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한했다. 익숙한 풍경인데 느낌이 전혀 달랐다. 이유는 여럿이었다. 무엇보다 절대 속도가 낮았다. 그만큼 스쳐 지나던 풍경을 더 오래 시야에 가뒀고, 덕분에 갓길 너머 풍경 같은 디테일까지 꼼꼼히 훑었다. 운전대 뒤채고 기어 봉 휘저어 힘 뿜는 과정 또한 상대적으로 슬로모션. 그래서 맛난 음식 아껴먹듯 모든 순간을 찬찬히 곱씹고 음미할 수 있었다.
과거 시승을 위해 즐겨 달렸던 강원도 대관령 옛길을 오랜만에 다시 찾았다. 그동안 이 꼬부랑길을 세단과 SUV, 스포츠카 등 갖가지 차종과 함께 했다. 특히 엄동설한에 괜한 객기로, 크라이슬러 크로스파이어의 지붕 열고 고개 넘다 지독한 감기로 고생한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땐 젊었다. 이번에 함께 한 차는 생뚱맞다. 르노 마스터 버스 13인승이다.
지난 20세기 말, 영동고속도로가 4차선으로 확장 개통하기 이전의 대관령 옛길은 횡계와 강릉 잇는 주요 통로였다. 그래서 여름 휴가철이면 예외 없이 정체로 들끓었다. 하지만 지금은 고갯마루 넘나드는 지역 주민의 출퇴근 시간 빼면 대체적으로 한산하다. 번듯한 추월 차선 갖춘 오르막과 비교적 넓은 갓길, 다양한 곡률의 코너를 갖춰 시승 코스로 그만이다.
지금껏 별별 차로 여길 달려봤지만 이번처럼 묘한 희열을 느낀 적은 드물었다. 르노 마스터 버스를 여기서 몰아보니 외모와 덩치, 제원이 주는 편견(걱정)과 퍽 거리가 있었다. 일단 쾌적했다. 운전석이 높고 앞과 옆 유리 면적이 넓어 같은 풍경도 초대형 TV로 보는 듯 시원시원했다. 의외로 무게중심도 낮아 물리력에 정처 없이 휘둘리지 않고 제법 잘 버텼다.
나아가 6단 수동변속기를 갖춰 엔진 브레이크를 걸기 좋았다. 낮은 기어 문 채 회전수 높여 다가오는 코너로 돌진하는 재미 또한 쏠쏠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심한 굽잇길을 제법 여유롭고 매끄러운 궤적으로 도려냈다. 가파른 고개도 농익은 토크로 심드렁하게 치고 올랐다. 이때의 성취감은 기대 이상 컸다. 긴박하지 않고 느긋해 역설적으로 더 명징했다.
우월한 덩치만큼 껑충하고 널따란 실내
출발 전 마스터 버스와 마주하는 순간 숨이 턱 막혔다. 13인승도 새삼 커서다. 길이×너비×높이는 5,550×2,020×2,500㎜. 수시로 주차칸 씹어 먹는 렉스턴 스포츠 칸보다 길다. 물론 너비와 높이가 주는 압도감에 비할 바는 아니다. 특히 키가 대부분 지하주차장의 높이제한(2.1~2.3m)을 웃돈다. 휠베이스는 3,685㎜로, 현대 쏠라티보다 15㎜ 더 길다.
주위를 의식해야 할 만큼 커다란 덩치는 광활한 실내로 보답한다. “12인승 스타렉스보다 한 명 더 태우기 위해 최대 1,200만 원 이상 더 쓸 필요 있냐”는 지적도 있다. 하지만 모르는 소리다. 공간의 질이 다르다. 스타렉스는 어깨만큼도 오지 않는 보조좌석을 몽땅 펼쳐야 비로소 정원을 태운다. 고급형인 ‘어반’ 빼면 2열 이후 좌석 벨트는 아직도 2점식이다.
반면 마스터 버스는 제대로 된 크기의 좌석으로 정원을 보듬는다. 또한, 모든 좌석에 3점식 시트벨트를 채운다. 나아가 천정이 워낙 높아 평균 키라면 반듯이 선 채 실내를 오갈 수 있다. 물론 아쉬운 점도 있다. 13인승은 운전석 제외하곤 슬라이딩은 물론 등받이 조절 기능마저 없다. 그래서 허리를 꼿꼿이 펴고 앉아야 한다. 그거 얼마 한다고 좀 넣어주지.
그래도 시승차는 마스터 버스 15인승의 전유물인 줄 알았던 자동문과 전동 발판을 갖췄다. 르노삼성 연구소에서 테스트할 겸 달아놓은 장비인데, 시승하면서 굉장히 요긴하게 썼다. 타고 내릴 때마다 저 큰 문을 ‘스매싱’하는 모습은 상상만으로도 어깨가 쑤신다. 만약 르노 마스터 버스 13인승을 산다면, 전동 슬라이딩 도어 개조는 선택이 아닌 필수다.
성문처럼 높고 웅장한 뒤쪽 양문을 열면 황당하게 넓은 공간이 펼쳐진다. ‘패키징의 달인’ 현대차였다면 1초도 고민하지 않고 시트 한 열 구겨 넣었을 텐데. 마스터 버스는 빈틈없이 시트 채울 미련을 버린 대신 캐리어를 인원수대로 쌓고도 남을 트렁크를 챙겼다. 짐 공간의 너비는 1,739㎜, 높이(시트 등받이까지)는 1,300㎜, 깊이는 최대 925㎜다.
상용차답게 견고하고 수수한 내장재
르노 마스터 버스는 밴을 바탕으로 해외의 외주업체가 내장재를 씌우고 시트 얹어 완성한다. 내구성에 초점 맞춘 상용차 베이스의 흔적은 실내 곳곳에 묻어난다. 무미건조한 색감과 뻣뻣한 감촉의 플라스틱이 대표적이다. 운전석에 ‘오르면’ 온통 진회색 천지. 광활한 대시보드는 여기저기 다양한 크기와 용도의 수납공간을 품었다. 그런데 구성이 다소 산만하다.
마치 디자이너가 여백 발견할 때마다 무언가 하나씩 더한 느낌이다. 바탕 면적이 넓다보니 옵션인 내비게이션 품은 센터페시아의 디스플레이가 새삼 앙증맞아 보인다. 대시보드 상단엔 무시동 히터 스위치를 달았다. 엔진을 깨우지 않고도 난방이 가능해 겨울철 ‘차박’할 때 요긴한 장치다. 트렁크 왼쪽 바닥의 시커먼 박스가 바로 이 스위치와 연결된 장치다.
계기판은 심플하다. 프랑스의 주요 제한속도에 맞춰 속도계 또한 70·90·110 등 홀수만 오롯이 새겼다. 림이 제법 두툼한 스티어링 휠은 위아래 각도조절만 가능하다. 기어 봉은 길이와 조작범위 모두 예상보다 짧다. 클러치 페달은 가벼우면서도 깊게 밟히고, 거의 다 떼었을 때 동력을 잇는다. 위치가 오른쪽으로 치우쳐 변속하지 않을 때 왼발 놓기 편하다.
직물로 감싼 시트(인조가죽은 옵션)는 딱히 입체적이지 않고 쿠션이 얇은 편이다. 1열엔 최대 3명까지 앉을 수 있다. 하지만 가운데 좌석은 앞쪽의 수납공간 때문에 무릎공간이 넉넉지 않다. 대신 좌우 어깨 공간은 여유만만이다. 2열 이후 좌석은 가운데는 직물, 가장자리는 인조가죽으로 씌웠다. 13인승은 세 좌석을 나란히 붙여 한쪽에 복도를 마련했다.
송풍구는 2열 위쪽에서 뒤를 향해 나란히 6개를 뚫었다. 풍량이 충분해 고래뱃속처럼 뻥 뚫린 실내를 원하는 온도의 공기로 채우는데 부족함이 없다. 창문이 큼직해 풍경도 막힘없이 내다볼 수 있다. 실내를 둘러보고 있으니 10개의 빈자리에 태우고 싶은 이들의 얼굴과 이런저런 조합이 하나하나 떠오른다. 상상만으로도 흐뭇해 입 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대형 버스 모는 듯 낯설고 흥미로워
스마트 키 같은 사치는 없다. 브레이크와 클러치 페달 밟고 스티어링 칼럼 왼편의 구멍에 열쇠 꽂고 돌리면, 대시보드 너머 엔진이 절절 끓기 시작한다. 시야와 감각 모두 평소 익숙한 승용차의 느낌과 차원이 다르다. 기어를 1단에 물리고 가속페달을 살며시 밟자 커다란 버스가 의외로 사뿐히 발걸음을 뗀다. 크기를 의식하다 보니 운전이 평소와 달라진다.
처음 드는 감정을 간추릴 표현은 의기양양. 토르의 망치나 캡틴 아메리카의 방패처럼, 막강한 무기 쥔 듯한 착각에 뿌리를 둔 감정이다. 그런데 캐딜락 에스컬레이드 같은 고배기량 대형 SUV 몰 때 느낀 우월감과는 결이 좀 다르다. 자신감이 차오르되 여러 승객을 태운 기사로서의 책임감 또한 동시에 밀려든다. 그래서 사소한 조작도 신중하고 조심스러워졌다.
특히 경차 한 대 길이 꿀떡 삼키는 휠베이스 때문에 좌우 회전 때 충분한 간격을 둬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뒷바퀴로 연석을 타고 넘을 수 있으니까. 갑자기 끼어드는 차도 신경 써야 했다. 제동 및 회피기동 성능이 승용차만 못한 탓이다. 한참 운전에 몰입하다 문득 피식 웃음이 새나왔다. 45인승 대형 버스 기사라도 된 양 비장해진 내 모습이 왠지 머쓱해서다.
하지만 역시 사람은 적응의 동물. 이내 덩치와 움직임에 익숙해졌다.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운전이 보다 과감하고 자연스러워졌다. 어느덧 코끝부터 꽁무니까지 완전히 파악하고 휘두를 수 있게 되었다. 딱 그즈음 대관령 옛길에 접어들었다. 캠핑카와 카라반 정박장으로 변한 대관령 휴게소를 지나 내리막 시작되는 정점을 지났다. 이제 제대로 운전할 차례다.
르노 마스터 버스의 엔진은 직렬 4기통 2.3L(2,299㏄) 디젤 터보다. 밴은 같은 엔진을 얹고서 145마력 내는데, 버스는 18마력 더 높은 163마력을 낸다. 최대토크 또한 밴은 36.7㎏·m, 버스는 38.7㎏·m다. 마스터 버스의 공차중량이 밴보다 최대 1,500㎏ 더 나가지만, 가속이 확실히 더 기운차다. 수치 차이를 고스란히 머리와 가슴으로 느낄 수 있다.
기대 이상 힘차고 재미있는 주행성능
활강코스 같은 내리막에서도 위축될 필요 없었다. 네 바퀴 디스크 브레이크와 ABS는 물론 전자식으로 제동력을 나누는 ‘EBD’와 페달을 깊이 밟지 않아도 충분한 제동력을 지원하는 ‘BAS’까지 기본으로 갖춘 까닭이다. 실제로도 이날 기나긴 내리막을 달리며 제동을 반복했지만, 브레이크는 피곤해하거나 느슨해지는 기색 없이 상큼한 컨디션을 유지했다.
1단 기어는 기어비가 꽤 길다. 같은 이유로, 2단 출발이 퍽 상쾌하지 않다. 따라서 1단으로 어느 정도 끌어준 뒤 2단으로 갈아탈 때 보다 매끄럽고 경쾌했다. 고속도로에선 기어 바꿀 일이 거의 없다보니 간혹 정체구간을 만나고 나서야 수동 변속기의 존재를 깨닫기도 했다. 이날 대부분 시간을 혼자 탔는데, 이 기준으로 체감가속은 수치를 성큼 넘어섰다.
강릉으로 접어들기 직전 차를 돌렸다. 수동 변속기로 토크를 잔뜩 응축시켜 후련하게 쏟아내며 언덕 치고 오르는 재미가 기대 이상 긴박하고 흥미진진하다. 뒤 서스펜션의 탄탄한 판스프링은 롤과 악수조차 거부했다. 구동계 때문에 앞쪽으로 쏠렸던 무게도 뒤쪽로 나뉘면서 밸런스도 훨씬 좋아졌다. 덕분에 마치 클리오라도 되는 듯 흥에 흠뻑 취해 몰았다.
주변 해안도로에서 후배에게 운전 맡기고 2열로 옮겼다. 이번엔 커다란 창문 밖 뽀얗게 부서지는 파도를 보며 여행자로 빙의했다. 그야말로 비교체험 극과 극. 이처럼 색다른 경험과 추억을 한 가득 안겨줄 마스터 버스 13인승의 가격은 3,630만 원. 기아 카니발 수준이다. 수동뿐인 변속기가 걸림돌이라면, 시중에서 150만 원이면 반자동으로 개조할 수 있다.
내년 중 부분변경 거친 마스터가 들어온다. 파워트레인 구성은 같은데, 디자인 다듬고 장비를 더한다. 가격은 오르고 혜택은 줄어들 전망이다. 지난 1~11월, 마스터 국내 판매는 3,094대. 2019년이 끝나가는 지금, 밴은 재고가 거의 바닥났고, 버스는 좀 남았다. 마스터를 고민 중이었다면, 지금이 좋은 기회다. 개인적으론, 지금 디자인이 더 예쁘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