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좀 긴글이지만 산을 좋아하시는 분들이라면 산을 타는 느낌으로??
인내심을 가지고 끝까지 읽어보심이....
(그게... 읽을땐 금방이었는데 올리다보니 내용이 많아 보이네요...그래서....^^;;; )
취재한 분의 이야기에 의하면 엄홍길 대장을 만나는 순간부터 헤어지는 순간까지
산신령을 만났다는 느낌을 내내 지울수가 없었다는 군요.
[ 우리길벗 3월호 ]에 실림.
한국인 엄홍길 대장이 지난해 얄룽캉(8,505m) 정상 등정에 성공함으로써 세계 최초로 히말라야 8,000m급 15좌를 완등했을 때, 그 불굴의 도전정신에 경외감과 감동을 숨길 수 없었다.
2005년 3월 13일, 그는 또 하나의 원정을 준비하고 있다. 일명 <휴먼원정대>로 이름 붙여진 이번 에베레스트 원정은 세계 고산 등정사상 전례가 없는 일로, 8,750m에서 지난해 5월 조난 사망한 박무택 대장의 시신을 가져온다는 임무를 띠고 있다.
산악인 박무택 대장은 2004년 5월 계명대 산악대 에베레스트 원정대를 이끌고 등정에 올랐지만 정상등정 성공 후에 하산하는 도중 8,750m 지점에서 설맹(雪盲)으로 인한 부상으로 조난 사망하였다. 엄홍길 대장과는 8,000m급을 다선번 함께 올랐으며, 칸첸중가에서는 단 둘이 나선 정상공격에서 빙벽에 매달린 죽음의 사투 끝에 성공하면서, 죽음을 함께 넘나든 깊은 인연을 가지고 있다.
8,000m는 신의 영역이자 죽음의 세계이다. 항상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온 그이지만 유족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몇 배 더 위험한 원정을 떠나는 엄홍길 대장에게서 감동적인 휴먼 스토리를 들어보았다.
인터뷰는 선후배 산악인 및 팬클럽 회원들과 함께 엄홍길 대장의 모산(母山)인 도봉산을 등정하면서 이루어졌다.
취재 _ 안 종 국(편집부장)
◈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삶의 끈을 놓아버리고 싶은 순간이 많았고, 동료와 셰르파의 그 많은 죽음을 목도하면서도, 또 히말라야로 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 25살에 처음 히말라야에 도전하고, 저의 청춘과 인생은 히말라야를 빼놓고는 이야기 할 수 없습니다. 히말라야의 그 거대한 신 앞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며 느낀 것은, 그 산이 바로 저이고 제가 산의 일부라는 것입니다.
히말라야 8,000m 그 위의 세계는 신들의 영역이며, 죽음의 지대입니다.
저는 그 흰 설산을 그리면서, 끝없는 도전만이 나의 존재 의의라는 것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또한 나와 함께 등반 도중 유명을 달리한 박병태, 지현옥, 한도규 대원, 현명근 기자, 셰르파 술딤 도로지, 나티, 까미 도루지, 다와 따망, 그리고 2003년 로체샤르를 함께 오르다 사망한 박주훈과 황선덕 대원의 영혼이 머무르는 그곳을 한시도 잊을 수 없습니다.
◈ 2005년 벽두부터 엄홍길 대장의 휴먼원정이 세인의 관심과 함께 잔잔한 감동을 불러 일으키고 있습니다. 생명과 사람의 가치가 소중하다면, 또한 죽음의 가치도 정비례해서 소중할 것입니다. 생사고락을 함께한 동료 산악인의 시신을 찾아온다는 이번 원정은, 감동을 넘어 안타까움조차 표현하지 못할 정도로 휴먼적 의미를 던져주고 있습니다. 이번 원정대를 꾸리게 된 계기는 무엇입니까?
▷▶ 2004년 가을에 16좌인 로체샤르(8,400m) 원정이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난 봄 갑작스런 박무택 대장의 죽음으로, 에베레스트로 가서 시신을 가져오는 원정을 계획했습니다.
박무택 대장은 작년 봄에 15좌 도전을 위해 출발할 때 한국에서 함께 출발했습니다.
네팔에 가서도 같은 호텔에서 묵었고, 그곳에서 나는 얄룽캉으로, 박 대장은 티베트로 들어가 에베레스트 북벽원정에 나섰습니다.
그 후에도 얄룽캉 등반 도중에 그쪽 베이스캠프에서 여러차례 전화를 걸어 왔습니다.
그쪽은 티베트인데, 네팔에 있는 내게 위성전화로 날씨를 묻기도 하고 서로 성공을 기원한다는 인사를 하곤 했습니다.
원정 중에 다른 곳을 도전하고 있는 원정대에 전화를 하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죠.
사고 후에 생각하니 박무택 대장이 평소 안하던 행동을 한 것이죠.
내가 세계최초로 히말라야 15좌의 정상 등정에 성공하고 내려오는 날 베이스캠프로 축하 전화를 하였고, 자신도 다음날 정상을 공격한다고 말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그가 마지막 가는 길에서 서로에게 이어져 있는 운명의 끈을 확인하는 예식이 아니었나 싶기도 합니다.
저는 세계 최초의 15좌 완등의 기쁨을 안고 한국에 들어왔는데,
며칠 후에 박무택 원정대의 성공 소식을 들었죠.
그런데, 성공 소식을 들은 3시간쯤 후에 사고가 나서 설맹(雪盲)으로 하산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 친구는 수도 없이 사선을 넘나들어서 살아 돌아올 것으로 믿었습니다. 날씨도 좋다니 믿음을 가졌는데, 조난된 지 하루가 더 지난 5월 18일 사망했고, 19일에 확인했다는 비보를 접했습니다.
기가 막혔죠. 저와 8,000m급만 다섯 군데를 함께 올랐고 수많은 죽음의 고비를 함께 넘었는데... 더구나 그보다 더한 사고가 한두 번도 아니고 네 번씩이나 살아 돌아왔는데, 그렇게 죽을지 몰랐죠.
그 시신이 등반 노상의 길목에 있다고 합니다.
다른 나라의 등반대가 확인한 바에 의하면 길 가운데, 눈 속에 있는 것도 아니고 외길인 그런 곳에 있다고 하니, 내가 가서 데리고 와야 하겠다고 결심을 한 것입니다.
◈ 일반인들이 생각할 때, 시신을 가져온다는 것을 이해하기 힘든 사람도 많을 것 같습니다. 굳이 시신을 가져와야 하는 이유와 두 분의 관계는 어떠했습니까?
▷▶ 박무택 대장은 저로 인해 히말라야를 올랐습니다. 그의 가슴에 히말라야 원정의 불을 댕긴 것이 저였고, 그와 함께 수많은 산을 올랐습니다. 그리고 박 대장의 시신이 눈 속에 파묻혔거나, 계곡 혹은 보이지 않는 비등정로에 있다면 몰라도, 차후에 누군가는 에베레스트 정상을 오르면서 국적은 틀리지만 누구라도 같은 산악인으로서 가슴 아프고 괴로울 것입니다.
그 높이에서는 누구라도 한쪽으로 치우겠다는,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없습니다. 몸 하나, 손가락 하나 움직이기 힘드니까 밀쳐낸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한국의 산악인으로서 그 시신을 가져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 일반적인 원정 때보다 얼마나 힘이 더 들까요? 그리고 이러한 시도가 세계 고산등반 사상 최초의 일이라고 들었습니다.
▷▶ 8,000m 급에서 시신을 가져오는 일은 그 누구도 생각하지 않는 등반 사상 유례가 없는 일입니다. 정상 도전보다 당연히 힘든 일이고 위험도 많이 따릅니다. 그래도 시도는 해봐야 되지 않겠습니까? 시작하기도 전에 그냥 안 된다고 하는 것보다 시작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이제는 그것이 모두와의 약속이 되었습니다.
산악인만이 가지고 있는 특유의 의리와 엄홍길 대장의 휴먼적 심성(心性)이 일으킨 아름다운 마음이라고도 하지만 평범한 사람들과 달리 두려움을 이겨내는 종교가 있을 법 한데요?
언제나 원정을 가면 등반 전에 셰르파들과 함께 라마제단을 쌓고 기원제를 올립니다. 그러한 의식은 단지 티베트의 라마불교의식의 차원을 넘어 자연에 대한 경외스러움의 의식인 것입니다.
본래 인간은 자연에서 왔습니다. 자연이 바로 우리 인간의 창조주이고 인간의 도전에 대해서 허락하거나 혹은 경망함에는 가차 없이 응징하는 심판자인 것이죠. 그것은 다분히 동양적인 가치관, 즉 자연에 대한 경외심과 동양적 신관(神觀)과 닿아있는 것입니다.
서양의 산악인들도 대부분 히말라야에 오면 그러한 동양적인 신관과 불교적인, 혹은 정령적인 신앙을 갖게 됩니다. 분명히 히말라야는 살아있는 신입니다. 그 신이 저를 돌봐 주지 않으면 저는 산을 오를 수 없고, 정상을 절대 허락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인간의 정신이 강하다지만 자연 앞에 한없이 겸손해지지 않으면 신의 영역에서는 절대 생존 귀환이 가능하지 않습니다. 후에 돌이켜보면 사고의 유형이 대부분, 과욕과 욕심, 인간의 오만과 억지, 그리고 이기심이 항상 뒤에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 14좌 완등 목표는 어떻게 세워진 것입니까?
▷▶ 1995년 봄 세계적인 등반가 후아니토가 이끈 스페인 바스크 팀과 함께 마칼루 등반에 성공하고 내려왔을 때였습니다. 네팔 카트만두의 한 술집에서 성공에 들떠 대화하는데, 한 무리의 산악인들이 우리가 있는 술집에 밀려들어왔습니다.
그 가운데는 멕시코의 산악영웅 카를로스 카르솔리오와 프랑스의 브누아 샤무 등이 함께 있었습니다. 당시 카르솔리오는 14좌 완등을 목전에 두고 있었고, 브누아 샤무는 8,000m 급의 세계적인 산악인으로 유명세를 타고 있었죠.
그들은 대뜸 저에게 한국등반가가 가장 많이 오른 봉우리가 몇 개냐, 과연 우리처럼 쉽게 오르겠느냐 하면서 자존심에 깊은 상처를 내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그때 저는 8,000m급은 4개를 오른 상태였고, 1977년 고상돈 선배가 에베레스트에 오른 이후 세계 산악계가 주목할 만한 별다른 인물이 없기도 해서, 대꾸도 못하고 속으로만 분노를 삭여야 했죠. 그들은 보통 8,000m 급을 10개씩 올랐다는 것으로 저를 마치 뒷동산 몇 개 오른 사람처럼 무시하는 것이었습니다.
술자리가 끝나고 숙소로 돌아오면서, 그 수모에 대해서 이겨낼 수 있는 방법은 14좌 완등뿐이 없겠다고 그때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그 전까지는 그냥 목적 없이 히말라야가 좋아서 산에 간 것이죠.
그런데 그런 결심을 하고 나니 히말라야가 다시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공식적으로 목표를 정하고 달려드니 제대로 산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죠.
◈ 등반 도중 가장 슬펐거나 어려웠던 순간은 언제였습니까?
▷▶ 가장 참담했던 것은 안나푸르나와의 인연입니다. 안나푸르나는 네 번 도전해서 실패했고, 다섯 번째 비로소 성공한 정말 질긴 인연의 산입니다. 그 중에서도 다섯 번째 도전에서 함께 간 지현옥 대원을 잃었을 때가 가장 참담했습니다.
안나푸르나의 네 번째 도전에서는 발목이 부러지는 부상을 당했습니다.
7,700m 지점에 이르렀을 때 순식간에 일어난 사고로 두 명의 네팔인 셰르파를 구하다가 자일에 발이 감겨 발목이 180도 돌아가서 발목뼈와 종아리뼈의 쇄골이 분쇄되었고, 인대가 늘어나는 중상으로 덜렁거리는 발을 표식용 대나무와 자일로 고정시킨 채 72시간동안 죽음의 설산을 기어 내려왔습니다.
1주일간의 하산 끝에 병원으로 후송된 저에게 의사가 다시는 고산에 갈 수 없다는 판정을 내렸을 때 그 좌절감은 말로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저는 철심을 박은 채 다시 미국 시애틀의 레이니어봉과 캐나다의 로키까지 오르는 재활의 의지를 불태웠습니다. 그리고 기어이 그 사고가 난지 10개월만인 1999년 봄에 지현옥 대원과 함께 다시 안나푸르나 앞에 섰던 것입니다.
한국 산악계에서 키운 최초의 여성대원이었던 지현옥 씨는 8,000m급을 세 번 오른 국제적인 인물이었고, 남자의 두세 사람 몫을 해내는 체력과 정열, 의지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첫 히말라야 원정이었던 안나푸르나를 1989년 함께 했고, 1997년에는 가셔브룸Ⅰ을 함께 등정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1998년에는 가셔브룸Ⅱ를 세계 여성 최초로 무산소 등정을 한 기록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랬던 그녀가 간발의 차이로 나보다 20분 늦게 등정해서 내려오는 도중에 셰르파와 함께 정상부근의 설사면(雪斜面)에서 추락해 유명을 달리하고 안나푸르나를 영원한 안식처로 삼게 된 것이죠. 결국 시신도 찾지 못하고 돌아서 올 때의 그 참담함이란 말할 수 없는 것이죠.
◈ 안나푸르나가 시련과 시험을 혹독하게 안겼군요?
▷▶ 안나푸르나에 대한 도전과 성공은 제 산악 인생에서 가장 처절했던 기록으로 남았습니다. 안나푸르나에서 지현옥 대원과 셰르파 까미가 죽었고, 나티를 잃었으며, 발목 부상도 그곳에서 입었습니다. 동시에 안나푸르나를 통해서 정신적으로 많이 성숙했고, 산에 대한 경외로움과 겸손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지현옥 대원의 이야기를 할 때면 엄홍길 씨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사람들은 8,000m 위에 무엇이 있는지 궁금해 합니다. 8,000m 이상은 전혀 다른 세계라고 하셨는데, 정상에 올랐을 그때의 느낌은 어떻습니까?
모든 산은 정상을 오를 때 다 죽고 싶을 정도로 고통이 심하고 어렵고 힘들다는 기억으로 떠오릅니다. 그것을 참아 이겨내야지만 성공하고 그것을 못 이기면 죽음을 선택하게 되는 것이죠.
정상에 오르면 우선 히말라야 신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이 자리에 올라서게 받쳐준 데 대해서 진정으로 감사를 느끼는 것이죠.
그리고 함께 한 동료들을 떠올리죠. 당신들의 희생과 죽음이 나를 여기 있게 했구나 하면서 그들에게 몸을 숙이고 절을 하며 마음으로 경건한 예배를 올립니다. 그리고 또 살아 돌아갈 수 있도록 해달라고 기도를 하죠.
일반 세상에서도 성공하면 곧 그 가치와 정신을 잊어버립니다.
그러나 정상에서는 무사히 하산할 때까지 절대로 긴장과 그 경외로움을 놓칠 수 없습니다.
산이 보살펴주고 먼저 죽어간 산악인들의 영혼이 지켜주어야 무사히 내려올 수 있기 때문이죠. 제 능력이나 체력보다는 8,000m에서는 보이지 않는 신의 역할과 그들의 보살핌이 가장 중요합니다.
우리도 일상에서 하나를 성취했다고 거기에 안주해서 그다음 관리를 하지 않으면, 이내 타락하는 것과 마찬가지죠.
◈ 다소 선문답 같은 질문이지만, 엄 대장에게 히말라야는 과연 무엇입니까?
▷▶ 배움에는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학문을 통해서 지식을 배우기도 하고, 세상을 헤쳐 나가는 지혜를 체득하기도 합니다. 저는 산이 바로 위대한 스승입니다. 자연을 통해서 스스로 느끼고 깨닫게 됩니다. 히말라야는 우리 인간이 꿈의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 우주이며, 위대한 교실입니다.
부상자도 아니고 시신을 가져오는 일이 등반사상 별로 없는 일인데, 자칫하면 라이언일병 구하기처럼 한사람을 위해서 많은 사람이 희생할 수도 있는 영웅담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엄홍길 씨를 아끼는 국민들은 지금 16좌를 완등해야 한다는 견해도 많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제 개인의 16좌 도전도 중요하지만 한국 사람으로서, 그리고 산악인으로서 그곳에서 시신을 수습하는 일도 마냥 방치해 둘 수는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번 원정도 그 앞길은 알 수 없습니다. 많은 분들이 염려하고 걱정하는데, 어쨌든 사고도 사고지만 그걸 수습하러 가는 여정이 안전하게 끝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고, 히말라야는 인간의 뜻대로 되는 영역이 아니기 때문에 모든 준비를 철저하고 정교하게 마쳐야 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모든 가치가 돈이나 사적인 이익, 그리고 탐심에 많이 젖어 있습니다. 얼마나 생명 경시풍조가 심합니까? 험악한 범죄도 많고 사람 간의 끈끈한 정이나 목숨을 넘어서 사랑하고 존중하는 일보다 이용가치만 따지는 것이 오늘날의 사람 관계이고 돈이 인생의 목적이 된 지 오래입니다.
이번 원정의 의미가 그래서 많은 사람들에게 훈훈한 인간의 내음을 퍼트리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 박무택 대장과 칸첸중가에서의 특별한 인연을 말씀해 주시죠?
▷▶ 박무택 대장과 생사를 넘나든 일이 많았죠. 특히 칸첸중가에서 정상부근에서 10시간동안 밤을 새며, 살아남은 것은 잊을 수 없는 일입니다.
살 가망이 전혀 없는 곳에서의 생존, 그리고 다시 정상을 오르고 내려온 것도 박무택 대장이 함께 해서 가능했던 것이죠.
8,500m의 설벽(雪壁)에서 기대어 밤을 맞이할 때는 이게 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다 포기하고 가족과 중학생인 큰딸 지은이와 둘째아들 현식이에게 유언까지 했습니다.
겸허하게 죽음을 받아들이고 여기서는 죽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안했습니다.
환청과 환각 속에서 동료와 친구들과 따듯한 방 아랫목에서 떠들고 이야기하다가 추위에 눈을 떠보면 현실은 아득한 벼랑에 매달린 암흑의 지대죠.
그 상황에서 함께 견딘 이가 박무택 대장입니다. 헛소리와 추위 속에서 서로를 부르며 의식을 놓지 말라고 격려하면서 여명이 올 때까지 있었죠.
그런데 신비롭게도 아침이 밝아오자 기적같이 생기가 돌고 우주의 기가 들어오는 듯 기운이 다시 솟아나는 것이었습니다. 이미 베이스캠프에서는 포기를 하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생명의 신비는 참 놀라운 것입니다.
그 상황에서 하산보다 정상 공격을 감행하고 결국 그와 나는 칸첸중가 정상에 오른 것입니다. 1999년 KBS기자 2명과 셰르파의 목숨을 앗아간 그 칸첸중가에서 엉금엉금 기어서 정상에 올라가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5,000~7,000m에서는 인간의 능력이 힘을 발휘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8,000미터 이상에서 정상을 가는 과정은 인간 능력 밖의 영역입니다. 그곳은 보이지 않는 기와 에너지가 있습니다. 아무리 경험이 많고 완벽해도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정상에 올라서 두 손을 합장하고 머리를 눈에 대고 한없는 감사의 기도를 올렸습니다.
그리고 죽어간 산악인들의 사진을 정상에 눈을 파고 묻었습니다. 나를 이렇게 살게 하고 여기에 서게 한 것이 바로 당신들이구나, 그런 감격에 겨워 울었습니다.
◈ 엄홍길 대장님은 산을 오르는 이유 가운데 하나로 수많은 산악인, 또 청소년들에게 진취적인 도전을 하도록 추동(推動)하는 의미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산악인으로서,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엄 대장의 끝없는 도전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 저의 도전은 그들에게 큰 용기와 희망을 준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모두 개인의 꿈과 지향하는 목표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다시 일어서는 불굴의 의지가 필요합니다. 저에게는 실패가 더 큰 힘이었습니다. 15좌 등정 성공에는 열다섯 번의 실패가 있었고, 발가락 두 개를 바쳤으며, 발목부상과 숱한 동료의 목숨을 잃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엄홍길은 저렇게 목숨을 걸고도 하는데 내가 못할 게 무엇이냐는 오기도 갖게 하고, 참고 이겨내는 메시지를 줄 수 있다면 저의 도전은 의미가 있는 것이겠죠.
엄홍길이라는 이름은 이제 한 개인이 자신의 의지에 의해서 중단하거나 스스로도 어쩔 수 없는 경계를 넘었습니다. 어쩌면 산악인 엄홍길에게는 은퇴란 없는 듯이 보이기도 합니다. 언제쯤 도전을 멈추게 될 것 같습니까?
두 발이 있고 걸을 수만 있다면 은퇴란 없을 것입니다. 다만 높이를 조절하고 위험도를 조절하겠지만 산이 존재하면 제가 존재하고 제가 존재하는 이상 산과의 연은 뗄 수가 없습니다. 지금 저에게는 히말라야 8,000m 16좌 완등과 7대륙 최고봉 도전이라는 목표가 있습니다. 그것이 이루어지면 저는 또 다른 목표를 세울 것입니다.
작년에 가수 이문세 씨와 함께 히말라야 산상음악회와 사진전 등을 개최하는 등 다각적인 행사를 통해서 기금을 조성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동안 히말라야 8,000미터급 15좌 완등에 이르기까지 함께하면서 죽음을 맞이한 산악인의 가족을 위하여 장학재단을 만든다고 하셨는데 그 의미는 무엇이고, 재원은 어떻게 마련하실 예정이십니까?
산에서 사는 사람들의 삶은 매우 열악합니다. 셰르파들은 목숨을 건 직업을 선택한 사람들인데, 집안의 가장인 그가 죽었을 때 유족들은 얼마나 막막하겠습니까? 그래서 지속적이고 체계적인 지원이 있어야겠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의지가 기금을 조성해서 유가족 자녀의 장학금을 지원하는 재단을 만들려고 노력하게 된 것입니다.
10억 원을 조정하는 것을 목표로 진행 중이며, 많은 분들이 도움을 주셔서 현재 1억2천만 원이 모였습니다. 재원마련은 저에게 후원하는 금액을 적립하거나 원정 사진 전시회를 개최하는 등, 선후배들이 여러 가지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재원이 마련되면 저와 관계가 있었던 산악인만이 아니라 히말라야 원정 중에 불의의 사고를 당한 모든 유가족들에게로 지원을 확대할 예정입니다.
◈ 이번에 떠나는 휴먼 원정의 규모와 비용은 어떻게 됩니까?
▷▶ 동참하겠다는 사람이 많았지만 선발 기준을 '박무택 대장과 함께 산에 올랐던 사람'으로 정했기에 계명대 산악대 4명을 중심으로 10명을 선발했습니다. 비용도 적지 않아 4억원 정도를 예상하고 있는데, 늘 그렇듯 비용 문제는 어려움이 많습니다.
◈ 지금 우리나라는 실업율도 높고 경제적 상황이 어렵다고 하는데, 좌절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산악인으로서 하실 말씀이 있다면?
▷▶ 사람은 태어나서 성장하다가 죽을 때까지 나름의 목표란 것이 있고 꿈이 있고, 그것을 이루는 과정에 우여곡절이 있습니다. 정상을 두고 도전하는데 저 역시 산악인으로서 수많은 시련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끝까지 신념과 의지를 절대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꿈을 이루겠다는 의지와 정열이 있어서 이 자리에 오게 된 것입니다.
좌절은 일순간입니다. 한 순간의 좌절을 인생의 전체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것은 극히 일부일 뿐입니다. 실패는 단지 딛고 일어나는 용기와 자신감의 발판입니다.
자신감이 없으면 결국 아무것도 이루어내지 못합니다. 특히 청소년들은 굳건한 자부심, 당당하게 맞서는 용기와 자신감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위대한 열정과 정열 없이 이루어지는 것은 없습니다. 목표를 세우고 도전하는 자만이 성취합니다. 우리나라가 힘들고 어려운 시기라지만, 언제나 좋은 때만 있는 것은 아닐 것이고, 양지만 있는 것 또한 아닐 것입니다.
그리고 성공이라는 것도 그 결과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지키고 관리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산에서는 하산하는 과정에서 사고가 가장 많이 일어납니다. 진정한 성공은 정상의 자리에 선 것이 아니고 그 이후에 어떻게 잘 관리하느냐 하는 점입니다. 결국은 살아 돌아와서 존재해야만, 성공의 희열을 누리고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이번 원정이 무사히 끝나고 돌아오기를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간절히 기원합니다. 원정 준비에 바쁠 터인데, 긴 시간 함께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첫댓글^-^ 산촌에살고파님! 방가방가여요!!! 지난번 달마산행 때 하도 오랫만에 뵌것 같은데 인사도 제대로 못했네요. 역시 성공은 열열한 열정과정열을 갖고 목표에 도전하는 엄홍길 님의 글 감명깊게 보고 갑니다. 언제나 항상 행운과 건강 그리고 행복 가득하세여~~~굿~~~럭 !!!
첫댓글 ^-^ 산촌에살고파님! 방가방가여요!!! 지난번 달마산행 때 하도 오랫만에 뵌것 같은데 인사도 제대로 못했네요. 역시 성공은 열열한 열정과정열을 갖고 목표에 도전하는 엄홍길 님의 글 감명깊게 보고 갑니다. 언제나 항상 행운과 건강 그리고 행복 가득하세여~~~굿~~~럭 !!!
산촌에 님, 오랜만이네요. 명지산행때 보고 못본것 같은데... 좋은 글 좀 많이 올려 주세요.
나 다시태여나면 엄씨로 날까부다.ㅎㅎㅎ 마지막 부분... 성공이란 결과보다 관리가 중요 하다는 말씀을 명심 하겠나이다.동산 오름이도 기쁨인데 그 큰산을 정복했으니 기쁨이 이루 말할수 없겠지요.좋은글 감명깊게 읽고 나갑니다.행복 하세요.
성공한 사람들에게는 역시 무언가 다르다는 느낌이 드네요...어느분야 에서건 최선을 다하는 정신자세 ..도 가통했다 라고 하던가요 ! 도가통하기 까지는 얼마나 많은 과정을 거쳐야 하는지 그것은 알려고하지 않지요 우리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