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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야국(狗邪國)
古代史(고대사)地名(지명)
삼한시대 변한(弁韓)의 한 소국(小國).
異稱(이칭)변진구야국(弁辰狗耶國), 구야한국(狗耶韓國), 금관가야(金官加耶), 본가야국(本伽耶國), 가락(駕洛), 가락(伽落), 가라(加羅), 가라〔加良〕분야고대사유형지명성격변한(弁韓) 소국(小國)所在地(소재지)慶尙南道(경상남도) 金海(김해) 一帶(일대)時代(시대)古代(고대)-初期(초기)國家(국가)成格(성격)변한(弁韓) 소국(小國)所在地(소재지)慶尙南道(경상남도) 金海(김해) 一帶(일대)
定義(정의)
三韓(삼한)시대 변한(弁韓)의 한 소국(小國).키워드(keyword:예어:關鍵詞)구야한국(狗耶韓國)가라(加羅)금관가야(金官加耶)국읍(國邑)김해 양동리 고분군(金海 良洞里 古墳群)良洞里(양동리)古墳群(고분군)改設(개설)弁韓(변한) 小國(소국) 가운데의 하나로서, 지금의 慶尙南道(경상남도) 金海(김해) 地方(지방)에 있었다.『삼국지(三國志)』위서 동이전(魏書 東夷傳)에 ‘변진구야국(弁辰狗耶國)’ 또는 ‘구야한국(狗耶韓國)’으로 記錄(기록)되었으며, 본가야국(本伽耶國), 즉 금관가야(金官加耶)의 母體(모체)로서『삼국
사기(三國史記)』·『삼국유사(三國遺事)』·『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가락(駕洛·伽落)’·‘가라(加羅)’·‘가라〔加良〕’ 등으로 記錄(기록)되어 있다.自然(자연)環境(환경)狗倻國(구야국)은 立志的(입지적)으로 洛東江(낙동강)을 따라 慶尙道(경상도) 各(각) 地域(지역)과 通(통)하고 韓半島(한반도)로부터 日
本(일본)列島(열도)로 들어가는 海路狀(해로상)의 重要(중요)地點(지점)으로서, 일찍부터 外部(외부)勢力(세력)과 頻繁(빈번)한 交涉(교섭)이 있어온 地域(지역)이다. 특히, 진한(辰韓)·弁韓(변한)의 鐵(철)資源(자원)이 널리 알려짐에 따라 낙랑군(樂浪郡)·대방군(帶方郡)·동예(東濊)·마한(馬韓)·왜(倭) 등과 鐵(철)을 媒介(매개)로 活潑(활발)한 交易
(교역)關係(관계)를 가지면서 韓半島(한반도) 初期(초기)鐵器(철기)文化(문화)의 中心地(중심지)로 發達(발달)하였다.形成(형성) 및 變遷(변천)金海(김해) 地域(지역)에는 新石器時代(신석기시대) 이래 多數(다수)의 住民(주민)集
團(집단)들이 居住(거주)해왔으며, 靑銅器時代(청동기시대)에 이르러 現在(현재)의 金海市(김해시)를 비롯해 주촌면(酒村面)·長有面(장유면)·대동면(大東面) 등지에 各各(각각) 獨自的(독자적)인 政治集團(정치집단)들이 形成(형성)되고 있었다. 西紀前(서기전) 2世紀(세기)경에는 金海
市(김해시)를 中心(중심)으로 豐富(풍부)한 靑銅器(청동기)를 所有(소유)하는 相當(상당)한 規模(규모)의 政治集團(정치집단)이 存在(존재)하게 되었다.그 뒤 이러한 有力(유력)集團(집단)을 土臺(토대)로 隣近(인근)
地域(지역)의 小集團(소집단)들 사이에 政治的(정치적) 統合
(통합)이 進行(진행)됨으로써『三國志(삼국지)』의 狗倻國(구야국)이 成立(성립)된다. 小國(소국) 가운데 比較的(비교적) 큰 나라가 中心(중심)이 되어 聯盟(연맹)적 結束(결속)을 한 政治
體(정치체)가 地域(지역)聯盟體(연맹체)인데, 2世紀(세기) 中(중)·後半(후반) 무렵부터 形成(형성)되기 始作(시작)하였다. 弁韓(변한)의 狗倻國(구야국)은 地域(지역)聯盟體(연맹체)에서 周邊(주변) 小國(소국)들을 主導(주도)하는 位置(위치)에 있었
다. 2世紀(세기) 後半(후반) 狗倻國(구야국) 국읍(國邑)의 主(주) 古墳群(고분군)인 良洞里(양동리)古墳群(고분군) 中(중) 가장 오래된 古墳(고분)인 ‘良洞里(양동리) 162號(호)墳(분)’은 大型(대형) 長方形(장방형) 목곽묘
(木槨墓)일뿐 아니라 遺物(유물)에서도 한경 2매를 포함한 10매의 동경(銅鏡)과 수정다면옥, 유리구슬목걸이 등 水準(수준) 높은 위세품(威勢品)과 多量(다량)의 철정(鐵鋌), 철촉(鐵鏃), 철모(鐵矛) 등 鐵製(철제)武具
(무구), 재갈 등을 부장(副葬) 하고 있어 그 勢力(세력)의 정도를 가늠하게 한다.1世紀(세기) 前半(전반) 9간(九干)주 01)의 推戴(추대)를 받아 駕洛國(가락국)(狗倻國(구야국)을 세웠다는『三國遺事(삼국유사)』「가락국기(駕洛國記)」의 수로왕(首露王)은 초기철기문화(初期鐵器文
化)를 배경으로 하는 유이민 集團(집단)으로서, 靑銅器時代(청동기시대) 이래 存續(존속)해 온 金海(김해) 地域(지역)의 다수 政治集團(정치집단)들을 統合(통합)하는 主導(주도)勢力(세력)으로 解釋(해석)되고 있다. 9干(九干(간)에는 몇 개
의 읍락(邑落)을 거느린 小國(소국)의 首長(수장)은 물론 小國(소국) 段階(단계)까지 發展(발전)하지 못한 邑落(읍락)의 首長(수장)도 包含(포함)되어 있었다. 首露王(수로왕)은 小國(소국)이 아닌 이들 地域(지역)聯盟體(연맹체)의 首長(수장)으로 推戴(추대)되었던 것이다.또한, 狗倻國(구야국)은 政治的(정치적) 支配者(지배자)인 신지(臣智)에게 ‘구야진지렴(狗耶秦支廉)’이라는 우호(優號)를 附與(부여)해줄 정도로 有力(유력)한 小國(소국)이었으며, 4世紀(세기)까지는 洛東江(낙동강)下流(하류) 및 南海岸(남해안)地域(지역)의 일부 小國(소국)들을 統率(통솔)하는 하가야(下伽耶)의 中心(중심)勢力(세력)으로 成長(성장)하였다.이는『三國史記(삼국사기)』新羅本紀(신라본기) 파사왕(婆娑王) 23년(102년)조에 실려 있는 新羅(신라)와 首露王(수로왕)의 逸話(일화)를 통해 確認(확인)할 수 있다. 新羅(신라)의 領土紛爭(영토분쟁) 解決(해결)을 위해 首露王(수로왕)을 招聘(초빙)한 事例(사례)이다. 게다가 수로는 自身(자신)에 대한 接待(접대)에 不當(부당)한 待遇(대우)를 한 한기부(漢祗部)의 首長(수장)인 보제(保齊)를 죽이고 自國(자국)으로 돌아간다. 이처럼 사로국(斯盧國)에 비해 位相(위상)이 높았던 狗倻國(구야국)은 3世紀(세기) 무렵 斯盧國(사로국)의 飛躍的(비약적)인 發展(발전)으로 인해 그 位相(위상)이 逆轉(역전)된다. 이후 광개토왕(廣開土王)이 派遣(파견)한 高句麗(고구려) 남정군(南征軍)에 의해 그 勢力(세력)이 점차 弱化(약화)되어 532년(法興王(법흥왕) 19)新羅(신라)에 倂合(병합)되기까지 周邊(주변) 强大(강대)勢力(세력)의 交易(교역)仲介地(중개지)로 存續(존속)하였다.
參考(참고):慶尙南道(경상남도) 金海市(김해시) 酒村面(주촌면) 가곡마을 뒷산에 있는 三國時代(삼국시대) 널무덤·덧널무덤·돌덧널무덤 등이 發掘(발굴)된 무덤군.事迹(사적).
分野(분야)古代(고대)私有形(사유형)文化財(문화재)指定(지정)機關(기관)文化財廳(문화재청) 指定(지정) 部類(부류) 事迹(사적)指定(지정)番號(번호)第(제)454號(호), 遺跡(유적)成格(성격)무덤군 建立(건립)時期(시기) 三國時代(삼국시대)規模(규모)51,826㎡所在地(소재지)慶南(경남) 金海市(김해시) 酒村面(주촌면) 良洞里(양동리) 산3番地(번지) 登(등)所有者(소유자)金海市(김해시)時代(시대)古代(고대)-三國(삼국)指定(지정)機關(기관)文化財廳(문화재청)指定(지정)部類(부류)事迹(사적)指定(지정)番號(번호)第(제)454號(호)
定義(정의)
慶尙南道(경상남도) 金海市(김해시) 酒村面(주촌면) 가곡마을 뒷산에 있는 三國時代(삼국시대) 널무덤·덧널무덤·돌덧널무덤 등이 發掘(발굴)된 무덤군.事跡(사적).改設(개설)事跡(사적) 第(제)454號(호). 金海(김해) 良洞里(양동리) 古墳群(고분군)은 조만강의 支流(지류)인 내삼천과 유하천 사이에 형성된 海拔(해발) 90m의 丘陵(구릉)에 立地(입지)하고 있다. 지금까지 發掘調査(발굴조사)한 結果(결과) 이곳에서는 목관묘, 목곽묘, 옹관묘, 석곽묘, 석실묘 등 546기의 무덤을 確認(확인)하였다. 時期(시기)는 대체로 紀元前(기원전) 2世紀(세기)대로부터 紀元後(기원후) 7世紀(세기)대에 걸쳐 形成(형성)된 무덤군으로 여겨지고 있다.歷史的(역사적) 變遷(변천)金海(김해) 良洞里(양동리)古墳群(고분군)은 1980年(년)初(초)까지 金海(김해) 良洞里(양동리)에서 出土(출토)된 것으로 전해지는 遺物(유물)들이 學界(학계)에 紹介(소개)되면서 重要(중요) 遺跡(유적)으로 注目(주목)되었다. 1984년國立(국립)文化財(문화재)硏究所(연구소)에 의한 調査(조사)에서 목관묘와 목곽묘 등 23기를 確認(확인)하였고, 1990∼1996년 동의대학교(東義大學校) 博物館(박물관)에 의하여 546기의 무덤을 확인하였는데, 中心(중심)되는 무덤은 목곽묘였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그 후 遺跡(유적)의 重要性(중요성)이 認定(인정)되어 2004년 7월 24일 事迹(사적) 第(제)454號(호)로 指定(지정)되었고, 2011년에는 國立(국립)金海(김해)博物館(박물관)에 의하여 6번째 發掘調査(발굴조사)가 이루어져 단각고배를 부장한 石室(석실)을 確認(확인)하였다.內容(내용)과 特徵(특징)와질토기단계의 무덤으로는 良洞里(양동리) 162호묘와 良洞里(양동리) 235號(호)墓(묘)가 代表的(대표적)이다. 목곽묘인 良洞里(양동리) 162號(호)墓(묘)는 길이 494㎝, 너비 344㎝, 깊이 123㎝의 토광 안에 길이 388㎝, 너비 280㎝ 되는 목곽을 設置(설치)하였는데, 피장자의 네 모서리에는 판상철부를 10매씩 묶어 놓았다. 水晶(수정)과 유리구슬로 만든 경식, 부채흔적, 거울, 철복 등을 부장하였다. 235호 목곽묘는 길이 760㎝, 너비 390㎝, 깊이 116㎝의 토광 안에 길이 540㎝, 너비 320㎝로 추정되는 목곽을 設置(설치)하였는데, 바닥에는 판상철부를 깔고 목곽을 안치하고 屍身(시신)과 副葬品(부장품)을 安置(안치)하였다. 出土(출토) 遺物(유물)은 水晶(수정)과 유리제 玉(옥)으로 만든 경식을 부장하였다. 고식도질토기 단계인 4世紀(세기)의 무덤으로는 양동리78호 목곽묘가 있다. 길이 495㎝, 너비 210㎝, 깊이 115㎝의 토광에 길이 432㎝, 너비 155㎝, 높이 60㎝의 곽을 안치하였는데, 외절구연고배, 직구대부호, 소형기대를 비롯하여 고사리무늬를 붙인 판갑, 몽고발형 주, 목심등자, 재갈, 유자이기를 부장하였다. 良洞里(양동리) 349號(호)墓(묘)는 주부곽식으로 주부곽 모두 목곽을 安置(안치)하였고 良洞里(양동리) 304號(호)墓(묘)는 주곽은 石槨(석곽)이며 副槨(부곽)은 木槨(목곽)을 使用(사용)하였다.意義(의의)와 評價(평가)金海(김해) 良洞里(양동리)古墳群(고분군)은 紀元(기원)前後(전후)에서 7世紀(세기)대까지의 다양한 무덤유구들이 分布(분포)하고 있는 점에서 좁은 地域(지역)이지만 地域(지역)의 變遷史(변천사)를 照明(조명)해 볼 수 있는 점에서 意義(의의)가 있다. 아울러 出土遺物(출토유물) 가운데에서 中國(중국) 한 系統(계통)의 거울이나 왜계의 銅鉾(동모) 등이 부장되고 있는 점에서 當時(당시)의 國際交流(국제교류)를 類推(유추)할 수 있는 資料(자료)를 提供(제공)하고 있다.
金海(김해) 良洞里(양동리) 古墳群(고분군) 全景(전경)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김해 양동리 고분군(金海 良洞里 古墳群)
參考文獻(참고문헌)
『金海(김해)良洞里(양동리)古墳(고분)文化(문화)Ⅰ』(동의대학교 博物館(박물관),2008)『김해양동리고분문화』(동의대학교(東義大學校)박물관,2000)『金海(김해)良洞里(양동리)古墳(고분) 發掘調査(발굴조사)보고서』(文化財(문화재)硏究所(연구소),1989)『菊隱(국은) 李
養璿(이양선) 收集(수집)文化財(문화재)』(國立(국립)慶州(경주)博物館(박물관),1987)「金海(김해) 良洞里(양동리) 遺跡(유적) 2011년도 發掘(발굴)成果(성과)」(박진일,『제18회 가야사 國際(국제)學術會議(학술회의) 金海(김해) 양동 古墳群(고분군)과 高大(고대)東(동) 亞細亞(아세아)』,인제 大學校(대학교)伽倻(가야)文化(문화)硏究所(연구소) ․國立(국립)金海(김해)博物館(박물관),2012)「金海(김해)地方(지방)出土(출토) 靑銅(청동)
遺物(유물)」(박경원,『고고미술』제106․107합집,韓國(한국)美術史(미술사)學會(학회),1970)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김해 양동리 고분군(金海 良洞里 古墳群))]
參考文獻(참고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삼국유사(三國遺事)삼국지(三國志)일본서기(日本書紀)
후한서(後漢書)「변한(弁韓)의 ‘왕(王)’과 구야국(狗邪國)-3世紀(세기) 全般(전반)을 中心(중심)으로-」(박대재,『한국사학보(韓國史學報)』24,2006)「신라국가(新羅國家) 성립과정에 있어서 소국쟁강(小國爭疆)」(선석열,『歷史(역사)와 경계』49,2003)「전기 伽倻(가야) 소국(小國)의 成立(성립)과 發展(발전)」(백승옥,『韓國(한국) 古代史(고대사) 속의 伽倻(가야)』,혜안,2001)
「3世紀(세기) 後半(후반) 弁·진한 세력권(弁·辰韓 勢力圈)의 변화(變化)」(선석열,『가라문화』13,1996)『가야연맹사(加耶聯盟史)』(김태식,일조각(一潮閣),1993)「가야지역선사문화(伽倻地域先史文化)의 변천(變遷)」(안춘배,『한국고고학보(韓國考古學報)』12,1982)「부산(釜山)과 가야문화(加耶文化)」(김정학,『부산시립박물관보(釜山市立博物館報)』1·2합집,1981)「수로왕고(首露王考)」(이병도,『한국고대사연구(韓國古代史硏
究)』,박영사(博英社),1976)「김해지방(金海地方)의 선사문화(先史文化)」(김정학,『김해지구종합학술조사보고서(金海地區綜合學術調査報告書)』,부산대학교 한일문화연구소(釜山大學校韓日文化硏究
所),1973)「신라상고세계(新羅上古世系)와 그 기년(紀年)」(김철준,『역사학보(歷史學報)』17·18합집,1962)「김해패총연대(金海貝塚年代)에 관한 재검토(再檢討)」(김원룡,『역사학보(歷史學報)』9,1957)「加羅諸國の史的
發展について」(鬼頭淸明,『朝鮮史硏究會論文集』11,1974)「金海貝塚の再檢討」(榧本杜人,『考古學雜誌』40-3,43-1·2,1954·1957:『朝鮮の考古學』,1980)「金海貝塚發掘調査報告」(濱田耕作·梅原末治,『大正九年度古跡調査報告』,1923)
주석주01아홉개 토착세력집단의 족장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구야국(狗邪國)]
金海市(김해시)의 行政(행정) 區域(구역)은 1邑(읍), 6面(면), 12行政洞(행정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金海市(김해시)의 人口(인구)는 2019년 12월 末(말) 住民登錄(주민등록)을 基準(기준)으로 54만2455 명, 21만7228 家口(가구)로 慶南(경남) 全體(전체)의 16.1%에 該當(해당)하며, 面積(면적)은 463.3 km²로 慶南(경남)의 4.4%에 該當(해당)한다. 人口(인구)가 50萬(만) 名(명)을 超過(초과)하였으므로 行政區(행정구)를 設置(설치)할 수 있는 要件(요건)을 갖추고 있으나, 區(구)를 設置(설치)하지 않고 있다. 1991년부터 1995년까지 韓國(한국)土地(토지)公社(공사)가 58만평 規模(규모)의 金海(김해)內外(내외)地區(지구) 新都市(신도시)를 開發(개발)하였고, 1998년부터 '장유신도시'가 開發(개발)되었다.
金海市(김해시) 行政區域(행정구역)
邑(읍)·面(면)·洞(동)漢字(한자)
面積(면적) (km²)
人口(인구)世代(세대)
진영읍 進永邑 39.67 55,968 23,462
주촌면 酒村面 31.29 16,143 6,347
진례면 進禮面 44.82 6,775 3,549
한림면 翰林面 59.51 7,969 4,219
생림면 生林面 50.18 3,874 2,198
상동면 上東面 70.51 3,304 1,683
대동면 大東面 48.63 6,459 3,230
동상동 東上洞 1.80 10,219 4,830
회현동 會峴洞 1.14 9,801 4,550
부원동 府院洞 2.06 10,239 4,735
내외동 內外洞 5.33 75,635 30,749
북부동 北部洞 13.94 80,643 29,793
칠산서부동 七山西部洞 20.04 9,643 4,301
활천동 活川洞 5.88 41,981 17,460
삼안동 三安洞 11.29 34,971 15,351
불암동 佛岩洞 2.59 8,021 3,176
장유1동 長有1洞 13.51 56,662 20,720
장유2동 長有2洞 19.70 37,034 14,035
장유3동 長有3洞 21.97 67,114 22,840
김해시金海市 463.3 542,455 217,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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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승철 ~ 일 2021-01-03 오후 5:48 ~ 좋은 역사 자료 잘 받았습니다. 감사 합니다. 항상 귀한 자료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