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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18. 묵상글 ( 사순 제5주간 월요일. - 뜸 들이다.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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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18. 사순 제5주간 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뜸 들이다.
“예수님께서는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 쓰기 시작하셨다.
그들이 줄곧 물어대자 몸을 일으키시어 그들에게 이르셨다.”
뜸 들이다.
오늘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은 여인을
돌로 쳐 죽이려고 하는데 예수님께 그래도 될지 말지 답을 요구합니다.
평소대로라면 죄인을 용서하시는 주님이지만 이 경우만은 그러지 못할 것이라고,
그리고 궁지에 몰아넣을 좋은 기회라고 의기양양하며 빨리 대답하라고 좨칩니다.
사람들의 시선도 이제 여인이 아니라 예수님께 쏠려있습니다.
이럴 때 보통의 우리는 빨리 답해야 한다는 대단한 압박감을 느끼게 되고,
그래서 그들의 페이스에 말려들기 쉽고 조급해지기 쉽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바로 답하시지 않고 뜸을 들이십니다.
제가 식당 주방일을 하다 보면 뜸을 들이기 전에 손님이 닥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급한 마음에 김을 빼면 밥이 덜 되거나 제맛이 나지 않습니다.
그러니 상황이 급하더라도 마음은 급하게 먹지 말고 뜸 들여야 합니다.
마음을 급하게 먹지 않고 뜸 들이는 것,
이것이 바로 다른 사람의 페이스에 말리지 않고,
상황에 휘둘리지 않으며 내가 상황을 주도하는 법입니다.
사실 우리는 뜸 들이는 이 시간을 가지지 않아
지나고 나서 이렇게 답하면 되었을 것을!
이렇게 대처하면 좋았을 걸을! 한 적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면 오늘 주님의 뜸 들이심도 이런 의미일까요?
자기 주도를 위한 시간 벌기!?
주님께서 뜸 들이신 의미는 분명 이것 이상이고,
우리의 뜸 들임도 이것 이상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의미의?
하느님의 뜻을 찾고 알기 위한 기도의 시간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느님께서는 내가 어떻게 하길 바라실까?
이렇게 우리는 답을 재촉하는 사람에게서 시선을 거두고는
얼굴을 하느님께 향해 기도하는 것이 신앙인다울 것입니다.
오늘 다니엘서의 경우 소년 다니엘이 성령의 감도로
간음죄에 몰려 죽을 판인 수산나를 살판으로 바꿨는데
우리도 다니엘처럼 이렇게 성령으로 판을 바꾸는 겁니다.
이것은 스테파노가 죽게 되었을 때 사람들에게서
시선을 돌려 하늘을 본 것과도 같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얼굴을 하늘로 향하는 대신
땅에다 ‘하느님’ 이렇게 쓰고 계셨을 겁니다.
그랬는데 그 하느님께서 ‘살려라!’ 하고 답하셨을 것이고,
살리는 방법은 죽이려고 하는 그 사람들에게
죄 없으면 돌로 치라 하면 될 거라고 알려주셨을 겁니다.
그러니 우리에게도 이런 급한 상황이 벌어졌을 때
상황이 빨리 해결되길 조급해하지 말고 뜸 들이고
당황하지 말고 기도하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급할수록 돌아가라고 했는데
급할 때 기도하고 급할수록 기도하라!
이것이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행동으로 보여 주신 모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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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18. 사순 제5주간 월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대학생 아들이 있는데 게임만 하면서 인생을 낭비합니다. 성인이니까 그냥 놔둬야 할까요? 아니면 게임을 못하게 일일이 따라다니며 잔소리해야 할까요?”
“회사 생활이 너무 힘듭니다. 요즘에 취업하기 힘들다고 하니 그냥 꾹 참고 다녀야 할까요? 아니면 그만두고 새로운 일을 해야 할까요?”
이런 식의 흑백 논리를 말하면서 답을 이야기해 달라고 합니다. 이 세상은 ‘이것 아니면, 저것’ 이런 식으로 흘러가지 않습니다. 다양한 길이 있음에도 선택의 폭을 스스로 좁힐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사실 이렇게 단순화하면 그 답을 쉽게 찾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잠깐이나마 편안한 심정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 해결이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다시 더 복잡한 마음이 되고 맙니다.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세상임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인생에서 답이 없는 것이 아니라, 답이 너무 많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답이 많은 세상에서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으면 근시안적인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기준이 정확해야 합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율법을 어긴다고 주장했습니다.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 일을 하고 있다면서 말이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단 하나의 기준을 정확하게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사랑’이었습니다. 율법이 먼저가 아니라, 사랑이 먼저였습니다. 이 사랑 안에서 서로의 다양성을 인정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율법을 벗어나는 다양성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앞으로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혀 온 여인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리고 모세의 율법을 이야기하면서 돌을 던져 죽이라고 했다면서, 예수님의 생각은 어떤지 묻습니다. 살려주라고 하면 율법을 어긴다고 트집을 잡을 것이고, 죽이라고 하면 이제까지 가르쳤던 사랑은 어디에 있냐면서 또 다른 트집을 잡았을 것입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것 같은 상황입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요한 8,7)
나이 많은 자들부터 시작해서 하나씩 떠나갑니다. 죄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의 억지를 스스로 깨달았을 것입니다. 간음했다고 하는데, 혼자 그 자리에 온다는 것 자체가 큰 억지이요. 여자 혼자서 간음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이렇게 그들은 사랑 없는 닫힌 마음으로 그 자리에 서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을 먼저 생각하면 됩니다. 그래야 서로의 다양성을 인정할 수 있으며, 이 안에서 진정한 사랑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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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우리는 사랑하는 법과 용서하는 법을 배우며 삶을 완성해 간다(케리 이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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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18. 사순 제5주간 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요한 11,7)
예수님께서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을 고발하는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에게 말합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요한 11,7)
혹시 가슴에 돌덩이 한 두 개 정도 품고 살아가지는 않나요? 차마 던지지는 못하고, 가슴에 품고 만지작거리기만 하는 돌덩이 말입니다. ‘화’라는 돌덩이, 상처와 미움의 돌덩이, 원망과 심판의 돌덩이 말입니다. 사실, 그것은 스스로 들게 된 돌덩이든, 타인들이 들려주어서 들게 된 돌덩이든, 사실 그 돌덩이는 타인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자신을 짓누르고 있고 자신을 무겁게 할 뿐입니다.
그런데 고발했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나이 많은 자들로부터 시작하여 하나씩 하나씩 떠나갔습니다.’ 돌을 손에 든 채로 갔는지, 땅에 내려놓고 갔는지는 모를 일입니다. 차마 지금은 던지지 못하고 나중에 적절한 시기에 더 큰 돌로 더 세게 내리치려고 그냥 들고 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사실, 그들은 여인을 구실로 삼아, 이미 예수님에게도 여인에게도 ‘돌’을 던진 이들입니다. 단지 더 이상 돌을 던지지 못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 자리를 피하였을 뿐입니다. 죄송하다고 말하지도 않고, 용서해달라고 말하지도 않고, 단지 떠나갔을 뿐입니다. 아마 그들을 또 다시 예수님을 죽일 음모를 꾸밀 것입니다.
그러기에,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요한 8,7)는 예수님이 말씀에 그들은 ‘나이 많은 이’부터 돌아갔지만, 진정으로 회개한 이들은 아닌 것입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회개는 단지 심판하지 않고 돌을 던지지 않는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돌 맞은 이의 아픔과 상처를 위로하고, 쓰러진 이를 일으켜 세우는 일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단지 자신의 죄만 피하는 것이 아니라, 혹은 용서만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를 위하여 그에게 선을 베푸는 일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지은 여인에게 그렇게 하십니다. 돌 맞은 그의 상처를 위로하고 일으켜 세우며, 또한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도와주십니다. 구원의 길을 걸을 수 있도록 이끄십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용서의 표시입니다. 곧 용서할 뿐만 아니라, 그를 위해 도와주고 기도해주고 이끌어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는 다시는 죄짓지 마라.”(요한 8,11)
우리 주님께서는 죄인은 용서하실 뿐만 아니라, 그가 새롭게 살 수 있는 힘과 위로를 주십니다. 도와주시고 이끌어주십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요한 8,7)
주님!
제 가슴에 돌덩이를 품고 살아가는 일이 없게 하소서.
돌덩이로 오히려 저 자신이 짓눌려 있지 않게 하소서.
돌덩이를 가슴에 품고 만지작거리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품고 만지작거리게 하소서.
위하는 마음을 품고 가벼워지게 하소서!
위로하고 축복하고 기도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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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18. 사순 제5주간 월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저는 죄인입니다
우리는 보이는 것들에 대해 수시로 판단을 내리고 단죄합니다. 심지어 영화나 텔레비전의 극을 보면서도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을 구별하여 열을 올립니다.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들을 보면서 마음에 화를 쌓아 올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정작 자기가 잘못을 범하고 있다는 사실은 잊고 삽니다. 남의 티끌은 유난히 잘 보면서도 자기 눈에 든 들보는 보지 못합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를 예수님께 끌고 와서 단죄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이것은 여인을 단죄하기보다는 예수님께 올가미를 씌우고자 하는 속셈이 더 컸습니다. 사랑을 가르치는 예수님께서 그를 단죄하면 지금까지의 가르침이 헛된 것이요, 단죄하지 않으면 전통의 율법을 어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에게 돌을 던져라”(요한 8,7) 하십니다. 그리고 몸을 굽히시어 땅에 무엇인가 쓰셨습니다. 그러자 나이 많은 사람부터 하나씩 하나씩 떠나갔습니다(요한 8,9).
자리를 떠난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는 주님의 한 말씀에 자신이 죄인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의 지나온 과거를 속일 수가 없었기에 자리를 떠났습니다. 사실 자기가 용서가 필요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 비로소 타인을 용서할 수 있게 됩니다. 그는 결코 돌을 집어 들 수 없습니다. 우리는 삶의 현장에서 죄인을 만나게 됩니다. 잘못한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데 우리는 바리사이처럼 고발하고 단죄하는 모습이 아니라 몸을 굽히시어 죄인의 처지가 되어 주시는 예수님의 태도를 본받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땅바닥에 무엇인가 쓰고 계셨다는 것이 마음에 듭니다. 즉각 판단을 내리지 않으시고 여유를 주셔서 자신의 속을 보도록 해 주셨다는 것이 은총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자신의 속을 보고도 돌을 들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남의 허물에는 엄격하면서도 자신의 허물에는 한없이 관대합니다. 이런 모습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런 모습 때문에 더 큰 자비가 필요합니다. ‘죄가 많은 곳에 은총도 충만히 내렸다’(로마5,20) 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대로 허물이 많은 우리에게 주님의 충만한 은총이 주어지길 빕니다. 저는 죄인입니다. 예수님께서 땅바닥에 무어라고 쓰셨을까요? ‘너 자신을 알라! 아니면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의 죄목들’을 나열하셨을까요?
예수님께서는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마태7,3) 고 말씀하십니다. 나의 허물을 인정할 수 있는 깨달음을 얻게 되길 희망합니다.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못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비를 내려주시는’(마태5,45) 아버지 하느님, 당신이 보내주신 아드님께서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요한 8,11)하시니 감사합니다. 주님의 자비를 체험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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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18. 사순 제5주간 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요리(料理)’라는 말의 뜻은 ‘헤아려 다스린다.’라고 합니다. 요리사, 주방장, 쉐프는 헤아려 다스리는 사람입니다. 음식을 만드는데서 저는 요리할 줄 모르는 편입니다. 며칠 전입니다. 사골 육수에 꽁치 통조림을 넣고, 거기에 소시지 볶음을 넣었습니다. 어묵과 떡국 떡도 넣어서 끓였습니다. 헤아림이 없어서인지 맛이 신묘했습니다. 나중에 이야기를 들으니 꽁치 통조림에는 묶은 김치가 잘 어울린다고 합니다. 사골 육수에는 담백한 재료가 좋다고 합니다. 재능도 없고, 노력도 부족하니 앞으로도 음식을 요리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많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가끔씩 정성과 맛이 깃들여 요리된 ‘반찬과 국’을 주는 분들이 있는 것입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합니다. 쉬운 것부터 하나 둘 배워나가면 저도 음식 재료를 헤아려서 다스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나마 아침은 헤아려 다스리기 쉽습니다. 떡과 계란 그리고 우유와 과일 한 쪽이면 진수성찬입니다.
대한민국은 총선을 앞둔 선거의 계절입니다. 정당은 ‘공천’이라는 요리를 잘 해야 합니다. 능력과 인품을 겸비한 후보를 선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국가와 국민을 위한 정책과 현실에 다가온 위기와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해야 합니다. 선거는 어쩌면 잔인한 요리인 것 같습니다. 같은 목표를 향해서 여러 후보가 준비하지만 결국 선택되는 사람은 오직 한 사람입니다. 그렇게 선택된 정당의 후보들 중에서도 오직 한 사람만이 당선되기 때문입니다. 깨어 있는 시민은 ‘투표’라는 요리를 잘 해야 합니다. 옥석(玉石)을 가릴 수 있는 혜안이 있어야 합니다. 왜곡된 정보와 진실을 식별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상대방을 무조건 비난하는 후보, 허황된 공약을 남발하는 후보, 비리와 부패에 연루된 후보를 요리에서 배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나라의 민주주의와 인권의 수준은 깨어 있는 시민들의 참여와 요리 능력에 따라서 정해지는 것입니다. 몸은 비록 멀리 타국에 있지만 2024년 총선이라는 요리가 대한민국과 국민을 위한 성찬이 되면 좋겠습니다.
인간의 ‘희노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慾)’의 문제를 요리하는 것은 종교입니다. 인간은 유한하면서 무한을 생각합니다. 죽어야 할 존재임을 자각하면서 살아야 할 의미를 찾습니다. ‘왜(why)'라는 질문을 던지는 존재입니다. 유교는 ‘우환(憂患)’을 요리해서 삶의 의미를 찾으려고 합니다. 천명을 따른다면 우환에서도 희망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사서삼경은 ‘인의예지(仁義禮智)’의 덕으로 우환을 극복하는 길을 제시합니다. 불교는 ‘고통(苦痛)을 요리해서 삶의 의미를 찾으려고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는 고통, 미워하는 사람을 만나야 하는 고통, 원하는 것을 채우지 못하는 고통, 거짓된 자아에 흔들리는 고통을 벗어나는 길을 찾으려 합니다. 돈오돈수와 돈오점수의 깨달음으로 집착이라는 업보를 끊어버리면서 고통을 극복하는 길을 제시합니다. 그리스도교는 ‘두려움(恐怖)’을 요리해서 삶의 의미를 찾으려고 합니다. 두려움은 하느님의 은총과 하느님의 자비하심에 의탁할 때 사라진다고 합니다. 풍랑에 떨고 있던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두려워 말라’고 하십니다. 물속에 빠져드는 베드로에게 ‘왜 두려워하느냐?’라고 하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두려워 다락방에 숨어 있던 제자들에게 ‘평화와 성령’을 주십니다. 인의예지와 깨달음 그리고 믿음은 인류가 삶의 문제를 헤아려 다스리는 요리입니다. 물론 저는 그리스도교에 의지하면서 삶의 의미를 찾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부정한 여인을 데리고 온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과 대화를 하였습니다.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은 율법에 따라서 부정한 여인에게 돌을 던져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러분 중에 죄 없는 사람이 먼저 부정한 여인에게 돌을 던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돌을 던지려던 사람들은 모두 돌아갔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부정한 여인의 죄를 묻지 않으셨습니다.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이라고 천대받고 무시 받았던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교회를 박해했던 바오로 사도에게 이방인의 선교를 맡겨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3번이나 모른다고 했던 베드로 사도에게 천국의 열쇠를 주셨습니다. 율법에 의해서 죽어야 했던 여인은 용서를 받았습니다.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발라드리고 씻어 드렸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제일 먼저 만날 수 있었습니다.
억울한 누명을 벗었던 수산나는 하느님의 자비하심에 감사드렸습니다. 죽어야 할 운명에서 용서받고 다시 태어났던 여인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누가 더 큰 은총을 받았을까요? 하느님의 자비하심에 감사드리면서 사순시기를 지내면 좋겠습니다. “당신 이름 위하여, 나를 바른길로 이끌어 주시네. 어둠의 골짜기를 간다 하여도, 당신 함께 계시오니, 두려울 것 없나이다. 당신의 막대와 지팡이, 저에게 위안이 되나이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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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18. 사순 제5주간 월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태어난 모든 사람은 죽음을 향해갑니다. 매일매일….
즉 하루하루 하느님께로 향해간다는 말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우리 삶을 평가받을 날을 향해가고 있다는 뜻입니다.
자명한 말이고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 말이지만 삶의 순간순간에 잊혀지는 말입니다.
살아간다는 것은 우리 몸에 검은 때가 하나씩 하나씩 생겨난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분노로 모여든 사람들을 향해 말씀하셨습니다.
‘죄 없는 사람이 이 여인에게 먼저 돌을 던져라.’
사람들은 하나둘씩 떠나갑니다. 왜냐하면 그들 자신의 죄를 스스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돌을 들고 있지만, 그 돌을 죄지은 여인에게 던지려 하고 있지만, 사실 돌팔매에서 자기 자신도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죄 없는 사람처럼 가면을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죄가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죄가 영원히 드러나지 않으리라 믿기 때문입니다. 물론 모든 사람에게 죄를 드러내라는 말은 아닙니다.
다만 누군가를 단죄할 때 우리 모습을 봐야 한다는 말입니다. 다만 죄가 드러나 돌을 맞아야 하는 사람 앞에서 죄 없는 사람처럼 돌을 들지 말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아직 우리 죄가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저 그 작은 차이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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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취(개인취향)
각자 개취가 있습니다.
옷을 입는 것도,
헤어 스타일도,
음식을 고르는 것도,
영화도, 음악도,
사람도….
얼마 전 알았습니다.
사람에게만 개취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입니다.
강아지에게도 개취가 있고
고양이에게도 개취가 있습니다.
그뿐일까요? 확인하진 못했지만
사자에게도 개취가 있고 코끼리에게도 개취가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에는 같은 것이 없나 봅니다.
그래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참으로 위대하신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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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18. 사순 제5주간 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자비와 지혜의 주님
-“죄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어둠의 골짜기를 간다 하여도,
주님 함께 계시오니, 두려울 것 없나이다.
당신의 막대와 지팡이, 저에게 위안이 되나이다.”(시편23,4)
오늘 시편 화답송이 그대로 오늘 말씀을 요약합니다. 오늘 3월18일 다산 어른과 논어의 공자 말씀도 주님과 날로 더욱 가까이 하라는 가르침을 줍니다.
“막연한 그리움만 품으면서 정작 다가가지 못하고 있다면,
그에 대한 마음이 식고 가라앉아 멀어질 준비를 마쳤다는 뜻이다.”-다산
“산 앵두나무 꽃이 펄럴펄럭 나부끼네.
그대 어찌 그립지 않겠소만, 그대 머무는 곳이 너무 머네.”
공자가 말했다,
“생각하지 않는 것이지, 진정 생각한다면 어찌 먼 것이 있겠는가?”-논어
“가장 작은이들과 함께하라, 언제나!”
(Be with the least, always!)
어제 교황님을 방문했던 어느 일행들에게 주신 교황님의 짧은 권고가 잊혀지지 않습니다. 복음의 핵심 진리이며 그대로 자비하신 하느님의 존재방식을 알려 주는 말씀입니다. 자비하신 하느님은 가장 작은이들과 함께 하십니다. 언제나! 바로 오늘 말씀에서도 그대로 입증됩니다.
어제 수도형제가 공동카톡방에 올린 수도원 대문 뒤쪽에서 발견했다는 유인물의 차마 입에 올리기 거북한 저주의 거친 문구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인간이 먼저 되라. 천벌 받는다”
“못되 쳐먹은 새끼들아 천벌 받는다”
이해하기 힘든 구절이나 이 또한 사순시기 정신 번쩍 들게 하는, 우리의 깊은 회개를 촉구하는 말마디로 알아 들었습니다. “사람이 먼저 되라”, 수도자, 사제, 신자이전에 “사람이 됨”은 기본이겠습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와 복음 말씀이 사람됨의 기본을 알려줍니다.
오늘 제1독서 다니엘서 13장은 다니엘이 죽음의 위기에 처한 수산나를 구하는 무려 63절까지 계속되는 참으로 긴 장입니다. 개신교 공동번역에는 생략되고 가톨릭 공동번역에만 나오는 외경에 속하는 다니엘서입니다. 여기서는 수산나가 고립무원의 외로운 처지의 가장 작은 자가 됩니다.
반면 오늘 복음은 요한복음보다는 루카복음에 더 어울리는 감동적인 내용으로 복음의 핵심적 진리를 보여줍니다. 여기서는 간음하다 사로잡힌 여자가 고립무원의 죽음의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여기서 혜성같이 등장한 주인공이 제1독서 다니엘과 복음의 예수님입니다. 이 두분은 참으로 사람됨의 모범을 보여 주면서 가장 작은 자들과 함께 하시는 자비하시고 지혜로우신 하느님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먼저 다니엘서에서 음욕에 빠져 수산나를 사지에 몰아넣은 사악한 두 원로를 응징하고 수산나를 구원하는 다니엘의 용기와 지혜로운 처신이 참 통쾌합니다. 절체절명의 위기의 순간에 하느님은 다니엘을 통해 개입하신 것입니다. 사실 수산나의 간절한 기도가 하느님께 상달된 것이지요.
사실 수산나는 매우 아름답기도 하거니와 주님을 경외하는 여인으로 소개되어 있습니다. 이들 사악한 원로의 흉계에 빠졌을 때도 하느님 앞에 죄를 짓느니 차라리 이들 손아귀에 걸려드는 편이 낫겠다하며 결연하게도 이들과의 타협을 거절합니다. 이런 절망적 상황속에서도 수산나는 눈물이 가득한 채 하늘을 우러러 보니 그대로 주님 향한 일편단심 사랑과 신뢰, 희망의 기도하는 눈길이요 이어지는 절박한 기도입니다.
“아, 영원하신 하느님! 당신께서는 감추어진 것을 아시고, 무슨 일이든 일어나기 전에 미리 다 아십니다...저는 이제 죽게 되었습니다.”
그순간 하느님께서는 다니엘이라는 아주 젊은 사람 안에 있는 거룩한 영을 깨우심으로 개입하심으로 두 원로는 가차없는 심판을 받았고, 수산나는 구원되어 살아나니 말그대로 구사일생, 천우신조입니다. 온 회중은 이구동성으로 당신께 희망을 두는 이들을 구원하시는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간음하다 사로잡힌 여인이 살아나는 과정도 참으로 극적입니다. 정말 제1독서의 사악한 원로들처럼 간음하다 사로잡힌 여인을 예수님께 데려온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야 말로 정말 사악한 죄인들입니다. 예수님 빼놓고 정도의 차이일뿐 모두가 죄인들입니다. 이 여인과 함께 사면초가, 고립무원의 처지가 되버린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의 지극히 침착한 처신이 놀랍습니다. 예수님의 판단을 촉구하는 적대자들에 아랑곳 없이 침묵중에 묵묵히 땅위에 무엇인가 쓰시며 주위 사람들 모두의 흥분을 진정시키며 밖으로 향하던 눈길을 자기 내면으로 향하게 합니다. 이어 다음 말씀으로 기상천외한 반전이 이뤄지니 진정 천상 지혜의 계시입니다.
“너희 가운데 죄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새삼 자비의 깊은 샘에서 솟아난 지혜임을 깨닫습니다. 다니엘은 물론 예수님의 지혜는 그대로 자비하신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일반 사람들에게도 얼마나 많이 회자되는 말마디인지요! 그리고 나서 예수님은 다시 몸을 굽히시어 땅에 무엇인가 쓰시니 예수님의 지혜로운 말씀, 지혜로운 처신이 놀랍습니다. 그동안 이 말씀을 들은 이들은 죄가 많은 나이 많은 이들로부터 시작하여 하나씩 하나씩 떠나가고 마침내 예수님과 여자만 남습니다.
모두를 자발적 회개로 이끌어 모두를 살리는 자비하신 예수님의 구원의 지혜입니다. 이어지는 둘 사이의 대화도 깊은 가르침이자 깨우침이 됩니다. 참으로 자비하시고 지혜로우신 주님의 모습이 약여(躍如)합니다.
“여인아, 그자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단죄한 자가 아무도 없느냐?”
“선생님, 아무도 없습니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
주님도 단죄하지 않는데 누구 누구를 단죄합니까? 주님은 회개한 이들을 단죄하지 않고 그들의 과거는 불문에 붙이십니다. 오직 오늘 지금부터 새로운 시작의 삶이 중요할 뿐입니다. 그러니 넘어지면 즉시 회개하여 일어나 늘 새롭게 시작함이 지혜이자 구원의 첩경입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회개한 우리 모두를 자유롭게 하시고 살 힘과 지혜를 주십니다. 오늘 온 종일 되뇌고 싶은 화답송 시편 마직막 구절입니다.
“주님, 제 한평생 모든 날에,
은총과 자애만이 따르리니.
저는 오래오래, 주님 집에 사오리다.”(시편23,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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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18. 사순 제5주간 월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살림의 사람이 있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요한 8,7)
살림의 사람이 있네
죽이려는 사람과
죽어야하는 사람
그 한가운데
살림의 사람이 있네
죽임의 마수에 사로잡혀
죽이려는 사람마저
살림에로 되돌리시는
살림의 사람이 있네
스스로와 죽이려는 사람에게
죽어야하는 사람을
살림에로 들게 하시는
살림의 사람이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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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18. 사순 제5주간 월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올리브 산으로 가셨다.(요한 8,1)
높은 산과 같은 주님의 자비
올리브 산은 주님의 호의와 자비의 드높음을 나타냅니다. 그리스어로 ‘자비’는 ‘올레오스’(oleos)고 ‘올리브 밭’은 ‘올레온’(oleon) 이기 때문입니다. 또 올리브기름을 바르면 지쳐서 쑤시는 팔다리의 통증이 가라앉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기름은 힘과 순수함 면에서도 탁월하며, 어떤 액제와 섞어도 맨 위에 뜹니다. 이런 면이 거룩한 자비의 은총을 암시한다고 보아도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온 마음을 모아, 보이지 않는 올리브 산에 당신의 자리를 두고 계신 그분께로 옵시다. 그분의 하느님이신 우리 하느님께서는 기쁨의 기름으로 그분의 동료들에 앞서 그분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어(시편 45,8 참조), 그분께서당신의 기름부음에 우리를 동료로 삼을 수 있게 하셨습니다. 곧 영적 은총을 함께 나누는 이가 되게 하셨습니다.
-존자 베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4 존재는 거룩하다
엑카르트는 존재의 신비 곧 신적인 신비를 더 많이 감지한다. 쉬르만이 지적한 대로, 우리는 우리룹 “둘러싼 모든 대상 속에서 충만한 신적 존재를 볼 수 있다.” 존재는 실로 우리를 온통 둘러싸고 있지만, 엑카르트에게 존재는 존재 그 이상의 것이다. 존재는 하느님의 현존이다. 하느님은 존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모든 것은 존재를 지니는 만큼 하느님을 닮는다. 피조물은 저마다 하느님의 연인이다. 피조물은 자신이 어떻게 해서든지 유지하려고 하는 존재 속에 하느님이 현존하고 있음을 안다. 송충이조차도 이것을 알고 있다! 나무에서 떨어진 송충이조차도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기 위하여 다시 나무줄기를 타고 높은 곳으로 기어오른다. 이토록 존재는 고귀하다. 모든 피조물은 존재를 가지고 있고, 존재인 하느님 안에 있다. 따라서 피조물치고 고귀하지 않은 것은 없다. 아무리 고통스럽다 해도, 우리는 존재를 사랑할 수 있다.(137)
✝️ 월요일 거룩한 독서(렉시오디비나)의 날✝️
마태 24,32-44
무화과나무의 교훈
“너희는 무화과나무를 보고 그 비유를 깨달아라. 어느덧 가지가 부드러워지고 잎이 돋으면 여름이 가까이 온 줄 알게 된다.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사람의 아들이 문 가까이 온 줄 알아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가 지나기 전에 이 모든 일이 일어날 것이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깨어 있어라
"그러나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로지 아버지만 아신다.
노아 때처럼 사람의 아들의 재림도 그러할 것이다.
홍수 이전 시대에 사람들은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면서,
홍수가 닥쳐 모두 휩쓸어 갈 때까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사람의 아들의 재림도 그러할 것이다.
그때에 두 사람이 들에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의 주인이 어느 날에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이것을 명심하여라. 도둑이 밤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깨어 있으면서 도둑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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