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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왕곡성당 카페, 마리아사랑넷,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우리에게 맡겨진 양들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습니까?
초기 교회 이방인들의 사도요 최고 목자였던 바오로 사도의 삶과 신앙이 얼마나 열정적이고 충실했으며, 모범적이었는지는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습니다.
오늘 특별히 첫 번째 독서 필리피서는 그런 바오로 사도의 위대함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회심 이후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예수님의 제자가 된 그는 매사에 다른 제자들의 본보기가 되었습니다.
그는 목숨을 내걸며 복음 선포에 매진했지만, 자신의 의식주는 스스로 일을 해서 해결했습니다. 천막 짜는 일로 생계를 꾸려가면서 동시에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목자로서 교우들에게 조금도 민폐를 끼치지 않으려는 그의 섬세한 배려심과 당당함이 돋보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설교가 힘이 있고 설득력이 있었던 이유는 그가 선포하는 말씀과 그의 구체적인 삶의 일치했기 때문입니다. 구체적인 생활은 조금도 따르지 않으면서 말만 번지르르했다면, 설교를 듣는 청중들이 콧방귀를 꼈을 것입니다. 그러나 철저하게도 언행일치되는 그의 강론에 사람들은 감동을 받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의 서한 한 구절 구절에는 당당함이 잘 묻어나고 있습니다. “형제 여러분, 다 함께 나를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여러분이 우리를 본보기로 삼는 것처럼 그렇게 살아가는 다른 이들도 눈여겨보십시오.”(필리 3,17)
사실 바오로 사도의 말씀, “나를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라는 구절을 묵상해봅니다. 사실 우리 가운데 이렇게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는 구체적인 삶이 그랬기 때문에, 그리도 당당히 선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어디 당당함 뿐인가요? 바오로 사도가 초세기 이방 교회의 지도자로서 얼마나 교우들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배려했는지도 눈여겨봐야 할 것입니다. 교우들을 대하는 사목자로서의 자세가 세상에 둘도 없이 자상한 친 아버지 그 이상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형제 여러분, 나의 기쁨이며 화관인 여러분, 이렇게 주님 안에 굳건히 서 있으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필리 4,1)
보십시오. 바오로 사도는 자신에게 맡겨진 양들을 존재 자신의 기쁨이요 화관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 표현을 들은 초세기 이방계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이 어땠을까 생각해봅니다.
진심과 사랑이 가득 담긴 그런 표현들은 힘겨웠던 초세기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위로와 격려가 되고도 남았을 것입니다.
오늘 나는 내게 맡겨진 양들을 어떤 마음,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지 진지하게 성찰해보는 하루가 되길 청합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사제가 박해 당하면 우리 신자들은 나를 숨겨줄까?>
복음: 루카 16,1-8
오늘 복음은 약삭빠른 집사에 관한 내용입니다. 집사는 주인의 재산을 관리하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재산은 ‘성령’입니다. 하느님은 청하는 이들을 당신 집사로 삼으십니다. 우리는 모두 성령을 청하는 신앙인들입니다. 성령으로 이뤄지는 하느님 나라의 행복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받는 곳에 교회입니다. 교회 안에는 수많은 다양한 신앙인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약삭빠른 집사처럼 된다면 하느님은 그들을 당신 집사로 계속 삼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회개하기 전의 집사처럼 한다면 쫓겨나고 말 것입니다.
“어떤 부자가 집사를 두었는데, 이 집사가 자기의 재산을 낭비한다는 말을 듣고, 그를 불러 말하였다. ‘자네 소문이 들리는데 무슨 소린가? 집사 일을 청산하게. 자네는 더 이상 집사 노릇을 할 수 없네.’”
사제가 되어보니 신자 중에서도 성령의 은총을 약삭빠르게 잘 사용하는 집사가 있는가 하면 낭비해버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는 자신이 이 일을 더 할 수 없을 때 드러납니다. 만약 제가 사제를 더는 하지 못하게 될 때 저를 맞아줄 신자들이 있을까요? 갑자기 자신이 없어집니다.
프랑스 혁명 당시는 신자들이 대부분 성직자를 죽이기 위해 찾았습니다. 그만큼 은총의 관리를 잘하지 못했다는 증거가 됩니다. 이렇게 교회가 그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 된 이유는 중세 교회 때의 습관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때의 모습이 잘 드러나는 소설이 있습니다.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 형제들』 중에 ‘종교 재판관’ 부분입니다. ‘대심문관’이라고도 불립니다. 대심문관은 당시 종교 재판으로 사람들을 화형에 처하는 엄청난 권력을 지닌 고위 성직자였습니다.
이 이야기는 예수님이 세상으로 돌아오시다가 대심문관을 만나 갇혀서 재판받는 형식을 취합니다. 물론 예수님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마지막에 대심문관에게 마치 유다가 당신에게 그렇게 하셨듯이 입을 맞춥니다. 이 상징적 행위는 목매달아 죽은 유다처럼 종교가 죽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대심문관은 예수님의 죄를 이렇게 밝혔습니다.
“당신은 인간의 자유를 빼앗기는커녕 그것을 더 늘렸고, 인류의 영적 왕국에 영원히 고통을 안겨 주었습니다. 당신은 사람의 자유로운 사랑을 바라시어, 사람이 자유롭게 당신을 따르며 당신에게 유혹당하고 포로가 되기를 바라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청지기가 바로 예수님처럼 해야 했습니다. 자유가 빼앗겼기 때문이 아니라 고마워서 자유롭게 자신을 받아들일 친구를 사귀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대심문관은 종교는 그런 식으로는 안 된다고 믿습니다. 종교는 인간에게 자유를 주어서는 안 되고 통제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인간이 가장 힘들어하는 게 ‘자유’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빵에 대한 유혹을 이긴 것을 비난하면서 중세 교회의 부유함을 통해 인류를 교회가 배를 불리게 만드는 것이 효율적이라고 말합니다.
“결국 그들은 그들의 자유를 우리 발 앞에 놓고 우리에게 ‘우리를 너희의 노예로 삼아 먹이라.’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들은 모든 사람에게 충분한 자유와 빵이 함께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게 될 것입니다.”
또 자비는 행사되어서는 안 되며 종교 재판처럼 종교가 강한 힘으로 그들의 자유를 빼앗아 줄 때 그들은 신비로운 평화를 누릴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자신들이 쫓겨났을 때 자신들을 자유롭게 맞아줄 사람들을 만드는 게 목적이 아닌 자신들에게 완벽히 통제되는 사람들로 만들려는 시도이고, 예수님 시대의 종교 지도자들로부터 시작하여 지금도 일부 성직자가 그러한 모습을 보일 수도 있습니다.
은총을 관리하는 집사는 자신이 사제라면, 만약 사제 옷을 벗었을 때 자신을 맞아줄 사람들을 만드는 사람과도 같아야 합니다. 만약 자유를 빼앗는 존재였다면, 그들이 그를 맞아들여야 하는 자유를 갖게 되었을 때 자신들을 통제하지 못하는 그를 받아줄 리가 없습니다. 프랑스 혁명 때는 성직자들이 얼마나 신자들에게 못되게 굴었는지 오히려 그들을 찾아내어 신자들이 죽이려 하였습니다.
주문모 신부를 생각해 봅시다. 박해 받는 땅에 처음으로 들어와 미사와 고해성사를 해 주었습니다. 그를 보호하기 위한 우리 신자들의 노력은 대단했습니다. 평신도 최인길은 주문모 신부가 피할 시간을 벌기 위해 자신이 사제복을 입고 대신 체포되어 무수한 고문을 당했습니다. 쫓기는 주문모 신부를 목숨을 다해 보호한 강완숙 골롬바도 있습니다. 그가 체포령이 발효된 주문모 신부를 숨겨주고 있다는 사실이 발각되면 수많은 가족이 다 위험할 수 있어도 용기를 낼 수 있었습니다. 주문모 신부는 목숨을 걸고 은총을 신자들에게 베풀었습니다. 그러니 신자들도 주문모 신부를 위해 목숨을 내어놓을 수 있었습니다.
평신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평신도들도 은총을 받으니 은총의 관리자입니다. 박해 시대가 되었을 때 자신을 숨겨줄 친구를 그 은총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런 청지기만이 끝까지 주인이 칭찬해주며 자신의 집에 살게 할 것입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루카 16,1-8: 약은 집사
오늘 복음에 나오는 집사는 교활한 사람이다. 집사는 자기가 맡은 주인의 재산을 관리하면서 횡령을 하였다. 주인은 자기의 부정을 알아차리고 이제 자기를 해고하겠다고 통고한다. 그런데 집사는 기발한 생각을 해낸다. 그는 장부를 조작하여 빚진 자들에게 실제로 빚진 액수보다 훨씬 적은 액수로 고쳐 쓰게 했다. 그렇게 해두면 자신에게 해고라는 최악의 불운이 닥치더라도 빚진 자들에게서 자기가 또 받아낼 수 있는 좀 더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 놓는다. 이러한 처사에 주인은 충격을 받았지만, 약은 집사의 교활한 처사에 감탄하며 집사를 칭찬하고 있다. 그들이 세속적인 삶을 위해서 교묘한 수단 방법을 짜내고 있다. 약은 집사의 비유는 중요한 가르침이 있다. 다가올 미래를 생각하는 이 집사와 같이, 다가올 하느님의 나라를 준비하면서 오늘을 잘 살아야 한다는 종말론적 가르침이 담긴 말씀이다.
세상의 이익을 위해서 이처럼 갖은 재주, 갖은 꾀를 다 동원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우리 자신은 우리의 영적인 삶을 위해서 무엇을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자신의 구원을 위하여 그렇게 노력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신앙생활에 얼마나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겠는가! 집사가 횡령하고 사기를 쳐가면서 준비한 그래서 그토록 안전을 보장받으려는 삶도 언젠가 끝나고 말 삶이다. 그러니 영원한 생명을 보장받기 위해서는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겠는가? 우리도 언젠가는 하느님 앞에 우리가 책임을 갖고 관리하던 우리 자신의 집사 일에 대한 셈을 하는 날이 올 것이다. 그 셈을 바치는 날이 언제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날에 대비하여 언제나 준비되어있는 삶을 살도록 노력하고, 항상 깨어있는 삶이 되도록 하여야 한다. 준비가 되어있지 못하다면 우리는 주님께 나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이 항상 지금 여기에서부터 구원을 체험하고 그 구원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할 수 있는 삶이 되도록, 우리도 그만한 준비를 할 수 있도록 하여야 우리가 맡은 집사 일을 잘하는 것이다. 언제나 깨어있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최초로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제는 수많은 나라를 전쟁으로 정복했고 여러 번의 공격에서 살아남아 권력을 굳건히 했습니다. 그 뒤에 그가 한 것은 무엇일까요? 불로장생의 영약을 찾았습니다. 비슷한 영약이 있다는 희미한 소문만 들려도 특사를 파견했습니다. 문제는 불로초를 찾지 못하고 돌아오면 처형당했으므로, 그 특사들은 소식을 끊고 종적을 감추었다는 것입니다.
불로초를 찾지 못한 그가 선택한 것은 진시황릉입니다. 황제는 무려 70만 명을 동원해 시안에 도시 하나 크기의 무덤을 건설합니다. 무덤에서는 흙으로 만들어 구운 병사와 말 모형이 7천 점이나 발견되었습니다. 황제로 다시 태어날 때까지 호위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렇게 죽지 않으려 했고, 또 죽음을 대비했던 그 역시 기원전 210년, 49세의 나이로 죽고 맙니다. 역설적인 것은 수명을 연장하기 위해 먹은 온갖 독성 물질 때문에 천수를 누리지 못하고 일찍 죽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가 꾸준히 복용했던 것이 ‘수은’이라고 하지요. 이 수은에 장기간 노출되면 우울증, 의욕 상실, 졸음 등 정신장애를 동반하고, 심할 경우 환각, 정신착란, 기억상실 등으로 이어집니다. 진시황제가 말년에 보였던 모습입니다.
죽음을 두려워해서 피하는 것이 옳을까요? 아닙니다. 죽음 역시 하나의 피할 수 없는 과정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을 피하지 않은 이유는 죽음이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지금을 잘 사는 것입니다. 지금을 의미 있게 살아갈 때, 죽음 이후의 미래도 의미 있게 됩니다. 그러나 지금을 소홀히 하면, 죽음 이후의 미래는 없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정직하지 못한 집사의 비유 말씀을 하십니다. 재산을 낭비하였을 뿐 아니라, 주인에게 쫓겨나게 되자 자신의 미래를 준비하려고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의 빚을 몰래 깎아 주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주인은 그가 영리하게 대처했다고 칭찬합니다. 바로 현재를 늘 미래와 연결해서 생각하고 판단할 것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지금을 어떻게 해야 잘 사는 것이 될까요? 미래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할 것만 신경 쓰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아무리 많은 것을 가져도 미래의 하느님 나라에 가지고 갈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자기 욕심 채우는 것만을 행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죽음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죽음 너머의 세상을 위해 지금을 잘 사는 준비가 필요합니다. 이러한 사람만이 주님으로부터 영리하게 대처했다고 칭찬받을 것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과도 하늘 나라의 가치와 바꿀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명언: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은 사소한 감정을 어떻게 처리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그것이 도화선이 되어 큰 불행으로 발전하는 일이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알랭).
※김혜선 아녜스 - 출처 : 바오로딸콘텐츠, 묵상-말씀이 시가 되어
“내가 집사 자리에서 밀려나면 사람들이 나를 저희 집으로 맞아들이게 해야지.”(루카 16,4)
설령,
방탕한 생활로
세상의 뒷자리로 밀려난다 해도
언젠가
우리가 베풀었던 자선이
우리에게
새로운 거처를 마련해 준다네.
가난한 이들에게
대가 없이 베푸는
자선은
우리가 철없이 탕진해 버린
영적 재산을
다시금 넉넉히 채워준다네.
※김경진베드로 신부님 - 의정부교구 한마음청소년수련원(출처 : 묵상글 단톡방)
책임을 맡은 집사는
집 주인이 걱정 없이 살 수 있도록 해 주는 사람이면 좋겠습니다.
책임을 맡은 집사는
진짜 행복을 선물로 줄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습니다.
책임을 맡은 집사는
기쁨과 즐거움을 선사할 줄 아는 사람이면 좋겠습니다.
책임을 맡은 집사는
희망을 꿈꾸게 해 줄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습니다.
책임을 맡은 집사는
주인을 주인처럼 섬길 줄 아는 사람이면 좋겠습니다.
책임을 맡은 집사는
권위적이지 않고 겸손한 사람이면 좋겠습니다.
책임을 맡은 집사는
무엇보다 하느님의 마음으로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면 좋겠습니다.
책임을 맡은 집사는
세속의 자녀가 아니라 빛의 자녀로 사는 사람이면 좋겠습니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 구속주회
※이병우 루카 신부님 - 마산교구 합천성당 주임신부님
복음말씀
제1독서
<우리는 구세주를 고대합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 사도 바오로의 필리피서 말씀입니다.3,17―4,1
17 형제 여러분, 다 함께 나를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여러분이 우리를 본보기로 삼는 것처럼
그렇게 살아가는 다른 이들도 눈여겨보십시오.
18 내가 이미 여러분에게 자주 말하였고 지금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는데,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19 그들의 끝은 멸망입니다. 그들은 자기네 배를 하느님으로,
자기네 수치를 영광으로 삼으며 이 세상 것만 생각합니다.
20 그러나 우리는 하늘의 시민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구세주로 오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고대합니다.
21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을 당신께 복종시키실 수도 있는 그 권능으로,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4,1 그러므로 내가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형제 여러분,
나의 기쁨이며 화관인 여러분,
이렇게 주님 안에 굳건히 서 있으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이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6,1-8
그때에 1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떤 부자가 집사를 두었는데, 이 집사가 자기의 재산을 낭비한다는 말을 듣고,
2 그를 불러 말하였다.
‘자네 소문이 들리는데 무슨 소린가? 집사 일을 청산하게.
자네는 더 이상 집사 노릇을 할 수 없네.’
3 그러자 집사는 속으로 말하였다.
‘주인이 내게서 집사 자리를 빼앗으려고 하니 어떻게 하지?
땅을 파자니 힘에 부치고 빌어먹자니 창피한 노릇이다. 4 옳지, 이렇게 하자.
내가 집사 자리에서 밀려나면
사람들이 나를 저희 집으로 맞아들이게 해야지.’
5 그래서 그는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을 하나씩 불러 첫 사람에게 물었다.
‘내 주인에게 얼마를 빚졌소?’
6 그가 ‘기름 백 항아리요.’ 하자,
집사가 그에게 ‘당신의 빚 문서를 받으시오.
그리고 얼른 앉아 쉰이라고 적으시오.’ 하고 말하였다.
7 이어서 다른 사람에게 ‘당신은 얼마를 빚졌소?’ 하고 물었다.
그가 ‘밀 백 섬이오.’ 하자,
집사가 그에게 ‘당신의 빚 문서를 받아 여든이라고 적으시오.’ 하고 말하였다.
8 주인은 그 불의한 집사를 칭찬하였다. 그가 영리하게 대처하였기 때문이다.
사실 이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