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시절, 같은 과 친구 제일 교포의 소개로 아까사까 한국 술집에서 웨이터로 알바를 하게 되었다.
석사 1년차 라서 별로 바쁘지 않은 터여서, 드디어 나의 이중 생활이 시작되었다.
낮에는 학생으로, 밤에는 밤의 꽃들 속에서 나비로.
덴쪼(てんちょう,店長)였던, 일본인은 잘 알고 있었다. 같은 과 친구 제일 동포와 친구여서 평소에도 가끔 보던 사이였다.
덕분에 가장 중요하면서도 힘들지 않았던 아가씨들의 출근 관리와 도항(同伴,どうはん)체크를 맡았다.
도항은 아가씨들이 의무적으로 자기 손님을 동반해야지만 기본급이 나오는 아까사까 한국 술집 제도이자, 대부분의 일본 술집에서 사용했던 매출을 올리는 일이었다.
이쁜 아가씨는 한 달에 도항 횟수가 적고 못생긴 아가씨는 도항 횟수가 많았다.
이쁜 아가씨는 도항에 별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문제는 못생긴 아가씨들이었다. 그녀들은 그것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았다.
나는 못생긴 아가씨들을 도와 주었다.
덴쪼나 마마(술집 여주인)는 내가 하는 일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고, 걸릴 수도 없는 구조였다.
못생긴 아가씨들은 전부 내 편이었다.
손님을 꼬셔서 나에게 팁을 주도록 유도했고, 나는 하루에 만엥 이상의 팁을 받았다.
만엥은 그 당시 일본에서는 꽤 큰 돈이었다.
당시 일본 초등학교 교사의 초봉이 십만엥을 겨우 넘길 정도였다. 나는 한달에 삼십만엥 이상의 팁을 받았고, 월급을 합치면 오십만엥을 넘었다.
주말이면, 아가씨들과 아까사까 바로 옆의 록뽕기(六本木) 술집에서 술을 마셨다.
내 인생을 관통하여서, 그렇게 많은 여자들과 놀았던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고, 그 후로는 전혀 없었다.
내 인생의 황금기였다고 할까.
돈도 많이 벌었다. 문부성 장학금이 나오기에 아까사까에서 번 돈은 전부 저금을 했다.
여자 경험도 자주 했다. 아가씨들과 술을 마시면, 외로운 아가씨들이 유혹했다.
아까사까에서 나는 돈도 벌었지만, 여자도 많이 경험을 했다.
그런 날은 그 후로 다시는 오지 않았다.
아내와 결혼을 하고 그만 두었다. 학교가 바빠지기 시작했다.
일 년 정도 했던 거 같다.
아까사까에서 번 돈은, 그 후 내가 한국에서 시간 강사를 그만 두고, 장사를 시작했을 때 큰 도움을 주었다.
그 돈으로 중고 포크레인 열 대를 사서 대박이 났다.
그 당시 한국은 건설업의 열풍이 불던 때였다.
잘못되면, 실직을 해서 가족들을 먹여살리기 힘들었는데, 아까사까가 나를 도와 준 셈이었고, 어쩌면 그 후로도 나의 경제적 바탕이 되어 내 가족들이 편하게 살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아까사까는 나에게 행운이었다.
나는 그때 꽃 속에서 놀았다. 나는 나비였다.
그리고 가끔은 벌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