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키타 여행3 - 아키타 센슈코엔 구보타성을 보고 내려오다가 아키타 개를 보다!
여행 나흘째인 7월 2일 야마가타 를 출발해 2시에 아키타 秋田(추전)에 도착해 가부키공연이
열리는 현민회관을 지나 센슈코엔 千秋公園(천추공원) 구보타 성 久保田城跡 에 오릅니다.
센슈공원 안쪽에 胡月池(호월지) 연못을 지나 높고 가파른 계단을 올라서는
혼마루 에 동상이 서있는걸 보니 사타케 요시노부 (佐竹義宣) 인가
본데.... 아키타시 는 16세기 센고쿠(전국) 시대에는 구보타 라고 불렸습니다.
히타치국 오타(이바라기현) 성주 사타케 요시노부 는 히데요시와 우호 관계를 유지하며
시모쓰케국과 무쓰국 까지 세력을 넓혀 55만석으로 400여 다이묘 중에 8위 를 차지
했으며, 1591년 본거지를 오타에서 미토 로 옮기는데 북으로 센다이의 다테 마사무네,
남으로는 사가미국(가나가와현 오다와라) 호조 우지나오 의 압박을 받아 싸움을 벌입니다.
그러던 중에 일본을 거진 통일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 가 1590년에 호조씨 가 백수십년
또아리를 틀고 큰 세력을 이룬지라 히데요시에게도 고개를 숙이지 않는
사가미국 오다와라 정벌 을 개시하자 출진해서는 오시성 전투에 참가해 전공을 세웁니다.
이때 사타케 가문 은 도쿠가와, 마에다, 시마즈, 모리, 우에스기 가문과 함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6대장 으로 불렸으며..... 히타치노쿠니
54만석 영지 를 획득하는 데에 성공하니 열손가락 안에 드는 대영주 가 됩니다.
1599년 가토 기요마사 등 일곱 장수들의 미쓰나리 습격 사건이 발생하자 우키타 히데이에,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손을 잡고 미쓰나리를 구출 하는데, 미쓰나리가 히데요시의 은총
으로 임진왜란때 감독으로 조선에 파병되어 위세를 부린게 무장들의 미움을 샀기 때문입니다.
1600년에 발발한 세키가하라 전투 에서는 죽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대한 의리 를
중시하여 가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미쓰나리의 서군측에 선다는
입장을 표명하나 아버지 요시시게 는 후환을 염려해서 이에야스의 동군 편에 섭니다.
아버지와 싸울수는 없으니 마음을 바꾸어 도쿠가와씨의 동군이 기후성을 함락시키자
이에야스에게 축하 사자 를 파견하고 자신의 휘하에 있던 사타케
요시히사의 군대가 도쿠가와 히데타다 쪽으로 나아간 일 외에는 중립 을 유지 합니다.
이에야스의 동군의 승리로 전투가 끝난후 사타케 요시노부 는 이런 애매한 태도 로
인해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질타를 받고는 히타치노쿠니 미토의
54만석에서 여기 데와노쿠니(아키타) 구보타 의 21만석 으로 삭감 전봉 되었습니다.
죽거나 아니면 영지를 모두 빼앗기고는 중신들과 사무라이들은 낭인 으로 전락할 위기에서
벗어난 요시노부 는 아키타의 구보타성과 가쿠노다테성, 오다테성 을 거점으로 삼고
무쓰국 옛 다이묘들의 유신들과 사타케 가문의 옛 가신들을 등용하여 개간 정책을 폅니다.
이런 노력으로 에도 중기에 구보타번의 실제 고쿠다카 는 45만 석을 상회하였으나......
다른 가문의 가신 시부에 마사미쓰 를 중용한 것이 오랜 가신들의 반감을 사는데,
이에 요시노부 는 암살 기도를 한 가신들을 숙청 하였으며 1614년 죽은 히데요시
아들 히데요리의 거성 을 공격한 오사카 전투 에서는 도쿠가와군 측에 참가하였습니다.
오사카 겨울전투 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리군의 기무라 시게나리등에게 고전하여
이마후쿠 전투에서는 새로 등용한 가신 시부에 마사미쓰가 전사 하였으며,
1621년 적자가 없던 요시노부는 넷째 동생 요시나오를 양자 로 맞이하였습니다.
5년후 폐적하고 둘째 동생의 아들 요시타카 를 양자로 들여 후계를 이었으니...
이런저런 회상을 하는 가운데 요지오 이나리 신사의 붉은 도리이를
구경하고는다시 가파른 언덕길을 올라 구보다성 오스미 야구라 로 향합니다.
그러고는 다시 내려와 혼마루 넓은터에서 조금전 올라갈 때 얼핏보고 지나쳤던 동상 을
다시 보는데 구보타번 초대 번주 사타케 요시노부 佐竹義宣 라고 생각했던 것이
그런데.... 가까이 다가가 이름을 읽으니 사타케 요시타카 佐竹義隆 라.... 그럼
초대 번주 요시노부 가 아니라 사타케 가문의 20대 당주로 구보타 번의 2대 번주인데?
처음 이름은 이와키 요시타카 (岩城吉隆) 로 에도 도쿠가와 막부시절인 1620년 아버지가
죽자 뒤를 이어 시나노(나가노현)의 나카무라 번 1만석 영지를 다스렸다고 합니다.
3년후에 요시타카는 유리군 가메다 번의 초대 번주 로 전임되고 1626년에
백부 "사타케 요시노부의 양자" 가 되어 이름을 사타케 요시타카 로 바꾸었던 것이네요.
7년후 요시노부가 사망하자 가문을 계승하여 여기 구보타번(아키타현) 번주 가
되었으니...... 그 둘째 번주 요시타카 인 모양이네요? 그는 요시노부의
둘째 동생의 아들로 태어나 백부의 양자가된후 우여곡절 끝에 구보타번
번주가 되어 "중흥" 을 이룩한지라..... 초대 번주 대신에 동상이 서있는 모양입니다?
그러고는 하치만 아키타 신사 를 보고는 다시 그 아래쪽에 자리한 성의 정문 에 해당하는
"구보다성 표문" 을 구경하는데 남문 이라고 불리는 성문은 언덕을 올라 오다가
가파른 급경사에 지어졌으니 앞쪽에 지그재그로 통로 를 만들어 방어망을 형성한 걸 봅니다.
우린 그 아래 돌계단을 내려가는 대신에 오른쪽으로 구부러진 좁은 비탈길로 들어서는데
실은 지도상에 보이는 "다실 선암" 을 보기 위함이네요? 그런데 한 건물에
이르러 위치로 보자면 다실 같은데 홍보 사진에 나온 연못 이보이지 않는지라 지나쳤더니...
그 앞쪽에는 비슷한 건물이 없는 것이 분명하니 다시 되돌아 가서 확인을 해보니 연못의
물이 말라버린 모양입니다? 옛 다실 을 구경하고는 다시 내리막길을 접어 들었다가
가슴은 희고 .....등은 갈색인 진돗개 비슷한 개 를 데리고 산책을 나선 아가씨를 마주칩니다.
사진을 찍어도 좋으냐고 물으니 쾌히 허락하고 포즈를 취해주기에 찍고는 이 개가 바로
"아키타개" 가 맞느냐고 물으니 그렇다는데.... "아키타 개" 는 우리 진돗개나
풍산개 처럼 여기 아키타산 명물로 리처드 기어 주연으로 영화 로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전에 일본 첫 여행시 도쿄 시부야역 에서 보았던 동상 "충견
하치코" 는..... 바로 여기 아키타산 이라고 합니다. 몸집이 큰
탓에 전후 "식량부족" 으로 곤란을 겪던 시절에 멸종 되다시피 합니다.
하지만 미군들의 사랑을 받아 미국으로 많이 건너갔고 지금은 아키타현에서 보존운동 도
벌이고 있답니다. 전후 극심한 빈곤 속에 사람도 먹을게 없어 굶어죽어 가는데
식량을 많이 축내는 덩치 큰 아키타 개 는 천덕꾸러기 라.... 멸종되다시피 했던 것이지요?
사람도 굶어죽는데 개를 키울 염치 가 어디 있느냐던 시절을 생각하니... 불현듯 세기의
요정 이라고 불리는 여배우 오드리 헵번 의 날씬한 몸매와 우아한 용모는 실은
세계대공황과 2차대전을 거치면서 굶주림으로 인한 병마의 흔적 이라던게 따오르네요?
헵번의 아들 루카 도티 는 “내 어머니 부엌에 대한 추억”에서 헵번이 굶주렸다는건 아이들
에게 요리를 해주던 자상한 어머니에게서 들은 어릴적 얘기라고 합니다?
도티는 밥상머리 전기 라 이름 붙인 이 책에서 어머니는 평생 전쟁 을 끌어안고살았답니다.
나치 치하에서 굶어죽은 네델란드인이 2만 2천 에 달할때.... 어머니는 튤립 구근 까지 캐먹으며
39kg 체중 으로 "살아남는데 성공" 했다나요? 그 때문일까요? 그녀는 나이 들어서는
아프리카등 굶주리는 아이 들을 위한 봉사에 평생을 바치는 참으로 아름다운 삶을 살게 됩니다.
그때 공소리가 들리고..... 마눌이 여학생들이 테니스 를 치고 있다기에 내려와 보니
테니스는 아니고 말랑말랑한 고무공 을 사용하여 경기하는 연식정구 입니다?
내 취미가 첫째 테니스, 둘째 여행, 셋째 바둑, 넷째 독서인지라 참새가 방앗간을.....
19세기 말에 일본 사람들은 테니스의 용구난과 비싼 가격 그리고 왜소한 체격 으로 인해
경구(硬球) 대용품으로 고무공을 고안 하여 테니스를 했으니 연식 정구라고 불렀는데
모방의 천재 라는 일본인들이 서양이나 중국에서 들어온 것을 변용한게 정구뿐만은 아니고...
나가사키 짬뽕 은 규슈 나가사키 차이나타운의 화교 들이 만들었으니 그렇다 치더래도!
불교와 영농 때문에 1,200년간 소고기나 돼지고기 를 먹지 않던 일본인들이 육식
을 하면서 고안한 돈까스 외에도 카레라이스, 오무라이스, 고로케, 단팥빵, 라면 등....
아키타 여고생들이 정구 연습 을 하는 것을 철망 너머로 오래토록 지켜보는 것은
내 취미가 옛날에는 전국의 산이라는 산은 열심히 올랐던 등산 이었으나....
지금은 여행, 테니스, 바둑, 독서 그 중에서도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매일
열중하는 것이 테니스 라..... 그 형제 종목인 정구 라서 그런가 봅니다?
아키타 여고 건물에 “和魂洋才 화혼양재” 란 문구를 보는데, 19세기에 서양문물이
밀려오자 중국에서 “중체서용 中體西用” 에 뒤이어 일본에서 나온 말입니다.
서양의 물질문명 은 기꺼이 수용하겠지만 "동양의 정신적 가치" 는 포기하지
못하겠다는 뜻으로 일본에 이어 조선에서도 "東道西器 동도서기" 라는 말이 생깁니다.
동양의 정신(道) 과 서양의 기술(器) 을 결합하자는 주장인데 중국과 조선은 실패하고
일본만 성공하는건 정신문명과 기술문명이 애초 부터 구분될수 없기 때문이지요?
서양의학 을 수용하기 위해선 음양오행 을 기반으로 한 동양의학 을 버려야 하고
서양의 정치제도 를 받아들이기 위해선 동양의 유교 왕정체제 를 버려야만 합니다.
예를 들자면 남녀 차별 과 장유유서 관념을 유지하면서 기술문명인 자동차와 기차 를
받아들이자는 주장이니 조선에서 성공할리가 있겠는가요? 자명종 보다는
자연적 기의 흐름 에 따라 이른 시각에 저절로 눈을 뜨는 것이 진정한 유학자의 자세라!
비데도 꺼림칙하니 낭비되는 물이 자연을 파괴할걸 우려하면서 새끼줄이나 짚을 이용하며 검정 세단도
적절치 않은 것은 자연을 파괴하면서 휘발유 를 사용하는 것은 우주적 기의 순환작용에 역행 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일본은 중국 및 조선과는 다른 길을 걸었으니 그들이 내세운 화혼양재 란
실질적으로는 베버가 말한 "탈주술" 의 길이니... 일체의 주술적 요소를 신(God) 에게 맡겨버립니다.
그럼 인간은 현세에서 탈주술적 측면인 과학과 기술, 자본주의 를 발달시킬수 있게
되고 이것은 민주주의와 인권 이라는 서양의 정신문명 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습니다. 하느님 하나만 절대적 존재이며 그 밑의 인간은 누구나
평등 하니..... 이른바 신분제도의 극복 은 탈주술 로 인해 가능했던 것이지요?
영혼 이 빠져 나간 인간의 몸을 해부 하는 것은 신에 대한 불경이 아니니 과학자는 신이
창조한 질서를 신의 간섭을 받지 않은채 발견할 자유 를 얻을 수 있게 됩니다.
일본의 근대 사상가들은 귀신은 없으며 동양의 정신적 가치를 부정 하는 합리적인
태도 를 지녔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정신적 중심인 일왕(天皇 천황) 을 신격화 했습니다.
여기가 바로 탈주술적 요소와 주술적 요소가 갈라져 동거 할수 있는 지점이니
신과 같은 존재로 절대자인 천황 이 서양 문물 을
받아들이자고 하면 그대로 따를 뿐, 국민들이 반론을 제기하는 것은 금물 입니다.
그런 반면에 동도서기와 중체서용, 조선과 중국에는 하느님이나 천황과 같은 초월적
존재에 대한 믿음이 없었으니 현실을 완벽히 탈주술화할 수가 없었습니다.
"신체발부는수지부모" 라며 삼년상을 지내는 조선은 부모를 해부대에 눕힐수 없다는?
현실은 늘 주술적 요소와 과학적 요소가 섞이니 하나님과 천황에게 초월적 영역 을 양보한
대신에 흔들림 없이 현실의 정신적, 물질적 측면을 일관되게 추구한게 유럽과 일본이지요!
성을 둘러싼 서쪽 해자 를 지나면서 보니 저만치 햇불 이 타오르는 멋진 호텔
이 있으니...... 저기서 묵으면 성을 바라보는 전망 또한 훌륭하겠네요?
그러고는 일본에서 드물게 보는 성당 을 지나 다시 남쪽 해자 를 걷는데 연꽃 무리를
지나니 성 동쪽과 만나는 지점에 성의 전문인 대수문 이라는 표지석이 보입니다.
그러고는 번화가 로 접어들어 이자까야를 겻눈질하는데 첫날 부터 3일 내내 이자까야
술집에서 비싼 돈을 쓴지라..... 마눌의 눈치가 보여 차마 들어가지는 못합니다.
그때 백화점 지하에 대형 마트 가 보이자 마눌이 눈을 반짝거리며 들어가자기에
식당에서 우동 이나 한그릇 하겠다며 마눌과 30분후에 만나기로 하고는
헤어져서 건물 상층부로 올라가서는 식당가를 찾다가..... 한 집으로 들어갑니다.
우동을 시키니 주인 아주머니가 야키 우동 도 괜찮느냐고 묻기에 그러라고 했더니....
나보다 늦게 들어온 이웃 테이블에 먼저 음식을 갖다주면서도 나에게는 음식을
내올 생각조차 없으니..... 외국인이라고 차별 하는가 싶어 은근히 부아가 치밉니다.
동아일보에 실린 기사에 보면 특파원으로 미국에 거주하는 한국인이 마눌 과 함께
서양 레스토랑 을 찾았더니 종업원이 좋은 자리를 놔두고는
하필이면 바깥 흐름한 자리 로 안내하기에 마뜩치 않아 다른 자리를 달라고 했더니...
흑인 종업원 이 이번에는 구석 청소용구가 세워져 있는 자리 로 데려 가기에.....
마눌이 그예 설움에 받쳐 눈물을 흘리기로 저 특파원 남편이 항의를 했다나요?
또 다른 신문 보도에는 슈퍼에서 한 남자가 도둑질을 하고 달아나다가 잡힌후 자기 옆의
중국인도 물건을 훔쳤다고 신고해 한국 젊은이가 붙들렸으니 아무리 변명해도
소용이 없어 곤욕을 치뤘다는데, 그후 한국인을 불러세운 흑인 종업원이 "백인
이라면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을....." 하고 중얼거렸다는 기사가 생각 납니다!
한국인들이 착각하는건 동양인은 백인과 흑인 중간쯤이며 그중에 우린 백인에 가깝다고
여기는데... 미국에서 인종은 백인과 유색인종 (흑인, 동양인, 멕시코인...)
둘 뿐이라? 서양인이 유색 인종인 동양 누른둥이 를 차별하는 것이야
이미 익히 알고있는 일이지만..... 지금 일본인 여주인이 이웃나라 한국인을 차별 한다?
그러고는.... 마침내 우동 이 나왔기로 보니 국물 우동이야 간편하고 빠르게 내올수
있겠지만 "볶음 우동" 은 갖가지 재료를 준비해서 오랫동안 볶은
것이니 시간이 오래 걸리기로..... 내가 "오해" 한게 무안해서 그만 우스워 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