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롱초롱 박철홍의 지금도 흐른다! 756
ㅡ <1898년>을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이유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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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
2024년 크리스마스 아침입니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윤석열 탄핵 헌재심판 문제로 여전히 혼란 스럽습니다.
이 혼란이 빨리 마무리 되게 하기 위해서는 국민여러분들 더욱 더 지속가능한 강한 관심과 열정이 필요합니다.
잠시만 마음을 놓고 관심을 풀면 배는 산으로 가고 맙니다.
예전에도 수없이 겪었던 일들 입니다.
그 중 지금 윤석열 비상계엄선포 로 진행되고있는 탄핵현실 현 시국과 가장 비슷했던 놀라운 년도가 있었습니다.
바로 그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1898년!>
우리는 학창시절 역사를 배우면서 년도를 외우고 기억하는 것을 많이 힘들어 했습니다.
그래도 우리 역사에는 기념비적인 년도가 있습니다.
660년 백제멸망, 668년 고구려 멸망, 918년 고려건국,1392년 조선건국, 1592년 임진왜란 등등
구한말에 들어서서는 1876년 강화도 조약, 1882년 임오군란,
1884년 갑신정변 그리고
<1898년!>
이 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무도 기억하지 못 합니다.
제가 조선오백년에 관한 역사 글을 쓰면서 정말 이런 일들이 <1898년>에 우리나라에서 일어 났다고 정말 믿기지 않을 정도로 경이로운 사건입니다.
어찌보면 반만년 우리나라 역사에 최대 사건일 수도 있습니다.
2016에 일어난 '촛불혁명' 못지 않은 사건이었습니다.
정말 우리 역사에 길이 길이 남아야 할 <1898년> 입니다.
지금부터 제 글을 세세히 읽어 보십시오.
1898년이 우리 민족에게 그리고 우리 역사 속에서 얼마나 빛났던 년도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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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7년 아관파천으로 러시아 대사관에서 숨어 지내던 고종이 '독립협회' 주장대로 궁으로 돌아와 느닷없는 '대한제국'을 선포한다.
그러나 고종이 구성한 내각은 독립협회가 주장했던 것과는 정반대로 '수구파'와 '친러파'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황제권강화 움직임에만 나선다.
대한제국 정부시책도 황제가 "구규(舊規)로 본(本)을 삼고 신식(新式)을 참고한다"고 천명하고, 갑오·을미 개혁을 반성해 전제군주시대로 다시 복귀하려 했다.
고종은 전제군주권이 사라지고 '입헌군주제'나 '민주공화제'로 가려는 세계적시류와는 정반대로 대한제국 선포를 빌미로 절대왕정 으로 가려 한 것이었다.
하여튼 고종과 당시 집권세력은 청개구리도 이런 청개구리들이 없었다.
항상 백성들이 원하는 것과는 거꾸로 움직였다.
이러한 왕권강화·전제화 움직임은 당연히 독립협회와 백성들 거센 저항을 받는다.
이에 독립협회는 <1898년 3월> 우리 나라 최초 근대적 주권수호 및 이권침탈 반대 민중대회였던 <만민공동회>를 서울 종로에서 개최한다.
2016년 촛불시위 같은 평화적 민중대회였다.
그런데 그 곳에 무려 '8,000여명'
군중들이 몰려든다.
지금 숫자로는 그리 많지 않은 숫자처럼 보이지만 당시 한양 인구가 '20만' 조금 넘었을 때 였다. 인구비율로 따지자면 2016년 촛불혁명 때만큼 모인 것이다. 교통시설도 없는 상황에서 엄청난 인파였다.
그리고 <만민공동회>에서 8000명 민중들이 한목소리로 외쳤다.
"열강의 한국침략 정책을 규탄한다."
"러시아의 절영도 조차를 결사 반대한다."
"러시아인 재정고문과 군사교관, 한로은행 철수를 강력히 요구 한다. "
이에 놀란 고종황제는 백성들 요구대로 러시아 군사고문관, 한로은행등을 폐지한다.
이어서 <만민공동회>는 '정부 7대신 탄핵운동'을 전개한다.
고종은 민중 뜻에 따른다. 드디어 민중대회 힘으로 수구파 내각을 총 사퇴 시킨 것이다.
우리 역사상 최초로 민중요구로 외세를 배격하고, 정권을 바꾸는 놀라운 성공을 거둔 것 이다.
서양에서도 보기드문 평화적 민중의 힘으로 정권교체를 단행 시킨 근대적 민중운동의 획기적인 승리였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 같은 무장투쟁으로도 이룩하지 못한 정권교체를 현 촛불시위 같은 평화적 민중운동으로 정권을 몰아 냈다는 것은 그 모임에 참여한 백성들에게도 경천동지할만한 경이로운 일이었다.
그러고 보면 우리나라에서 평화적 민중운동으로 정권을 바꾼 것은 촛불혁명이 처음이 아니었던 것이다.
바로 <1898년>에 있었다.
비록 왕조교체까지는 못했지만 민중의 힘으로 당시 내각총사퇴 까지 이끌어 낸 것은 그때까지 역사에 전혀 없었던 일이었다.
그런데 우리 역사 속에서 이렇게 크고 의미있는 '만민공동회'를 크게 다루지 않고 있다.
<만민공동회>를 들어 보기는 했겠지만 이렇게 대단한 의미가 있었는지는 거의 모를 것이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만민공동회' 이후에도 민중들 깨어남을 무서워하는 독재정권 들이 우리 역사속에 오랫동안 지속되어 왔기 때문이다.
어쨌든 지금 우리도 깜짝 놀랄 정도로 <1898년> 그 시기 백성들은 깨어 있었다.
그런데 조선오백년 내내 공식화 되어버린 '현명한 백성, 우매하고 탐욕스런 지도층' 모습을 이 사태 에서도 볼 수 있다.
우매하고 탐욕스런 위정자들에 의해 또 다시 반전이 일어나는 비극이 발생하고 만 것이다.
<1898년 10월 12일> 수구파 내각이 물러가고 박정양 개혁파 내각이 구성된다.
이어 독립협회 제의에 따라 10월 15일에는 독립협회 대표들과 정부대신들이 정부청사에 모여 관민협상을 벌여 '의회설립'과 '내정개혁' 문제를 협의한다.
관민협상은 <관민공동회>개최를 위한 예비회담 성격을 가졌다.
이와 같은 독립협회 강력한 활동 에 위협을 느낀 고종황제는 '언론 과 집회를 단속하는 조칙'을 발표 한다. 고종은 또 한 번 시대를 역행하는 청개구리 같은 어리석은 짓을 한 것이다.
그러나 독립협회와 백성들은 예전처럼 왕이 내린 조칙에 무조건 따르지 않았다.
독립협회는 그 조칙이 내려지자 즉시 발표한다.
“만국에 평행하는 것은 폐하의 권리이며, 탄핵해 성토하는 것은 백성의 권리이다”
이에 겁많은 고종은 그 조칙을 철회한다.
이처럼 또 다시 평화적시위와 농성을 통해 고종 언론통제조칙을 번복시킨 것이다.
이어서 독립협회는 <1898년 10월 28일에서 11월 2일>까지 6일간 종로에서 대집회를 열었다.
우여곡절 끝에 한양 백성들은 물론 독립협회·국민협회·일진회 그리고 정부대표로 의정부 참정 박정양, 민영환등이 참석한다.
이와 같이 백성과 시민단체, 정부고위관료들 까지 참여해서 토론하는 대규모 민중대회는 우리 역사상 유래를 찾아 볼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으로 말하면 윤석열 비상계엄 선포와 탄핵문제로 시민들은 물론 민주당, 국민의 힘 국회의원, 총리와 정부관료, 사회 시민단체 그리고 태극기부대들까지 모두 한 곳에 모여 같은 연단에 서서 연설 하고 마주하고 앉아 협상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상상이나 되는 일인가?
상상도 안 될 것이다.
그런데 <1898년>에 그런 일이 실제 벌어졌다.
왕조시대였지만 참으로 믿기 힘든 경이로운 일이 벌어진 것이었다.
이를 역사는 <만민공동회>와는 다르게 <관민공동회>라고 부른다. 헷갈려서는 안 된다. 이 둘 차이가 역사시험에도 자주 나온다.^^
어쨌든 둘 다 <1898년>에 일어 난 일이었다.
이 대토론회에서는 그동안 가장 천대받던 백정출신 '박성춘'이 개막연설에서, “관민이 마음을 합쳐 국가를 이롭게 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할 방도를 찾아야 한다.”고 연설 해 만장의 박수갈채를 받기도 한다.
당시 백정이 연설자로 나설만큼 열려있는 토론회 장이었다.
종래 통치 대상에 불과했던 민중이 정부대신과 함께 국정을 논의하는 경이로운 모습을 보이는 것 또한 우리 역사상 유일무이한 일이었다.
이어 다음 날, 참석자들은 국정 개혁에 관한 여러가지 의견발표가 있은 뒤, 국정개혁 기본방향을 제시한 <헌의육조 獻議六條> 라는 개혁강령을 채택한다.
이날 결의된 '헌의6조'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일본인에게 의부(依附)하지 말 것.
둘째, 외국과의 이권계약을 대신이 단독으로 하지 말 것.
셋째, 재정을 공정히 하고 예산을 공표할 것.
넷째, 중대 범인의 공판과 언론·집회의 자유를 보장할 것.
다섯째, 칙임관의 임명은 중의(衆議)에 따를 것.
여섯째, 기타 별항의 규칙을 실천할 것.
수많은 민중들이 모인 것에 놀란 고종은 헌의6조를 수정 없이 재가하고 이를 실천할 것을 약속 한다.
11월 3일에 이르러 민중들은 '중추원'을 근대적 의회식 개편과 <헌의육조> 실시에 관한 정부의 확고한 다짐을 받고 1주일간에 걸친 <관민공동회>를 성공적으로 끝마치고 해산했다.
드디어 우리나라 유사이래 최초로 민중의 힘으로 이룩한 입헌정치를 눈 앞에 두고 있었다.
이 민주적, 민중적 열기가 계속 이어졌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나 안타갑게도 '헌의 6조 개혁안'은 단 하룻밤을 못 견디고 만다.
백성들이 모여 한창 소리를 낼 때는 찍소리도 하지않고 다 들어 줄 것 같이 해놓고 백성들이 해산하자마지 조선위정자들은
또 다시 그동안 수도없이 해왔던 일들을 그대로 자행한다.
청개구리 본성을 가진 고종과 우둔하고 탐욕에만 사로잡힌 조선위정자들은 민중들이 해산하자마자 손바닥을 뒤집고 만다.
동학혁명 때도 그랬다. 집강소도 설치하며 농민들 약속을 다 들어 줄 것처럼 했다. 그러나 그들은 뒤로는 다른 속셈을 가지고 있었다. 해산하지마자 그들 탄압하는 일에만 몰두한다.
<관민공동회> 때도 동학혁명 때와 똑같은 수작을 한 것이다.
그렇게 당하고도 순진하게 또 믿고 해산한 착하고 순진한 백성을 탓해야 하는 것인지 정말 가슴이 아프다.
그러니 지금 '윤상현' 같은 작자가 "탄핵반대 해 욕을 좀 먹더라도 1년만 지나면 다시 뽑아주니 걱정하지마라"는 개소리를 뻥뻥치고 있는 것이다.
<1898년 11월 4일 밤>조병식등 수구세력은 독립협회가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정을 실시하려 한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린다.
마치 윤석열이 비상계엄선포를 위하여 '부정선거'를 들고 나온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 날 바로 그들은 고종을 충동해 진보적인 박정양 내각을 전복시킨다.
느닷없이 터무니없는 비상계엄을 선포한 윤석열과 똑 같은 짓을 한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당시는 조병식등 수구세력 뜻대로 되고만다.
심약한 고종은 수구세력 유언비어 이야기만 듣고 독립협회 회원을 체포하고 독립협회 해산을 명령한다.
참말로 고종의 이런 일관성은 우리를 절대 실망시키지 않는다.
헌의6조는 재가한지 단 하루만에 폐지를 발표한다.
기가막힌 일이었다.
이어 수구파 정부는 보부상을 중심으로 황국협회라는 어용단체 를 조직해 독립협회에 맞서게 한다.
이런 결과로 실시를 눈앞에 둔 '의회설립'도 좌절되고 만다.
<관민공동회>의 궁극적 목표인 근대적 입헌정치 실현도 물거품 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아쉬운 것은 그 뜨거웠던 민중의 열기도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다.
김수영의 시 '풀'에 나오는 것처럼 풀들은 바람보다 빠르게 드러 눕고 말았다.
구심점이 사라져버린 민중의 한계 였다.
<1898년> 그 현명한 백성들도 지도층을 잃고 갈 곳 몰라 헤메이다 결국은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우리 역사가 결정적일 때 꼭 이랬다.
2024년 12.3 밤에도 우리 국민 들이 조금만 허둥대다 늦었다면 1898년 그 슬픈 밤과 비슷하게 일이 진행되었을 것이다.
참으로 한탄스러운 일이지만 위에 설명한대로 무능하고 탐욕스런 위정자들이 자기들 권력유지를 위해서는 그 무슨 짓이라도 하고, 현실 속 결과는 항상 그들 승리로 끝났다는 것이 역사적 사실 이었다.
이러한 우리의 슬픈역사가 반복 되었기 때문에 탐욕스런 지도층인 기득권층들이 백성들을 전혀 무서워 하지않는 것이다.
지금 진행되어 가고있는 사태를 잘 살펴봐도 탄핵반대세력들의 하는 짓들이 눈에 훤히 보이지 않는가?
그들은 시간을 끌기만하면 또 다시 자기들이 승리할 것이라는 것을 믿고있다.
그 동안 우리 역사가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역사를 무시하고 알려고 하지도 않고 오로지 현실 권력만 취하며 항상 기고만장 해 있다.
현재도 이런 일들이 진행중이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정말 이런 참혹한 일을 또 다시 당해야만 하는걸까?
잘못된 역사의 악순환 반복을 지켜 봐야만 할까?
역사는 똑 같지는 않지만 비슷하게 반복된다.
우리는 <1898년> 역사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
"이번 만큼은 잘못된 역사 악순환을 끝장내야 한다!"
2024.12 .25
ㅡ 초롱박철홍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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