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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욱일이 맞소? 당신 맞소?”
“그래, 내가 최욱일이오. 내가 죄인이오. 죄인이오….”
지난해 12월 31일 중국 내 모처. 1975년 8월 동해상에서 조업 중 북한 경비정에 의해 납북됐다가 31년여 만에 만난 납북 어부 최욱일(67)씨와 부인 양정자(66)씨가 서로를 부여안고 하염없이 숨죽여 눈물을 흘렸다. 생사(生死)도 모른 채 지내온 한 많은 지난 세월, 통곡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남들이 들을까 봐 목놓아 울 수도 없었다. 부부는 주름이 가득하고 반백이 된 서로를 한눈에 알아봤다.
“내 한시도 당신을 잊은 적이 없소. 몸은 비록 이북에 있었지만 마음은 늘 고향에 있었소.” 납북 당시 172㎝의 키에, 64㎏의 건장한 선원이었던 최씨는 새까만 얼굴에 48㎏도 채 되지 않는 앙상한 모습이었다. 탈북 도중 당한 교통사고로 8바늘을 꿰맨 오른쪽 이마엔 피와 고름이 범벅이 된 ‘거즈(gauze)’가 아무렇게나 붙어 있었다. 얼굴과 온몸엔 시퍼런 멍도 보였다.
“어디 있다 이제 오오. 나 혼자 우리 애들 시집·장가 보냈소. 이제 과부 소리 듣지 않아도 되겠네….” 양씨는 눈물을 삼켰다.
◆최씨 “토끼가 먹는 거면 다 먹었다”
최씨는 납북 이듬해인 1976년 7월 함북 김책시 풍년리 남새(채소)밭 농장에 배치됐다. 그로부터 3년 뒤인 1979년 아이 둘 딸린 여자와 결혼해 1남1녀를 더 낳았다. 주변의 감시는 그래도 풀어지지 않았다. 우연히 옆집 사람과 다투다가 그 집이 자신을 감시한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최씨는 “북 체제는 기본적으로 감시와 통제요. 나더러는 잘 때도 혼자 자지 마라, 심지어 변소에 갈 때도 혼자 가지 말라고 한단 말이오”라고 말했다.
최씨는 당시 농장 일을 하면서 쌀과 옥수수가 절반씩 섞인 한 끼 200g 정도의 식량을 배급 받았다고 했다. 최씨는 “그래도 배급이 나올 때는 좋았다”고 말했다. 1995년쯤부터는 배급도 일절 끊겨 굶어 죽는 사람이 속출했다. 함께 납북됐다가 김책시에 살던 천왕호 선원 박상원(납북 당시 37세)씨도 1998년 굶어 죽었다고 최씨는 말했다. 이후 산으로 들로 먹을 것을 찾아 헤맸다. 최씨는 “칡뿌리는 ‘선생’이지. 토끼가 먹는 풀이라면 다 먹었다”고 말했다. 최씨는 “지금 북한은 군량미 빼곤 일반 사람들이 먹을 게 거의 없다”고 말했다. 집단 농장에서 농사를 지으면 소출이 목표량에 미치든 못 미치든 군량미는 100% 징수해가고, 온갖 토지대, 농약대, 비료대로 거둬가니 남아나는 게 없다는 것이다. 최씨는 “올해부터는 핵실험으로 한국의 비료 지원마저 끊길 테니 농사짓기 더 어려워질 것”이라고 전했다.
◆부인 양씨 “도둑질 빼고 다 했다.”
강원도 주문진에 남은 부인 양씨는 최씨가 납북된 뒤 매일 딸 셋을 걸리고, 일곱 달 된 막내아들은 업고 주문진 앞바다에 나가 남편 소식을 기다렸다. 남편을 잃은 것도 서러운 판에 정보기관에서는 거의 매일 양씨 가족을 찾아와 조사한답시고 들볶았다. 양씨는 홀로 자식들을 키우기 위해 일수 돈을 얻어 생선장사, 채소장사, 떡장사 등 온갖 일을 다했다고 했다. 하지만 남편이 빨갱이 누명을 뒤집어쓰고 있는 이상 자식들은 학교에 갈 수도, 군대에 갈 수도 없었다. 결국 양씨는 1978년쯤 남편의 사망신고를 했다. 양씨는 이후 억척같이 사 남매를 모두 키워 결혼도 시켰다. 그러던 중 1998년 남편이 살아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양씨는 납북자가족모임 최성용(55) 대표를 찾아가 도움을 청했다. 정부에 도움을 요청했으나 나서지 않으니 직접 구해올 수밖에 없었다고 판단한 것이다. 양씨는 남편 구출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아파트 청소를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번 월 55만원 중 남는 돈 45만원을 남편을 위해 차곡차곡 모았다. 양씨는 “처자식 먹여 살리려고 배 타고 나갔다가 붙잡혀 가 뼈만 남은 남편에 비하면 내 고생이 고생이랄 것까지 있소?”라며 눈물을 훔쳤다.
◆긴 이별, 짧은 만남, 다시 이별
“이제 가면 언제 또 보나. 죽기 전에 볼 수나 있으려나….”
단 3일간의 만남을 가진 최씨 부부는 3일 오전 중국 모처에서 또다시 기약할 수 없는 이별을 했다. “나를 두고 자네 혼자 어디를 가나. 나도 데리고 가소.” 최씨가 울음을 삼켰다. “30년 전에 잡혀간 것도 억울한데, 간신히 탈출시켰더니 정부에서 왜 도와줄 생각을 않느냐.” 양씨는 최씨의 가슴에 매달려 울부짖었다. 비행기 시각이 다가왔지만 양씨는 입만 달싹였다. 최씨는 “나는 이제 돌아갈 곳이 한국밖에 없다”며 “제발 하루 빨리 한국에 갈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애원했다.
• 박정면 (bajooka)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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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재호 (lesljh9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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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병조 (ldl33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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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기호 (keyholim)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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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병조 (ldl336) | 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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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원석 (parkws92) | ||
• 김태용 (bannosamo)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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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수경 (vincent5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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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동식 (jds771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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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8월 동해상에서 조업 중 납북된 오징어잡이 어선 ‘천왕호’의 사무장 최욱일(67)씨가 31년여 만에 북한을 탈출했다. 최씨는 현재 중국 모처에서 한국 정부의 도움을 기다리고 있으나 정부가 미온적으로 대처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최씨는 지난달 22일 함경북도 김책시 풍년리를 출발, 24일 함북 회산에 도착, 25일 얼어붙은 두만강을 건너 중국으로 향하던 중 교통사고로 오른쪽 이마 위 8바늘을 꿰매는 등 사선(死線)을 넘어 31일 마침내 부인 양정자(66)씨와 31년여 만에 해후(邂逅)했다.
검문소만 13곳… 목숨건 탈출
최씨는 “이제 죽어도 돌아갈 곳은 내 고향 한국밖에 없다”며 “하루 빨리 한국에 갈 수 있도록 꼭 도와달라”고 말했다. 앞서 납북된 천왕호 선원 33명 중 한명인 고명섭씨가 유일하게 2005년 중국을 거쳐 귀환했다.
지난해 12월 8일 함경북도 김책시 풍년리 최욱일씨의 집에 낯선 남녀 두 명이 찾아왔다. 1998년 중국을 통해 남한의 가족들에게 살아있다는 편지를 보낸 뒤 2001년부터 여덟 번째 찾아오는 낯선 이들이었다. 납북된 이래 30여년 동안 한시도 잊지 않은 고향이었다. 하지만 주위엔 날카로운 감시와 경계의 눈초리가 항상 도사리고 있어 그냥 돌려보내거나 보위부 등에 자진 신고할 수밖에 없었다.
그 이후 최씨의 꿈에는 부쩍 자주 아내 양정자씨가 보였다. 결국 최씨는 죽음을 각오하고 남한행을 결심했다. 드디어 12월 22일 최씨는 안내인들을 따라 김책시를 출발, 회산행 화물차에 올랐다. 덮개도 없는 화물차 짐칸에는 쌀부대, 돼지 잡은 것 등 온갖 잡동사니 화물과 그 위에 30여명의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오금을 펼 수도 없을 정도로 다닥다닥 붙어 앉았지만 12월 험준한 백두산 기슭에서 불어오는 북풍(北風)은 뼛속까지 스몄다.
한국정부는 미온적 대처
24일 밤 회산에 도착할 때까지 무려 13개의 검문소를 지나야만 했다. 경비대원들은 화물차 짐칸에 올라 꼬챙이로 쌀부대를 꾹꾹 찔러봤다. 이틀 밤을 화물차 짐칸에서 새우잠을 잤다. 24일 마침내 회산에 도착, 하룻밤을 묵고 25일 초저녁, 최씨는 또 다른 중국인 안내인들과 합류해 얼어붙은 두만강을 건넜다.
그러나 두만강을 건너 탈북했다고 해서 끝이 아니었다. 최씨가 남쪽 가족으로부터 돈만 받고 다시 북한으로 돌아갈 줄만 알고 있던 안내인이 최씨가 북한으로 돌아갈 마음이 없다는 것을 알고 중국 공안(公安)에 신고라도 하는 날이면 끝장이었다.
최씨 일행은 두만강을 건너자마자 미리 대기시켜놓은 택시를 타고 쏜살같이 눈길을 달려 그날 밤 중국 지린성(吉林省) 창바이(長白)에 도착했다. 창바이엔 미리 와 기다리고 있다던 아내와 딸이 보이지 않았다. 다른 곳에 있다고 했다. 최씨는 “그때 ‘아내가 날 남한으로 데려가려고 하는구나’ 하고 짐작했다”고 말했다.
12월 26일 오전 최씨 일행은 아내가 있는 곳을 향해 눈길을 달리다 승용차가 눈길에 미끄러지면서 앞서 가던 원목을 실은 화물차를 들이받았다. 뒷자리 가운데에 앉아있던 최씨는 앞으로 튕겨나가면서 머리를 심하게 부딪혔다. 최씨의 이마에서는 피가 철철 흘러내렸다. 급히 병원 응급실로 옮겨 8바늘을 꿰맸다. 하지만 언제 또 중국 공안이 들이닥칠지 두려운 최씨 일행은 급히 병원을 떴다.
그러나 아내를 만나기까지는 며칠을 더 기다려야 했다. 12월 31일 오후 드디어 부인 양씨를 만나러 가자는 기별이 왔다. 북한인 안내인을 포함해 안내인들과 함께 중국 모처의 한 식당에 들어섰다. 그곳에 꿈에도 그리던 아내가 있었다. 얼굴엔 주름이 깊게 패이고 돋보기를 썼지만 분명 부인 양씨였다.
하지만 목놓아 울 수도 없었다. 북한인 안내인이 눈을 번득이고 있었다. 하지만 수적으로 우세한 중국인 안내인들이 북한인 안내인에게 술을 권하며 안심시키는 한편 최씨와 양씨가 조용한 곳에서 얘기나 나누도록 하자며 북한인 안내인을 따돌렸다.
최씨 부부는 택시를 잡아타고 쏜살같이 그곳을 떠나 또 다른 안전가옥에 도착했다. 드디어 최씨가 북한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순간이었다.
첫댓글 외교부서, 이것들 사람도 아니구먼...다른나라 사람이라도 이렇게 못하겠는데, 하물며 남북됐다가 탈출한 님에게 이딴짓을 해! 더러워 더러워! 속 터지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