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빔밥과
덮밥
배혜경
뉴스를 검색하다가 소소한 기사 하나가 마우스에 걸렸다.
‘전주비빔밥’ 이라는 식당을 운영하고 있는 정씨는 근처의 박씨의 가게 때문에 속병을 앓아왔다. 정씨는
비밤밥, 박씨는 한식덮밥을 파는 조건으로 분양회사와 계약을 했지만 박씨가 ‘궁중돌솥비빔밥’ 이라는 간판으로 식당을 열고 손님들에게 비빔밥을
팔면서 정씨의 식당에 손님이 줄기 시작했다. 정씨는 법원에 영업금지 가처분신청을 냈고 박씨는 비빔밥, 돌솥비빔밥, 궁중돌솥비빔밥 들 비빔밥
종류의 음식을 일절 판매해서는 안 된다는 판결을 받았다. 그러고도 박씨는 돌솥비빔밥을 팔았고 참다 봇한 정씨는 박씨는 검찰에 고소하기에
이르렀다. 판사는 법원의 영업금지 가처분결정 뒤에도 손님들에게 비빔밥을 판 혐의로 박씨에게 벌금 백만 원을 선고했다는
내용이다.
기사를 읽으며 두 가지 추측을 해 보았다. 먼저, 박씨가 한식덮밥과 궁중돌솥비빔밥을 혼동했거나
혼용했을 가능성이다. 그가 분양회사와 계약할 당시 그냥 덮밥이 아니라 ‘한식덮밥’ 이라는 조건을 걸었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다.
덮밥은 일본식 요리로 ‘돈부리’ 라고 불린다. 더운밥에 장어구이, 튀김, 닭고기, 달걀, 채소 같은
재료로 만든 소스를 얹은 밥으로 소스의 재료에 따라 이름을 달리한다. 담백한 맛으로 미식가를 사로잡는 일본식 덮밥은 덮밥 소스의 국물이
중요한데, 고슬고슬한 밥에 국물이 자작하게 배여 부드러운 맛을 낼 수 있어야 한다.
중국식 덮밥의 소스는 해물과 버섯을 주재료로 녹말가루를 이용해 걸쭉하고 투명한데 어머니의 특기
메뉴다. 기름진 중국식 덮밥에 비해 한식은 칼칼하고 개운하여 매운맛을 좋아하는 우리 입맛에 맞다. 일식 장어구이 덮밥과 한식 낙지덮밥은 나도
좋아하는 음식이다.
박씨가 한식덮밥이라는 이름에 궁중돌솥비빔밥이 포함되는 것으로 오해했다고 관대하게 해석해 주려 해도
그건 상도의를 따지기 이전에 어불성설이다.
비빔밥의 유래를 찾아보았다. 19세기 말 조선시대 요리책인 시의전서에 골동반(骨董飯)이라는 음식
이름이 나오는데 흔히 이것이 비빔밥과 혼동되어 불린다고 한다. 골동반은 밥을 할 때 어육 등 여러 재료를 미리 넣어 찌는 중국식 부빔밥으로,
오래 전부터 먹어 왔던 우리네 비빔밥과는 조금 다르다. 오늘날 돌솥밥이 바로 중국의 영향을 받아 궁중에서 곱돌솥에 부빔밥 형태로 지은 골동반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비빔밥은 골동반이 들어오기 이전부터 전국 각처에서 만들어 먹은 음식이고 지역특산품과 서민들의 생활
문화에 영향을 받아 종류도 다양하다. 우리 고유의 비빔밥은 골동반처럼 모든 재료를 쌀과 함께 한 솥에 넣고 조리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찬을
각각 도리한 후 따로 지은 밥 위에 올려 넣고 비벼서 먹는 음식이다. 비빔밥에 들어가는 재료는 딱히 정해 놓은 것이 없다. 계절에 맞는 나물과
지방의 툭산물을 맛깔나게 올리면 된다. 입에 들어가면 사르르 녹는 진주의 육회비빔밥, 콩나물국을 곁들여 방짜에 정갈하게 담겨 있는 전주비빔밥
그리고 산사를 내려오는 길에 먹는 산채비빔밥 한 그릇도 내가 좋아하는 음식이다. 요즘은 먹을 거리에도 참살이 바람이 불어 상큼한 새싹비빔밥이
인기 대열에 올랐다. 종류를 불문하고 비빔밥은 영양 면에서도 부족함이 없는 일품(一品)요리이고 기내식으로도 손꼽히는 메뉴가
되었다.
달리 추측해 보면, 박씨가 비빔밥을 선호하는 우리네 입맛을 알고 잇속을 포기하지 못했을 거라는 심중이
갔다. “박씨가 손님들에게 비빔밥을 팔지도 않았다고 주장했으나 비빔밥 그릇과 덮밥 그릇은 높이가 다르고 먹는 방법도 다르다.”는 판사의 말이
더욱 솔깃하다.
비빔밥 그릇은 높이가 낮고 바닥이 넓으며 아가리는 더 넓다. 육회나 쇠고기 볶은 것에 조물조물 무친
갖가지 나물과 바삭바삭한 김부각에 고소한 달걀구이까지 여러 가지 재료를 얹고 약고추장과 참기름을 넣고 쓱쓱싹싹 비비려면 그릇의 품이 좁아선 못
쓴다. 재료 하나하나의 고유한 맛이 고스란히 살아 있어야 하는 비빔밥은 흰밥과 온갖 재료가 한 그릇 안에서 고루 섞여야 진짜 제 맛이 난다.
국물을 제기며 재료가 뭉개지지 않도록 살살 비빈 비빔밥은 한눈에 보기에도 얼마나 먹음직스러운지, 갖가지 색의 조화에 고소한 참기름 향이 더해져
눈맛과 코맛이 입맛을 돋우고 나물이 아삭아삭 씹히는 소리는 귀맛을 감치고 돈다. 이렇게 삼 맛을 고루 지닌 비빔밥을 좋아하는 내게는 비빔밥
좋아하면 딸 낳는다는 우스개가 틀리지 않다.
농경사회에서 비빔밥은 새참으로 안성맞춤이었을 테다. 고된 노동의 땀과 섞여 입 안 가득 채우는 갖가지
맛의 어울림 못지않게 야외에서 먹기에 편리함으로도 최상이었지 싶다. 시댁에서는 제사가 끝난 뒤면 밥그릇에 있던 밥을 넓직한 양푼에 죄다 쏟고
나물을 한데 넣은 뒤 참기름을 듬뿍 두르고 쓰윽쓰윽 비빈다. 비빈 밥을 온 가족이 한 그릇씩 떠서 먹는 제사비빔밥은 여느 때 먹는 비빔밥과 다른
맛을 낸다. 제각각 떨어져서 살기 바쁜 가족들이 제사를 구실로 한자리에 모여 조상의 은덕을 기리는 건 잠깐이고 묵혀 두었던 장담을 함께 비비기
때문일 게다. 제사비빔밥을 유난히 좋아하시는 아버님은 기독교 신자이면서 제사를 꼭 챙기고 종종 헛제삿밥을 깔끔하게 차려내는 식당을 찾아가는 일을
지금껏 즐겨 하신다.
비빔밥과 달리 덮밥을 담는 그릇은 작고 오목하며 비빔밥 그릇에 비해 높아 보인다. 비벼서 먹지 않기
때문에 품이 넓을 필요가 없다. 물론 박씨가 조건으로 내건 한식덮밥은 이보다 훨씬 넓적한 그릇을 말한 것 같지만 그렇다 해도 비빔밥 그릇과는
엄연히 다르다. 박씨는 비빔밥을 선호하는 우리네 입맛을 모른 척할 수 없었던 건지 모른다. 한식덮밥이라는 이름으로 생고집을 부려서라도 비빔밥을
만들어 팔려고 했던 그에게 나는 배심원은 아니지만 동정표를 주고 싶다. 한 그릇 안에서 비벼도 고개를 삐죽 내밀고 있는 고사리나물 같은 내게도
분명, 알게 모르게 비빔밥 정서가 감치고 있는 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