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의 위치에 있는 원청 조선소의 기성금 삭감과 공기단축 압박을 견디지 못해 하루아침에 문을 닫는 하청업체가 늘고 있다. 업체가 폐업하는 과정에서 임금과 퇴직금이 지급되지 않으면서 하청노동자들에게 피해가 집중되고 있다.
금속노조(위원장 전규석)는 28일 오전 서울 정동 노조 회의실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최근 울산 현대미포조선에서 잇따라 발생한 하청업체 폐업사태를 규탄하고 원청의 책임을 촉구했다.
노조에 따르면 현대미포조선 건조부 업무를 도급받아 운영하던 KTK선박이 이달 13일 폐업했다. 해당 업체 안아무개 사장은 “지난달 원청인 현대미포조선으로부터 기성금 2억7천만원을 받았는데 빚을 갚고 나니 1천만원밖에 남지 않았다”며 “월급을 단돈 1원도 지급할 수 없고, 나는 감옥에 가겠다”고 밝힌 뒤 폐업절차에 들어갔다. 업체에 속한 100여명의 하청노동자들은 영문도 모른 채 해고된 것도 모자라 임금까지 떼일 처지에 놓였다. 체불임금은 4억원에 달한다.
현대미포조선 하청업체 폐업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올해 1분기에만 도장부 소속 3개 업체가 폐업했다. 건조부 소속 KTK선박 외에 또 다른 업체도 폐업을 예고한 상태다. 같은 그룹사 소속인 현대중공업 울산조선소에서도 2개 업체가 문을 닫았다. 이들 업체는 원청으로부터 3월분 기성금을 받은 뒤 직원 임금은 지급하지 않고 폐업절차를 밟는 유사한 패턴을 보이고 있다.
김백선 현대중공업사내하청지회 사무장은 이 같은 일련의 흐름이 현대중공업그룹 차원의 구조조정과 무관치 않다고 주장했다. 김 사무장은 “지난해 말 현대중공업그룹의 인력 구조조정이 본격화한 뒤 하청업체에 지급되는 기성금이 크게 줄었다”며 “정규직 사무관리직과 여사원에 대한 희망퇴직뿐만 아니라 하청노동자에 대한 소리 없는 구조조정이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고 말했다.
국내 조선업종은 다른 업종과 비교해 하청노동자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다. 규모조차 집계되지 않는 이른바 물량팀으로 이어지는 다단계 하도급 구조로 운영되는 실정이다. 지난해 고용노동부의 고용형태공시에 따르면 현대미포조선의 경우 정규직 비율은 33%에 그친 반면 간접고용 하청노동자 비율은 67%에 육박했다. 물량팀 노동자까지 더하면 간접고용 규모는 가늠하기 힘들 정도다.
이런 구조에서 하청노동자들은 정규직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저임금과 상시적인 고용불안에 노출돼 있다. 원청기업은 간접고용을 활용하면 인건비 부담을 줄이면서도 사용자 책임은 피할 수 있다.
조현주 변호사(금속노조 법률원)는 “원청업체들은 현행법상 사용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하청노동자에게 발생하는 산재나 고용·임금체불 문제를 나 몰라라 하고 있다”며 “근로기준법과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에 원청 사용자성을 명시하는 방향으로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고 주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