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는 교계 웃는 교계 춤을 추는 3代 과제
-웃는 교계로 세상에 웃음을 줄 수 있어야-
사람이 사는 곳엔 울고 웃는 희로애락이 있기 마련이다. 웃고 울 수 있다는 건 살아 있다는 증거다. 우는 날보다 웃을 날이 많으면 좋겠다. 부흥과 발전이 조금 늦어져도 좋으니까 하나님 영광과 주의 나라 확장과 서로 서로 사랑하고 위해주며 상부상조하던 앞서간 믿음의 선조들의 정신을 계승하는데 핵심가치를 둘 때 웃을 수 있을 것이다. 범죄 없고 갈등과 분쟁, 고소고발 등 소송문제가 한 건도 없다면 좋을 때 웃을 수 있을 것이다. 문제발단을 미연에 차단하고 설령 어떤 민감 사안이 발생하더라도 더 크게 확산되지 않도록 머리를 맞대고 화해하게 해야 할 것이다. 서로 조금씩 손해를 보고 양보하면서 협의 협상 조정 화해로써 얽힌 문제를 해소시킴으로 한마음 한뜻이 되면 화합의 그곳에 큰 웃음이 넘치게 할 것이다. 주의 몸을 찢는 분열은 어떤 연유로든 설득력을 얻을 수 없다. 아직도 우리 교계엔 보이지 않는 무수한 장벽이 커뮤니티를 가로 막는 장애요소로 작용하고 있어 대하모니를 위한 장벽해소에 대한 과제를 풀어야 한다. 바이러스 감염증 재난으로 자녀들의 성화에 못 이겨 교회 공 예배 참석이 안 된데다 온라인 예배도 할 수 없는 어르신 신자들을 생각하니 눈물이 나고 여기 저기 안 아픈데 없으니 온 몸이 종합병원이니 자식 많아도 모시겠다는 자식 없는 독거노인, 무의탁노인을 보면서 설움의 눈물이 난다는 것이다.
사람 사는 곳이면 어디나 자식얘기가 대세를 이룬다. 교계도 예외가 아닐 것이다. 겉으로 의연한척해도 속으로는 펑펑 우는 사람도 있다는 것이다. 가슴으로 흘리는 피 눈물도 있다는 것이다. 목사장로권사의 자녀가 아직도 방황중인데다 중심을 못 잡고 사니 자식이 십자가 되고 이날까지 제대로 된 직장에도 못 들어가고 장가도 시집도 못간 자식을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혼기를 놓치고 쓸쓸하게 지내는 걸 보고 있으니 눈물이 난다. 졸업을 하고도 취업이 안 되고 목회자 장로 부모에게 돈을 갖다 쓰는 일도 있고, 직장 없다고 애인도 주변 친구도 떠나는 걸 보니 가슴이 미어진다. 그나마 어렵게 구한 직장에서 명퇴 당해 재취업도 별 따기가 되고 보니 마음 더 아파 운다. 목사 집안에 목사 나고, 장로 집안에 장로 나고, 권사 집안에 권사 나고, 집사 집안에 집사 나고 교사, 찬양대원 집안에 교사가 나고 찬양대원이 나면 웃는다. 희생과 헌신으로 교계 발전을 이끄는 모습을 보고자란 자녀세대가 교회봉사정신을 계승하는 전통도 모두를 기쁘게 웃게 해준다고 본다. 매를 맞고 집밖으로 쫓겨나며 갖은 핍박과 박해 속에 혈혈단신 맨주먹 쥐고 신앙에 입문해 신수 성가한 이들을 보며 기뻐 웃고, 주안에서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들과 우애 있게 지내는 걸 보며 좋아한다는 것이다.
고구마에 꽁보리밥을 먹는 가난한 살림가운데 허리띠 졸라가며 십일조에, 성미까지 드리며, 다섯 여섯 형제 중에 머리 영리한 자식을 대표주자로 출세시키기 위해 기독교학교에 보낸 부모를 봐서 잘돼야 한다. 그리고 나머지 형제를 봐서나 열심히 해서 부모명예 집안명예, 가문명예를 최고의 명문가 위치까지 끌어 올리도록 최선을 다해주는 모습에서 우리 모두는 기뻐하며 박수를 보낸다. 독학으로 아르바이트 해가며 주경야독으로 공부 많이 해서 신학계에 정치계에 경제계에, 그리고 교직에 법조계에 언론방송계에 취직해 승진까지 억대의 연봉에 결혼까지 잘해서 승승장구한다며 한 턱을 내는 걸 보며 웃는다. 기왕이면 우는 교계보다 웃는 교계이기를 바라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그러나 많은 날들 속에 어떻게 웃는 날만 있기를 바라겠는가? 하나님 없이 살면서 조상대대로 우상숭배에 자행자지하며 하나님 가슴에 아프게 한을 죄악을 회개눈물로 씻어내야 한다. 알고 짓고 모르고 지은 천인공로 할 죄를 주의 보혈로 씻어내기 위해 일부러 옷을 찢음이 아닌 마음을 찢으며 울어야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어쩔 수없이 울어야한다면 목 놓아 소리 내어 우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비온 뒤에 햇볕이 나는 것처럼 울음 뒤에 웃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설령 눈물이 마를 날이 없다 해도 그곳에 주의 병에 눈물을 담아둔다는 약속의 말씀이 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을 단을 거둔다.(시 126:5)’는 위로가 있다. 눈물을 닦아주는 위로가 있다면 그나마 괜찮을 것이다. 비올 때 우산을 빼앗지 말라 했다. 울고 싶은데 뺨 때린다는 말이 있다. 우는 자들을 품어줘야 한다. 요셉이 형들로부터 상처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눈물을 흘리며 두려워하지 않도록 하나님이 먼저 보낸 것이라고 달래는 걸 본다는 것이다. 전도자는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다고 했다. 새벽기도 때 우는 사람이 많았던 때가 있었다. 예수님은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했다. 우는 자들로 함께 울 것을 말씀하고 있다. 사람 앞에 울면 흉이 될 수 있기에 차라리 혼자 하나님 앞에 조용히 우는 게 낫다고 해 두 다리 뻗고 소리 내 울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 세상 가장 슬픈 사람들의 울음을 대신해서 울어줘야 한다. 민중의 울음을 우는 곡비와 같은 대신 울어주는 애곡직업이 있었다. 눈물을 잊고 사르라며 대신 울어주는 정서가 형성되도록 하면 좋겠다. 같이 울어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같이 울어 줄 수 있는 장치마련이 요청된다 할 것이다. 웃을 때 엔도르핀이 생긴다. 울 때는 글로블린 같은 호르몬이 나와 2배 이상 항체가 생겨 암세포를 억제한다고 한다.
눈물은 삶에 소중한 자양분이다. ‘눈물이 병 들면 웃음도 병이 든다.’는 말이 있다. ‘곡을 하여도 울지 않고 슬피 울어도 가슴을 치지 아니한다(마 11:17)’고 했다. 웃을 때 웃고 울 때 우는 감정에 솔직해야 할 것이다. 교계를 위하고 싶고 사랑하고 싶은 간절함에 비해 힘없고 나약한 한계 앞에 운다. 허물 많은 나 하나로 영광을 가리 우고 교계의 명예를 실추하고 훼손한데 대해 우는 마음이고 손잡아주지 못하고 격려해주지 못하고 도움을 드리지 못한 사실에 대해 울고 싶은 것이다. 부흥과 발전에 대해, 하나님의 비전성취에 대해 도움이 되지 못해 울고 싶은 것이다. 교계에 궂는 일로 울 일은 없어지고, 좋은 일만 많아져서 환하게 웃을 일만 가득하길 바래본다. ‘항상 기뻐하라’(살전 5:16)고 했다. 그리고 웃을 일이 있어서 웃기보다 웃어야 웃을 일이 생긴다는 사실을 알고 웃을 일이 없어도 먼저 웃는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이다. 위 사진은 필자(앞 줄 가운데)가 맘을 먹고 주선한 출장전문사진사를 불러 제50회 정기회(2002. 4. 15~18) 중에 서광교회(당시 담임 배영길 목사, 현재 김정기 목사)당 앞 계단에서 기념사진을 남기고 있는 장면이며, 모두가 웃는 모습임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당일 촬영에 참가한 모든 분들은 본 사진을 간직하고 그 날을 추억하고 있을 것이다. 아래 사진은 호남, 광주전남협의회 2017체육대회(10. 24)에 참가한 본 노회 축구선수단 모습으로 유니폼이 특별한 가운데 왼쪽 첫 번째가 필자 모습이다. /여수=정우평 목사, 010-2279-8728【교계소식】문서선교후원계좌 우체국 500314-02-264196 정우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