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한채아(35)는 KBS 드라마 <장사의 신-객주 2015>에서 조소사 역을 맡았다. 캐릭터 설명은 짧았다. ‘경국지색 절세 미녀’. ‘나이나 체통과 상관없이 그녀를 한 번 본 사내는 조소사를 잊지 못하고, 단 한 번이라도 그녀를 품에 안아보고 싶다는 정념에 사로잡히고 만다’는 게 부연 설명이었다. 대표적인 특징이 외모인 셈이었다. 그가 이전에 맡았던 역할도 ‘출중한 미모’ ‘도도하고 차가운 미녀’로 간단하게 설명이 됐다. 그가 연기한 인물에 외모가 아닌 성격이 먼저 눈에 띄기 시작한 것은 최근 출연한 영화 <비정규직 특수요원>과 드라마 <내성적인 보스>부터다.
강예원과 둘이서 주연을 맡은 <비정규직 특수요원>에서 그의 캐릭터 설명은 이렇다. ‘사건 해결이라면 물불 가리지 않는 경찰청 미친X 형사 나정안’. 불과 2년 만에 ‘절세 미녀’에서 ‘미친X’이 된 한채아는 이런 변화가 반가운지 캐릭터 설명을 할 때 표정이 밝아졌다. 그는 “드라마 방영 당시 예능 프로그램에 나와 스스로를 ‘경국지색 절세 미녀’라고 소개했다. 드라마 대본에 그렇게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내 입으로 그 이야기를 하면서도 아찔했다”고 말했다. 당시 한채아는 상대역인 장혁을 지고지순하게 사랑하는 여인을 연기했다. 그는 “함께 연기한 장혁은 ‘컷’ 소리만 나면 ‘넌 아니야’라고 했다. 나도 눈물 뚝뚝 흘리고, 인형처럼 앉아 있는 게 힘들었다”고 말했다.
못난이 캐릭터, 자연스러운 캐릭터에 대한 갈증 “장혁씨도 제 실제 성격을 알았어요. ‘네 성격은 그게 아니다. 훌훌 털어내고 싶지? 그런 캐릭터를 만나라’고 했어요. 저도 자연스러운 캐릭터에 대한 갈증이 있었죠. 못난이 캐릭터나 자연스러운 캐릭터도 연기하고 싶었거든요. 갇혀 있는 것보다는 그게 더 편해요.”
<비정규직 특수요원>은 대한민국 최고 기관들까지 털어버린 보이스피싱 조직에 비정규직 특수요원 장영실(강예원)과 물불 안 가리는 형사 나정안(한채아)이 잠입해 펼치는 합동수사를 그린다. 나정안은 말보다 주먹이 먼저 나가고 불의를 보면 앞뒤를 재지 않으며 무한 욕을 내뱉는 인물. 한채아는 예쁘다고 해주지 않아도, ‘미친X’이라고 불려도 나정안이 편했다. “앞으론 절세 미녀 캐릭터가 안 들어와도 괜찮다”고 할 정도이다. 그는 “절세 미녀는 이미 한 번 해봤다. 과거 작품에선 모든 역할을 풀메이크업 하고 연기했다. 그런데 이번 <비정규직 특수요원>에서는 속눈썹도 안 건드리고 메이크업을 조금만 했다. 사실 풀메이크업을 안 하고 연기한 건 처음이라 걱정됐는데 한번 해보니 편해졌다”고 했다.
그는 나정안을 자신에게 “가장 편한 옷”이라면서 이 캐릭터에 대한 자신과 애정을 드러냈다. “내게 안 맞는 옷을 입고 있다가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생각이 들었다. 원래 평소에 메이크업도 안 하고 버스도 타고 다닌다. 나정안이 필요할 때만 구두를 신었다가 운동화로 갈아 신는데, 내가 평소에 하던 버릇을 제안해서 만든 설정이다. 스스로 만족스럽게 캐릭터를 완성시켰다”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실제로 제 안에 감정을 숨길 줄 모르는 캐릭터가 있어요. 소심한 면도 있지만 그런 솔직한 면을 조금 더 극대화해서 캐릭터와 접목했어요. 그간 해왔던 캐릭터와는 외모부터 조금 다른 부분이 있어서 부자연스럽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는데 저는 이번 작품 하면서 오히려 편했어요. 항상 옷을 갖춰 입고 힐을 신다가 운동화 신고 뛰어다니고 아무 데나 막 철퍼덕 앉다 보니 더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촬영한 것 같아요. 사실 제가 원래는 터벅터벅 걷는 사람이거든요. 드라마 찍을 때도 감독님들이 날 다시 봤던 게 걸음걸이 때문이었어요. 발도 220~225mm로 작아서 맞는 하이힐이 없는 데다 하이힐을 신는 게 어색한 거예요. 섹시하고 당당하게 걸어야 하는 역할을 많이 맡았는데 그러지 못해서 지적을 많이 받았어요.”
<비정규직 특수요원>은 한국 영화시장에서 찾아보기 드문 여성 투 톱 영화다. ‘버디 영화’(남자 배우 두 사람이 콤비로 출연하는 영화) 공식을 뒤집어 여성을 배치한 것만으로도 영화는 흥미로운 웃음을 자아낸다. 비정규직을 전전해온 장영실은 국가정보국에 ‘댓글 알바’로 취직해 있다. 감원 명령이 내려온 순간, 보이스피싱에 걸려 거액의 업무비를 탕진한 박 차장(조재윤)이 돈을 찾기 위해 장영실을 보이스피싱 회사에 위장 취업시킨다. 그곳에는 나정안(한채아)이 먼저 위장 취업해 있다. 한채아의 액션 연기와 욕설 연기, 강예원의 코믹 연기가 돋보인다.
한채아는 “카메라가 돌아갈 때가 아니고는 연기하는 걸 부끄러워한다. 대본도 안 들고 다닌다. 10년 넘게 다니는 숍(미용실)에서도 아마 내가 대본 들고 다니는 걸 못 봤을 것이다. 그냥 남자분들이 욕하는 걸 보고 따라 하려고 연습한 정도”라고 했다. 그런데도 욕이 차지다. ‘남자 감독이 쓴’ 나정안의 대사가 한채아의 눈을 거치면서 좀 더 현실적으로 변한 덕분이다. “‘웃긴 수박씨 발라먹는…’ 이런 식으로 원래 긴 욕이 많았다. 상의 끝에 진짜 할 수 있는 욕, 들어도 기분 안 나쁜 욕을 쓰기로 했다. 그걸 연습을 해서 차지게 하는 게 좋지 않을까 했다”고.
“원래는 욕이 되게 많았어요. 생전 처음 듣는 웃긴 욕들도 많았죠. 감독님에게 욕설은 빼자는 얘길 많이 했어요. 왜냐고요? 만약 중국어 같은 걸 한다면 잘 못하더라도 그냥 넘어갈 수 있겠지만 욕은 잘 못하면 캐릭터가 어설퍼지잖아요. ‘정말 잘해야 하는데 자신이 없다’고 감독님에게 얘기했죠. 이거야말로 비현실적이라는 생각이 들어 진짜 일상적으로 사람들이 쓰는 낯익은 욕 몇 개만 골라 차지게 쓰자 해서 연습했죠.”
일찍부터 액션에 욕심을 내고 있던 한채아는 <비정규직 특수요원>을 통해 조금이나마 그 한을 풀 수 있었다. 영화에서는 한채아가 격투를 벌이면서 한 남성의 목을 감고 돌리며 쓰러뜨리는 장면이 있는데 대역 없이 소화했다. 액션에 자신감이 없다면 여배우가 소화하기는 좀처럼 쉽지 않은 이 장면은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주요 장면 중 하나다. 한채아는 “좀 더 제대로 찍고 싶었는데 시간과 여건상 쉽게 넘어간 부분이 꽤 있다. 한 10년 동안 액션스쿨을 다녀서 이번에 보여줄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는데 아쉽다”고 했다.
“그동안 조금씩 액션을 배워서 어느 정도는 자신 있었어요. 후려치기랑 발차기는 되니까요. <각시탈>에서도 잠깐 했었고. 특히 머리를 감고 돌리는 장면은 얼굴이 드러나기 때문에 감독님이 저보고 직접 해야 한다고 하시더라고요. 저 역시 욕심이 있었기에 하기로 했죠. 솔직히 그리 어려운 장면은 아니었어요. 매트도 깔고 해서 크게 위험하지 않았고요. 이번에 느낀 게 저희 영화는 그리 큰 액션이 없어서 소소하게 부상을 입는 정도였지만 정말 큰 액션 영화들은 많이 위험하고 긴장하면서 찍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TV 드라마에서 맹활약 한채아는 2006년 가수 손호영의 뮤직비디오 ‘사랑은 이별을 데리고 오다’와 2007년 류시원의 뮤직비디오 ‘With You’를 통해 연예계에 데뷔했다. 그는 2008년 MBC 드라마 <코끼리>를 시작으로 2009년 SBS <스타일>, 2010년 SBS <이웃집 웬수>, 2011년 KBS2 <사랑을 믿어요>, 2012년 OCN <히어로>로 본격적인 연기 활동을 시작했다. 특히 그해 방송된 KBS2 <각시탈>에서 채홍주 역을 맡아 큰 인기를 얻었다. 이후 2012년 KBS2 <울랄라 부부>, 2013년 SBS <내 연애의 모든 것>, KBS2 <미래의 선택>, 2014년 KBS1 <당신만이 내 사랑>, 2015년 KBS2 <장사의 신-객주 2015>, 2017년 tvN <내성적인 보스> 등에 출연하며 TV에서 탄탄한 입지를 쌓았다.
드라마에서 맹활약을 펼친 한채아지만 드라마와 달리 스크린 활동은 뜸했던 게 사실이다. 2012년 개봉한 <아부의 왕>으로 영화에 첫 출연한 후 <메이드 인 차이나>(2015)로 다시 한 번 관객을 찾았지만 거의 주목받지 못했다. 한채아는 “항상 영화에 출연하고 싶었지만 기회나 상황이 맞지 않아 출연하지 못했다. 영화를 더 하고 싶어도 드라마를 안 보시는 영화 관계자들이 많더라. 나를 모르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번 영화를 통해 그들에게 눈도장을 찍어서 다양한 연기에 도전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드라마든 영화든 연극이든 연기는 모두 같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일부 영화 하시는 분들 중에는 ‘영화에서는 그렇게 안 해’라는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솔직히 저는 그 말이 이해가 안 됐어요. 디테일한 부분에서는 다르긴 하더라고요. 또 드라마는 영화보다 더 집중도가 떨어지는 것도 사실이고요. 그래서 이번 작품 촬영하면서 더 재밌었던 것 같아요. 열정을 쏟아붓지 않으면 안 되니까요. 미니시리즈, 드라마는 빨리 찍어야 해서 시간에 쫓겼는데 이번에는 좀 더 디테일하게 들어가 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한채아는 앞서 “강예원에게 조금은 생소한 영화 촬영 현장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밝혔다. 그는 “강예원을 보면서 배웠다. 마치 내 모니터링을 하듯이 언니의 연기를 보면서 현장 분위기도 익히고 드라마와는 다른 용어도 익히기에 바빴다. 특히 강예원은 누굴 가르쳐주는 성향이 아니고 칭찬을 해주는 스타일이다. 그래서 덕분에 더 편하게 호흡을 맞출 수 있었던 것 같다”고 했다. <비정규직 특수요원>을 연출한 김덕수 감독이 강예원에게 ‘채아 좀 가르쳐주라’고 했는데 강예원은 그저 손뼉 쳐주고 추어올려줬을 뿐, 연기적 조언은 하지 않았다. 대신 한채아와 강예원은 끊임없이 이야기를 주고받고 서로 다독여주며 의지한 덕분에 친해졌다. 소속사와 영화 홍보사 등 아무도 한채아의 열애 사실을 몰랐는데 강예원은 이미 알고 있을 정도였다.
“예원 언니가 저에게 뭘 하라고 가르치거나 지시했다면 그렇게 친해지지 않았을 거예요. 언니는 첫 촬영 때부터 저에게 먼저 다가와 인사한 뒤 진심으로 대해줬어요. 언니 만날 때는 무슨 교주를 만나는 듯한 느낌이에요.”
한채아가 대중적으로 인기를 끈 것은 드라마 외에도 예능에서 보여준 털털하고 의연한 모습 때문이다. <진짜 사나이>에서 군대를 잘 몰라서 엉뚱한 모습을 보여주면서도 <나 혼자 산다>에서는 혼자 똑 부러지게 사는 30대 여자의 모습을 보여줬다. 그는 “연기를 오래전부터 했는데 <진짜 사나이> 때부터 많이들 기억해주시더라. 그래도 섭섭하지는 않다. 그렇게라도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됐고, 그걸로 이 영화에 캐스팅되기도 한 것”이라고 담담하게 말했다.
매 순간 떳떳하고 좋은 사람으로 “감독님이 <진짜 사나이>에서의 제 모습을 보고 출연 제안을 한 거예요. 소리 소문 없이 없어지는 배우도 많은데 대중이 좋아해주시니까 감사한 마음이죠. 이미지는 바뀌는 것 같아요. 악역을 했고, 귀여운 모습도 보이다가 청순한 모습도 보였고요. 언젠가는 코믹도 도전할 기회가 생기지 않을까요?”
영화 <비정규직 특수요원> 언론시사회 후 진행된 기자간담회에서 한채아는 전 축구대표팀 감독 차범근의 막내아들이자 전 축구선수 차두리의 동생 차세찌씨와의 열애를 공개했다. “아이돌 스타도 아니고 결혼 적령기에 있는 사람인데 전혀 열애를 숨길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최근 열애설이 불거졌을 때 소속사에서 부인하는 보도 자료를 냈지만 한채아는 “열애설 이후 언론, 대중과 처음 만나는 자리이니 밝히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며 당당히 밝히기로 했다.
“작품 외적으로 관심을 받아 보니까 참 어려운 것 같아요. 과거 관심을 못 받을 땐 댓글 하나가 소중했는데, 관심을 받아 보니 좋은 말도 있지만 나쁜 말도 있어서 상처가 되기도 하네요. 하지만 저는 결국 대중의 힘으로 살아가는 것 아닌가요. 좋게 받아들여야 하는 거라 생각해요. 어차피 뭔가를 감추고 신경 쓰는 걸 귀찮아하는 성격이라 흘러가는 대로, 지금의 일에 충실한 편이에요. 매 순간 내 주위 사람들에게 떳떳할 수 있고 좋은 사람이 되는 게 제 인생의 바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