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삿 18:7]
이에 다섯 사람이 떠나 라이스에 이르러 거기 있는 백성을 본즉 염려 없이 거하여 시돈 사람 같이 한가하고 평안하니 그 땅에는 권세 잡은 자가 없어서 무슨 일에든지 괴롭게 함이 없고 시돈 사람과 상거가 멀며 아무 사람과도 상종하지 아니함이라..."
라이스에 이르러 - 라이스 또는 레센이라고도 하는 이곳은 오늘날의 '텔 엘 카디'에 해당된다. 팔레스틴 최북단에 위치한 이곳은 헬몬 산에 가려 아람과 단절되어 있고, 레바논 지역에 의해서 페니키아와도 단절되어 있어서 외침을 받을 염려가 거의 없는 안전한 곳이었다.
그리고 요단 강에서 흘러나오는 물로 인하여 용수 또한 충분했기 때문에 힘이 약한 단 지파의 정착지로서는 안성마춤이었다. 더욱이 원주민들은 이러한 천연적인 조건에 타성이 젖어 외침에 대해 무방비 상태일 뿐만 아니라 군사력도 빈약했으므로 단 지파가 정복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곳이었다.
시돈 사람같이 한가하고 - 여기서 '한가하다'에 해당하는 '쉐케트'는 '풍족한 가운데 여유를 즐기는 상태'를 의미한다. 공동 번역은 이를 '아쉬운 것 없이'로 번역하고 있다. 실제로 시돈인들은 동서 교역의 중개지로서 또한 상아 제품 제조 산업 따위로 많은 부를 벌어 들여 풍족한 경제 생활을 구가하였다.
따라서 라이스 거민들이 이러한 시돈 사람 같은 경제 생활을 누렸다함은 그들이 상당히 여유 있는 생활을 즐겼음을 의미한다. 권세 잡은 자가 없어서 - 여기서 라이스 사람이 한가하고 평안했던 이유 중의 하나로 권세 잡은 자가 없음을 들고 있다. 당시 고대 근동 지역의 왕들은 대체로 세습에 의한 독재자들이었고 이들은 외침을 막고 부강한 나라를 만든다는 이유로 많은 세금을 징수하고 사람들을 징용에 끌어 넣었다.
그러나 라이스는 천연적인 요새에 가까웠기 때문에 이러한 고통에 시달리지 않았던 것이다. 시돈 사람과 상거가 멀며 - 당시 라이스는 시돈의 통치하에 있었다. 그러나 시돈은 레바논 산맥의 장애로 인해 라이스를 관리하는 데 있어서 어려움을 겪었고 또한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안정세를 누렸으므로 굳이 라이스에까지 간섭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였다.
따라서 라이스는 천연 방벽을 의지하여 사실상 독립된 생활을 누리고는 있었으나 자체 내의 방어 체제를 구비하지 못한 상태였으므로 뒤에가서 단 자손의 침입을 막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삿 18:8]"그들이 소라와 에스다올에 돌아와서 그 형제에게 이르매 형제들이 그들에게 묻되 너희 보기에 어떠하더뇨..."
일어나서 그들을 치러 올라가자...매우 좋더라 - 본절에서는 단 지파가 라이스를공격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가 무엇인가를 보여 주고 있다. 그 동기는 여호수아와 갈렙이 제시한 가나안 정벌의 신앙적 동기와 비교해 볼 때 완전히 대조적인 것이었다. 그들은 일단 외형적으로 보기에 좋기 때문에 그 땅을 정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와 같이 신앙이 없는 자들은 안목의 정욕을 따라 자신의 행동 방향을 결정하게 되는 것이다.
[삿 18:9]"가로되 일어나서 그들을 치러 올라가자 우리가 그 땅을 본즉 매 우 좋더라 너희는 가만히 있느냐 나아가서 그 땅 얻기를 게을리 말라...."
[삿 18:10]"너희가 가면 평안한 백성을 만날 것이요 그 땅은 넓고 그곳에는 세상에 있는 것이 하나도 부족함이 없느니라 하나님이 너희 손에 붙이셨느니라..."
평안한 백성 - 이에 해당하는 '암보테하'는 '방심한 백성'이란 뜻이다. 이는 라이스 거민들이 물질적 풍요와 천연적 방어벽을 과신하여 안이한 심경에 젖어 있었음을 나타내 준다. 하나님이 너희 손에 붙이셨느니라 - 일반적인 성전의 구호에서는 하나님의 명칭을 '여호와'로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단 사람들은 '엘로힘'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는데 그것은 아마 레위 소년에게 신탁을 구한 것과 관계 있을 것이다.
본절에 기록된 성전 구호는 단순히 형식만 따랐을 뿐 그 내용에 있어서는 본래의 성전 구호와 비길 수 없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단 지파의 전쟁이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자신들의 정욕을 쫓아 행하는 전쟁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즉 그들은 기업으로 받은 당을 저버리고 심지어 우상 숭배에 깊이 젖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하나님의 성전을 수행하고 있는 양 행동하였던 것이다.
한편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라는 표어는 모든 성도들에게 영원히 적용되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현실의 복잡 다양한 제반 상황들에 적응하다 보면 그러한 표어가 한갖 공허한 추상적 원리로 머물 때도 있으며 심지어는 그와 전혀 상반되는 일을 하면서도 그 표어대로 살고 있는 양 착각하는 경우마저 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늘 스스로를 돌아보아 그러한 표어가 실제적이고도 구체적인 측면에서 자신의 존재 근거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의 크신 권능이 함께 하사 모든 대적들을 성도의 손에 붙이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