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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의 저편> 제9장 고귀함이란 무엇인가?
257. 인간과 감정(파토스Pathos)
1.
‘인간’이라는 유형을 향상시키는 모든 일은 지금까지 귀족적인 사회의 일이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항상 그렇게 반복될 것이다 : 이와 같은 사회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위계질서나 가치 차이의 긴 단계를 믿어왔고 어떤 의미에서 ‘노예제도’를 필요로 했다.
마치 혈육화된 신분 차이에서, 지배 계급이 예속자나 도구를 끊임없이 바라다보고 내려다보는 데서, 그리고 복종과 명령, 억압과 거리의 끊임없는 연습에서 생겨나는 거리의 파토스das Pathos der Distanz가 없다면, 저 다른 더욱 신비한 파토스, 즉 영혼 자체의 내부에서 점점 더 새로운 거리를 확대하고자 하는 요구는 전혀 생겨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것은 점점 더 높고 점점 드물고 좀더 멀리 좀더 폭넓게 긴장시키는 좀더 광범위한 상태를 만들어내는 것이며, 간단히 말해 ‘인간’이라는 유형의 형상이자 도덕적 형식을, 초도덕적인 의미로 말한다면, 지속적인 ‘인간의 자기 극복’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물론 귀족적 사회의 (즉 ‘인간’이라는 유형을 향상시키는 조건의 ⎯ ) 발생사에 대해서는 어떤 인도주의적 미혹에 빠져서는 안 된다. <여기까지 제9장 본문>
*<자료 펌>
==>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에서, 로고스(이성/논리) / 파토스(청중의 감정) / 에토스(말하는 사람의 고유한 카리스마, 성품)에 대해서 말했다. 그는 에토스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 그리스어 ‘파토스’는 영어 ‘페이소스’로 불리면서 사용되었으나 근래에는 다시 ‘파토스’가 더 자주 사용된다.
* 거리의 파토스das Pathos der Distanz(다스 파토스 데 디스탄스)
==> 복종과 명령, 억압과 거리의 연습에서 생겨나는 파토스에 의해 ‘저 다른 더욱 신비한 파토스“
즉, 영혼 자체의 내부에서 점점 더 새로운 거리를 확대하고자 하는 요구가 생겨났다는 것.
*<내생각> ┗> 새로운 거리의 파토스는, ‘차이의 파토스’가 아닐까?
차이적 차이에 의해 파토스는 점차로 개성화 되었다는 것이 아닐까?
* Distanz는 독일어로 거리/간격/거리감/소원/격차 등의 의미를 갖고 있다.
* Pathos는 그리스어로 애수/비애감/감정적/격정적/열정/노여움 등등의 정념을 의미
* <자료 펌>
Pathos : 주어진 상황에서 표출되는 감정을 말하는 철학용어__________________________
1. 원래 수동적인 상태를 의미하는 말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에서는 욕정, 노여움, 공포, 즐거움, 증오, 연민 등 쾌락 또는 고통을 수반하는 감정을 의미한다. 지속적인 에로스에 대해 일시적인 상태를 지칭하기도 한다. 그리스 철학과 신학에서 우주에 내재하면서 우주를 다스리고 우주에 형식과 의미를 부여하는 신의 이성으로 이해되는 로고스의 상대되는 개념으로 파악하기도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수사학〉에서 사람의 자연적 성향, 기질, 도덕적 성격 등을 에토스로, 주어진 상황에서 표출되는 감정을 파토스로 구별하였다. 오늘날 파토스는 한편으로 일시적으로 강렬하게 고양된 감정 상태를 가리키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무엇인가에 강력한 지속적 욕정인 지배욕, 소유욕 등을 의미하기도 한다. <출처 : 다음백과>
2. 파토스(pathos, 그리스어: πάθος, 영어: ˈpeɪθɒs 또는 /ˈpeɪθoʊs/)는 원래의 그리스어로는 청중의 감성에 호소하는 것을 나타낸다. 파토스는 수사학, 문학, 영화 그리고 서사적 예술 장르에서 사용했던 의사소통 기교이다. 영어 발음을 따라 '페이소스'라고 하기도 한다.
파토스는 그리스어 '고통', '경험'을 뜻하는 πάθος에서 왔으며, 영어의 형용사 pathethic은 παθητικός에서 왔다. 감성적인 호소는 다음과 같은 많은 방법을 동반한다. 수사적 도구로서 은유나 이야기하기, 전달되는 총체적인 열정, 그리고 전반적인 감정과 화자의 공감. 외부로부터의 사물에 의해 수동적으로 흔들리게 된 일시적인 쾌고(快苦)의 감정을 수반하는 감정적 흥분·격정을 뜻했다. 이지적·로고스적인 것의 반대라고 할 수 있다. 오늘에 와서는 일시적인 감정적 흥분 외에 무엇인가에 대한 지속적인 정열, 정념, 욕정도 의미한다. <출처 : 위키백과>
*<내생각>
==> 파토스의 이 특징, 즉 지속적 욕정인 지배욕, 소유욕 등이 ‘권력의지’와 맞닿아 있는지도. 쾌락과 고통을 수반하는 감정, 이 감정은 어떤 대상과 만났을 때에 일어나는 것이므로 수동적인 상태에 있다. 초기불교에 의하면 ‘수’ 즉 느낌에 해당하는 부분. 니체는 이 파토스에 집중하여 파토스에 가치의 전도를 시전 한다. 아니, 가치의 전도가 아니라 이것이 본래적 상태인지도 모른다. 그러니 제자리에 가져다 놓은 것인지도. 니체 이전에는 피지배자/약자의 ‘몸’을 하찮은 것으로 여겨 몸을 학대하기도 하였다. 당연히 목숨도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리고 종교에서는 ‘몸’을 정신보다 미천한 것으로, 벗어나야 할 ‘짐’으로 보았다.
니체는 ‘몸’을 새로운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니체의 이러한 관점의 전환은 과히 혁명적이다. ‘수사적 도구로서 은유나 이야기하기, 전달되는 총체적인 열정, 그리고 전반적인 감정과 화자의 공감. 외부로부터의 사물에 의해 수동적으로 흔들리게 된 일시적인 쾌고(快苦)의 감정을 수반하는 감정적 흥분·격정을 뜻’ 하는 파토스는 너무나 인간적이다.
이지적·로고스적인 것과 반대되는 것이므로 파토스는 종교의 신적인 것과도 반대되는 개념이다. 인간을 해석하는 개념으로 파토스에 주목한 니체는 수동적인 파토스가 오히려 어떤 변화를 일으킨다고 보았다. 수동성은 눈에 보이지 않기에 그렇게 생각되는 것이다. 즉 로고스적 관점에서 본다면 파토스는 수동적으로 보인다. 반면에 이 수동적인 것이 그 안에서 어떤 변환을 거친다고 니체는 보았다. 몸은 바로 그 변환의 ‘공장’과도 같다.
‘저 다른 더욱 신비한 파토스’가 의미하는 것, 그리고 ‘영혼 자체의 내부에서 점점 더 새로운 거리를 확대하고자 하는 요구가 생겨났’다는 것이 가리키는 것은 무엇일까? 영혼 자체의 내부는 구체적으로 ‘어디’이며, 그 장소는 어느 곳일까? 몸의 가장 깊은 곳, ‘심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영혼 자체의 내부라는 표현은 몸이 곧 영혼이라는 것을 뜻하는 키워드가 아닐까? 감정은 어디에서 만들어지는가? 몸의 내부에서 만들어진다. 몸 자체가 감정을 감각하는 도구이며 감정을 생산하는 기관이다. 그리고 그 감정이 상승하여 표면으로 미끄러지는 것이다.
파토스에 ‘격차’가 발생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복종과 명령, 억압과 거리의 연습에서 생겨나는 파토스에 의해’ 여기서 니체는 파토스 사이에 ‘격차’가 발생한다고 보았다. 니체 이후로 ‘몸’은 존재 사유의 근간이며 출발점이 되었다. 이 격차를 들뢰즈 식으로 풀어본다면 새로운 거리의 파토스는, ‘차이의 파토스’가 아닐까? 차이적 차이에 의해 파토스는 점차로 개성화/개별화 되었다는 것이 아닐까? 차이는 내부에서 만들어진다. 영혼 자체의 내부에서.
2.
진리는 냉혹하다. 지금까지 모든 고도의 문화가 어떻게 지상에서 시작되었는지 가차 없이 말해보자! 여전히 자연적 본성을 지닌 인간, 언어가 가지고 있는 온갖 섬뜩한 의미에서의 야만인, 아직 불굴의 의지력과 권력욕을 소유하고 있는 약탈의 인간들이, 좀더 약하고 예의 바르고 좀더 평화로운, 아마 장사를 하거나 가축을 사육하는 종족에, 또는 마지막 생명력이 정신과 퇴폐의 찬란한 불꽃 속에서 꺼져 가고 있던 늙고 약해질 대로 약해진 문화에 엄습했던 것이다. <p271~272/ 제9장 본문>
*<내생각> ==> ‘ 진리는 냉혹하다. 지금까지 모든 고도의 문화가 어떻게 지상에서 시작되었는지 가차 없이 말해보자! 여전히 자연적 본성을 지닌 인간, 언어가 가지고 있는 온갖 섬뜩한 의미에서의 야만인, 아직 불굴의 의지력과 권력욕을 소유하고 있는 약탈의 인간들이 ’ 이 문장은 야만인을 가리키고 있다. 야만인은 물리적 힘 보다는 정신적 힘에 그들의 우월함이 있었다. 니체는 야만인을 훨씬 완전한 인간, 완전한 야수로 보고 있다. 그리스 신화에서는 ‘헥토르’를 완전한 인간으로 보았다. 헥토르와 바이킹을 보는 니체의 기준은? 같은 것일까 다른 것일까? '투쟁'하는 인간의 관점에서 보자면, 야만은 '야성'이 살아 있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노마드적 인간은 이 관점에서 비롯된 것인 듯.
이렇게 보자면, 플라톤 이후로 인간의 가치 하락이 일어났는데, 다시 고대로 환원하여, 본능이 살아 있는 인간으로 회귀하는 것인데, 이 회귀는 '격세유전'으로 가능하다는 말이 되겠다. 회귀는 역으로 곧 되돌아 온다는 의미일 것이다. 과거 그 자체로의 회귀가 아니라 도래하는 미래로서의 '회귀'인 것이다.
니체는 고대인의 '정신적 힘에 그 우월함이 있었다' 고 하였다. 그것은 그들이 '신화'라는 상상의 영역을 현실로 끌어왔기에 그렇게 표현했을 것이다. 상상을 현실화 시키고 물질화 시키는 그 근본 에너지가 본능에서 기인하는 '파토스'에서 비롯된다고 본 것일 것이다. 니체는 이것을 바로 '힘에의 의지'라고 명명한 것은 아닐까.
그런데 파토스는 제어하여 사용하기는 쉽지 않은 힘(능력)이다. 무조건 분출한다고 하여 다 뜻대로 과녁을 맞추지는 못한다. 손오공이 에네르기를 사용하고자 하여도 처음에는 그 강도를 조절하는 훈련을 해야 하듯이. 이 파토스의 원활한 사용이 바로 '감성 훈련'일 것이다. 철학을 공부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 해 본다.
3.
고귀한 계층은 처음에는 항상 야만인 계층이었다 : 그들의 우월함은 처음에는 물리적인 힘이 아닌, 정신적 힘에 있었던 것이다. ⎯ 그들은 훨씬 완전한 인간이었다 (이는 어떤 단계에서도 ‘훨씬 완전한 야수’였음을 의미한다 ⎯). <p272쪽 7절까지/제9장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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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모셔옴/
트로이 문명이 역사적으로 증명되지 않았다고 하지만, 미케네 문명과 크레타 문명이 있었다면, 당연히 별로 멀지도 않은데 현재 튀르키에가 있는 곳에도 문명이 있었다고 전제해야 되지 않을까? 그것이 트로이 문명인지 아닌지는 불확실하다고 해도. 어쨌든 트로이 문명으로 일컬어지는 그곳이 그때에도 빈 땅으로만 있지는 않았을 듯.
첫댓글 선악의 피안중 자유러운 정신중 첫마디가 성스러운 단순함이여...로 시작되는데 여기서 성스러움이란 무슨뜻 입니까?
읽으셨으면 먼저 설명해 주세요~ 저에게 묻지 마시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