 것은 아니고, 측천무후를 핑계로 당고종이 손을 봤다는 것이 최근의 평가이다. 대략 숙종이 장희빈을 핑계로 환국정치를 해서 왕권 강화한 것과 비슷한 형태였다고 보면 된다. 자세한 것은 측천무후항목 참고.
[8] 민심이 천심이라는 말은 이상 속의 야기일 뿐, 주요 귀족들만 장악할 수 있다면 나라는 오래 가는 게 현실이다. 중국통일왕조에 비해 현저하게 하층민에 대한 장악능력이 떨어지던 로마제국은 중국통일왕조보다 월등히 높은 귀족포섭능력으로 훨씬 오랜 기간을 버텼다.
[9] 다만 결과는 썩 좋지 못했다. 의욕과 능력은 별개의 문제... 하지만 수문제는 이런 아내의 의견을 존중해주었다고 한다. 아마 자신과 동등한 입장에서 의견을 주고받을 수 있는 아내가 있다는 점이 지지세력과도 싸워야했던 고독한 제왕의 마음에 크나큰 위안이 되어주었을 것이다. 또한 독고씨는 자신의 출신성분이 관농집단임에도 불구하고 양견의 정치에 지지를 표했다. 양견 입장에서는 얼마나 힘이 났을까...
첫댓글 ~_~;
듣기로는 어떤해에는 아주 세금을 징수하지 않은 이유가...
흑자재정 덕분에 세금을 줄여주고도 결국 잉여재정이 넘쳐나서 세금을 거두어도 더 쌓아둘 곳이 없어서 였다고...;;;
그냥 올해는 세금을 다 면해주지... 이게 3년인가 연속이었다는 기억이...;;;
사실 한국에서는 나쁜놈이 맞습니다. 고구려 몇 번 쳐들어왔었으니(...)
ps.이 말에는 머리가 없습니다.
말머리점..
수 문제는 칭찬 받아 마땅하죠.그 아들이 좀 문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