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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기성공한 메디슨
‘1세대 벤처기업의 성공신화’, ‘1호 IT벤처’, ‘벤처업계의 대부’…. 2000년까지 메디슨과 창업자인 이민화 회장을 따라다닌 화려한 수식어다. 하지만 메디슨은 무리한 사업 확장으로 유동성 위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2002년 부도와 법정관리를 겪으면서 대중으로부터 잊혀졌다. 그랬던 메디슨이 체력을 완전히 회복하고 새로운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다. 급성장, 부도와 법정관리 4년여 만의 졸업, 재도약 등 한국 벤처기업의 역사와 궤를 같이 한 메디슨의 25년을 되짚어 봤다.
메디슨은 한국을 대표하는 의료용 초음파 진단장비 기업이다. 2009년 업계 순위 세계 5위, 세계시장 점유율은 7%에 이른다. 전체 매출의 80% 이상은 해외시장에서 이뤄진다. 세계 12개국에 현지법인을 설립하고 110여 개 나라에 판매망을 갖추고 있다.
메디슨은 2008년 창사 이래 최대의 매출 실적을 기록했다. 메디슨이 부도나기 전인 2000년 매출액은 2074억원, 영업이익은 62억원으로 최고정점이었다. 그런데 2008년 2299억원의 매출과 441억원의 영업이익으로 전성기의 실적을 뛰어넘은 것. 법정관리에서 벗어난 지 불과 2년 만의 성과였다.
지난해 세계적인 경제 위기로 인해 2074억원의 매출과 307억원의 영업이익을 기록한 메디슨은 올해 3000억원 이상의 매출과 20%대의 영업이익률을 달성한다는 계획이다. 2012년에는 초음파 진단장비 분야(5000억원)와 비초음파 진단장비 분야(5000억원)를 합쳐 총 매출액 1조원을 달성한다는 공격적인 목표를 세웠다.
여관방에서 창업해 국내 시장 1위 도약
메디슨의 탄생은 불가능에 대한 도전의 결과였다. 메디슨은 1983년 한국과학기술원(KAIST)의 국책연구과제인 초음파 진단기에 대한 개발 프로젝트에서 시작됐다. 당시 기술로 봤을 때 쉽지 않은 연구였지만, 1984년 초음파 진단기에 대한 연구를 완성, 공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상용화를 담당했던 업체가 이를 포기하면서 프로젝트는 난항에 빠졌다. 그동안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갈 위기에 처하자, 당시 책임연구원이었던 이민화 연구원이 초음파 진단기 기술의 상업화에 나섰다. 철저한 사업계획서와 시장 분석 전략을 가지고 자금력을 갖춘 업체들을 찾아다녔다. 하지만 반응은 냉소적이었다. 불투명한 전망과 외국계 대기업과의 경쟁, 첨단 의료기기라는 특수성으로 인해 투자자를 구하는 것이 쉽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이민화 연구원은 직접 회사를 설립하기로 결심했다. 임시 창업 준비 본부는 카이스트 앞의 여관방이었다. 1985년 5월, 여관방에서 첨단기술을 집약한 고해상도의 초음파 진단기가 태어났다. 이는 GE, 도시바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이룬 성과였다.
이민화 연구원은 1985년 7월 카이스트 출신 전문가 7명과 함께 메디슨을 창업하고 ‘기술에 의한 세계 도전’에 나섰다. 메디슨은 2개월 뒤 자체 개발한 초음파 진단기를 국제의료기기전(KIMES)에 출품했고, 시행착오 끝에 녹십자병원에 납품하는 데 성공했다. 녹십자병원과의 첫 계약은 메디슨이 영업 전략을 완전히 바꾸게 된 계기가 됐다. 기술력, 마케팅, 브랜드 등에서 외국계 기업과 맞붙어선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중소도시부터 공략하기로 한 것이다. 메디슨은 대도시의 도심보다는 중소도시에 판매 거점을 확보했고, 지방의 개인병원을 대상으로 판매망을 넓히는 전략을 펼쳐 나갔다.
운도 따랐다. 당시 정부가 고가의 의료기기 수입 규제 정책을 펼치면서 GE, 도시바 등 글로벌 기업들이 주춤하고 있었기 때문. 그 사이 메디슨은 경쟁사가 내버려둔 중소도시 시장에서 조용히 시장 점유율을 높여나갔다.
1987년부터는 터키, 이탈리아, 파키스탄, 인도 등 5개 나라의 업체와 계약을 체결하고 해외시장 공략에 나섰다. 터키를 기점으로 타 국가, 특히 유럽으로의 진출도 모색했다. 이처럼 1987년은 대도약을 위한 준비 기간이었다. 첫 상용화시킨 제품 이외에 신제품 개발도 이뤄졌고, 홍천 공장 준비, 영업조직 구축 등 기반을 마련하는 시기였다. 메디슨의 신화가 서서히 움트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메디슨은 1986년 매출 5억원을 시작으로 성장을 거듭했다. 창업 3년 만인 1988년에는 매출 30억원을 기록, 국내에 진출한 다국적 기업들을 제치고 시장 점유율 1위를 차지했다.
1990년에는 메디슨이 미국 FDA로부터 승인을 받는 획기적인 사건이 있었다. 초음파 진단기의 종주국인 미국에서 메디슨의 기술력이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것. 이는 당시 국내 의료기기 업계에 커다란 자부심을 주는 일대 사건이었다. 품질이 진일보함에 따라 메디슨은 영업 방향을 품질과 기술에 집중했다. 치열한 경쟁이 펼쳐지던 중소형 시장에서 메디슨은 신제품을 대거 개발하며 경쟁력을 높여나간 것이다.
그 결과 메디슨은 1992년 미국을 비롯해 독일, 러시아, 중국에 해외 합작 법인을 설립하고, 50개국에 해외 대리점을 구축하면서 전 세계 연간 수요의 6분의 1을 공급하는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메디슨은 인적자원이 풍부한 나라에는 공장을 설립해 생산단가를 낮추고, 기술력이 뛰어난 나라에는 공동 R&D를 통해 글로벌 경쟁력을 높여나가기 시작했다. 이러한 차별화 전략에 따라 메디슨은 1995년에 설계기술 및 핵심부품의 100% 국산화를 실현, 국내 초음파 진단기 시장의 70%, 세계시장의 17% 이상을 점유한 기업으로 성장했다. 매출액도 1989년 25억원에서 1994년에는 20배 가까이 성장한 476억원으로, 1995년에는 800억원으로 급증했다.
무리하게 사업 확장하다 부도
탄탄대로를 달리던 메디슨은 2002년 생사의 기로에 서게 된다. 초고속 성장에 성공한 이민화 회장이 사업 다각화라는 명분으로 전문 분야인 의료기기 개발과는 무관한 50여 개 벤처에 800억원 이상을 투자한 것이 발단이었다. 다양한 분야의 벤처기업을 모아 ‘벤처 연방제’를 구성한다는 것이 이 회장의 비전이었다. 하지만 이는 시너지 효과를 내지 못하고, 오히려 비핵심 영역에 대한 과다한 투자로 비효율성만 가져 왔다.
이러한 무분별한 문어발식 투자는 재무구조를 약화시키는 악순환의 고리가 됐다.
2000년 들어 벤처 거품이 꺼지면서 주식가치가 10분의 1로 떨어지자, 메디슨의 부채 총액은 3600억원으로 불어났다. 유동성 위기에 몰린 메디슨은 결국 2002년 1월 부도를 맞았다.
이후 메디슨은 벤처 거품과 함께 사라져버리는 듯했다. 그러나 채 3년이 지나기도 전에 메디슨은 회생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 2004년 매출 1542억원에 453억원의 순이익을 내며 대반전을 시작한 것이다. 신제품을 잇달아 출시하고 세계 초음파 진단기 시장에서 위상을 회복하기 시작했다.
현재 메디슨은 2009년 세계 경제 위기 속에서도 초음파 진단장비 시장 점유율을 7%까지 끌어올리면서 2074억원의 매출을 달성, 과거의 위상을 넘어서고 있다. 부도 당시 부채를 모두 털어내고 순자산 1500억원을 가진 우량기업으로 성장했다.
1980년대 글로벌 시장에서 의료용 초음파 영상기기 개발 경쟁에 참여했던 대부분의 업체들이 타 기업에 인수돼 잊혀졌다. 반면, 메디슨은 유일하게 성공적으로 독자생존의 길을 걸어온 셈이다. 이는 25년간 축적된 메디슨의 기술력과 노하우, 기업문화가 일궈낸 쾌거다.
재도약 성공 요인 1
부도에도 R&D 등 핵심인력 보강
메디슨은 법정관리 후 치열한 구조조정에 들어갔지만 무조건 인원을 감축하지는 않았다. 주력인 초음파 진단기 부문을 제외한 사업부를 분사시키는 대신, 아웃소싱 하던 A/S 인력을 흡수했다. 비주력 부문의 분사와 핵심인력의 흡수를 동시에 추진한 것이다. 메디슨은 초음파 진단기 이외에도 MRI, X-ray촬영기 등을 생산했지만 부도 이후 이들 분야는 분사를 통해 털어냈다.
핵심인력을 흡수하면서 결과적으로 본사 인력은 300명 선에서 오히려 늘어났다. 연구 개발 부서의 인력은 부도 전보다 50% 이상 증가했다. 비용 절감에만 집착해 인력을 줄이는 대신 필요한 핵심사업에 인원을 확충하는 쪽으로 구조조정의 가닥을 잡았던 것이다. 부도가 난 어려운 시기에서도 직원들의 월급이 나오지 않은 적은 딱 한 번뿐이었다.
회사의 노력에 직원들도 동참했다. 당시 메디슨 직원들에게 많은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다. 초음파 진단기는 고난이도의 기술과 판로 개척의 어려움 때문에 연구 개발은 물론 생산과 마케팅 모두 인력이 부족했다. 그런 데다 당시 외국계 글로벌 경쟁사는 한국 내 초음파 연구소 설립을 추진하는 등 한국 내 의료기기 시장을 적극적으로 확대해 나가는 시점이었다. 의료기기 업계가 아니어도 메디슨의 인력은 기술 중심의 IT 회사들에게 있어 영입 1순위였다. 하지만 실제로 부도 직후 회사를 떠난 직원은 손꼽을 정도였다.
21년을 근속한 함정호 상무는 “회사가 어려웠던 시기에도 조직에 대한 자부심과 사업성에 대한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에 직원 대부분이 회사를 믿고 더욱 똘똘 뭉쳐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메디슨은 국내 의료기기 업체 중 유일하게 매년 매출액의 약 10%를 R&D에 투자하고 있다. 연간 200억~300억원에 달하는 금액이다. 부도 후에도 연구 개발은 활발하게 진행됐다. 부도 전 1년에 한 건 정도씩 진행됐던 제품 개발 프로젝트가 부도 후에는 연간 3~4건이 동시에 이뤄졌을 정도다. 2009년까지 메디슨은 950건의 특허를 출원하고 400건을 등록했다. 연평균 150건의 새로운 아이디어들이 특허출원과 등록 과정에 있었다는 얘기다. 새로운 아이디어 하나가 탄생하는 데 채 사흘이 걸리지 않는 셈이다.
메디슨의 기술력은 국내 의료 산업에도 공헌하고 있다. 의료장비의 국산화로 인한 수입 대체 효과가 연간 500억원에 달한다. 해외시장에 비해 한국에서는 초음파 수입 장비 가격이 33% 인하된 가격에 거래되고 있으며, 메디슨 매출의 80% 이상이 해외 수출로 이뤄져 외화 획득에도 기여하고 있다.
재도약 성공 요인 2
공격적인 해외 마케팅과 영업망
메디슨의 부도는 당시 경쟁 업체들에겐 희소식이었다. 1990년대 이후 메디슨의 게릴라식 영업에 적잖게 타격을 받았던 경쟁 업체들에게 메디슨은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메디슨의 부도는 경쟁사들의 교란 전술에 활용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메디슨은 부도와 법정관리에도 불구하고 해외시장에서 공격적인 마케팅으로 다른 업체들과 경쟁했다. 우선 외상 거래를 금지했다. 이는 해외 대리점의 재고를 줄이는 것은 물론, 제품 대금에 대한 채권 부담을 줄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또 일부 품목은 공급가를 떨어뜨리기는커녕 더 비싼 가격으로 판매하기도 했다. 이를 통해 얻은 자금의 일부로 광고·홍보 규모를 늘려 메디슨이 건재함을 알려나갔다.
당시 해외 법인 6개와 100여 개에 달하는 국내외 대리점들의 본사에 대한 신뢰는 기술력과 함께 가장 큰 힘이 됐다. 국내외 영업 네트워크는 특히, 위기 때 그 힘을 보여줬다. 대리점들은 부도 이후에도 계속 제품을 공급 받기를 원했고, 먼저 나서 선급금을 보내주기까지 했을 정도였다. 이는 그동안 쌓아왔던 신뢰와 더불어 메디슨의 기술력과 함께 제품력을 인정받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2009년 취임한 손원길 대표(부회장)는 글로벌화를 더욱 가속화했다. 손 부회장은 취임 후 이탈리아와 인도에 법인을, 두바이에는 지점을 설립해 본격적인 글로벌 시장 점유율 확대에 돌입했다. 이후에도 적극적인 마케팅 활동을 통해 한 해 동안 11개 해외 법인과 1개 지점을 구축해 글로벌 네트워크를 더욱 강화했다.
메디슨은 전체 매출액에서 수출 비중이 80% 이상을 차지하고 있으며, 외화 가득률도 약 80%에 달한다. 글로벌 경기 위기로 인해 유럽 시장과 북남미 시장이 주춤거리고 있지만 성장세는 꾸준하다. 이는 아시아, 아프리카, 중동 지역 등 신흥시장의 매출 비중이 확대되고 있기 때문이다.
재도약 성공 요인 3
손원길 부회장은 메디슨의 최대주주인 칸서스자산운용의 공동대표였다가 지난해 초 대표이사로 취임했다. 글로벌 경제 위기를 극복하고, 메디슨의 미래를 책임지기 위해 투입된 구원투수인 셈이다.
손 부회장은 취임하자마자 직원들의 자기계발과 R&D 인프라 구축, 창조적 조직문화 마련 등 경영 혁신에 돌입했다. 손 부회장이 가장 강조한 부분은 소통. 메디슨의 가장 중요한 자산은 사람인데 소통이 원활히 이뤄져야 시너지 효과를 창출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손 부회장이 취임 후 많은 시간과 노력을 할애한 분야가 인재 양성과 소통이다. 그는 사내 MBA를 도입하고, 다양한 어학교육 프로그램을 실시해 관리자급 인재 육성을 강조했다. 전 세계 12개 법인과 110여 개 판매망을 보유한 메디슨에게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갖춘 글로벌 인재는 회사의 핵심 경쟁력이라는 것이 그의 소신이다.
사내 MBA에 참여한 김기형 경영지원팀 과장은 “전문 강사들이 회사를 방문해 경영실무는 물론 다양한 분야의 지식 습득에 큰 도움을 준다”며 “실제 MBA 과정에 뒤지지 않을 만큼 짜임새가 있어 직원들에게도 호응이 좋다”고 말했다.
또 TFT를 조직해서 특정 제품들의 프로모션을 진행함으로써 영업 직군 외 인력들이 해외시장에서 영업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했으며, 실제로 상당한 판매 실적을 거둔 바 있다.
손 부회장은 소통을 원활하게 돕는 여건을 조성하는 데도 힘써왔다. 회의실부터 대표이사실까지 사내 모든 사무공간을 투명한 유리로 교체했다. 상호 원활한 커뮤니케이션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에서 시작된 소통의 수단이다. 또 매일 아침마다 미팅을 열어 각 사업부의 현안을 공유하고, 회사 목표에 부합하는 대응방법 찾기에 고심해왔다. 이처럼 인재와 소통을 중시하는 기업문화는 메디슨이 재도약할 수 있는 발판이 돼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