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1년 우창의 신군 봉기를 말미암아 일어난 신해혁명으로 몰락한 청 왕조를 대신해 등장한 중화민국은 1930년대에 이르러서까지 불안한 불안한 내외정세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위안스카이의 중화제국 건립과 그의 사망 이후 수많은 군벌들의 난립, 그리고 국공의 내분은 중국의 미래를 한 치 앞도 제대로 가늠할 수 없는 혼란의 수렁으로 몰아넣고 있었습니다. ' 혁명은 아직 이룩되지 않았다. ' 라는 쑨원의 유언처럼, 중화민국은 인민들의 일치단결을 목표로 하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혁명을 완수하지 못했습니다.
길고 긴 대장정 끝에 옌안에 근거지를 마련한 공산당은 국민당의 토벌군을 상대로 게릴라전을 펼치며 후방의 위협으로 자리매김했으며,
동쪽에선 조선을 병합하고 만주사변을 일으켜, 괴뢰국을 세운 일본제국이 호시탐탐 중국의 본토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총통 장 제스는 부국강병, 즉 새로운 중국이란 구호를 내세우며 산업을 진흥하고 군대를 육성시키려 노력했습니다.
일본군의 무력, 그리고 불법적인 만주 침탈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던 것은 바로 군사력의 부족에 그 원인이 있었습니다. 장 제스는 일련의 군제개혁을 단행해 부패한 군 인사들을 갈아치우고, 군 효율의 강화를 꾀했습니다.
만주를 손에 넣은 것으로도 모자라, 국경 인근에 군을 주둔하며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는 일본군의 행태에 장 제스는 분노를 금치 못했습니다. 하지만 아직 그들을 정면으로 상대하기엔 역부족이었습니다. 장 제스는 가까운 시일 안에 일본군이 또 다른 '사변'을 일으킬 것을 예감했고, 일본군의 진격을 막기위해 독일 고문 알렉산더 폰 팔켄하우젠과 한때 봉천 군벌을 이끌었던 장 쉐량의 조언을 받아 황허 강 북쪽에 하천을 낀 방어선을 형성했습니다. 일선에선 베이징과 톈진을 무슨 일이 있어도 사수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터져나오기도 했지만, 장 제스는 전략적, 전술적인 불리함을 근거로 들어 양 도시엔 약간의 수비대만을 남긴 채 방어선에 편입시키지 않았습니다.
중화민국은 백방으로 경제 외교를 펼쳤습니다. 그들은 자국에 남아도는 보급품들을 서유럽의 부유한 국가들에게 외화를 받고 팜으로서 외국의 채권을 줄이고 자주적인 경제 체제를 구축하려 했습니다.
이러한 노력에 힘입어, 중화민국은 뱅크런이라는 초유의 사태를 맞긴 했지만, 그간 모아둔 외화를 바탕으로 빠르게 사건을 수습, 경제적인 타격을 최소화할 수 있었습니다.
한편 일본에선 중화민국의 반일적인 움직임을 염려해, 정변을 사주해 총통을 비롯한 국가 수반들을 몰아내려 했지만 이는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정변을 진압한 장 제스는 일본이 이를 뒤에서 조종했음을 뒤늦게 알고 이를 갈며 분통을 토해냈지만, 그렇다고 해서 군사적인 행동을 취할 여력은 없었습니다. 대신 그는 몽골과 만주에 있는 조선의 독립군들이나 잔존 군벌 등 소위 반일세력들에게 비밀리에 상당한 자금 지원을 바탕으로 그들의 무력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했습니다. 그 결과, 만주 일대엔 수많은 반일군이 봉기했고, 일본군도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많은 시간과 물자를 소요했습니다. 실로 장 제스의 계획이 제대로 먹혀들어간 것입니다.
1936년 7월, 저항을 지속하던 광서성 군벌이 중화민국의 공세를 이기지 못하고 드디어 항복했습니다.
이로서 광서 군벌의 본거지를 제외하곤 남중국해의 전 해안가는 다시 중국 인민의 손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1937년 1월, 노구교 사건을 일으킨 일본제국은 마침내 그 야심을 드러내고 중화민국을 침략했습니다! 총통 장 제스는 오히려 잘된 일이라 말하며, 이 기회에 간악한 제국주의 파시스트들에게 쓴 맛을 보여주겠다고 공헌했습니다. 그는 중화의 모든 인민에게 대일항전의 결의를 호소했습니다. 운남, 광서, 서북, 산시성의 군벌들은 장 제스의 국민당군과 연합해 대일전에 참전하기로 약조했고, 심지어 옌안의 공산당까지도 잠시 사상의 차이는 접어두고, 중국의 깃발 아래에 함께 들어와 침략자를 몰아내는 데에 동의했습니다.
만주사변, 그리고 국제연맹의 탈퇴 이후, 일본의 행보를 가만히 지켜보고있던 미국은 의회에서 피트만 법을 통과시켜 중국을 지원했습니다.
육지에서의 싸움은 몰라도, 공중과 바다에서의 싸움에서 중화민국은 압도적인 열세에 놓여있었습니다. 장 제스는 해안지방에 몰려있던 산업시설들을 안전하게 보존하기위해 굉장한 규모의 운송책들을 이용, 이들을 내륙으로 옮겼습니다.
군벌들의 군세와 연합한 국민당군은 지닝에서 창저우까지 두꺼운 방어선을 형성했습니다.
모든 이들의 우려대로, 전쟁이 발발한 지 채 한 달도 되지 않아, 베이징과 톈진은 일본군의 손에 넘어갔습니다. 장 제스는 이 두 역사적인 도시를 반드시 탈환하고, 더 나아가 만주를 회복하며 조선까지 해방시킨다는 장대한 목표를 내걸고, 사병들의 사기를 고양시켰습니다.
일본제국과 중화민국, 양국의 제대로 된 정규전이 벌어진 것은 바로 바오딩의 일이었습니다. 1937년 2월 25일, 30개 사단으로 바오딩을 공격한 일본군은 질적인 우세를 바탕으로 48개 사단의 중화민국군을 압박했습니다.
총사령관 장 쉐량은 바오딩을 구원하기위해 다른 방어선의 병사들을 일부 차출, 이를 지원토록 했습니다.
장 쉐량은 이에서 멈추지 않고, '공격적인 방어'를 위해 일본군 주력이 주둔해있던 장위안으로 쳐들어가 바오징을 구원하려 했습니다.
장 쉐량의 유기적인 움직임으로 바오딩을 공격했던 일본군은 패퇴했습니다. 길고 긴 중일전쟁의 첫 승리는 중국에게 돌아갔습니다.
바오딩 공세에 실패한 일본군은 12개 사단을 이끌고 창저우를 기습했지만,
좁은 강을 통해 도하를 하는 과정에서, 일찍이 방어선을 마련해논 중국군의 반격에 뼈아픈 피해를 입고 퇴각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한편 장위안으로 공격해 들어갔던 장 쉐량의 군대는 승승장구해 지역에 주둔해있던 일본군 사단 전체를 패주시키는 경이로운 전과를 올렸습니다. 하지만 차후의 포위공격을 염려한 장 쉐량은 다시 회군해 다퉁으로 돌아왔습니다.
전선의 낭보에도 불구하고, 불미스런 소식이 총통의 집무실로 전해졌습니다. 일본과 방공협정을 맺었던 독일이 그들의 군사고문, 알렉산더 폰 팔켄하우젠을 본국으로 소환한다는 내용이었죠. 중화민국의 군 개혁에 열화와 같은 지지를 보내왔던 그의 출국에, 장 제스는 직접 알렉산더를 배웅하며 아쉬움을 드러냈습니다.
북부 전선에서 교착상태가 이어지자, 일본 군부는 사태의 호전을 위해 상하이를 기습했습니다. 난징 정부는 이런 일본의 공격에 매우 당황했지만, 일본군의 주력은 이미 베이징과 톈진 부근에 집중된 바, 이들을 막아내는 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장 제스가 직접 이끄는 난징 정부의 직속군대는 항저우까지 진출한 일본군을 무력화시켰습니다.
남쪽에서의 침입과 더불어, 일본군은 이번엔 다퉁에 대규모 공세를 가했지만, 이내 실패하고 말았으며
상하이의 일본군도 완전히 일소되고 말았습니다.
일본군은 계속해서 중화민국의 방어선을 뚫으려 노력했지만, 그저 실패의 연속일 뿐이었습니다.
이러한 일본군의 실패엔 국민당군이 유리한 지형을 바탕으로 전쟁에 앞서 방어선을 완공해둔 점에 있었습니다. 지닝은 몽골의 사막지대로 군대를 섣불리 움직이기 어려운 환경이었고, 다퉁과 링추는 가파른 산악지대로 수비에 절대적으로 이로운 곳이었습니다. 바오딩은 공격에 용이한 평야지대였으나, 이미 요새가 건설되어 일본군의 침공을 수월히 막아낼 수 있었고, 창저우는 좁디 좁은 강유역을 바탕에 국민당군의 수비진이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상하이 침공에 실패한 일본은 이번엔 그보다 조금 더 북쪽인 화이인에 상륙했지만, 역시나 중국군의 발빠른 대처로 저지되고 말았습니다.
일본군은 13개 사단을 편성, 다퉁을 재차 침입해 제 2차 다퉁 전투를 일으켰습니다.
1937년 9월, 일본의 침략전쟁을 주시하던 소련은 제트작전을 통해 극비리로 중국을 원조했습니다.
소련의 원조를 등에 업은 중화민국은 제 2차 다퉁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연이어 비슷한 시기에 이루어졌던 제 2차 링추 전투에서도 중국군은 완벽한 승리를 거두며, 1937년에 시작됬던 모든 전역을 승리로 끝냈습니다.
첫댓글 아아니.. 왜 사진이 전부 엑박이지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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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RL이 네이버로 되어있군요. 네이버는 외부링크가 안되니 다음카페 편집기로 직접 업로드하세요.
에구구 이런 -_-;; 전부 수정했습니다.
재밌어요! 중국군으로 잘하시네요 ㄷㄷ;;;
마술사 양의 먼 선배 마법사 장
아, 중일 전쟁은 해안 하나 비워놓고 주변 프로빈스에 두어 사단씩 싹 깔아두세요. 난퉁 위에 후어인은 주변 5프로빈스와 연결되는 지역인데, 다른 상륙포인트는 최소 4개 민병대 이상으로 막아두고 여기만 허술하게 해두면 금새 쳐들어옵니다. 점령 당해준 뒤 주변의 부대로 포위공격하면 2선급 민병대 8~9사단 정도로도 일본 사단을 곶감 빼먹듯 송송 날려버릴 수 있어요. 일주일 이상 방치하면 금새 증원이 도착해 새 전선이 생겨버리니 즉각즉각 썰어주시면 좋습니다. 30사단쯤 잡아먹고 진출하면 profit! 베하로도 어렵지 않아요~
노멀이긴 했지만 시작시 있는 사단 중 셋씩은 상륙가능해안 막아버리고 나머지는 모조리 지닝-북경-천진 선에 전쟁 시작하든 어쩌든 배치만 성공하면(물론 그바로 뒷선에서 올라가도 됩니다.) 거기서 그대로 교착상태 되고 밀어버릴수 있더군요. ;;;
역시 중일전쟁은 국민당이 제맛이죠.
꿀잼 꿀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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