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의 3선개헌
1967년 대선에 두 번째로 나서면서 박정희는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공언했다. 하지만 그것은 애초에 거짓말이었다. 그 후 곧바로 3선 개헌을 준비했고, 1971년 3선 이후 바로 유신체제를 준비했기 때문이다. 김형욱 회고록에 의하면, 1967년 대선 기간 중 사석에서 박정희는 “나는 절대 정권을 못 내려놔!”라고 실토했다고 한다.
1967년 6월 8일 제7대 국회의원 총선거 때 대대적으로 부정선거를 자행했던 이유도 개헌에 필요한 국회의원 정족수를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1969년 1월 공화당 의장서리 윤치영은 “조국 근대화와 민족중흥의 과업을 이루기 위해 강력한 리더십이 필요하다”고 설레발을 치면서 3선 개헌의 물꼬를 텄다. 윤치영은 박정희를 ‘단군 이래 최고의 성군’이라 부른 희대의 아첨꾼으로 유명하다.
야당과 청년 학생, 시민들의 반발이 거셌다. 3선 개헌에 대놓고 반대하는 뜻 있는 젊은 국회의원들은 정보부에 끌려가 고초를 당했고, 대학생은 물론 고등학생들까지 전국적으로 반대 투쟁이 일어났다. 이에 위수령을 발동했고, 모든 학교는 교문을 닫아버렸다.
3선 개헌 당시 헌법 개정안의 가결 정족수는 117명이었는데, 공화당 의원은 총 109명이었다. 당시 정구영 국회의장이 개헌안에 공개적으로 반대해 확보된 찬성표는 108표였다.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한 박정희는 공화당 108명, 유신정우회 11명, 신민당 3명으로 총 122명의 국회의원을 확보하고 9월 8일 국회에 개헌안을 상정한다. 당시 야당이었던 신민당 의원 중 성낙현, 조흥만, 연주흠이 중앙정보부의 공작에 넘어갔던 것이다.
전국적인 개헌 반대 시위가 일어났지만 결국 9월 13일에 개헌안의 국회 표결이 선포되었다. 위기감을 느낀 신민당 의원들은 표결 저지를 위해 단상을 점거하고 반대 농성을 벌였다. 자정이 다가오자 이효상 국회의장은 주말을 보낸 후 월요일에 다시 본회의를 소집하겠다고 밝히고 산회를 선언한다. 여당 의원들이 퇴장하자 안심한 야당 의원들도 집으로 돌아가 단꿈에 빠져 있었을 이튿날 새벽 2시 50분, 태평로 국회의사당 건너편의 국회 제3 별관에 불이 켜지고, 주변 반경 5백m를 1,200명의 기동경찰이 철통같이 에워싼 상황에서 날치기 통과가 이루어진다.
얼마나 급했던지 미처 의사봉을 준비하지 못해 주전자 뚜껑으로 책상을 3번 두드려 통과시켰다. 여기에 걸린 시간은 단 6분이었다. 당시 이 사건은 신생 언론매체였던 MBC 기자의 특종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날치기 통과의 주범이라 할 수 있는 이효상 의장은 진보적 사회운동을 해온 학자였는데 그런 그가 박정희 정권의 들러리로, 독재자의 앞잡이로 활동했다는 것이 참으로 부끄럽고 가슴 아프다. 대구 출신인 이효상은 “대구, 이곳은 신라의 찬란한 문화를 자랑하는 고장이건만 그 긍지를 잇는 이 고장의 임금은 여태껏 하나도 없었다. 박정희 후보는 신라 임금의 자랑스러운 후손이며, 이제 대통령으로 뽑아 이 고장 사람으로 천년만년 임금으로 모시자”라고 했다. 한국 현대사에서 지역감정을 처음으로 등장시킨 장본인이다. 대구는 원래 항일 재야 도시였다. 3.15 부정선거 때 투표함을 몸으로 껴안고 지켰다는 대구의 야성이 박정희 정권을 기점으로 변질하였다. 대구의 지역신문인 <매일신문>은 전두환의 언론 통폐합 정책에서도 살아남았다.
여기서 우리나라 헌법의 제정과 개정에 대해 간략히 정리할 필요가 있다. 헌법이란 공동체 구성원의 합의와 약속으로, 대통령을 비롯한 공동체 구성원 누구나 준수해야 할 규범이다. 대한민국 헌법은 1948년 7월 12일 제정하고 동월 17일에 공포했다. 이후 현재까지 아홉 차례 개정되었다. 그 가운데 4.19혁명 이후의 3차, 4차 개헌과 대통령 직선제로 복귀한 현행 9차 개정을 제외한 여섯 차례의 개정이 모두 독재자의 사익을 위한 불법적 개정이었다.
1차 개정은 1952년 7월 7일 당시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의 재선을 위한 직선제와 양원제를 설정하는 개헌이었다. 2차 개정은 1954년 11월 29일 이승만의 3선 연임을 위한 개헌으로 국민투표제를 실시하였다. 3차 개정은 1960년 6월 15일로 4.19혁명 후 의원내각제 실시를 위한 것이었고, 국민의 기본권을 확장하는 개정이었다. 4차 개정은 1960년 11월 29일로 무위로 끝난 ‘반민특위’에 대한 부활을 의미하는 반민주행위에 대한 처벌에 관한 것이었다. 5차 개정은 1962년 12월 26일로 군사반란 이후 박정희의 대통령 권한 강화 및 헌법재판소 폐지를 위한 개정이었다. 6차 개정은 바로 위에서 상세 기술한 대로 1969년 10월 21일로 박정희의 3선 연임을 위한 개정이었다. 7차 개정은 다음에 설명할 유신헌법으로 1972년 12월 27일에 있었고, 기본권 침해, 긴급조치 조항, 국회의원 1/3 임명권(유정회), 대통령 간선제(체육관 선거) 등의 사항이었다. 8차 개정은 1980년 10월 27일로 전두환 독재자를 위한 대통령 간접선거로 7년 단임제를 위한 체육관 선거였다. 9차 개정은 1987년 10월 29일로 현행 헌법인 대통령 직선제를 채택했다.
만약 제헌헌법을 제정한 제헌국회 의원들이 이러한 헌법 개정을 굽어보고 있다면 다음과 같은 역사적 꾸짖음을 하지 않을까 한다.
“헌법을 준수하겠다고 오른손을 들고 온 국민 앞에 선서한 대통령들아! 내 말을 들어라. 그리고 헌법을 개정한 국회의원들과 법대로 판결한다는 법관들, 법을 집행한다는 검찰들아, 내 말을 들어보아라! 너희는 법의 기초인 정의를 짓밟고 불의한 짓을 수없이 많이 저지른 역사의 배신자들이다. 이승만의 사사오입 개헌, 박정희의 3선개헌과 유신헌법, 전두환의 7년 단임제 체육관 선거, 이 모두가 법을 잘 알고 법을 바르게 집행한다는 너희들이 한 짓이 아니냐? 이 범죄에 가담한 모든 정치인, 교수, 법관, 검찰, 공직자, 법조인은 모두 가슴을 찢고 뉘우쳐야 한다. 부디 철들고 바르게 살기 바란다. 이제는 제발 말장난하지 않기를 바란다. 선조들이 꿈꾸었던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그 대동 세상을 이루어다오. 항일 독립 선조들과 선인들이 만든 이 헌법을 부디 진심으로 잘 지켜 공동선을 실현해다오!”
박정희의 유신체제
1971년 이후락이 북한을 방문해 김일성과 회담을 하여 7.4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했다. 표면적으로는 남북 평화 공존의 기초를 놓았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남북 양쪽의 검은 속셈이 숨겨져 있었다. 공동성명 이후에 북한은 김일성 수령 1인 독재 체제가, 남한은 유신독재 체제가 공고화되었기 때문이다. 뒷거래란 의심을 지울 수가 없다.
1972년 7.4남북공동선언 실천, 즉 분단에 대응하고 경제 발전을 위해서 독재를 받아들이라는 강요로 내건 구호가 ‘한국적 민주주의’였다. 수식어만 달라졌지 민주주의를 억압하거나 독재 통치를 용인하라는 협박이란 점에서는 변함이 없었다. 투표라는 민주주의 형식을 빌려 법과 제도를 무력화하는 권력자의 야만적 행동이었다.
미국에서 해제된 기밀문서에 따르면, 1972년 유신체제를 발표하기 며칠 전 중앙정보부가 두어 차례나 북한의 박성철과 김성주에게 구체적 내용을 통보했다고 한다. “우리에게 곧 정치 변혁이 있을 터인데 그것은 내부 문제이고 북한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란 내용이다. 남과 북의 지도자에게 가장 중요했던 것은 이념도 민족도 아닌 자신의 정권욕이었다.
유신헌법이란 무리수는 박정희의 두려움에서 출발했다. 1971년 3선 개헌 이후 정권에 반대하는 시위가 이어졌다. 또한 전국적인 부정선거, 관권선거를 저질렀지만, 국회 의석은 민주공화당 183석, 신민당 89석으로 개헌 저지선이 무너졌다. 1972년 박정희는 위수령과 휴교령을 발동하고 특별조치법을 통과시켰다. 일련의 유신 전(前) 단계 조치였다. 같은 해 10월 17일 대통령 특별선언을 통해 국회를 해산하고 정당정치를 금하는 계엄령에 준하는 조처를 한 후 박정희는 유신헌법을 발표한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민국은 3·1운동의 숭고한 독립정신과 4.19의거 및 5.16혁명의 이념을 계승하고…”로 시작하는 유신헌법은 뻔뻔함의 극치이자 군사반란으로 4.19정신을 파괴한 자들의 자기부정이었다. 유신헌법은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한 대통령 간선제와 연임 제한 철폐에 그치지 않고, 대통령에게 의회 민주주의에서는 불가능한 막강한 권한을 부여했다. 국회의원 추천권, 긴급조치권, 국회해산권, 법관 임명권, 법률 거부권 등이다. 국민의 기본권은 축소되었고, 자유와 권리의 본질적 내용은 침해할 수 없다는 조항도 삭제되었다. 대통령은 삼권 위에 군림하는 초헌법적 존재가 되었다. 유신헌법에 관여했던 헌법학자와 교수들이 바로 독재 정권의 조력 범죄자들이다.
젊은 검사 김기춘이 유신헌법의 초안을 마련했고, 당대 최고의 헌법학자로 칭송받던 한태연과 갈봉근이 박정희의 영구 집권 계획에 부역했다. 한때 유신헌법을 두 학자의 이름을 따서 ‘한갈이 헌법’이라고 불렀다. 한태연 교수는 유신헌법에 대해 드골 헌법을 차용했으며 ‘한국적 민주주의’를 구현한 것이라고 변명하였다. 지식인이 자신의 양심을 팽개치면 이런 참담한 결과가 초래된다. 역사의 악당은 별난 존재가 아니다. 우리가 존경하던 지식인들이 얼굴을 바꿔서 민중을 탄압하고 독재에 앞장섰다. 유신헌법이 악랄한 것은 반대를 원천 봉쇄했다는 점이다. 유신헌법을 수정하자고 건의하는 것도 위헌이었다. 하지만 학생, 시민들은 오래 침묵하지 않았다.
1973년 10월 서울대 문리대에서 시위가 시작되었다. 학생들은 ‘유신 철폐, 파쇼정치 철폐, 중앙정보부 철폐, 김대중 납치 진상 해명’을 외쳤다. 이어서 경북대가 서울대 시위를 이어받으면서 전국의 대학과 시민사회, 종교계 등에서 유신 반대 시위가 들불처럼 일어났다. 1973년 12월에는 ‘개헌청원 100만인 서명운동’이 시작되었다. 장준하, 함석헌, 천관우, 김수환 추기경 등이 참여하였다. 유신헌법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조차 불법이었기에 이 운동의 정식 명칭은 ‘현행 헌법 개정 청원운동’이 되었다. 박정희는 담화문을 발표해 불순한 행동을 중지하라고 협박했지만, 서명운동은 10일 만에 30만 명을 돌파할 정도로 뜨겁게 불타올랐다.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간파한 박정희는 1974년 1월 8일 ‘긴급조치 1호’를 발동했다. 유신헌법에 대한 비난, 개정하거나 폐지하자는 주장과 청원은 물론 이를 보도하는 행위도 금했다. 장준하 선생과 백기완 선생 두 분은 긴급조치 1호의 최초 구속자였다. 서명운동이 전국적인 호응을 끌어냈지만, 공권력을 가장한 폭력 앞에 좌절되고 말았다. 이후 긴급조치는 9호까지 이어지면서 언론에 재갈을 물렸고, 독재 권력에 항거하는 학생과 시민들을 갖은 방법으로 탄압했다.
희망
역사는 잔인할 정도로 정확하다. 존재했던 과거는 저절로 지워지지 않고, 모든 희망과 변화는 대가를 요구한다. 유신헌법이 알려주는 역사적 교훈은 명확하다. 일제강점기의 친일 부역, 이승만 독재 정권의 잔재들이 박정희 유신체제의 모태가 되었고, 그것은 다시 전두환 군부독재를 불러냈다. 오늘날에도 그 후예들이 이름을 바꾸고 옷을 갈아입고 활개를 치고 있다. 다른 모습, 더 교묘한 수단으로 민주주의를 훼손하고 역사와 온 국민을 속이며 민족의 평화와 공존을 해치고 있다. 우리의 역사가 다시는 질곡에 빠지지 않도록 불의한 과거를 깨끗이 청산하는 길을 선택해야 한다. 우리 깨어있는 시민들이 자신 앞에 놓인 역사의 소명을 인식하고 민족공동체의 평화를 향해 늘 양심과 법에 따라 이웃과 공동체를 지향하는 바른 삶을 살기 위해 바른 것은 ‘예’라 하고, 그릇된 것은 ‘아니오’라고 당당하게 응답하며 불의한 제도와 정치를 개선하고 개혁해 아름답고 참된 민주주위 공동체를 이룩해 나아가야 한다.
친일 청산을 하지 못한 길고 끈질긴 업보가 독재 정권으로 이어졌고 오늘날까지도 그 연장선에 있다. 청산해야 할 과제를 더는 외면하면 안 된다. 친일과 독재의 고리를 끊지 않는 한 고통스러운 역사는 반복된다. 그것이 역사의 법칙이다. 불의한 독재 정권을 저지하기 위해 온몸을 바쳐 투쟁한 정치인과 청년, 대학생을 기억하고, 하루빨리 불의한 과거와 친일 청산을 이루어 보다 투명하고 선명한 민주주의로 나아갈 수 있기를 염원한다.
오늘날 수많은 학생과 시민이 희생을 치르며 지켜 온 우리의 민주주의는 얼마나 성장했고 단단해졌는지 되돌아보게 된다. 아직도 철 지난 냉전 시대 논리에 물든 사람들이 있고 과거 군사독재 정권에 향수를 가진 사람들도 있어 과거 독재자의 기념관과 동상을 건립하려는 세력이 있지만, 우리 사회는 충분한 자정 능력을 갖췄다고 믿는다. 모든 불의했던 과거와 단절하고 우리의 민주주의가 보다 인류 보편적이고 공동선에 근접하는 방향으로 전진하기를 바랄 뿐이다. <끝>
* 계간 『창작과 비평』에 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