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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19. 묵상글 (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 - 믿음의 사람은 흔들리지 않는다 . 등 )
06:55, 김찬선 신부님 글 추가. 07:05, 상지종 신부님 글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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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19.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믿음의 사람은 흔들리지 않는다
산부인과 의사가 제일 싫어하는 사람은 ‘무자식이 상팔자’라는 사람이랍니다. 그렇다면 변호사가 제일 싫어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법 없이도 살 사람’이랍니다. 오늘 기억하는 요셉은 “법대로 사는 사람”,“의로운 사람”사람입니다. 성경에서 의로움이란 하느님의 속성으로 사랑과 용서로 인간을 구하시는 하느님의 의(로마3,5 2코린5,21), 인간의 죄를 위해 무죄한 피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마5,17), 예수를 믿는 믿음 안에서의 의(로마9,30. 필리3,9)를 일컫고 있습니다. 의로운 사람이란,‘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며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하느님의 의로움이 인간의 징벌이 아니라 구원을 위한 것이었듯이 요셉의 의로움은 바로 한 여인을 살리는 사람에 대한 애정과 생명의 존중으로 나타났습니다.
우리는 가끔 화가 났다. 또는‘홧병이 났다’는 말을 합니다. 정말 화는 불입니다. 아주 뜨거운 불입니다. 그러나 그 불로는 방을 따뜻하게 덥힐 수도 없고 밥을 지을 수도 없습니다. 더군다나 나무를 태울 수도, 쇠를 달굴 수도 없습니다. 오로지 자신의 속만 태울 뿐입니다. 그러니 병이 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화를 다스리는 법을 터득하면 좋겠습니다. 화가 나도 무조건 참는다는 것은 용수철을 눌러놓는 것과 같습니다. 무조건 누르지 말고 하늘을 보면서 잘 풀어야 합니다.
오늘 기억하는 요셉은 정말 화를 다스릴 줄 아는 분이셨습니다. 요셉과 약혼한 마리아는 결혼하기 전에 임신한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바라보는 요셉의 모습은 놀라울 정도입니다. 신명기22장을 보면 간음에 대한 규정을 말하고 있는데 “젊은 여자의 처녀성이 증명되지 않으면, 그 여자를 제 아버지의 집 대문으로 끌어내어, 그 성읍의 남자들이 그 여자에게 돌을 던져 죽여야 한다”(신명22,20-21).고 되어 있습니다. 법대로 사는 요셉이 이러한 규정을 알진대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마태1,19).고 합니다.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결혼을 준비하며 꿈에 부풀었을 텐데 너무도 황당한 사실에 접하게 된 것이니 실망과 좌절감 속에서 마리아에게 망신을 주고 서운함을 되갚아 주어도 시원찮을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에 드러낼 생각을 갖지 않았다니 그러한 마음이 어디서 왔겠습니까?
돌에 맞아 죽을 허물까지도 덮어줄 수 있었던 것은 사랑 때문이라고 밖에 달리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마리아를 사랑했기에 사랑하는 이에게 줄 수 있는 마지막 배려입니다. 사실 사랑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힘이요, 능력입니다. 그리고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더 많은 일을 행할 수 있다는 것은 당연합니다. 화를 다스리는 방법은 결국 사랑하는 것입니다. 아니 지금까지 내가 하느님과 이웃으로부터 사랑받았다는 것을 일깨우는 것입니다.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꿈에 나타나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마태1,20).했을 때 곧바로 자기의 생각을 접고 천사가 일러준 대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군말이 필요 없었습니다. 그저 하느님의 뜻을 따른 겁니다. 깊은 신앙은 어려울 때 드러난다고 했는데 바로 이 순간이 그의 믿음을 확인해 주었습니다. 화를 다스리는 또 하나의 방법은 철저한 믿음을 간직하는 것입니다. 믿음 위에 서 있는 사람은 결코, 흔들리지 않습니다.
요셉 성인은 아주 사소한 일에도 마음 상하고 서운함을 오래도록 기억하는 우리들의 모범이십니다. 의로운 사람이란 하느님께 마음을 두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 생활하며 기쁘고 진실한 마음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요셉이 그런 분입니다. 그리고 요셉은 자신이 겪고 있는 일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결코 그것에 대해 알려고 하거나 해명하려 들지 않았습니다. 그저 받아들이고 살았을 뿐입니다. 어떠한 처지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의로움을 간직한 성인의 마음을 닮고 싶습니다. “믿는 이에게는 질문이 없고, 믿지 않는 이에게는 대답이 없다”고 합니다. 오늘은 사랑으로 그리고 믿음으로 화를 다스리시길 바랍니다.
“성 요셉의 침묵과 겸손, 절대적인 신앙이 있었기에 하느님께서는 요셉을 통해 당신의 뜻을 온전히 행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우리도 하느님께 완전히 내맡겨 드린다면 그분은 우리 안에서 당신의 일을 충분히 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가경자 알베리오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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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19.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4.03.19 05:37
성 요셉 대축일-2022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다."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는 약속은 율법을 통해서가 아니라
믿음으로 얻은 의로움을 통해서 주어졌습니다."
오늘은 성 요셉 대축일입니다.
이 축일에 복음은 요셉에 대해 의로운 사람이라고 얘기하고,
제2독서는 아브라함의 의로움을 얘기하면서 성 요셉이
아브라함처럼 믿음으로 의로운 사람이 되었음을 얘기합니다.
그런데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믿음으로 의로운 사람이
되는 것을 율법으로 의로운 사람과 비교하며 설명을 합니다.
한자어로는 이신득의(以信得義)와 이행득의(以行得義)의 차이입니다.
이행득의란 인간의 행위 또는 공로로 의로움을 얻는 것이고,
이신득의는 믿음으로 의로움을 얻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어떡해서 의롭게 되었느냐 그 얘기를 하는 거지요.
그렇다면 오늘 축일을 지내는 요셉은 어떻게 의롭게 되었을까요?
그의 의로움은 어떤 것일까요?
요셉이 의롭다고 할 때 그때의 의로움은 율법의 의로움이었습니다.
다윗 가문의 후손으로서 어렸을 때부터 율법을 배우고 익혀
의로운 사람이 되었으며 그렇지만 점잖고 따듯함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율법의 가르침에 따라 파혼을 하지만
소문을 냄으로써 마리아를 궁지에 몰 생각은 없었습니다.
이렇게 율법으로 의로움의 바탕이 되어 있는 그가
이제는 그리스도로 인해 은총으로 의로운 사람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은총의 짝이 바로 믿음이라는 점입니다.
은총으로 의로워진 것은 그가 은총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은총과 인간의 믿음이 합쳐져 의로워지는 겁니다.
도둑이나 강도에게는 문을 닫고 믿으면 문을 열 듯
믿을 때 하느님의 은총이 우리의 열린 문을 밀고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기적도 마찬가지잖아요?
주님께서 기적을 행하시곤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라고 늘 말씀하시잖습니까?
의사를 믿지 못하면 의사가 아예 치유를 할 수 없듯이,
독초라고 의심하면 거부하고 약초라고 믿을 때만 허용하듯이
주님 치유의 힘도 믿지 않는 이에게는 아예 거부되고 믿는 이에게만 들어옵니다.
요셉도 하느님의 말씀을 믿음으로써 은총의 시기가 열리고,
그래서 율법의 의로움이 은총의 의로움으로 승화되고,
자기의 의로움이 그리스도의 의로움으로 승화되었습니다.
자기의 의로움이 자기 힘으로 의로워진 것이라면 그리스도의 의로움이란
그리스도로 인한 의로움이요 그리스도를 위한 의로움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말씀을 믿음으로 이제 자기 자식은 낳을 수 없게 되었지만
그리스도의 아버지가 되어 그리스도를 키우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요셉의 위대한 가난이고 요셉의 위대한 정결입니다.
물건을 소유하지 않는 가난보다 자식을 소유하지 않는 가난이 더 큰 가난이고,
그저 여자를 소유하지 않는 것보다 그리스도를 소유하는 것이 더 위대한 정결인데
요셉이 바로 이 위대한 가난과 정결의 삶을 산 것입니다.
마리아를 자기 여자로 소유하지 않고 성령의 정배로 내줌으로써
요셉은 그리스도를 소유하게 되었고 그리스도의 아버지가 되었으며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우리의 많은 불의는 소유와 욕망에서 비롯되는데
우리는 요셉의 이 위대한 가난과 정결에서
그리스도의 의로움을 얻는 법을 배우는 오늘입니다.
요즘 자주 제가 늦잠을 잔다고,
건강이 안 좋아진 것 아니냐고 걱정해주시는 분들이 있는데
오늘도 일어나 묵상을 하는데 묵상이 깊게 되지도 않고
다른 때보다 조금 늦게 일어나기도 하여 결국 새로운 강론을 올리지 못했습니다.
걱정은 하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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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19.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바오로 사도께서는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필리 4,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어떻게 하면 늘 기뻐할 수 있을까를 묵상하게 됩니다. 돈 많이 벌고, 승진 척척 되고, 아프지 않고, 시험에 늘 좋은 성적을 맞고, 자기 원하는 대로만 된다면 늘 기뻐할 수 있을까요? 어린이가 썼다는 다음과 같은 일기의 내용을 봤습니다.
“수건은 집안의 더러운 것들을 깨끗하게 만들고 걸레가 된다. 걸레가 더러워진 만큼 우리 집은 깨끗하게 된다. 나는 걸레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어떠십니까? 걸레 같은 삶도 멋질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러나 부모는 자기 자녀가 걸레 같은 삶을 살겠다고 하면 아마 도시락 싸 들고 다니면서 말릴 것입니다. 그 삶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삶 안에서 더 큰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자기를 희생해서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고 행복하게 하는 것, 자기를 희생해서 다른 사람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삶이었습니다. 따라서 우리 역시 이 길을 쫓아갈 때, 예수님과 함께하게 되고 진짜 기쁨을 갖게 될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과 우리가 함께할 수 있었던 것은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이신 성 요셉 덕분입니다. 요셉 성인은 단 한 번도 주인공이 되지 않았습니다.
약혼자 마리아가 아기를 잉태하자 그저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마음먹습니다. 단호하게 마리아를 법정에 세우지도 율법 학자들에게 고발하여 돌로 치게 하지도 않습니다. 이런 요셉에게 꿈에 천사가 나타나 주님의 계획을 전합니다. 말없이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합니다. 이렇게 그는 조용하게 주님의 뜻이 세상에 펼쳐질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의 구원을 가능한 일이 되도록 하셨습니다.
이 세상 안에서 반드시 주인공이 될 필요는 없습니다. 초등학생이 말했던 걸레면 또 어떻습니까? 의미가 충만하다면, 분명히 기쁘고 행복한 삶이 될 수 있습니다. 요셉 성인께서 바로 그런 행복을 가지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따라서 깨끗이 닦여진 귀한 명품만 되려고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사실 명품은 피곤합니다. 어떤 분이 제게 명품 만년필을 선물해 주셨습니다. 한 번 쓸 때마다 부담됩니다. 즐겨 쓰는 만년필은 아무렇게나 쓸 수 있는 보급형 만년필입니다. 만년필 쓰는 기쁨 역시 명품 만년필이 아닌, 막 쓰는 보급형 만년필에서 생겼습니다.
많이 사용되는 ‘나’, 비록 걸레처럼 지저분하지만, 다른 이들에게 도움을 주고 사랑을 베풀며 기쁘게 사는 ‘나’가 되어야 합니다. 요셉 성인의 모범을 기억하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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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삶의 작은 일을 즐겨라. 어느날 돌아보면 큰 일이었다는 것을 깨닫는다(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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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19.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대로 하였다.”(마태 1,24)
오늘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이신 성 요셉 대축일입니다.
복음사가들은 예수님의 모친이신 마리아께 대한 관심에 비하면, 성 요셉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아마 그것은 구속사에 있어서 그의 중요성이 부족해서라기보다는 아마 그에게는 하느님께서 예수님의 유년시절까지만 함께할 수 있도록 안배한 까닭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는 그가 구속사에 있어서 해야 할 일을 다 하지 못했다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계획하신대로를 일찍이 다 이루셨다는 것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두 가지 예언이 성취되었음을 통해, 태어날 아기가 구세주 메시아임을 알려줍니다.
<첫째>는 그가 다윗의 자손이라는 사실이요, <둘째>는 그가 동정녀에게서 태어난다는 사실입니다. 구체적으로는 다윗의 자손인 요셉가문에서 태어남이요, 그 요셉의 약혼자인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남입니다. 오늘 <복음>은 이러한 하느님의 계획과 예언이 요셉의 믿음의 결단과 행동을 통해서 성취됨을 보여줍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 우리는 이처럼 인류의 구원을 잉태시키는데 온전한 조력자가 되신 성 요셉의 인품을 세 가지로 묵상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복음사가는 요셉이 “의로운 사람이었다.”(마태 1,19)고 전하고 있습니다. 곧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데 열심을 다하는 사람이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언제나 “하느님의 뜻”을 앞세우며 살았기에, 그는 자신의 개인적인 안락과 평안을 포기하고, “하느님의 뜻”을 따라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일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둘째>로는 요셉은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마태 1,19)고 전하고 있습니다. 곧 그는 타인에 대한 깊은 이해심과 자비심을 겸비한 사람이었음을 말해줍니다. 요셉은 약혼자가 임신한 사실을 알고 온갖 의혹과 치욕스런 배신감으로 분노와 갈등을 겪었을 것입니다. 비록 임신의 원인이 밝혀졌다 하더라도, 결코 약혼자에 대한 서운함과 불신을 떨쳐버릴 수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공적인 고소를 통해 마리아를 수치스럽게 만들지 않으려고, 사소한 문제를 빌미로 이혼증서를 써주어, 조용히 그와 파혼하기로 작정합니다. 물론 그렇게 된다하더라도 그 아기는 요셉의 아기가 되는 것이며, 결국 요셉에게는 모욕이 될 수밖에 없는 처지였지만 그러한 모욕을 감수하면서라도 마리아의 안녕을 도모하고자 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요셉의 사려 깊은 처사와 자비심을 보게 됩니다.
<셋째>로는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대로 하였다.”(마태 1,24)고 전하고 있습니다. 곧 그는 순명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항상 침묵으로 하느님의 음성에 마음의 귀를 열고 있었으며, “하느님의 뜻”에 행동하는 믿음으로 순명하였습니다. 그렇게 그는 순명으로 인류를 향한 하느님 구원계획의 조력자가 되었습니다.
사실, 요셉은 오늘 <복음>에서뿐만 아니라, 복음서 전체에서 단 하마디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제2독서>에 나오는 아브라함이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많은 민족의 아버지”(로마 4,18)가 되었듯이, 그 역시 “행동하는 믿음과 순명”으로 구원받는 모든 이들의 양부가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미 얻은 외아들을 포기했지만, 요셉은 아들을 얻기도 전에 이미 아들을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그 포기에 따르자면, 아브라함에게는 그래도 아내가 있었지만, 요셉에게는 아내마저도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그는 침묵하되 참으로 믿는 사람이었으며, 믿되 참으로 행동하는 사람이었고, 행동하되 참으로 순명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야말로 그는 우리 수도승들의 모델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도 이 수도생활 안에서, 요셉 성인과 함께 또 다른 예수님이신 형제들의 양부로 살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마태 1,20)
주님,
믿음으로 침묵할 줄을 알게 하소서.
행동으로 사랑할 줄을 알게 하소서.
타인의 처지를 자비로 헤아리고, 희망이 보이지 않아도 희망하게 하소서.
선하신 당신의 뜻과 당신의 의로움을 따르며,
영으로 인도되는 다 헤아려지지 않은 신비를 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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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19.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군대 가면 ‘군기’ 잡는다는 말을 듣습니다. 그것을 잘 통과하면 군 생활 적응을 잘 하고, 군 생활이 편해집니다. 그것을 통과하지 못하면 ‘고문관’이란 소리를 듣습니다. 지금은 군 생활이 짧아지고 편해졌습니다. 제가 군대에 있을 때는 지금보다는 열악한 상황이었습니다. 내무반에는 모포와 옷을 넣어놓는 ‘관물대’가 있었습니다. 관물대에 사람이 들어가려면 들어갈 수 있지만 쉽지는 않았습니다. 신병이 오면 관물대에 들어가서 ‘어머니 은혜’를 부르라고 했습니다. 신병은 비좁은 관물대에 들어가서 어머니의 은혜를 부르면서 감정이 복받치는지 눈물을 흘리곤 했습니다. 이 행사가 우리 내무반의 ‘신고식’이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식기를 세척하고, 내무반 청소를 하고, 군화에 광을 내면서 군 생활에 조금씩 봄이 오기 마련입니다. 전투체육의 꽃인 ‘족구’를 하고, 그리운 친구와 연인의 편지를 받고, 초소에서 근무를 서면서 계급도 이등병에서 일병 그리고 내무반에서 실세인 상병이 됩니다. 떨어지는 낙엽도 조심한다는 병장이 되면 국방부의 시계는 돌아가고 드디어 제대 특명을 받습니다. 3년의 군 생활은 군대에 다녀온 사람들에게는 잊지 못할 추억입니다.
새 집으로 이사 가면 집도 집 주인의 군기를 잡는다고 합니다. 새 집과 주인이 서로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사제관에 온지 3일 만에 보일러를 교체했습니다. 후배 신부님이 가스 냄새가 난다고 하였고, 홈디퍼에서 가스 누출 검사기를 사서 측정하니 가스가 누출되고 있었습니다. 보일러 수리하는 형제님이 와서 수명이 다 되었다고 교체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보일러를 새것으로 교체하고 5일 만에 싱크대에서 물이 흘렀습니다. 형제님이 와서 보더니 음식물을 분쇄하는 기계가 고장 났다고 합니다. 음식물 분쇄하는 기계를 교체하면서 싱크대 누수 문제는 해결되었습니다. 생각하니 새 집과 저는 적응기간이 있었습니다. 와이파이 용량이 너무 느려서 인터넷 접속에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용량을 높이고 기계를 새로 바꾸니 해결되었습니다. 화장실의 세면대가 막혀서 물이 잘 내려가지 않았는데 월마트에서 플라스틱 막대기를 사서 뚫으니 잘 내려갔습니다. 열쇠로 열어야 하는 문을 번호키로 바꾸었습니다. 신제품인지 스마트폰으로 밖에서도 원격으로 문을 열고 닫을 수 있어서 편했습니다. 사제관으로 온지 1달이 되었습니다. 이제 사제관도 저도 서로 적응 시간이 끝난 것 같습니다.
오늘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입니다. 나자렛의 성가정도 적응 기간이 필요했던 것 같습니다. 먼저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나타나서 아이를 가질 것이라고 예고하였습니다. 마리아는 ‘이 몸은 아직 남자를 모르는데 어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라고 응답했습니다. 천사는 이는 성령으로 인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마리아는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응답했습니다. 이번에 천사는 요셉에게 약혼녀 마리아는 아이를 가졌다고 말하였습니다. 요셉은 마리아가 곤경에 처할 수 있기에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천사는 다시 요셉에게 나타나서 그것은 성령으로 인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요셉은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 들였습니다. 그리고 나자렛의 성가정은 시작되었습니다. 마리아도, 요셉도 모두 자신의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따랐습니다. 그렇게 나자렛의 성가정은 시작되었지만 적응기간이 또 필요했습니다. 헤로데는 2살 이하의 어린이를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아기 예수님을 데리고 이집트로 피난을 갔습니다. 바람결에 헤로데가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드디어 요셉과 마리아는 어린 예수님과 함께 고향 나자렛으로 돌아와서 성가정을 이루었습니다.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의 공동체와도 적응시간이 필요할 것입니다. 생각이 다르고, 의견이 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영광과 하느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늘 그랬던 것처럼 하느님의 사랑이 길을 보여 주실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주님의 약속을 믿었고, 요셉은 꿈에서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이라는 천사의 말을 듣고 그대로 하였습니다. 약속은 믿음에 따라 이루어지고 은총으로 주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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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19.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성경 전체 안에서 찾는다면 ‘의로운 사람’이라는 표현이 몇 번 등장할까요? 구약부터 신약까지 수많은 사람이 등장하는데 그중 ‘의로운 사람’이라는 말을 들었던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요? 갑자기 궁금해졌습니다.
성경은 요셉을 의로운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요셉이 착한 사람이라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 파혼도 그리 좋은 선택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파혼한다는 뜻은 마리아 혼자 아이를 책임져야 한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여성이 혼자 아이를 양육하는 것은 힘듭니다. 그래서 많은 자선 단체들이 그런 어려움에 있는 여성을 돕습니다.
하물며 주님 시대의 여성이 아이를 혼자 키운다는 것은 죽음과도 같은 고통을 수반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도 성경은 요셉을 의로운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왜 요셉에게 의로운 사람이라는 표현을 썼을까요?
그건 바로 주님의 천사를 만난 후 요셉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천사는 요셉에게 아이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요셉으로서는 참으로 믿기 힘든 체험이었을 것입니다.
입장바꿔, 꿈에 천사가 나타나 ‘그 아기는 하느님의 아들이니 그 여인과 혼인하여라.’라고 한다면 결혼하시겠습니까?
그런데 요셉은 천사의 말을 믿습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책무를 다합니다. 성가정의 일원으로서 아기 예수를 돌보는 역할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의로운 사람’은 정의로운 사람이 아닌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인 것을 말입니다.
의로운 요셉을 따로 우리 모두 의로움의 길을 걷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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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 된다는 것.
인내하는 것.
참아 내는 것.
견뎌내는 것.
지켜내는 것.
아파도 웃는 것.
힘들어도 포기 않는 것.
슬퍼도 내색 않는 것.
그래서 어른은 외로운가 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함께 계신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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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19.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참 좋은 배경의 성 요셉
-성가정 교회 공동체-
“하느님의 사랑을 영원토록 노래하리라,
내 입으로 그 진실하심을 대대로 전하리라.”(시편89,2)
사순시기 및 3월 성 요셉 성월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오늘 3월19일은 우리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의 주보성인인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이신 성 요셉” 대축일입니다. 또 오늘은 우리 요셉 수도원이 1987년 3월19일 설립됐으니 설립 37주년이 되는 날이자, 2014년 3월19일 원장좌 자치 수도원으로 승격됐으니 승격 10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참 영예스럽고 자랑스런 성 요셉입니다. 저절로 3월 성 요셉 성월에 자주 부르는 “성 요셉 찬양하세” 성가 280장이 생각납니다. 3절까지 가사가 다 좋지만 1절만 인용합니다.
“성 요셉 찬양하세 주님의 양부를,
정결하신 성 요셉 마리아의 정배.
의로우신 성 요셉, 우리 양자로 삼아,
언제나 우리 마음을 정결케하시며.
의롭게 생활하도록 우리를 이끌어 주소서”
가톨릭 교회가 위기를 겪을 때마다 교회 수호자가 된 요셉 성인을 생각하면 저는 늘 하는 “만세육창”에다 오늘은 “성 요셉 만세!” 하나를 더 추가하고 싶습니다. 교회 위기때 마다 큰 빛을 발한 성 요셉의 역사를 간략히 소개합니다. 교회가 혼란과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큰 도움이 됐던 성가정 교회 공동체의 영원한 배경 성 요셉입니다.
1870년 교황 복자 9세는 성 요셉을 보편 교회의 수호자로 선포했고,
1889년 교황 레오 13세는 성 요셉을 성가정의 보호자이자 가장의 모범으로 공포했고,
1920년 교황 베네딕도 15세는 성 요셉을 노동자와 임종자의 수호자로 선포했고,
1937년 교황 비오 11세는 성 요셉을 사회정의의 수호자로 선포했고,
1955년 교황 가경자 비오 12세는 5월1일 노동절을 ‘노동자 성 요셉 기념일’로 정했고,
1961년 교황 성 요한 23세는 성 요셉 축일에 회칙을 발표하고 성인에게 공의회를 보호해 달라고 청했고,
1989년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성 요셉이 ‘구세주의 보호자’라는 사실을 거듭 강조했고,
2020년 교회가 코로나 19펜데믹으로 혼란을 겪을시, 교황 프란치스코는 ‘보편교회의 수호자 성 요셉 선포 150주년’을 맞이하여 그해 12월8일 교서 ’아버지의 마음으로’를 발표하고 다음해 2021년 12월8일까지 1년을 ‘성 요셉의 해’로 선포했습니다.
참으로 교회가 위기를 겪을 때 마다 든든한 배경이 되어 주셨던 성 요셉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 가득 지니게 됩니다. 성가정 공동체하면 참 좋은 배경의 성 요셉이 생각나듯,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하면 참 좋은 배경의 불암산이 생각납니다. 제가 자주 인용하는 자작 애송시 두편의 불암산이 상징하는바 성가정 공동체의 배경인 성 요셉입니다.
“언제나 거기 그 자리에 머물러
가슴 활짝 열고 모두를 반가이 맞이하는
아버지 산앞에 서면
저절로 경건 겸허해져 모자를 벗는다
있음자체만으로 넉넉하고 편안한
산의 품으로 살 수는 없을까?
바라보고 지켜보는
사랑만으로,
큰 바위 얼굴(the Great Stone Face)로,
늘 행복할 수는 없을까?
산처럼!”-2000.11.17.
또 하나 침묵에 잠긴 저녁 불암산을 보며 쓴 짧은 자작시입니다.
“아! 크다, 깊다, 고요하다
저녁 불암산!”-
바로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의 참 좋은 배경인 불암산같은 성 요셉입니다. 세 측면에 걸쳐 성인의 위대한 덕을 나누고 싶습니다.
첫째, 요셉 성인은 참 큰 분이십니다.
참으로 자비하시고 지혜로우신 분, 한마디로 의로우신 분이십니다.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을 때, 성인의 자비롭고 지혜로운 신속한 처신이 참으로 놀랍고 고맙고 감동스럽습니다. 자비와 분별의 지혜는 함께 갑니다. 다음 구절에서 성인의 고결한 인품이 잘 드럽납니다.
‘마리아의 남편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마리아가 절체절명의 위기에 봉착했을 때, 성 요셉의 우선적 관심사는 자기가 아니라 마리아의 안위요 마리아를 살리는 것이었습니다. 참으로 자비하고 지혜로운 하느님 아버지를 닮은 성 요셉입니다.
둘째, 요셉 성인은 참 깊은 분이십니다.
참으로 잘 들으시는 경청의 겸손한 성인이십니다. 귀기울여 주님 천사의 말을 겸손히 경청하는 성 요셉입니다. 깊은 산이 좋은 산이듯, 겸손의 깊은 사람이 참 좋은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전폭적 신뢰를 받고 있는 경청과 겸손의 사람, 성 요셉입니다. 하느님은 자신의 속내를 당신 천사를 통해 소상히 성 요셉에게 드러냅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구원하실 것이다.”
성 요셉의 책임감이 얼마나 막중한지 깨닫습니다. ‘주님께서 구원하신다’를 뜻하는 예수란 이름은 얼마나 은혜로운지요! 늘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제2독서 사무엘 하권의 예언자 나탄의 다윗을 향한 예언이 흡사 요셉을 향한 말씀처럼 들립니다. 다윗에 버금가는 존재가 오늘 복음의 다윗입니다. 그대로 우리 구원자 예수님의 출현에 대한 예언처럼 들립니다.
“네 몸에서 나와 네 뒤를 이을 후손을 내가 일으켜 세우고, 그의 나라를 튼튼하게 하겠다. 그는 나의 이름을 위하여 집을 짓고, 나는 그 나라의 왕좌를 튼튼하게 할 것이다.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될 것이다. 너의 집안과 나라가 네 앞에서 영원히 굳건해지고, 네 왕좌가 영원히 튼튼하게 될 것이다.”
사실 나탄의 이 예언은 예수님을 통해, 2000년 유구한 역사를 지닌 가톨릭 교회를 통해 영원한 현재 진행형으로 실현되고 있음을 봅니다.
셋째, 요셉 성인은 참 고요한 분이십니다.
고요한 물은 깊이 흐르고, 깊은 물은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정수유심靜水流深, 심수무성深水無聲). 바로 요셉의 고요한 믿음이 그러합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에 버금가는 요셉의 믿음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아브라함에 대한 고백은 요셉을 넣어도 그대로 통합니다.
‘그는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너의 후손들이 저렇게 많아질 것이다.” 하신 말씀에 따라 “많은 민족의 아버지”가 될 것을 믿었습니다. 바로 그 때문에 “하느님께서 그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에, 아브라함의 의로움에 비해 전혀 손색이 없는 요셉의 믿음, 요셉의 의로움입니다. 희망이 없어도 희망한 아브라함의 믿음, 요셉의 믿음을 본받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복음의 마지막 대목에서 요셉의 순종과 믿음이 통쾌하게 드러납니다.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하였다.’
주님은 일방적으로 일하시지 못합니다. 인간의 자발적 믿음의 순종의 협조를 통해 일하시는 주님이요 요셉의 믿음의 순종이 너무나 기쁘고 고마웠을 것입니다. 성가정 교회 공동체의 영원한 배경이신 성 요세이야말로 우리가 평생 보고 배워야 할 참 사람의 모델입니다. 참으로 하느님 아버지를 닮은 크고, 깊고, 고요한 성 요셉이요, 자비와 지혜, 경청과 겸손, 순종과 믿음의 성 요셉입니다. 그대로 이런 양부 성 요셉을 보고 배웠을 예수님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이렇게 날로 주님을 닮은,
“크고 깊고 고요한 삶을,
1.자비와 지혜의 삶,
2.경청과 겸손의 삶,
3.순종과 믿음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잘 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마태25,2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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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19.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남모르게>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마태 1,19)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마태 1,20)
홀로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도 아프지만
그대를 살리려
남모르게
한걸음 물러섭니다
홀로
보듬기에는
너무나도 두렵지만
주님의 뜻 이루려
남모르게
한걸음 물러섭니다
홀로
남모르게
한걸음 또 한걸음
물러서고 물러선 듯한
더 물러설 수 없는
나 없는 자리가
홀로
남모르게
한걸음 또 한걸음
내딛고 또 내딛어
마침내 주님과 하나 되는
나 있을 자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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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19.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탄생하셨다.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였는데,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마태 1,18)
예수님의 불멸성은 인간으로 태어나신 뒤에도 변함없다
왜 마태오 복음사가는 복음서 처음에는 ‘나심’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여기서는 ‘탄생’을 이야기할까요? 첫머리에서는 ‘나심의 책’(마태 1,1)이라고 하고, 여기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탄생하셨다."(마태 1,18)고 하니 말입니다.
.. 그러면 ‘탄생’과 ‘나심’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이 두 단어를 그리스도와 관련해 어떻게 사용해야 합니까?
잘 들으십시오. 지금 제가 하는 것과 같은,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고유의 본성상 만져지지 않고 보이지 않습니 다. 그러나 비유컨대, 이 말을 종이에 쓰면, 말이 육신을 취한 것입니다.
그러면 눈에 보이고 만질 수도 있습니다. 육체가 없고 봄이 없는 하느님의 말씀도 이와 같습니다. 말씀은 신성을 지닌 존재시기에 우리 눈에 보이지도 않고 우리가 묘사할 수도 없지만, 육화로 말미암아 우리 눈에 보이고 묘사도 할 수 있는 존재가 되십니다. 이런 까닭에, 육신이 된 존재로서 ‘나심’의 ‘책’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알고자 하는 것은 마태오가 왜 ‘환시’나 ‘이야기’라는 단어 대신 ‘책’이라는 단어를 썼느냐가 아닙니다.
마태오가 왜 앞에서는 ‘나심’이라고 하고 여기서는 ‘탄생’이라고 했느냐는 것입니다. ‘탄생’과 ‘나심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탄생’과 ‘남’은 다릅니다. ‘남’ 또는 ‘생겨남’은 본디 하느님께서 만드신 것이고, ‘탄생’은 죄를 지어 죽음을 선고받은 사람에게서 사람이 이어지는 것입니다. 지금도 ‘남’은 불멸성과 죄 없음의 의미를 담고 있는 반면 ‘태어남’은 정념과 죄에 매인 어떤 것을 암시합니다. 영원히 ‘나신’ 분인 주님은 죄를 지을 수 없는 분이십니다. 그분의 태어나심은 불멸의 존재인 그분의 영원한 ‘나심’을 훼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태어나심으로써, 영속하지 않는 것을 취하셨습니다.
이는 그분께서 죄의 지배 아래 놓이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분은 태초의 아담의 모습을 한결같이 지니고 계셨으므로 타락이나 죄의 가능성이 조금도 스며들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경우, ‘나심’은 무존재에서 존재가 되는 과정을 뜻하는 말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나심’은 ‘하느님의 모습’으로 계시다가 “종의 모습"(필리 2,6-7)을 취하신 ‘옮아감’[바뀜, 길]이라고 하는 것이 맞습니다. 따라서 그분의 ‘태어나심’은 우리의 태어남과 같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보다 뛰어난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태어나듯이 “여인에게서"(갈라 4,4) 태어나셨지만 “육욕이나 남자의 욕망에서 난 것이 아니라”(요한 1,13) 성령으로 말미암아 태어나셨으므로 우리의 태어남보다 뛰어난 태어남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일어날 새로운 태어남에 대한 암시, 말하자면 예고가 담겨 있습니다.
-오리게네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4 존재는 거룩하다
“만물은 하느님 안에서 순수하고 고귀합니다.... 만물은 스스로를 낳습니다. 저마다 자신의 본성을 낳습니다. 피조물은 자신이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자신의 존재를 끔찍이 사랑합니다. 셜령 어떤 사람이 지옥의 고통을 영혼에게 가할지라도, 영혼은 여전히 존재하려고 할 것입니다. 이처럼 피조물은 하느님으로부터 직접 받은 자신의 존재를 끔찍이 사랑합니다.”
도미니코회의 일원이자 엑카르트의 길벗인 토마스 아퀴나스는 하느님은 존재다(Deus est esse)라고 선언했다. 하지만 엑카르트는 이보다 한발 더 나아간다. 그는 자신을 둘러싼 존재, 곧 “하느님 안에 있는 존재”의 경험에 심취한 나머지 “존재가 하느님이다’ 라고 선언한다. 모든 존재는 하느님 안에 뿌리박고 있다. 하느님은 모든 존재를 품는 충만한 존재, 순수한 존재다.
엑카르트는 자신의 철학적 논문인 『삼부작』의 프롤로그 가운데 상당 부분을 할애하여, “존재가 하느님이다”라는 명제를 설명한다... “하느님 안에 있는 것은 하느님이다.” 모든 존재는 하느님 안에 있다. 모든 존재는 창조주 안에 머무름과 동시에 창조를 통해 밖으로 흘러 나왔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모든 존재는 창조주 안에 있는 자신의 근원으로 다시 녹아 들어가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엑카르트는 모든 사람을 꼬드겨 하느님이 가까이 있음을 깨닫게 한다. 하느님은 존재만큼이나 가까이 있다.(138)
✝️ 화요일 성령(성시간)의 날✝️
평화의 왕이신 예수님, 당신을 흠숭하며, 당신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바로 그 순간을 찬미하나이다. 그 거룩한 밤에 천사들이 나타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라며 평화에 대한 당신의 계획을 알려주었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며 모든 민족과 형제 자매가 당신 마음에 드는 사람들이 되게 하는 것이 바로 당신의 계획입니다.
제 마음을 성령으로 깨끗이 씻어주시면 제가 선의를 지닌 사람이 되어, 그 순간부터 끊임없이 당신의 영광을 노래하고 감사하며 참 펑화를 발견하리다! 모든 악한 경향, 기꺼이 당신을 찬미하지 못하게 하는 모든 것 선의를 갖고 살아가지 못하게 하는 모든 것에서 정화하소서! 예수님, 성시간을 통해 끊임없이 당신을 닮게 하소서. 제 마음이 천사들의 노래와 하나 되게 하소서.
0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 (침묵 가운데 반복한다.)
-성시간, 슬라브코 바르바리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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