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 막걸리 골목
골목마다 수십 집씩…나이 따라 친분 따라 ‘캬~’
술맛에, 주모맛에, 사람맛에 한 잔…삶을 마신다
소주·맥주·양주·와인 바람에 밀려났던 서민의 술 막걸리가 재조명을 받고 있다. 약초 등 다양한 재료를 활용한 새로운 맛과 향을 지닌 막걸리가 잇따라 선보이고, 해외 수출도 늘고 있다. 최근 일본으로 수출돼 ‘웰빙 와인’으로 인기를 끌면서 일본인 관광객 중엔 한국의 ‘막꼬리집’을 여행코스로 택하는 이들도 많다고 한다. 막걸리는 10여가지의 필수 아미노산에, 단백질·식이섬유도 풍부한 훌륭한 술이다.
비빔밥, 한정식, 콩나물국밥과 모주. ‘맛 고을 전주’를 대표하는 음식이다. 전주시민들이 여기에 한가지 더 주저함없이 보태는 게 바로 막걸리다. 전주를 대표하는 술이 아니라 ‘음식’이다.
“전주에서 막걸리는 밥이요, 생활이요, 문화입니다.” (이종진·44·전북대 강사)
“전주 막걸리문화는 거의 미학의 반열에 올라 있다고 볼 수 있죠.”(김병수·41·전주한옥생활체험관 관장)
호프집 밀어내고 신흥 아파트촌까지 불야성
골수 막걸리 예찬론자들이 잔 높이 들어 설파한 심오한 ‘수작담’은 제쳐놓더라도, 전주는 실제로 국내에서 보기 드문 막걸리 도시임이 분명하다. 다른 대도시에 호프집들이 지천이라면 전주엔 막걸리집 천지다. 그것도 ‘막걸리 전문점’임을 강조한 간판을 내건 술집들이 이골목 저골목 수십 집씩 몰려 있다.
막걸리가 전주의 독특한 식문화의 반열에 올라 있다는 사실은, 옛도심뿐 아니라 신흥 아파트촌에까지 막걸리집들이 떼지어 성업중인 데서 잘 드러난다. 삼천동·서신동·경원동·효자동·평화동 일대에 막걸리 골목이 형성돼 있다. 10년 전까지 호프집들이 주름잡던 삼천동 우체국골목 주변과 ‘벌떼가든’ 앞 골목 등엔 막걸리 전문점 100여집이 밀집돼 불야성을 이룬다. 물론 옛날식 막걸리집들도 옛 경원동(풍남동으로 통합), 한옥마을 부근 골목 등 곳곳에서 명맥을 이어온다.
산전수전 겪으신 60대 주모가 지키는 허름한 옛 막걸리집들엔 주로 어르신들이, 삼천동 주변엔 30~50대가, 서신동·평화동 일대는 20~30대가 많이 찾는다고 한다. 그러나 막걸리꾼들은 옛집·요즘집 가리지 않는다. ‘술맛 나는 집’ ‘주모맛 나는 집’ ‘안주맛 나는 집’ ‘지저분하고 편한 집’ 등 특징별로 단골집을 정해 놓고 기분 내키는 대로 찾아가는 이들이 많다.
예컨대 안주가 쓸만한 집으론 삼천동 우체국골목의 용진집과 벌떼가든 앞의 다정집, 주모가 쓸만한(물론 미모 기준 아님) 집은 경원동 한울집, 동문사거리의 영산포를 꼽는다. 주모가 괜찮은 막걸리집이란 대개 투박하면서도 정겨운 할머니가 지키는 허름하고 비좁은 집들이다.
주요 막걸리집들에선 2007년 ‘대한민국 막걸리 품평회’에서 금상을 받은 ‘명가’라는 이름의 전주 막걸리를 낸다. “단맛·쓴맛·신맛·떫은맛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 술이다.
한 주전자에 상다리 부러져…가라앉힌 맑은 막걸리가 대세
전주 막걸리가 ‘시민들의 생활이자 문화’라는 점은 이상과 같은 ‘하드웨어’만으론 설명되지 않는다. 전주 막걸리 전문점만의 독특한 내용이 있다. 일단 1만2천원짜리 막걸리 한 주전자(막걸리 세 병)를 주문해 보면 안다. 백반 상차림에 버금가는 푸짐한 기본 안주가 한상 가득 깔린다.
집마다 철마다 다르긴 해도 대개 이런 식이다. 김치·나물류의 밑반찬들에다 다슬기·옥수수·두부·부침개·게장·생선조림 등이 기본으로 나온다. “한 주전자 추가요!” 하면 꼴뚜기회·조기매운탕·잡채 등이 나오고, “여기 하나 더!” 하면 홍어삼합·낙지회 등 주인장이 아껴둔 고급 안주들이 추가되는 식이다.
이런 순차적 안주 제공 형식은 그날 주모의 기분에 따라 달라지기도 한다. 말 몇마디 잘 한다면, 거의 무한정에 가까운 안주 세례를 받는 경우도 있다. 일부 꾼들은 앉자마자 “여기 막걸리 세 주전자!”를 외치며 그날의 핵심 안주를 먼저 요구하기도 한다.
내오는 안주들은 당일 주모들이 장에서 장만해온 제철 재료들에 따라 달라진다. 이런 형식은 일정량의 소주·맥주를 시키면 안주가 대량으로 제공되는 통영의 ‘다찌’ 문화와 닮았다. 하지만 막걸리라는 값싼 술과 전주식 음식문화가 어울려 훨씬 저렴하고 푸짐한 술상이 차려진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막걸리와 문화운동에 밝은 김병수씨가 말했다. “전주의 푸짐하고 맛깔스런 음식, 인정과 풍류가 막걸리와 결합해 독특한 술집문화를 낳은 셈이죠.”
이른바 ‘맑은 막걸리’가 대세를 이루고 있는 것도 전주 막걸리집의 특징이다. ‘맑은 막걸리’란 막걸리통을 냉장고에 이틀쯤 세워둬, 내용물을 가라앉히고 위의 맑은 술만 떠낸 것을 이른다. 대부분 술집에서 탁주와 맑은술을 선택해 주문할 수 있다. 둘을 적당히 섞어 마시는 이들도 있다. 맑은술을 선호하는 꾼들은 ‘맛이 깔끔하고, 양이 적어 배가 덜 부르며, 뒤끝이 좋다’고 주장한다. 일본인들도 ‘마르근 막꼬리’를 많이 찾는다고 한다.
술꾼들이 전주 막걸리집의 술맛을 배가시키는 ‘문화’로 치켜드는 것이 바로 ‘교감하고 교통하는’ 정다운 술집 분위기다. 20여년간 막걸리와 고락을 함께 해왔다는 이종진씨는 “막걸리집은 다른 술집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매력을 가진 술집”이라고 주장했다.
“값싸고 푸짐하고 맛있는 데다, 오고가는 정이 살아 있기 때문이죠. 주모와 손님, 손님과 손님간의 커뮤니케이션이 있는 술집, 이것이야말로 전주에 막걸리 골목이 존재하고 유지되는 배경입니다.”
다양한 특성을 지닌 50여집의 단골 막걸리집을 보유했다는 그는 찾아오는 외지 손님들을 데리고 단골집을 순례하는, ‘막걸리집 투어’를 진행한다. “전주의 독특한 문화를 단박에 알릴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길거리 슈퍼마켓 간이의자 ‘가맥’도 막걸리집 못지않아
곳곳에 흩어져 명멸하던 전통 방식의 막걸리집이, 한데 모여 전문 골목을 형성하게 된 건 오래전 일이 아니다. 호프집에서 맥줏잔을 기울이던 꾼들이 아이엠에프 이후 값싸고 푸짐한 막걸리집으로 모여들기 시작하면서다.
막걸리집이 번성하자 전주시에선 3년전 막걸리 골목을 관광명소로 만들기 위한 ‘막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삼천동 30여곳, 서신동 10여곳의 막걸리집 실내외 디자인을 지원하고, 문인협회·미술인협회·사진작가협회 등 지역 예술단체들과 ‘1집 1협회 자매결연’을 사업을 벌였다.
미술인협회와 자매결연한 삼천동 용진집 주모 홍용자(51)씨는 “손님 중 절만 이상이 일주일에 1~2번 이상 들르는 문화예술 관련 단골손님들”이라고 말했다. “일본인 관광객도 귀찮을 정도로 늘었다”고 한다. ‘귀찮을 정도’라고 하는 이유는, 일인 관광객들은 여러 명이 몰려와 “한 주전자만 시켜놓고 몇시간씩 버텨 단골손님을 놓치게” 하는 때가 많아서다.
전주 술꾼들이 줄창 막걸리만 마시는 건 물론 아니다. ‘가맥’도 많이 찾는다. 가맥이란 가게에서 파는 맥주를 말한다. 옛날 주점 영업시간을 새벽 2시로 제한하던 때, 슈퍼마켓 간이의자에 앉아 차수를 늘이며 병맥주를 마시던 관습이 그대로 이어진 것이다.
수로 따진다면 막걸리집보다도 ‘가맥’이 훨씬 많다. 전주의 거의 모든 슈퍼마켓 간판에 가맥 또는 휴게실이란 글자가 따라붙는다. 가게 안팎에 탁자·의자를 마련해 두고 맥주와 갑오징어구이·황태구이·계란말이·북어국 등 안주를 독특한 양념장과 함께 낸다. 갑오징어구이로 잘 알려진 전일수퍼, 명태국으로 소문난 임실슈퍼, 튀김닭발을 잘 하는 영동슈퍼 등 이름난 가맥집들이 즐비하다.
왁자지껄하고 정겨운 분위기는 막걸리집과 다름없으니, 막걸리 전문점과 가맥집이라는 독특한 두 주점 양태가 전주의 음식문화·여가문화·밤문화의 한 축을 이루고 있는 셈이다. 술에 관심이 많은 백성이라면 볼거리 많고 먹을거리 많은 전주 여행길에, 막걸리집 찾아가 가슴 풀어헤치고 한잔 기울여봄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