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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년의 미소를 간직한 아름다운 경주에서 3일간의 여행을 마치고.. 2011.10.18.화~20.목(2박3일) 마이홈➡무장사지➡보문허브관광랜드➡불국사석굴암➡장항리사지➡골굴사 ➡기림사➡감은사지➡대왕암➡감포 가곡항➡양북5일장➡괘릉➡대릉원➡마이홈 경주시 감포읍 대본1리 숙소앞 바닷가에서..2011.10.20.목요일아침 3편(마지막편) 대왕암➡이견대➡감포 가곡항➡양북5일장➡괴릉➡영지➡대릉원 둘쨋날의 감은사지 관람을 마치고 경주 문무대왕릉 (慶州 文武大王陵)으로 이동 어느사이 하늘엔 푸른하늘이 구름으로 가리워져 대왕암에 도착했을땐 짙은 잿빛하늘로 시간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어두침침했다. 해가 하늘에 떠 있었다면 그 햇님이 분명 서산을 넘어가는 중이었으리라.. 1년전 신년새해 첫날, 일출을 보기 위해 가족과 함께 다녀 온 곳이다. 그땐 새볔 살을 에이는 혹독한 추위속에서 일출의 감동과 환희를 보기 위해 곳곳에서 모여든 사람들로 인산인해 였다. 저 바다끝에서 고개 쏘옥 내밀며 오르는 붉은 태양을 보기 위해 어둠속에서 혹독한 추위도 견디며 오르기를 가슴졸이며 기다리던 사람들로 바닷가가 흥청대었는데, 이번엔 수학여행 온 학생들로 바닷가 모래사장이 학생들의 축제장으로 흥청대었다. 파도소리와 아이들소리의 화음과 그리고 여러 제스츄어가 축제장의 흥을 돋구고 있었다. 볼거리 풍성이었다. 경주 문무대왕릉 (慶州 文武大王陵) 경북 경주시 양북면(陽北面) 봉길리(奉吉里) 앞바다에 있는 신라 문무왕의 수중릉(水中陵). 사적 제158호. 대왕암(大王岩)이라고도 한다. 삼국통일을 완수한 문무왕(文武王)은 통일 후 불안정한 국가의 안위를 위해 죽어서도 국가를 지킬 뜻을 가졌다. 그리하여 지의법사(智義法師)에게 유언으로, 자신의 시신(屍身)을 불식(佛式)에 따라 고문(庫門) 밖에서 화장하여 유골을 동해에 묻으면, 용이 되어 국가를 평안하게 지키도록(護國大龍) 하겠다고 하였다. 이에 따라 유해를 육지에서 화장하여 동해의 대왕암 일대에 뿌리고 대석(大石)에 장례를 치렀다. 사람들은 왕의 유언을 믿어 그 대석을 대왕암이라고 불렀다. 대왕암은 육지에서 불과 200여 미터 떨어진 가까운 바다에 있다. 큰 바위가 주변을 둘러싸고 있고, 중앙에 약간의 넓은 공간이 있는데, 이 공간에 대석을 이동하여 배치한 것으로 보인다. 중앙의 대왕암 주변을 큰 바위(화강암)가 둘러 싸고 있는데, 네 방향으로 물길이 나 있어 주변 바위는 네 부분으로 구분되어 있다. 자연적으로 물길이 나 있는 상태이나 약간의 인공을 가하여 튀어나온 부분을 떼어 내어 물길이난 가운데 공간을 약간 가다듬은 흔적이 발견되었다. 바닷물은 파도와 함께 동쪽 물길을 따라 중앙 공간으로 흘러들어와 서쪽 물길을 통해 빠져 나간다. 바닷물이 물길을 따라 중앙으로 진입할 때 파도가 소멸되기 때문에 중앙의 물은 파도의 영향을 받지 않아 잔잔하며, 물 높이는 중앙의 큰 바위를 살짝 덮을 정도를 항상 유지한다. 대석의 안치 방법과 유골의 수장 여부에 대하여 그 동안 많은 의문점이 있었다. 2001년 3월 한 방송사에서 역사연구 프로그램 제작을 위해 초음파 탐지기 등을 이용하여 바위의 조직과 바위의 내부 및 수면하를 조사한 결과, 대왕암 내부 또는 아래에 유골이나 부장품이 존재하지 않음을 확인하였다. 대왕암에서 멀지 않은 육지에 '낭산'이라고 하는 신성시되는 언덕이 있는데, 이곳에 '능지탑'이라고 불리는 탑이 있다. 연구 결과 문무왕의 시신은 이 능지탑에서 화장되어 대왕암 주변에 산골하고, 대왕암 주변 바위에서 절리된 큰 바위를 중앙의 빈 공터에 남북으로 안치시켜 장례를 지낸 형식적 절차를 가짐으로써 무덤(왕릉)으로서의 의미를 부여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대왕암의 네 방향으로 수로를 낸 것은 석가의 사리를 안치한 탑의 형식을 적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신라의 한 설화에, 문무왕이 그 아들 신문왕(神文王)에게 만파식적(万波息笛)이라는 피리를 주어, 문무왕이 죽은 후 바다의 용이 되었다가, 만파식적을 불면 용이 나타나 국가의 안위를 지키도록 하겠다고 하는 이야기가 전한다. 아들 신문왕은 바다에서 1.5km 떨어진 동해변에 부왕을 기리는 감은사(感恩寺)를 지어, 절의 금당 밑까지 바닷물이 들어오도록 설계하였다. 이는 용이 쉽게 접근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저어기도 보라며 손짓을 했는데 여기선 안 보이는군요. 감은사의 동쪽에 약간 높은 언덕이 있는 이견대.. 이곳은 대왕암을 정면으로 바라다 볼 수 있는 곳인데, 이곳에 이견대(利見臺)를 짓고 신문왕은 이곳에 수시로 와서 대왕암을 망배(望拜)하였다고 한다. [출처]네이버 백과사전 경주 이견대 (慶州 利見臺) 경북 경주시 감포읍 대본리 661 삼국통일을 이룬 신라 제30대 문무왕의 수중릉인 대왕암이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위치한 건물이다. 죽어서도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는 문무왕의 호국정신을 받들어 31대 왕인 신문왕이 681년에 세웠다. 신문왕은 해변에 감은사라는 절을 짓고, 용이 된 아버지가 절에 들어와서 돌아다닐 수 있도록 법당 밑에 동해를 향하여 구멍을 하나 뚫어 두었다. 그 뒤에 용이 나타난 곳을 이견대라고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또 이견대에서 신문왕이 용으로부터 세상을 구하고 평화롭게 할 수 있는 옥대와 만파식적이라는 피리를 하나 받았다고도 한다. 이견대라는 이름은 신문왕이 바다에 나타난 용을 보고 나라에 크게 이익이 있었다는 뜻을 포함한 말인데, 『주역』의 ‘비룡재천 이견대인(飛龍在天 利見大人)’이란 문구에서 따온 것이다. 발굴조사 때 건물이 있던 자리가 발견됨으로써 신라의 건축양식을 추정하여 오늘날 새롭게 다시 지었다. 이견정앞에서 문무대왕릉을 향해 풍경을 담는다. 여행 둘쨋날이 저물어 간다. 하룻동안에 많은 유적지를 돌며 긴시간을 보냈다. 둘쨋밤을 묵을 숙소부터 찾기 위해 이견대에서 감포읍 방향으로 이동하다가 바로 만난 화이트 캐슬이다. 도로변에 몇군데가 있지만 둘러보고 좋을 것 같아 정한 곳이다. 여행봇짐부터 풀고 나와 저녁식사와 주변산책을 즐긴다. 숙소앞인 도로 건너편 감포관광 기반시설 단지에도 땅거미가 내리기 시작이다. 노을빛 하늘은 길손의 마음을 싱숭생숭거리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숙소 바로 옆 해변가로 내려가는 길이다. 이곳은 다음날 일출을 보면서 즐기기로 하고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지방어항인 가곡항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이모습 저모습을 디카에 담는다. 지방어항인 가곡항의 풍경들.. 감포 관광 기반시설 단지 앞에 위치한 가곡항이다. 가곡항은 경상북도 경주시 감포읍 대본1리에 있는 어항이다. 1972년 2월 7일 지방어항으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다. 시설관리자는 경주시장이다. 본래 장기군 내남면의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의하여 대본, 가곡을 병합하여 대본리로 하였다. 본 항의 어항구역인 수역은 남방파제 기부에서 정동쪽으로 50m 이동된 지점을 중심으로 반경 200m 선을 따라 형성된 공유수면(62,000㎡) 어항 시설은 북방파제 286m, 남방파제 110m, 선양장 55m, 물양장 100m 주요 어종은 고등어, 우럭, 조피볼락, 감성돔, 돌돔, 오징어, 돌미역, 참가자미 *위키백과 낚싯대를 드리우고 낚시중인 사람들.. 둘쨋날은 가곡항산책으로 마무리 짓고 하루를 접는다. 세쨋날(마지막날): 2011.10.20.목요일 해변에 위치한 숙소에서 일찍 눈을 떴다. '화이트캐슬' 경주시 감포읍 대본1리 46-2 (054)771-7775, 771-9782 홈페이지:http://www.gjwhitecastle.co.kr/ 전날에 쥔님께서 일출을 방에서 볼 수 있다고 알려 주었지만, 그러나 바로 앞이 바닷가인지라 이른아침 더욱 생생한 일출을 만나기 위해 디카들고 바닷가로 나온다. 그런데 구름이 훼방이다. 용 모습의 바위다 참 잘 보낸 좋은 해변가 숙소를 뒤로하고 괘릉출발이다. 괘릉 가는길에 운 좋게도 양북면 5일장을 만나게 되었다. 오랜동안에 여행을 다녀도 시골5일장은 처음 만난 것 같았다. 만난 기억이 없다. 장이 선지 얼마 되지 않은 아침시간이어서 흥청대지 않아 사람 볼거린 없었지만, 그래도 흥미 진진했다. 이것저것 그 지역 신선한 농산물을 몇가지 사서 차에 실었다. 예정에 없던 일정이 운 좋게도 현지에서 잡힌 것이다. 양북면 5일장 마지막날 코스로 괘릉과 대릉원을 남겨 두었다. 경주 괘릉부터 찾는다. 괘릉 경주괘릉 (慶州掛陵) 경북 경주시 외동읍 괘릉리 산17 괘릉은 낮은 구릉의 남쪽 소나무 숲에 있는 것으로 신라 제38대 원성왕(재위 785∼798)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원성왕의 이름은 경신이며 내물왕의 12대 후손으로 독서삼품과를 새로 설치하고 벽골제를 늘려쌓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왕릉이 만들어지기 전에 원래는 작은 연못이 있었는데, 연못의 모습을 변경하지 않고 왕의 시체를 수면 위에 걸어 장례하였다는 속설에 따라 괘릉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흙으로 덮은 둥근 모양의 무덤 아래에는 무덤의 보호를 위한 둘레석이 있는데, 이 돌에 12지신상이 조각되어 있다. 봉분 바로 앞에는 4각 석상이 놓였고 그 앞으로 약 80m 떨어진 지점부터 양 옆으로 돌사자 한쌍·문인석 한쌍·무인석 한쌍과 무덤을 표시해주는 화표석(華表石) 한쌍이 마주보고 서 있다. 이 석조물들의 조각수법은 매우 당당하고 치밀하여 신라 조각품 중 가장 우수한 것으로 꼽히고 있는데, 특히 힘이 넘치는 모습의 무인석은 서역인의 얼굴을 하고 있어 페르시아인이라는 주장도 있다. 괘릉의 무덤제도는 당나라의 영향을 받은 것이지만 둘레돌에 배치된 12지신상과 같은 세부적인 수법은 신라의 독창적인 것이다. 또한 각종 석물에서 보여지는 뛰어난 조각수법은 신라인의 예술적 경지를 잘 나타내고 있다. *문화재청 다음일정은 경주영지다..바로 서라벌요 앞에 위치한다. 경주 영지 [慶州 影池] 경상북도 경주시 외동읍(外東邑) 괘릉리에 있는 연못. 751년(신라 경덕왕 10) 김대성이 불국사를 지을 때 신라로 온 옛 백제지역의 석공 아사달과 그의 아내 아사녀의 슬픈 전설이 어린 곳이다. 아사달은 불국사 다보탑을 완성하고 석가탑을 만드는 데 여념이 없었다. 남편을 그리워하던 아사녀는 서라벌로 찾아갔으나, 탑이 완성될 때까지 기다려 달라는 주지의 뜻을 받아 들여 탑의 그림자가 비칠 것이라는 못가에서 기다렸다. 남편을 지척에 두고 만나지 못하던 아사녀는 문득 못 속에서 탑의 환상을 보고 아사달을 그리며 연못으로 뛰어들었다. 석가탑을 완성하고 아사녀가 기다리는 영지로 찾아 온 아사달 역시 아내의 죽음을 알고 아사녀를 부르며 못 속으로 뛰어들었다. 이후 아사녀가 남편을 기다릴 때 탑의 그림자가 이 연못에 비추었다 하여 그림자 못, 영지라 하였고 그림자를 비춘 다보탑을 유영탑(有影塔), 비추지 않은 석가탑을 무영탑(無影塔)이라고 불렀다. 연못가의 소나무숲에 그들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웠다는 영사(影寺)의 영지석불좌상(影池石佛座象)이 남아 있다. *출처:네이버 백과사전 그 주변에 있는 영지 석불좌상으로 이동.. 영지 석불좌상 경주 황남리 고분군 [慶州皇南里古墳群]으로 이동 경북 경주시 황남동 일대에 있는 신라의 고분군. 경주 황남리 고분군 [慶州皇南里古墳群] 사적 제40호 소재지: 경북 경주시 황남동 53 경주시내 황남동 일대에 분포되어 있는 신라초기의 무덤들로 일부는 대릉원 구역안에 있다. 일제강점기에 붙여진 일련번호 90∼114, 151∼155호인 원형으로 흙을 쌓아올린 30기의 무덤이다. 큰 무덤은 돌무지덧널무덤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이고 주변에는 봉분이 없어진 작은 무덤이 있다. 대릉원 안에는 전 미추왕릉을 비롯하여 천마총(天馬塚)과 황남대총(皇南大塚) 등이 있다. 1973년에 발굴조사된 천마총은 지름 47m, 높이 12.7m로 금관을 비롯하여 많은 유물이 나왔다. 당시 천마도가 그려진 말안장 드리개가 출토되었기 때문에 '천마총'이라 이름하여 내부를 공개하고 있다. 또한 1973년부터 1975년까지 발굴조사된 황남대총은 남북길이 120m, 동서길이 80m, 높이 23m의 거대한 쌍무덤으로 남쪽 무덤에서는 금동관과 남자의 뼈 일부 및 많은 유물이 나왔다. 북쪽 무덤에서도 금관과 부인대(夫人帶)라는 글씨가 있는 은팔찌 등 많은 유물이 나왔다. 남쪽 무덤의 주인은 남자, 북쪽 무덤의 주인은 여자로, 부부의 무덤을 붙여 만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1973년에 발굴된 제 155호 고분인 천마총은 신라 특유의 적석목곽분이다. 높이 12.7m, 지름 50m의 능으로 봉토 내에는 냇가의 돌로 쌓은 적석층이 있고, 적석층 안에는 길이 6.5m, 너비 4.2m, 높이2.1m의 나무로 된 방이 있어, 그 중앙에 목관을 놓고 시신을 안치했다. 출토된 유물이 11,526점으로, 그 중 천마도는 우리나라 고분에서 처음 출토된 귀중한 그림이다. 천마총 내부 관람을 마치고.. 천마총 사적기 이 곳은 국토통일의 기상이 넘치고 민족문화가 찬란하게 꽃핀 신라의 천년고도 서라발의 옛터다. 박정희 대통령께서는 신라의 통일정신을 오늘에 되살리고 찬란한 민족문화를 기리 보존하기 위하여 경주지구 개발의 대영단을 내리셨다 그 사업의 하나로 1973년 4월부터 10월까지 7개월에 걸쳐 천마총 발굴조사가 실시 되었으며 대능원이 정화되었다. 5세기말부터 6세기 초의 신라왕의 무덤으로 알려진 이 천마총을 발굴조사가 끝난뒤 원형대로 복원했으며 그 내부만을 후세의 교육을 위하여 공개하기로 하였다. 세계 문화사에 찬연히 빛나고 있는 우리 민족문화의 전통을 발전 한국의 위대한 기상 속에 재현코져 하는 그 드높은 뜻을 여기 새겨서 기리 전하고져 한다. 황남대총 목마른 청솔모.. 물 마시러 수돗가로 뛰어가는 청솔모 수도꼭지에 입을대고.. 대릉원에서 청솔모와의 놀이는 여기서 끝맺음이다. 나무위로 올라가서 "나 잡아봐라"다. 가을빛에 숨 좀 돌리고.. 이번엔 까치가 놀재더니 소나무 위로 후다닥 날아 오른다. 고분발굴지 지난 1973년 7월14일부터 8월16일까지 34일간 발굴작업을 한 반려자님의 추억어린 곳이다. 발굴작업당시 김상협총장님과 기념촬영한 옛사진.. 좌로부터 총장비서,김상협총장님,성백선학장님,이규호선생님,김영하님, 최덕수님,이정신님,권진순(반려자) 마지막 일정인 대릉원 관람까지 모두 마치고 나니 시장기가 돈다. 교동쌈밥점(경주음식 별채반 지정업소) 054)773-3322 대릉원 바로 앞에 위치한 별채반에서 점심식사를 하기로 한다. 육부촌육계장은 10,000냥, 곤달비비빔밥은 9,000냥.. 식사를 마치고..식당 전면이 시원한 풍경이다. 이로써 2박3일의 여정을 모두 마치고 서울마이홈으로 출발이다. 경주Ic로 들어가 경부고속도로를 달리다가 경북 경산시 진량읍 평사리.. 평사휴게소에서 잠시 쉬어간다. 고적도시 경주여행을 잘 마치고...... 감사합니다. 사진촬영및제작찬란한 빛/김영희 |
첫댓글 자세한 설명과 사진 잘봤읍니다.
다음에 한국가면 저도 한번 가보고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