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치마 벗는 소리
노병철
황진이가 30년 도를 닦은 지족 선사를 어떻게 꼬셨을까? 우리가 흔히 하는 “오빠아앙”라는 코맹맹이 소리를 했을까? 아니면 바로 들이대는 육탄 공세로 스님을 넘어트렸을까? 암튼 지족 선사는 벽만 보고 수행을 하다가 황진이의 꼬임에 넘어가 육체관계를 맺고 만다. 여기서 작가들은 고심하게 된다. 어떻게 하면 지족 선사와 황진이의 관계를 고상하게 승화시킬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다. 그래서 짜낸 것이 ‘해군성(解裙聲)’이다. 벗을 해(解), 치마 군(裙), 소리 성(聲). 풀어 쉽게 이야기하자면 ‘치마 벗는 소리’이다. 아무도 보는 이 없는 방안에서 어둠은 깊어지는데 벽보고 있는 스님 뒤에서 뭔가 소리가 들린다. “바스락바스락” 여인의 치마 벗는 소리이다. “스르륵” 마지막 단계인 속속곳 내려가는 소리다. 30년 도력을 가진 스님의 수도는 이 소리에 모든 것이 무너지고 만다고 쓰고 있다.
이 이야기는 유학자들이 불교를 깎아내리기 위해 만들어 낸 이야기라고 하지만, 뭔가 운치가 난다. 별 할 일이 없었던 유학자들이 시구에 자주 나타내는 소위 문학적 표현을 보노라면 ‘소리’에 대한 정말 기가 막히는 이야기가 나온다. 시대의 걸출인 오성 이항복은 ‘그윽한 밤에 아름다운 여인의 치마 벗는 소리’가 소리 중 최고의 소리라고 말한다. 이 말에 당대 최고의 유학자들인 정철, 유성룡 등은 박장대소하며 이항복의 풍류와 해학에 혀를 내두른다. 세상 사는데 그렇게 근엄하게 평생을 살 수는 없을 터, 조금은 농담을 주고받는 그런 삶 속에서 사는 재미라는 것을 느낄 것 같다. 하지만 일부 갑갑한 노인네들은 계속 권위만을 내세우며 위선적 양반 놀이만 하려 든다. 참 피곤한 삶을 사는 분들이다. 당대 최고의 유학자셨던 퇴계 이황 선생이나 율곡 이이 선생께서도 야한 소설을 좋아하셨고 야한 이야기를 참 많이 하셨다고 한다.
이름만 대면 다 알만한 분들이고 인격적으로도 나무랄 때 없는 분들이 모이는 자리에 심부름하러 갔다가 밥이나 먹고 가라는 말에 잠시 머뭇거렸다. 이런 자리에서 밥 먹으면 체할지 두려워 다른 때 같으면 그냥 물러 나왔지만, 워낙 배가 고팠고 음식이 제대로 된 한정식이라 구미가 당겨 말석에 앉아 버렸다. 이런 분들 모임에는 당연히 예의와 격식을 차리면서 “공자 왈 맹자 왈” 할 줄 알았는데 내가 말석에 앉아 있음을 잊으셨는지 걸쭉한 음담패설과 육두문자까지 쓰는 대화에 난 한참 키득거렸다. 꼬장꼬장하게 사서삼경이나 읊으면서 삶을 아주 청아하게 사신 분들 같지만, 그들만의 세계에서조차 삶의 재미는 존재했다. 이분들이 다시 보였다. 나의 선입견이 한방에 사라졌다. 더 존경스러웠다.
의사이자 가천의과대학 부총장을 지낸 윤방부 선생은 글에 대한 이야기를 화끈하게 했다. 자신이 가장 싫어하는 글은 마치 수도사 같고 설교투의 글이라 했다. 참으로 역겹게 느껴진다고도 했다. 이런 이야기를 신문에 대놓고 이야기한다. 윤 교수는 한국 사람들이 강박관념에 묻혀 사는 사람들을 보고, ‘단무지’ 같다고도 했다. 단순, 무지 그리고 지랄 같다는 의미라고 해설까지 한다. “운동해라.” “아침밥을 먹어라.” “채식해라.” 등 이런 단무지 같은 인생을 살지 말라고 한다. 인생이란 그럭저럭 사는 것이지 꼭 반드시 무엇을 해야 한다고 단정하지 말라는 것이다. 글에도 무슨 큰 규칙이나 있는 듯 말하는 분들이 있다. 여자 치마 벗기는 이야기라도 나오면 화들짝 놀라서 ‘수준’ 운운하며 동네방네 떠벌리고 다닐 것이다.
80년 전 조선일보 신춘 문예 당선작인 김광균의 시 설야(雪夜)에서, '첫눈 내리는 소리'를 '머언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로 비유하고 있다. 깊은 밤에 눈 내리는 소리가 시인에게 마치 어둠 속에서 치마끈을 풀어 치맛자락이 사르르 흘러내릴 때의 신비롭고 매혹적인 소리처럼 들린 것이다. 시인의 표현에 한번 놀라고 이런 시를 당선작으로 뽑은 심사위원의 혜안에 한 번 더 놀란다. 이런저런 야한 이야기를 글로 옮기려니 지인들이 만류한다. 어른들이 질 떨어진다고 꾸중할 것이라고. 몇년 더 기다리면 되려나.
첫댓글 '머언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 와 "여자 치마 벗는 소리"의 차이인 것 같습니다.
김광균 시인처럼 표현하면 상을 받지만 윤방부선생처럼 직설이면 도망갈 겁니다.
윤방부선생은 자연과학자이지 않습니까
유당선생님의 유머로 푸시는 편이 더 좋을 듯 합니다.
ㅎ 자연과학자라...그냥 의사입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건 독자라는 것이죠. 건강을 위해서 뭐 좋은걸 먹으라며 홈쇼핑에 나와 광고하는 의사가 아니라 재미있게 마음편하게 사는 삶을 강조하는 분이랍니다. 그런 분이 이런 말을 하는 요지는 읽히는 글을 쓰라는 것입니다. 읽히지 않는 글은 아무리 멋진 글이라도 일기에 불과하다는 것이죠. 읽히는 글을 만들기 위해 포토 에세이니 다섯장 에세이란 이상한 장르도 나오지 않습니까. 이런 글이 문학성이 아주 풍부한 글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냥 수필이 아닌 다른 장르일 뿐. 어떻게해서든지 독자를 확보해야 한다는 절실함이겠죠. 절대 선생님에게 반박하는 글이 아니라 제 생각을 적어보았습니다.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